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불안한 출발
코펜하겐? 병호는 그들 세 명의 이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아까는 그 코펜하겐행 승객명단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었다. 세 명의 행선지가 같은 것으로 보아 동행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좌석이 나란히 잡혀 있지
않았다. 일행이라면 나란히 앉아가는 게 당연한 일일 텐데
그들은 그렇지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앉고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됐지만 그런 생각을 얼른 겉으로 드러내 말하지는 않았다.
"450편기는 코펜하겐에도 들렀다 가나요?"
하고 물었을 뿐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지점장이 대답했다.
병호는 그 세 명의 코펜하겐행 탑승객들의 국적을 알아보고
싶었다.
병호의 요청을 받은 지점장은 부하 직원에게 그들 세 명의
인적사항을 알아봐달라고 지시했다. 그 직원은 옆에 놓여 있는
컴퓨터 단말기의 키를 두드렸다. 병호는 그쪽으로 다가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1. 하니 가랄 : 42세. 미국인.
2. 하인리히 분케 : 48세. 미국인.
3. 질다 그리지아 : 36세. 미국인(여)
미국 국적을 가진 세 명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같은 곳으로
향한다.--이것은 그들이 일행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행 JAL 450편기에 탑승할 손님들은 15번 게이트를 통해
빨리 탑승하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니 가랄은 36E, 하인리히 분케는 48G, 그리고 질다
그리지아의 좌석은 앞쪽인 2등석 10B였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수사에서 전혀 떠오르지 않은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병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마스오 부장을 바라보았다. 마스오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이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모르겠습니다."
병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첫째 경계가 삼엄한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출발하여
통과여객으로 로마행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점, 둘째 같은
일행이면서도 따로따로 떨어져서 좌석 배정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서울--로마 항로의 기착지인 코펜하겐에서 내린다는 점
등이었다.
병호의 이야기를 듣고 난 마스오 부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로서는 그같은 점들로 그들을 의심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그들을 한 번 주목해 보시죠."
자기는 관심 없다는 투로 마스오가 말했다. 병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로마행 비행기 손님은 빨리 탑승하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다시 들려왔다.
"무기를 준비했습니까?"
"아뇨."
병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요?"
마스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기 싫어서요."
그들은 15번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이건 전투입니다. 무기도 없이 어떻게 싸우겠다는 겁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병호는 말 끝을 흐렸다. 왜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는지 사실은
그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그
자신 무기를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15번 게이트 앞은 JAL 남자 승무원 두 명만이 서 있을 뿐
한산해 보였다. 이미 거의 모든 승객들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탑승구 위에 붙어 있는 시계가 21시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탑승구를 지나 비행기 출입구까지 길게 연결되어
있는 로딩 브릿지를 걸어갔다.
"한국팀은 모두 비무장인가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준비했습니다. JAL 보안요원들 것을 빌렸지요."
마스오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덧붙여
말했다.
"도꾜에서 탑승할 우리 요원들한테도 모두 무장하라고 지시해
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병호는 걱정이 되었다. 만일 비행기 안에서
쌍방간에 총격전이라도 벌어지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로딩 브릿지를 거의 다 걸어갔을 때 그들 앞을 목발을
짚은 외국인 한 명이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외국인의 잿빛 머리 위에는 녹색의 베레모가 얹혀져 있었다.
문앞에 서 있던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그 외국인을 부축하는
바람에 그들은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베레모의 오른쪽 다리는
통나무처럼 기부스가 되어 있었다. 그가 옆으로 얼굴을 돌릴 때
보니 턱 밑에는 잿빛의 염소 수염이 달려 있었고, 코는 매의
부리처럼 휘어져 있었다. 목에는 조그만 가죽 가방이 걸려
있었다. 왜 저런 몸으로 외국 여행을 하는 걸까 하고 병호는
생각했다. 베레모의 뒤를 따라 마스오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맨 마지막으로 병호도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 안에는 이미 승객들이 자리를 잡아앉아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레모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병호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걸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기회를 이용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자들을 살펴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스오 부장은 앞자리이기 때문에 먼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병호는 베레모 뒤를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2등석 10B번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을 주목했다.
그곳에는 흑발의 백인 미녀가 앉아 있었다. 검은 테의 안경을
끼고 있는 그녀는 지성적인 미모를 갖추고 있는 30대의
여인이었는데 첫눈에 반할 정도로 매혹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뉴스 위크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미국
국적을 가진 질다 그리지아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테러리스트를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인 것 같았다. 하긴
테러리스트라고 해서 자기 얼굴에 그런 표시를 하고 다닐 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요주의 인물들의 좌석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는 머리 위 선반 아래 쪽에 적혀 있는
좌석 번호를 살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녹색 베레모는 좌석이
뒤쪽인지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3등석 36열에 이르기 전에
병호는 36E번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는 중간 열에 끼어 있었다.
D석에 앉아 있는 거구의 흑인때문인지 E석에 앉아 있는 사나이는
유난히도 체구가 왜소해 보였다. 앉아 있는 키가 흑인의 어깨
높이 밖에 되지 않았고, 좌석에 푹 파묻혀 있는 아이처럼
보였다. 붉은 머리칼이 유난히 눈에 띄었고 노리끼한 두 눈이
무엇에 놀란 듯 동그랗게 떠진 채 계속 불안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그가 코펜하겐행 승객인 미국인 하니 가랄이었다.
그리지아도 그렇지만 가랄 역시 테러리스트의 이미지와는 너무
먼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 신경과민이야 하고 그는 자신을
타일렀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랄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이다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조금 더 걸어가자 유화시의 화사한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병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를 묵살하면서 율무의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고, 그 곁에 앉아 있는 율무는 푸른 눈을 부지런히 굴리고
있었다. 화시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병호는 화시의 배짱에 경탄하면서 40열을 지나쳤다. 그는 끝까지
가서 요주의 인물들을 모두 보아둘 생각이었다. 그의 자리는
42열에 있었다. 그가 43열을 지나치려고 했을 때 중간에 서 있던
스튜어디스가 그에게 좌석 번호가 몇번이냐고 물었다. 그가
탑승권을 보이자 그녀는 지나쳤다고 하면서 그의 뒤쪽을
가리켰다. 병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자리인 42C석에 가서
앉았다.
보잉 747기는 이미 엔진을 가열시키고 있었다. 의자의
등받이를 바로 하고 안전벨트를 매라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다. 병호는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뚱뚱한 백인 남자의 몸에
자신의 팔꿈치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안전벨트를 둘렀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다이어먼드가 했다는 말을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담배 깡통이 두 개 있는데...... 약을 제거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담배 깡통은 피살된 노엘
화이트의 유품 가운데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 깡통 속에는
체코제 세열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율무의
방에서 담배 깡통 두 개를, 그리고 그 안에서 수류탄을 발견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약을 제거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그
약이란 화약을 뜻하는 것일까? 그 여자가 수류탄에서 화약을
제거했다는 말인가?! 설마 그럴 리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녀에게 부탁한 것은 율무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캐내오라는 것이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유화시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그녀에게 대신 전가시켜보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만일 수류탄에서 화약을
제거했다면 그녀의 말대로 수류탄에 대해서만은 안심해도 된다.
놈들이 몇 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율무가 가지고
있는 수류탄에 대해서만은 안심해도 된다. 정말 그녀가
수류탄에서 화약을 제거했을까?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침내 보잉 747의 거대한 기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호는
눈을 뜨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1시 42분. 예정보다 7분
늦게 출발하고 있었다.
기내에는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무거운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비행기가 대지를 떠나 고도를 잡을 때까지는 긴장과 침묵의
시간이 계속된다.
엔진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활주로 위를 달리는 기체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이 수분간 계속되다가
마침내 대지와의 마찰음이 사라지면서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비행기는 이미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귀가 갑자기
멍해지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병호는 한 칸 너머 앞에 앉아 있는
율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다이어먼드의 말이 그런 뜻이라면
저자는 빈 수류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저자는 수류탄
속에 화약이 없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다면 큰 일이다.
놈은 이미 대책을 세워놓고 유화시와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화시가 제일 위험하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이 비행기에는 테러리스트가 몇 명이나 타고 있을까?
놈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만 있다면 선수를 쳐서 놈들을
저지할 수도 있으련만.
머리 위에 켜져 있던 벨트를 매라는 표시등이 꺼졌다.
여기저기서 벨트를 풀어 헤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승무원들이 바쁘게 통로를 오가기 시작했다. 승객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호는 창쪽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다. 스튜어디스들이 음료수를 나르기
시작했다.
스튜어디스가 푸쉬카를 밀고 2등석 9열에 다가와 마스오 부장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조금 후 마스오가 일어나 뒤쪽으로
다가왔다. 병호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마스오는 그에게 심각한
눈길을 한 번 주고 나서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사라졌다. 병호는
5분쯤 지나 가만히 몸을 일으켜 화장실 쪽으로 다가갔다.
비행기의 중간쯤에 화장실이 었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는지
마스오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네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 통로에 서 있으면 칸막이에 가려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 병호는 담배를
피워물고 기다렸다. 조금 후 문이 열리더니 마스오가 나왔다.
그는 병호 곁으로 바싹 다가서면서 재빨리 속삭였다.
"방금 무전이 들어왔는데...... 다이어먼드가 살해됐답니다.
스튜어디스가 전해 줬어요."
병호의 입에서 담배가 굴러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집으려다가
구두 끝으로 밟았다.
"다이어먼드가 누굽니까?"
"내 정보원인데...... 아마 율무의 손에 죽은 것 같소."
병호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다이어먼드가 죽었다고? 그게 정말일까? 정말이니까
무전연락이 왔겠지. 그 여자를 죽인 사람은 율무가 아니라 바로
나다. 나는 위험한 줄 알면서 그녀를 적지에 투입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