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45화 (45/45)

45. 별

"이 조센징, 얼마나 버티나 어디 두고보자."

오노는 한국인에게 특별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병호의 얼굴에다 주먹을 날렸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나중에는 권총을 거꾸로 쥐고 손잡이로 병호의

얼굴을 짓이겻다. 병호의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피가 그의

옷을 적셨다.

"네 동료들은 어디 있어?! 이 비행기에 몇 명이 탔어?! 빨리

말하지 않으면 내 손에 죽어!"

시간이 흐를수록 오노는 초조한 빛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른 자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반격에 대비해 더욱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병호는 그렇게 지독한 구타를 당해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너무 심하게 맞다보니 이제는 통증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새로운 고통이 엄습했다. 귓속을

후벼대는 열기에 그는 머리가 온통 분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난장이가 담배불을 그의 귓속에 쑤셔넣고 문질러댔던

것이다. 병호의 입에서는 마침내 비명이 터져나왔다. 머리가

펄펄 끓는 기름 속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그는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눈 밑으로 다가왔다. 난장이가 눈 밑에다 담배불을

갖다댔던 것이다.

한동안 병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겨우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은 머리가

타는 냄새였다. 난장이가 라이터불을 크게 만들어 그것으로

병호의 머리칼을 태우고 있었다. 머리 가운데를 마치 가르마를

타듯 태워나갔기 때문에 병호의 몰골은 괴이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병호는 터져나오려는 울부짖음을 집어삼키면서

난장이의 발작적인 웃음을 듣고 있었다.

문득 아무런 노력도 없이 무사하기만을 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더 이상 고통도

모욕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이 막다른 데까지 다달았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누군가가 먼저 시도하면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기가 없었다. 다행히 그의 두 손은

그때까지도 자연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가장 문제되는

인물이 율무라고 생각했다. 다른 자들은 총기를 휴대하고 있는데

그만은 수류탄을 들고 있었다.

총기를 가지고 비행기를 폭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수류탄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폭발하면

기내의 승객들은 모두 몰살될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총기에

의한 살상의 범위는 매우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수가 많을 수도 혹은 적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율무를 저지하는 것은 어렵게 되어 있다. 놈은 언제라도 폭파할

수 있게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은 채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접근을 어렵게 하기 위해 빈 자리를 많이

만들어놓고 있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처치한다

해도 율무를 저지하지 못하면 비행기는 폭파될 것이고, 승객들은

모두 바다 속에 수장될 것이다. 살해된 다이어먼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율무가 문제될 것은 없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율무가 들고 있는 수류탄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퉁퉁 부어올라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깜박거리며 그는 앞쪽

벽면에 걸려 있는 전자시계를 쳐다보았다. 23시 22분. 나리따

공항에 기착한다고 했으니까 20여분쯤 남았다.

이왕 비행기가 폭파할 바에는 공중에서 폭파하는 것보다는

지상에서 폭파하는 쪽이 훨씬 낫겠지. 그쪽이 인명 피해를

얼마라도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일을 벌이기에 가장

적당한 기회는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굴러갈 때일 것 같다. 그

기회를 놓치면 한국에서 공수되어온 나머지 4명이 비행기에

올라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결국

그는 비행기가 나리따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20분 동안을

어떻게든지 자신이 감당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끄는

방법으로서는 자신이 도맡아 고문을 받을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오노를 노려보면서 입가에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

"더러운 왜놈 같으니! 난 입이 열 개라도 말할 수 없으니까

네놈이 직접 찾아봐."

고분고분 얻어맞기만 하던 병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자 오노는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야아, 이 조센징이 제법 지껄이는데.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지. 난 네놈 입을 열게 할 수 있어, 얼마든지! 내가

일일이 찾아내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빠르단 말이야!"

오노는 주먹과 권총 손잡이, 그리고 구둣발로 병호를 난타하고

짓밟아대기 시작했다. 병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타격이 마치

소나기 같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가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노는 한참을 더 짓밟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지 씩씩거리며 물러섰다.

차츰 의식이 뚜렷이 살아나기 시작했을 때 곧 비행기가

나리따공항에 도착할 것이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모든

승객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라는 말도 들려왔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 앉지도 않았고 벨트를

매지도 않았다.

갑자기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요동치듯 좌우로 흔들리는

바람에 테러리스트들은 중심을 잃고 나동그라지기도 하고 의자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다. 병호는 문득 조종사가 기회를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활주로에 닿은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기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았다. 활주로에

닿기까지는 5분이나 10분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안에 율무가

수류탄을 푹파시킬 것 같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다시 한 번 심하게 흔들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다시

나동그라지는 것을 보고 병호는 몸을 일으켰다.

"왕형사!"

그의 외침에 왕형사가 권총을 뽑아들고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총소리가 났고, 기관단총을 든 대머리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마스오 부장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병호는 몸을

일으키는 오노의 권총 든 손을 구둣발로 냅다 걷어찼다. 권총이

공중을 튀어올랐다가 승객들 가운데로 떨어졌다. 난장이가

병호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기 전에 기관단총 소리가 났다.

병호는 화시의 손에 어느 새 대머리의 기관단총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난장이가 쓰러지는 것과 함께 남자 승객 두 명이

그 위로 한꺼번에 덮쳐드는 것이 보였다. 유화시는 기관단총

같은 것을 만져본 적이 없을 텐데 하고 병호는 생각했다. 때문에

그녀는 무턱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 같았다. 승객들이 오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짓이기고 있었다.

"꼼짝 마라! 움직이면 수류탄을 폭파하겠다!"

율무가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러댔다. 기내의 소동이 일순

정지되었을 때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부딪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수류탄은 빈 껍데기야!"

병호가 큰 소리로 외쳤을 때 그리지아가 화시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화시가 기관단총을 떨어뜨리며 쓰러지자 왕형사는 맹수처럼

그리지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리지아의 권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왕형사의 오른쪽 어깨가 꿈틀하는 것 같았다. 그가 왼손에

권총을 바꿔들었을 때 마스오 부장이 그리지아의 얼굴에다 대고

연속해서 두 번이나 권총을 발사했다.

비행기는 활주로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고, 창밖으로

비상등을 켠 차량들이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엎드려요! 한 곳에 모이지 말고 흩어져서 엎드려요!"

병호는 소리지르면서 율무 앞으로 다가갔다.

왕형사는 왼손으로 권총을 조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내버리고 조종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오른쪽 어깨는

피에 젖어 있었다. 조종실 앞에는 승무원 한 명이 방화용 도끼를

든 채 떨며 서 있었다.

"아직 안에 있나?"

왕형사는 거칠게 물었다.

"네, 아직 있습니다."

두꺼비는 승무원의 손에서 도끼를 빼앗아들고 그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문을 열어! 빨리!"

"기장님이 위험합니다!"

"위험하긴 마찬가지야! 빨리 열어!"

그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승무원은 조종실 문을 열어젖혔다.

분케는 기장의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다가 왕형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순간 떨어져 앉아 있던 부조종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번개처럼 구둣발로 분케의 오른손을 올려찼다.

분케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엉뚱한 곳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왕형사는 여유를 주지 않고 도끼로 분케의 오른쪽

어깨를 찍었다. 분케는 비명을 지르며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부조종사가 재빨리 걷어찼다. 왕형사가 다시 한번 도끼를

겨누었을 때 뒤늦게 뛰어든 마스오 부장이 분케의 머리통에다

권총을 갈겼다.

비행기가 멈춰서는 것과 함께 기내에는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괴로운 신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율무와

병호한테 쏠려 있었다.

"너는 포위됐어. 너를 구해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어.

어리석은 짓하지 말고 자수해."

"흥, 자수하라고? 자수할 바에는 죽는 게 나아! 혼자 죽지는

않겠다! 모두 데리고 죽을 거야!"

율무는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는 정말 자결한 결심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수류탄을 들고 통로로 나오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석 쪽으로 흩어졌다. 병호는 율무를 막아섰다.

"너는 죽을 수 없어. 여기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죽지

않아! 그 수류탄은 터지지 않아!"

병호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율무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좋아! 그럼 어디 죽어봐라!"

율무는 수류탄 한 개를 병호를 향해 냅다 던졌다. 그것은

병호의 어깨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가라앉은

뒤에도 폭발 소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봐! 내 말이 맞지? 그것도 터지지 않을 거야! 네가 죽인

여자가 못 쓰게 만들었어!"

병호는 율무가 들고 있는 다른 한 개의 수류탄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무자가 수류탄 두 개와 자신의 목숨을 바꾸었다는

사실이 감동의 물결이 되어 그의 가슴을 덮쳐왔다.

"그럴 리가 없어!"

율무는 부르짖으면서 나머지 한 개의 수류탄을 발 밑에다

내동댕이쳤다. 그러나 그것 역시 터지지는 않았다.

숨을 죽인 채 엎드려 있던 승객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남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율무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 몇 사람은 양주병을 움켜쥐고 있었다.

병호는 몸을 돌려 화시가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가슴은 검붉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뒤쪽에서

율무의 비명 소리와 함께 퍽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시의

맥박은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게 뛰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온 왕형사가 화시의 손을 움켜잡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화시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병호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는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병호의

손을 움켜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갑자기 힘이 가해지는 것

같았다.

"경감님은......서울에서......제일

쓸쓸한......사람이에요......

제발......결혼하세요......그리고...... 새......짝 맞춰주는

거......잊지 마세요......"

이틀이 지나서야 병호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집안은 어둠과 적막 속에 싸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종이 상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

안에서 문조 암컷이 놀라 파닥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너무나 조용했기 때문에 그는 혹시 새장 안의 새가 죽은

게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누르자 집안이

환해졌다. 조금 있자 새장으로부터 문조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쪽으로 다가가 새장 문을

열고 암컷을 넣어주었다. 낯선 새가 나타나자 수놈은 처음에는

놀란 모습으로 울어대다가 차츰 경쾌한 몸짓으로 암컷의 주위를

뛰어다니면서 맑고 고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병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창가로 다가가 베란다로

통하는 거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강 위로 휘황하게 불을 밝힌 유람선이 떠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물 위로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면서 그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마치 그 누군가의 별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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