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44화 (44/45)

44. 악마들의 축제

"이건 미국인들의 여권이야. 네가 죽고 싶지 않으면 이중에서

하나를 골라. 빨리!"

가랄은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병호는

앞으로 사태가 어느 정도까지 악화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율무는 여전히 두 손에 수류탄을 든 채 화시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병호가 보기에 가랄이라는 자는 사람을 난도질하고도

싱글싱글 웃는 것이 살인을 즐기는 정신병자 같았다. 저자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될수록 빨리 놈을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헬가가 드디어 여권 하나를 뽑아들었다.

"이름을 불러봐. 이리로 나오라고 해."

난장이가 말했다. 재촉하기라도 하는 듯 대머리가 쓰러져 있는

미국 젊은이의 몸뚱이에다 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사람들은

다시 비명을 질렀고, 헬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마스오 부장을 보니 그는 꼼짝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실내에는 다시 숨 막힐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헬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헬가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제임스...... 무어......"

"제임스 무어! 앞으로 나와라!"

난장이가 웃으며 말했다.

중간쯤의 자리에서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40대의 몹시 뚱뚱한 사람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난장이 앞으로

다가온 그는 헬가에게 저주스런 눈길을 한 번 보낸 다음

난장이에게 애걸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사실은 포르투갈

출신으로 미국에 이민한 지는 2년밖에 안 됐는데 미국이

생각보다는 너무 좋지 않아 본래의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미국은 지상 낙원이 아닌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지옥이다. 나는

지금 아내가 자동차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가는 길이다. 아내가 죽기 전에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뚱뚱한 미국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난장이는

여전히 싱글거렸다.

"살고 싶으면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리고 돼지처럼

꿀꿀거려봐!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해봐!"

미국인은 곤혹스헌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차마 돼지처럼 꿀꿀거리지는 못하고 숨만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야, 돼지! 왜 가만 있지? 밥 달라고 꿀꿀거려야 할 거

아니야. 꿀꿀해봐!"

난장이는 왼손으로 권총을 뽑아들더니 총구로 미국인의

대머리를 쿡 찔렀다. 미국인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돼지처럼 꿀꿀거리기 시작했다.

"좀더 큰 소리로! 고개를 위로 쳐들고!"

무어는 얼굴을 쳐들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난장이는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댔다. 미국인은 큰 입을 벌리고 꿀꿀꿀하고 소리를 냈다.

그의 굵은 목이 정말 돼지처럼 꿀렁거렸다. 그것을 보고

난장이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웃는 사람은 그 혼자 뿐이었다.

승객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떨며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꿀꿀거리는 소리와 난장이의 웃음 소리가 실내

분위기를 더욱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됐어. 그만 하면 됐어. 아주 잘했어. 너 CIA이지?"

"아, 아닙니다! 난 무역업자입니다! 여기 명함이 있습니다!"

뚱보가 명함을 꺼내보였지만 난장이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넌 CIA가 틀림없어."

난장이는 뚱보의 관자놀이를 총구로 쿡쿡 찔렀다.

"자, 여기에는 총알이 한 개 들어 있다.

6연발인데 언제 총알이 튀어나올지 나도 알 수 없어. 넌

CIA야. 그러니까 죽어야 해."

"아, 아닙니다! 절대......"

"자, 방아쇠를 당겨볼 테니까 기도나 해. 너희들 하나님한테

말이야."

미국인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와들와들 떨었다. 난장이는 장난치듯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의 공이치기가 빈 약실을 치는 소리가 딸깍하고 들렸다.

미국인은 눈을 뜨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난장이가 다시 관자놀이에

총구를 디밀며 말했다.

"자,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 이번에도 통과하면 넌 사는

거야."

"제발 살려주십시오! 난 CIA가 아닙니다!"

미국인의 입에서는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병호는 그의

바지의 엉덩이께가 젖어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인은

다시 눈을 감았는데 보기 민망할 정도로 턱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난장이가 두번째로 방아쇠를 당겼는데, 이번에는

딸깍하는 소리 대신 총소리가 기내를 벼락치듯 울렸다. 뚱뚱한

미국인은 튕기듯 옆으로 쓰러졌고, 구멍이 뻥 뚫린

관자놀이에서는 검붉은 피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병호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총소리의 여운이 가라앉자

그리지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또 하나 요구할 게 있어요. 우리는 한국 경찰에 체포된

우리의 동지들이 즉시 석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총소리를

들었지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승객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예요. 이 비행기는 일단 도꾜의 나리따공항에 기착할

거니까 거기서 한국 경찰에 체포된 4명의 우리 동지들을

우리한테 인계해 주어야 해요. 우리는 우리의 동지들을 인계받은

후 다시 출발할 거예요. 한국 정부는 4명의 우리 동지들을 지금

즉시 비행기에 태워서 도꾜로 보내주기 바랍니다. 7월 27일 오전

2시까지 우리한테 보내주지 않으면 우리는 한국인들을 살해할

것입니다."

그녀의 말소리는 기내에 울려퍼지는 것과 동시에 무전기를

타고 지상으로도 흘러나가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도 통신위성을 통해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를 수신하고

있었다.

기내에는 벌써 세 구의 시체가 나뒹굴어 있었다.

오노 다모쓰가 남자 승객 두 명을 나오게 하더니 통로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뒤쪽 빈 자리에 옮기게 했다.

"자, 또 하나 뽑아봐."

난장이가 미국인들의 여권을 내밀자 헬가는 몸부림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난장이가 그녀의 티셔츠를

움켜잡더니 칼로 그것을 찢어냈다. 상체가 완전히 드러나고

브러지어만 남자 그는 그것도 칼로 잘라냈다. 헬가가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리자 날카로운 칼 끝이 그녀의 손등을 찔렀다.

그녀는 얼른 손을 치웠다. 난장이는 칼 끝으로 그녀의 젖꼭지를

건드렸다.

"이걸 잘라줄까? 아니면 담배불로 지져줄까?"

그는 담배에 불을 부쳤다. 그리고 두어 모금 힘껏 빨고 나더니

그녀의 한 쪽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뽑을 거야 안 뽑을 거야?"

헬가는 난장이가 내미는 여권 뭉치를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완강히 흔들었다. 난장이는 웃으면서 여권 뭉치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쥐더니

거침없이 그것을 젖꼭지에 갖다대고 눌렀다. 병호는 귓속을 파고

드는 헬가의 비명 소리가 마치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귀를 막고 싶었다. 그녀는 더 이상 머리를

흔들지 않았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새 한 개의 여권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난장이가 시키는 대로 여권에 적혀 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미셸 하워드......"

여권에는 노파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헬가가 세 번 불러도 안

나오자 난장이가 두 번 더 큰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난장이는 그 노파를 찾아나섰다.

그녀는 금방 눈에 띄었다. 그녀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병호의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바로 옆자리에는 그녀의 남편인 듯한

노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똑같이 안경을 끼고

있었고, 서로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부둥켜 안고 있었다.

"미셸 부인...... 뭘 그렇게 무서워하십니까? 이리 나와

나하고 함께 춤이나 추시지 않겠습니까?"

난장이의 간드러진 말에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파고들듯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 악마! 죽일려면 나를 죽여라!"

노파의 남편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살인을 즐기고 있는

테러리스트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저항한 사람은 그 노인이

처음이었다.

"정말 죽고 싶어?"

난장이가 권총을 겨누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그래, 이놈아! 죽일테면 날 죽여!"

노인이 손을 쳐들어 권총을 막으려고 했다. 그때 총소리가

났다. 총알은 노인의 이마를 뚫었고, 노인은 두 손을

늘어뜨리면서 앞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뒤이어 노파의

울부짖음이 들려왔고, 또 한 번의 총소리가 그 울부짖음을

끊어놓았다. 그녀의 상체가 남편의 등 위로 포개지는 것을 보고

병호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는 자신의 무력감에 전율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데 대한

분노와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때 유화시가 또 비명을 질렀다. 병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율무가 한 손에 수류탄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소리쳤다.

"이년은 한국 경찰이 틀림없어! 이년을 살리고 싶으면 한국

경찰관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5분 여유를

주겠다! 가랄! 5분 후에 이년의 젖가슴을 도려버려!"

율무는 통로로 화시를 끌고 나오더니 그녀를 난장이에게

인계했다. 그녀는 블라우스와 브래지어가 거의 찢겨나갔기

때문에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난장이는 흰 이를

드러내며 악마처럼 웃었다. 그리고 칼 끝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건드렸다.

"아름다운 가슴이야. 잘라서 먹으면 아주 맛있겠는데......"

화시는 몸을 움츠리면서 뒷걸음질쳤다. 난장이는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어 그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노란색 팬티가 보이자 그는 괴성을 질렀다.

"네가 한국 경찰관들을 지명해도 좋아. 그럼 넌 살 수 있어.

어디에 숨어 있지? 몇 명이 여기에 탔지?"

그녀의 시선이 병호의 얼굴 위를 스쳐갔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병호는 그녀가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경찰은 모두 비겁한 놈들만 모여 있는 모양이지? 4분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야."

병호는 일어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왕형사가 일어서기 전에 자신이 먼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두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간격을 두고 한 사람씩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려운 생각이 안드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보다는 반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놈들을

승리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마침내 그는

손을 쳐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놈은 내가 처리하겠다!"

그때까지 얌전하게 있던 오노 다모쓰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살기로 굳어 있었다. 그는 먼저 병호의 몸부터 더듬었다.

"무기는 어디다 감췄지?"

"무기는 없어."

"거짓말 마! 이 조센징놈아! 무릎을 꿇어!"

갑자기 그는 주먹으로 병호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병호의

얼굴만 집중적으로 갈겼다. 온 힘을 다해 마치 샌드백을 치듯

때렸기 때문에 병호의 얼굴은 금방 피투성이가 된 채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놈들은 어디 있어?!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해! 안

나오면 널 죽일 테야!"

병호는 얻어터지면서도 왕형사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두꺼비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상체를 움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오면 안 돼! 그대로 숨어 있어!"

병호는 허공에다 대고 소리쳤다. 한국말로 소리쳤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은 그 말뜻을 못 알아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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