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41화 (41/45)

41. 통과여객

유화시는 8시 5분 전에 국제선 청사 2층에 있는 출국 대합실

스낵코너에 도착했다. 그녀는 떠날 수 있는 채비를 그런대로

갖추고 있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수 있을런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만일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에 일어날지도 모를 무서운

결과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녀는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귄터 율무가 과연 약속대로 나타나 자신과 함께

동행해 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돌아보니 율무였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야릇한

표정으로 웃었고, 율무도 웃으면서 그녀 곁에 다가앉았다.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눈초리 속에는 기쁨과 의혹이 엇갈리고

있는 것 같았다.

"믿어지지가 않아. 미스 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그리고

나하고 함께 간다는 것이......"

"저도 그래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사랑해."

그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뜨겁게 속삭였다. 화시는 그의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고, 그 손을 그의 큼직한 손이 꼭

잡아주었다.

커피를 마시고 난 그들은 아래층에 있는 JAL 카운터로 갔다.

화시는 홀가분하게 여행가방 한개만을 들고 있었지만 율무는

007가방 외에 큼직한 트렁크를 한 개 굴리고 있었다. 카운터

앞에 이른 율무는 화시의 비행기표를 받아 자기 것과 함께

카운터 위에 내놓으면서 나란히 좌석을 배정해 달라고 말했다.

잠시 후 일본항공 여직원이 내주는 두 장의 탑승권을 보니

좌석번호가 3등석 40A와 40B였다. 율무가 짐을 부치고 돌아왔을

때 화시는 황무자의 행방을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들은 다시

2층 출국 대합실로 올라갔다.

그때 국제선 청사의 한 사무실에서는 몇 사람이 모여 21시

35분에 출발하는 로마행 JAL 450편기의 최종 탑승자 명단과 그

숫자, 그리고 배정된 좌석 상태를 알아보고 있었다. 귄터 율무와

오노 다모쓰는 여전히 탑승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그들은

취소하지 않고 예정대로 출발할 모양이었다.

"유순경이 율무와 나란히 좌석 배정을 받았습니다."

왕형사가 40A와 40B를 가리키며 병호에게 말했다. 병호는

그보다 한 칸 건너 뒤쪽에 있는 42열 C석을 자신의 자리로

점찍었다. 그 자리에서는 율무를 잘 감시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통로에 면해 있기 때문에 움직이기에 편할 것 같았다.

왕형사는 오노 다모쓰를 감시하기로 했다. 오노의 자리는

율무보다 훨씬 뒤쪽인 3등석 57G석이었다. 왕형사는 뒤로 두 칸

떨어진 59G석에 자리잡기로 했다. 마스오 부장을 비롯한 세 명의

일본측 수사관들도 제각기 떨어져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마스오

부장의 자리는 앞쪽인 2등석 9H였고, 그의 부하들은 3등석 중간

자리와 맨 뒤쪽에 제각기 위치를 정했다.

8시 30분 현재 최종적으로 집계된 탑승객 수는 모두

327명이었고, 그중 로마까지 가는 승객이 92명. 그리고

코펜하겐행 승객이 3명 있었다.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도꾜까지만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도꾜에서 탑승할 승객

수는 현재 214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450편기는 도꾜에서 1시간 30분간 지체했다가 내일 상오 1시

15분에 출발합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도꾜에서 탑승할 승객 수는 더 불어날 겁니다."

일본항공 지점장의 말이었다. 그때 무전 연락을 받은 왕형사가

급한 어조로 보고했다.

"5분 후에 450편기 탑승객에 대한 출국 수속이 시작된답니다."

그들은 급히 2층 출국장 쪽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두꺼비가

병호한테 마침 생각난 듯 말했다.

"조금 전에 본부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다이어먼드한테서 연락이 있었다는 보고였습니다."

"그 여자는 지금 어디 있지?"

그들은 긴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이어먼드한테서 무슨 연락이 있었다는 거야? 무슨 말이

있었을 게 아니야?"

"전화를 받은 녀석이 무슨 내용인지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장님을 찾다가 안 계시니까 그냥 끊었다는데......

담배 깡통이 어쩌고 했답니다. 자신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병호는 걸음을 멈추고 왕형사를 쏘아보았다.

"전화를 받은 자식이 누구야?"

"박순경이라고 새로 배치된 녀석입니다."

"멍청한 자식 같으니!"

병호는 중얼거리면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담배 깡통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는 갑자기 창백해지면서 다시 걸음을

멈췄다.

"죽은 노엘 화이트의 유품에 담배 깡통이 있었어! 바로 그

깡통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었어!"

왕형사는 깜짝 놀라면서 병호를 마주 쳐다보았다.

"난 그 여자한테 담배 깡통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박순경한테 다시 전화걸어보겠습니다."

"내가 걸 테니까 빨리 가봐."

병호는 출국장 쪽으로 가지 않고 공항경비대 사무실로 들어가

임시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왕형사의 말대로 박순경은 다이어먼드의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병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다그치자 그는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거긴 뭐하러 앉아 있어?! 거기가 낮잠자는 덴 줄 알아?!

연락이 왔으면 빨리 보고해야 할 거 아니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야. 그게 얼마나

중요한 전화인줄 알아?! 자넨 징계를 받아야 해."

"죄, 죄송합니다."

병호는 단단히 일러두지 않은 자신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이어먼드한테서 전화가 온 게 몇 시였어?"

"오후였습니다. 그러니까 4시 지나서였습니다."

더듬거리는 것이 자기 말에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자식 같으니!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병호는

다시 물었다.

"그 여자가 분명히 담배 깡통이라고 그랬나?"

"네네, 그랬습니다."

그 말에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생각해 봐! 반드시 기억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야!

10분 후에 다시 전화걸 테니까 그때까지 생각해내! 그리고

인원을 동원해서 다이어먼드를 찾아봐! 1825호실에 가봐! 그

여자의 이름은 황무자야!"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물고 창가로 다가가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는 어느 새 많은 별들이 나타나 영롱한

빛들을 뿌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왕형사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병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왕형사는 그의 귀에다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율무와 오노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보세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유순경도 들어갔습니다. 율무와 오노의

휴대품에서는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휴대품이 뭐였지?"

"007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습니다."

"가방을 열어봤나?"

"아뇨. 휴대품 검사는 전자탐지기와 엑스레이 투시기로만

합니다. 특별히 그자들 가방만 열어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열어보지는 않았습니다. 탐지기와 투시기에 이상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무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병호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수화기를 들고 다시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박순경은 아까보다 더욱 주눅이 든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1825호실에 그 여자는 없었습니다."

"그 여자를 본 사람은 없나?"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말한 거 생각해냈나?"

"저기...... 담배 깡통은 두 개라고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슨 약을 말하면서 안심해도 된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약이라니? 무슨 약 말이야?"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안심해도 된다고 그랬나?"

"네, 분명히 기억납니다. 아, 이제 생각이 납니다! 약을

제거했다고 그랬습니다! 약을 제거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틀림없나?"

"네, 틀림없습니다."

"그 여자를 계속 찾아봐. 찾는 대로 연락해줘. 9시 35분

이후로는 로마행 JAL 450편기 안에 있을 거니까 비행기로

무전연락을 해줘."

"알겠습니다."

9시 15분 전이었다. 사무실을 나와 출국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병호는 박순경한테서 들은 내용을 두꺼비한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담배 깡통이 두 개 있는데...... 약을 제거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렇지."

"그게 무슨 말이죠?"

병호는 잠자코 출국장 입구를 가리켰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서로 알은 체하지 말고 따로따로 행동해야 한다. 왕형사는 먼저

출국장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맑은 목소리에 병호는 고개를 돌렸다. 이순이가 불안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거기에 서 있었다.

"아, 귀뚜라미......"

병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송 나왔어요. 그 일본 사람 저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녀가 출국장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수고 많았어요."

병호는 고개를 끄덕하고 출국장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 출국 심사대를 통과하려는데 보안요원이

그를 불렀다. 칸막이 뒤로 돌아가니 마스오 부장과 일본항공

지점장이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만 빼놓고 모두 출국 수속을 마쳤습니다. 지금 탑승중

입니다."

마스오 부장의 말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지점장이 말했다.

"현재 여기서 출국 수속을 마친 승객 수는 두 분을 제외한

293명입니다."

병호는 승객 명단을 들여다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는 탑승객 수가 327명으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우리 두 사람을 빼면 325명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네, 그런데 나머지 32명은 김해공항에서 탄

통과여객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김해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쳤기 때문에 여기서는 따로 받지 않아도 됩니다."

병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지점장과 마스오 부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 승객이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450편기 승객들은 모두

여기서만 타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에 일본인들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 비행기라고는

국내선만 몇 차례 타보았을 뿐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병호로서는 통과여객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통과여객이라면 중간에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는 승객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죠. 그 사람들은 출발지에서 출국 수속을 마쳤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중간에 출입국 수속을 밟지 않고

보세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른 비행기로 갈아탈 수가

있죠."

마스오 부장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빠진 그 32명도 김해공항에서 다른

비행기편으로 김포까지 와서 보세구역에 대기하고 있다가

450편기에 탑승했다는 겁니까?"

"그렇죠."

지점장이 끄덕였다.

"그 승객들은 누굽니까?"

"명단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입니다."

지점장이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병호는 32명의 명단과 그들의 목적지를 살펴보았다. 32명

가운데 로마행 승객은 없었다. 29명이 도꾜행이었고, 나머지 세

명은 코펜하겐이었다. 그 세 명 가운데는 여자도 한 명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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