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외로운 죽음
그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뒤에서 목을 휘어감고 꺽으면서
뒤로 힘껏 당기자 목과 허리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몸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윽고 축 늘어졌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목을 꺾어 비틀었다가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죽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율무는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열었다. 가방
안에도 담배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위에 놓여 있는 것들에도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깡통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고
담배가루를 헤집어 수류탄을 꺼내보았다. 이상이 없었다. 다른
쪽 깡통 속도 확인해 보았으나 수류탄은 거기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수류탄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도로 제자리에
넣어둔 모양이었다. 아무튼 수류탄이 발각됐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비록 그녀를 없애긴 했지만 조금 전 통화에서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을 수도 있었다. 위험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자 그의 몸은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그는 수류탄을 도로 제자리에 넣고 나서 죽은 여자를 내려다
보았다. 도대체 이년은 누구일까? 그는 발끝으로 그녀의 몸을
건드려보았다.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침투한 경찰 끄나불일까?
아니면 갑자기 도둑질할 마음이 생겨서 가방을 뒤진 것일까? 그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그녀를 살려둘 수는 없었다. 만일 그녀가
경찰의 끄나불이라면 그 아름다운 여대생도 한 통속이라는 말이
된다.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접근해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는 급히 옷을 입으면서 계속 문쪽을 주시했다. 금방이라도
한국 경찰이 나타나서 문을 두드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옷을 다
입을 때까지 노크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리지아에게 자신의 실수를 보고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살해한 여인이 경찰 끄나불이라면 모든
대원에게 위험이 닥친 것을 알려야만 한다. 그러나 그녀가
경찰의 끄나불이라는 증거가 아직 없었다. 그녀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이다. 굳이 그리지아에게 알려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녀에게 자신의 실수를 알리면 그녀는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받게 될 처벌이 두려웠다.
옷을 모두 입고 난 그는 난처한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날 때까지는 시체가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5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는 4시간 30분 정도가 남았다.
그가 시체를 침대 밑으로 밀어넣으려고 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전화벨은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자신이 독 안에 든 쥐라는
것을 알고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유화시였다.
"저 정말 함께 따라가도 되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있었다. 율무는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물론 되고 말고."
"혹시 제가 따라가면 부담되는 거 아니예요?"
"아아니, 그렇지 않아. 난 한번 말한 건 꼭 지키는 사람이야.
사랑하는 미스 유하고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어."
"고마워요. 로마에서 당신하고 멋지게 데이트하고 싶어요."
"내가 밉지 않나?"
"아뇨. 이젠 밉지 않아요. 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감미롭게 느껴졌다. 그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렇게 변할 수도 있을까. 그에게 강간당하고
났을 때 그녀는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었다.
"전 떠날 준비 다 끝냈어요. 지금 그쪽으로 가도 되겠죠?"
"아, 안 돼. 이따가 공항에서 만나기로 해. 출발 한 시간전에
출국 대합실에서 만나기로 해."
"그 여자때문에 그러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질투에 사로잡힌 것처럼 들려왔다.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여자가 아니고 당신이야. 그 여자도 함께 따라가고 싶다는 걸 안
된다고 했어. 그랬더니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버렸어."
"그럼 지금 그 여자 거기에 없나요?"
"없어, 나 혼자 있어."
"어디로 간다고 하면서 나갔어요? 다시 올 건가요?"
"어디로 갔는지 몰라. 다시 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나갔어."
"언제 나갔나요?"
"조금 전에......"
"미스터 율무, 당신은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여자와 밤새
즐겼어요. 내가 보거나 말거나 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건 그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야. 너에게
질투를 느끼게 하려고 그랬던 거야."
"정말 저를 사랑하세요?"
"정말 사랑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다시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녀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이따가 8시 정각에 만나요. 2층 출국 대합실 스낵코너에서
만나요."
"좋아. 그러지."
율무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얼굴에 번진 땀을 닦았다.
그는 생각 끝에 방안에 그대로 있기로 했다. 만일 한국 경찰이
그를 노리고 있다면 호텔 밖으로 도망친다한들 붙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왕 체포될 바에는
방안에서 조용히 체포되든가 자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기다릴 때까지 기다려보다가 아무 일 없으면 안심하고 공항으로
나가도 될 것이다.
귄터 율무와 통화를 끝낸 유화시는 병호를 쳐다보았다.
"다이어먼드가 율무와 싸우고 밖으로 나갔대요."
그녀는 병호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그는 황무자의 행방에
관심이 없는지 도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JAL 450편기의
도면이었다. 그들은 지금 차 속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탄 낡은
콜롬보차는 강변도로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잠복조한테 전화걸어 확인해 봐요."
병호가 도면에다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화시는 무선전화로 H호텔에 잠복중인 요원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오노는 외출중이고 율무는 방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잠복조의 말이었다.
"다이어먼드는 어디 있나요?"
"1825호실에 아직 있어요."
"그렇지 않을 텐데. 율무 말이 밖에 나갔다고 하던데요?"
"방에서 나오는 거 보지 못했어요. 나왔다면 우리 눈에 띌텐데
보이지 않았어요."
"연락도 없었나요?"
화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이어먼드를 발견하든가 그 여자한테서 연락이 있으면
반장님한테 연락주세요."
그녀는 카폰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병호를 쳐다보았다.
"오노는 외출중이고 율무는 방안에 그대로 있대요.
다이어먼드가 방에서 나오는 건 보지 못했대요. 아무 연락도
없었다는데요."
병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다시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괜히 그 여자를 침투시켰어."
그는 황무자를 동원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율무가 거짓말한 것 같아요. 그 여자는 율무하고 아직
방에서......"
그녀는 말 끝을 흐리면서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병호는 잠자코 자신의 콜롬보차를 출발시켰다. 그들에게는
매우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들은
마치 한가롭게 드라이브나 즐기는 한 쌍 같았다.
20분쯤 지나 그들은 강변 주공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나, 물이 하나도 없어요. 모이도 없구요."
병호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화시가 새장 안을 들여다보며 한
말이었다.
"아직도 짝을 안 지어주셨네요."
"시간이 없었어."
"너무 하셨어요."
화시가 새장 안에 모이와 물을 넣어주는 동안 병호는 가만히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타나자 문조는
기쁜 듯 마치 옥이 구르는 것 같은 맑은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쓸쓸하던 집안은 갑자기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향긋한
내음과 움직임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 놀라운 변화를
병호는 한동안 숨을 죽인 채 감지하고 있다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만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유순경이 그 새를 맡아서
길러요. 짝도 지어주고."
오늘 밤 출국하게 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모이와
물을 새장 안에 미리 많이 넣어주려고 잠시 집에 들렀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니요?"
화시는 고개를 돌려 병호를 쳐다보다가 그의 시선이
강렬했던지 도로 새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병호는 그녀의
동그스름한 어깨가 약간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어깨를 한 번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그는 거기에다 한
쪽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그녀가 숨을 흑하고 들이켰다. 그는 손을
거두었다.
"아, 아무 것도 아니야. 괜히 한 말이야."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이 유난히 맑게 빛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병호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재빨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가 가방을 챙기는 동안 유순경은 집안을 치웠다. 병호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집안이 마치 돼지우리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남자
혼자 산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H호텔 2015호실에 자리잡고 있는 수사본부는 아주 한산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국제 테러리스트들이 일망타진된 마당에
더 이상 거기에다 수사본부를 차려두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가 철수하고 소수의 인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나마 처음부터 수사에 참가했던 요원들은 다른 사건때문에
이미 빠져나가고 사정을 잘 모르는 신참들만이 대신 와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수사본부가 아직 그대로 거기에 있는 것은 병호가 수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호텔에서 수사본부를
철수시키라는 보스의 지시에 이삼 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요구했고, 범인들은 일망타진한데 대한 안도감과 만족감에 빠져
있는 보스는 그 요구를 쾌히 들어주었던 것이다.
박순경은 서른이 넘은 노총각이었다. 주의력이 산만하고
세심하지 못한 그는 2년 가까운 경찰관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고, 조만간 별 볼일 없는 경찰직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재 맡고 있는 일에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젊은 여인으로부터 오반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은 호텔 내에 있는 사우나실에서였다. 탕속에
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그는 이내 그것을 잊어먹었다.
그가 다시 또 그 생각이 난 것은 수사본부에 돌아왔을 때였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잘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는 볼펜을 집어들고 맞은편에 엎드려 있는 여순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쪽으로 등을 보인 채 서서 누군가와
히히덕거리며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상체를 구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동그스름한 엉덩이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흔들리는 그녀의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다가 그녀가 통화를 끝내고 상체를 바로 하자 박순경은 얼른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리면서 메모지 위에다 '다이어먼드'라고
적었다. 그런데 그밖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그 젊은
여자는 자기를 다이어먼드라고 하면서 오반장을 찾았었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는
볼펜을 놓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