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43화 (43/45)

43. 하이재킹

황무자는 어떻게 죽었을까? 아마 참혹한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녀를 죽인 살인범은 지금 태연한 모습으로 유화시 곁에 앉아

있다. 놈은 유화시를 노리고 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그녀를

인질로 삼겠지. 유화시는 그런줄도 모르고 앉아 있다. 놈이

유화시와 함께 태연히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황무자를 살해한 살인범으로 체포되기 전에

도망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경우에는 이미 계획이 탄로된

것으로 알고 하이재킹은 포기한다. 두번째는 위험을 각오하고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공항에서 체포될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쉽게 통과되었다. 이윽고 비행기에

안전하게 탑승함으로써 위험이 사라졌다고 판단한 그들은 즉시

하이재킹에 들어간다.

병호는 두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앞쪽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뒤쪽으로

걸어가보았다.

또 한 명의 코펜하겐 승객의 자리는 28G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나이는 곱슬머리에 억센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인리히

분케. 그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병호는 손바닥을 펴보았다.

다음 자리는 57G였다.

오노 다모스는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호텔에서 봐두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한 칸 건너 59G에는 왕형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병호를 쏘아보고 있었다. 병호는 코를 만졌다.

그것은 좀 만나자는 사인이었다.

비행기의 맨 뒤에도 화장실이 있었다. 병호는 그쪽으로

걸어가다가 녹색 베레모의 노인을 보았다. 그는 화장실 가까운

64열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좌석은 64F번이었다.

노인은 콜록콜록 잔 기침을 하고 있었다. 병호는 어쩐지 그 외국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분 나쁜 느낌이 드는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병호를 주목했다면 중간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뒤쪽 화장실에 들어가는 그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것을 가리고 있을 입장이 아니었다.

다행히 뒤쪽 화장실 통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담배에

불을 붙여 초조하게 그것을 빨아대고 있는데 왕형사가 나타났다.

"무전이 들어왔는데...... 다이어먼드가 살해됐대."

"아니, 그럴 수가......"

두꺼비의 입이 벌어졌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화시가 위험해. 다른 자리로 옮기지 않으면 안 돼."

왕형사는 고개를 끄덕한 다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녹색 베레모가 힘겹게 다리를 끌면서 통로로 들어섰다. 병호는

그에게 걸리지 않으려고 한쪽으로 비켜주었다. 베레모는 목발을

벽에 기대 세워놓은 다음 병호를 보고 씨익 웃었다. 그것은 아주

불쾌한 미소였다.

"안녕하시오?"

베레모가 영어로 말했다. 답답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병호는 그 노인이 화장실에 곧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담배꽁초를 벽에 부착되어 있는

재떨이에 비벼껐다.

"요샌 담배 피우기가 쉽지 않아요. 내 옆에는 신사가 앉아

있는데 담배 연기에 질색을 해서 이쪽으로 쫓겨왔지요. 이제

우리 같은 애연가가 마음놓고 담배를 피울 데라고는 화장실밖에

없나봐요."

베레모가 시가를 꺼내면서 말했다. 그는 병호에게 시가를

내밀었다.

"냄새가 아주 좋은 겁니다. 질도 좋은 거지요."

병호는 시가보다도 그것을 들고 있는 유난히 마디가

굵어보이는 갈쿠리 같은 손을 보았다.

"방금 피웠습니다.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병호는 급히 거기서 벗어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율무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는 머리 위 선반 문을 열더니

가방을 꺼낸 다음 도로 자리에 앉았다.

22시 4분. 출발한 지 22분이 되었다. 고도에 진입한 비행기는

동요도 없이 아주 조용히 날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흡사 공중에

가만히 떠 있는 것같이 느껴지고 있었다. 왕형사가 병호의 곁을

지나 앞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올 때 화시한테 사인을 보낼

모양이라고 병호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꼼짝 마라!"

답답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병호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얼른 뒤쪽을 쳐다보았다. 녹색 베레모가 뒤쪽 통로에

버티고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목발 대신 기관단총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기관단총이다!

명령에 거역하는 자는 사살한다! 뒷자리에 있는 승객들은 앞쪽

빈 자리에 가서 앉아라! 서지 말고 기어서 가라! 개처럼 기어!"

베레모는 영어로 외쳐댔다. 병호는 그의 시가를 받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의

눈이야말로 장님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을 파악하려는 듯 기내에는 한순간 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감돌았다. 모든 움직임은 정지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다음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통로를 뛰다시피

걸어갔다. 그는 곱슬머리의 하인리히 분케였고, 그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앞으로 곧장 걸어간 그는 조종실 문을

박차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테헤란으로! 테헤란으로!"

그는 조종사의 뒷덜미에 총구를 들이대며 소리쳤다.

병호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한 것을 알고 전율했다.

코펜하겐행 승객 세 명이 테러리스트들이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녹색 베레모가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귀찮다는 듯 베레모와 함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잿빛 머리칼이

벗겨지면서 대머리가 나타났다. 그는 베레모와 가발을

집어던졌다. 그는 기내 중간쯤에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병호는

이런 때 왕형사가 뒤쪽 자기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왕형사는 앞쪽 2등석과 3등석 사이의 공간에

엎드려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상체를 구부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꼼짝 마라! 손 들어!"

뒤쪽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동양인이 영어로

외치는 소리 같았다. 돌아보니 일본인 형사가 권총을 뽑아들고

대머리의 뒤를 겨누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병호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때 탕하고 총소리가 났다. 밀폐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총소리는 귀청을 찢을듯이 크게 실내를 울렸다. 마스오 부장의

부하 형사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것과 함께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를 쏜 사람은 같은 일본인인 오노 다모쓰였다.

오노는 뒤쪽 통로에 나와 있었고 발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회전하는지 심하게 요동했다.

그리지아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이제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하고 병호는 생각했다. 율무 쪽을 보니 그는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지아는 짙은 선글라스로 바꿔 끼고 있었다. 그녀는 가로

흰 줄 무늬가 있는 파란색의 팔없는 셔츠만 입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권총을, 그리고 빨갛게 루즈가 칠해진 입술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노란색의 점퍼는 허리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구석에 벌벌 떨면서 웅크리고 있는 일본인

스튜어디스에게 마이크를 달라고 말했다. 스튜어디스가 벽에

걸려 있는 마이크를 뽑아 그녀에게 전해주자 그녀는 승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비스밀라히 라흐마니 라힘!"

그것을 영어로 되풀이 말했을 때에야 병호는 그 말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뜻임을 알았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무기를 기내에 들여왔을까?

브러지어를 하지 않은 그녀의 젖가슴이 셔츠 위로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그녀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것은 보기 좋게

흔들거리곤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힘차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검은 6월단입니다. 우리는 알라의 이름으로 이

비행기를 납치했습니다. 우리는 미제국주의와 그들의 하수인인

이스라엘을 저주합니다. 알라의 이름으로 우리는 그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들과 싸울 겁니다. 우리는

미국인들을 모두 죽일 것이고 더 나아가 모든 승객들을 몰살시킬

것입니다. 승객 여러분은 우리의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는 자는 이 사람처럼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녀는 그때까지 죽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는 일본인 형사의

머리에다 대고 권총을 발사했다. 그녀의 냉혹하고 잔인한 행위는

사람들을 한 순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도대체 무엇이

저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을 저토록 잔인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병호는 생각했다. 그때 유화시의 비명이 들려왔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병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화시의 흰색 블라우스를 율무가 잡아찢고 있었다. 그녀의 흰

어깨는 이미 훤히 드러나 있었고, 그녀는 더 이상 알몸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율무를 뿌리치고 있었다. 율무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리고 ×자형으로 팔을

내밀면서 소리쳤다.

"이건 수류탄이다! 손만 놓으면 언제라도 터지도록 되어

있어!"

그의 양손에는 두 개의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비명을 질렀고, 화시의 비명은 거기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모두 비켜! 비키란 말이야!"

율무는 그의 앞과 뒤, 그리고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쫓아냈다. 율무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수류탄이 터질까봐

다투어 자리를 피하는 바람에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권을 모두 거둬요."

그리지아가 누군가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난장이는 같은

사내가 재빨리 통로로 미끄러지듯 나왔다. 하니 가랄이었다.

그의 입에는 칼이 물려 있었다. 그는 칼을 입에 문 채 악마처럼

흐흐하고 웃었다. 이윽고 뒤쪽으로 구르듯 달려간 그는 승객들의

여권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드러난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모두 6명인 것 같았다. 그들과

싸울 수 있는 이쪽 인원도 일본 형사들까지 합쳐 6명었다.

그러나 무기면에서 그들과 상대가 되지 않았고, 더구나 유화시는

율무한테 붙잡혀 있는 처지였다.

하니 가랄은 거둬들인 여권 가운데서 미국인들의 여권만

골라냈다. 그리고 미국인들의 여권 가운데서 하나를 펴들고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을 불렀다. 중간쯤의 자리에서 금발

머리의 젊은 아가씨가 일어섰다. 가랄은 그녀를 손짓해 불렀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면서 앞으로 나오려고 하자 그녀와 동행으로

보이는 금발 머리의 건장한 남자가 그녀를 젖히고 자기가 대신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 젊은이가 가까이 다가오자 하니 가랄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물었다.

"너도 미국인인가?"

젊은이는 증오로 몸을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는 네 뭐지? 애인이냐?"

"약혼녀입니다."

"너를 부르지 않았어. 난 저 여자를 불렀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는 번개처럼 재크나이프로

젊은이의 얼굴을 그었다. 젊은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가랄은 장난치듯 젊은이의 목덜미를 찔렀다. 그의

약혼녀가 비명을 질렀다. 가랄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여자를 불렀다. 그녀의 이름은 헬가라고

했다. 온몸을 떨어대면서 앞으로 나온 그녀는 울부짖으며

약혼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가랄의 칼끝이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그녀는 공포로 굳어지면서 뒤로 물러섰다. 가랄은

그녀에게 미국인들의 여권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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