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9화 (39/45)

39. 담배 깡통

외국인 테러리스트들 중 특히 일본적군파 간부인 사쓰마

겐지가 체포된 데 대해 크게 기뻐하고 있던 일본 수사팀장

마스오 부장은 병호의 말을 듣고는 펄쩍 뛰었다.

"그렇다면 그 두 명을 지금 당장 체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대로 비행기를 타게 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큰 일

아닙니까. 사전에 예방조치를 하는 게 뒷탈이 없을 것 같군요."

지금 당장 귄터 율무와 오노 다모쓰를 체포하자는 마스오

부장을 설득시키느라고 병호는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모험이긴 하지만 일당을 모두 체포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그대로 비행기에 타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자들이 꼭 서울에서 탑승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들은 서울 아닌 도꾜에서 탈 수도

있고 앵커리지에서도 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사전에

막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스오 부장은 한국 수사팀과 함께 일본팀도 JAL 450편기에

동승하여 합동작전을 편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병호의 의견에

굴복했다.

마스오 부장이 나서서 일본항공 서울 지점장을 직접 만나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에 지점장은 수사에 적극 협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스오는 그에게 위험 인물을 지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대신

JAL 450편기가 하이재킹당할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니

협조를 부탁한다는 정도로만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말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지점장은 사색이 되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그에게 매달렸다. 마스오는 병호가 곁에서 지켜보는

데서 승무원들은 긴장된 분위기를 보이지 말고 평소때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고 일렀다. 그대신 짐검사와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하고 만일에 대비해서 승무원들도 눈에 띄지 않게

무장을 할 것, 그리고 그가 지정하는 좌석들을 수사팀용으로

비워줄 것 등을 요구했다.

병호는 서울에서 21시 35분에 출발하는 로마행 JAL 450편기

예약 승객명단을 자세히 점검해 보았다.

오후 4시 현재 예약 승객 수는 모두 217명이었다. 출발 한

시간 전까지 몇명이 더 예약할지는 알 수 없었다. 217명

가운데서 그는 귄터 율무와 오노 다모쓰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좌석 배정을 받지 않은 상태였는데

목적지는 똑같이 종착지인 로마로 되어 있었다. 그는 그들 외에

수상한 자가 없나 하고 예약자 이름들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았지만 이름만 보고는 알 수가 없었다. 217명 가운데 로마까지

가는 승객은 89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꾜행 승객들이었다.

"도꾜에서 탑승할 승객들은 몇 명이나 되나요?"

병호의 질문을 받은 지점장이 여직원을 불러 도꾜에서 예약한

승객 명단을 뽑아오라고 하자 그녀는 즉시 도꾜로부터

전송되어온 예약자 명단을 가지고 왔다.

"현재 159명이 도꾜쪽에서 예약했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탑승객 수는 더 늘어날 겁니다."

명단을 병호에게 넘겨주면서 지점장이 말했다.

병호는 영어로 되어 있는 그 명단을 대강 훑어본 다음

서울에서 탑승할 승객명단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 가운데

그가 주목하고 싶은 이름들은 귄터 율무와 오노 다모쓰를 포함한

로마행 승객 89명이었다. 그는 그 89명의 이름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이름들 앞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두었다.

그 89명 가운데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이 꼭 끼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는 평범한 일반승객으로

가장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일시에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도꾜에 지원을 부탁했습니다. 특공요원 20명을 도꾜에서

투입시키기로 했으니까 안심해도 될 겁니다."

마스오 부장이 도꾜와 통화를 하고 나서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병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20명이나 말입니까? 그렇게 많이 투입시키면 범인들이 눈치

채지 않을까요?"

"유럽행 비행기에는 일본인 승객들이 많기 때문에 별로

의심받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특공요원들이 그렇게 눈에

띄게 어수룩하게 행동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겁니다. 그들은 테러에 대비해서 훈련된

요원들이니까 비행기가 납치되는 걸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마스오는 자못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병호는

불안하기만 했다.

그는 비행기 납치사건의 경우 모든 승객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만큼 대테러요원들 같은 거친 사나이들이 20명씩이나 탑승하여

총격전이라도 벌이면 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의

방법보다는 소수의 인원으로 아주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적합한 방법일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의견은 마스오 부장에 의해 묵살당했다.

그는 그의 팀이 작전에 참가하게 되자 갑자기 오만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본인으로서의 우월감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그는 하이재킹을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하고 있는 것 같았고, 일본측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그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호로서는 마스오 부장의 계획을 저지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가 자기 나라 비행기에 자기 나라 수사요원들을

태우겠다는 데에는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

욕실 쪽에서 샤워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쏴아하고 들려왔다.

침대 위에 벌거벗은 채 드러누워 있던 황무자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너무 힘을 뺐기 때문에 두 다리가 휘청거려왔다. 귄터

율무는 그야말로 지칠줄 모르는 절륜의 사나이였다. 그는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하면 할수록 더욱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고, 그래서 무자는 그와 밤을 꼬박 새고나서도 다시

지금까지 그에게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율무는 이제 비로소 만족한 것 같았다.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욕실로 들어갔고, 그때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던 무자는 급히

자리를 차고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까지 율무는 잠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옷장 문을 열고 율무의 옷을 더듬어보았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내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밑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무엇인가 만져졌다. 꺼내보니 두꺼운 007가방이었다. 그것은

잠겨 있었다. 들어보니 꽤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옷장 문을 열고 율무의 웃옷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열쇠

꾸러미가 만져졌다. 열쇠 고리에는 네 개의 열쇠가 걸려있었다.

그것들을 가방의 자물쇠 구멍에다 하나하나 맞춰보았다. 세번째

열쇠가 구멍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녀는 열쇠를 왼쪽으로

돌린 다음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맨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책과 서류 같은 것들이었다. 책은 두

권으로 영어로 된 페이퍼북이었는데 범죄소설류인 것 같았다.

서류는 누런 대형 봉투 속에 들어 있었다. 그 밑에 타월이 깔려

있었다. 그것들을 들추자 양철로 된 원통형의 깡통이 나왔다.

깡통은 두 개였다. 겉에 표시되어 있는 영문 표기들을 읽어보니

파이프용 담배가루를 담아두는 깡통이었다. 그런데 담배가루가

들어 있는 것치고는 꽤나 무거웠다. 두 개 다 비슷하게 무거운

느낌이었다. 오경감한테서 들을 바도 있고 해서 그녀는 깡통

뚜껑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담배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담배

향내가 물씬 풍겨왔다. 담배가루를 헤집자 은박지가 보였다.

그것을 만져보자 딱딱한 느낌이었다. 은박지에 무엇인가

싸여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낸 다음 은박지를

헤쳐보았다. 놀랍게도 은박지 안에서 수류탄이 나왔다. 다른

깡통 안에도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욕실 쪽에 귀를 기울였다. 욕실 쪽에서는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백속에서 ㅃ치를 꺼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해온

것이었다. 수류탄을 왼손에 움켜쥔 다음 ㅃ치로 수류탄 꼭지

부분을 단단히 집고 왼쪽으로 돌렸다. 움질일 것 같지 않던

그것이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릴수록 그것은 쉽게

돌아갔다. 이윽고 몸체로부터 꼭지가 빠져나왔다. 꼭지에는

스프링이 달려 있었고, 몸체 안에는 작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화장대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다 작약가루를 쏟아부었다. 또 하나의 수류탄도 분해하여

작약을 빼냈다. 대담한 그녀도 시종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손

끝이 떨려 일의 진행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분해된 두 개의 수류탄을 다시 조립해서 제 자리에 넣고 나서

모든 것을 처음 상태대로 해 놓을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율무가 욕실에 들어간 지 아직 10분이

못 되고 있었다. 가방을 침대 밑으로 밀어넣고 나서 마지막으로

열쇠를 남자의 옷 속에 집어넣고 난 그녀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병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호는 자리에 없었다. 어떤 수사관이 전화를 받았는데 용건이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녀는 속삭이는 소리로 말했다.

"지금 자세한 걸 말할 틈이 없어요. 다이어먼드한테서 전화

왔었다고 전해 주세요."

"뭐, 다이어먼드라구요? 무슨 일로 그러는 겁니까?"

그녀는 망설여졌다. 상대방은 그녀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담배 깡통 두 개를 발견했는데 잘 처리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약을 모두 제거했다고 전해 주세요."

"약이라니요? 무슨 약 말입니까?"

이렇게 답답한 수사관도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율무가 타월을 목에 걸친

채 거기에 서 있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난 자는 줄 알았지."

그는 중얼거리면서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방금 깼어요."

그녀는 그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디다 전화를 걸었지?"

"친구한테 걸었어요."

"이게 무슨 냄새지?"

율무는 코를 킁킁거리면서 침대 밑을 살폈다. 이윽고 그는

카피트 위에서 무엇인가 집어들었다. 그것은 담배가루였다.

그것을 코에 댔다가 그는 그녀의 눈앞에 손을 벌려보였다.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침대 밑으로 발을 넣어 가방을

밀어냈다.

무자는 그렇게 파란 눈을 일찌기 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두

눈은 유난히 파랗게 빛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인형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담배가루를 바닥에 흘린 자신의

부주의를 탓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몸이 얼어붙기 전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침대 위로 몸을 굴렸다. 침대

위를 한 번 굴러 바닥으로 떨어진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출입문

쪽으로 돌진했다. 그녀가 문고리를 움켜쥐고 문을 잡아당기는

순간 남자의 억센 손이 뒤에서 그녀의 목을 휘어 감았다. 문이

열렸지만 쇠고리가 걸려 있어 조금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쇠고리를 벗겨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너무 늦은 일이었다.

그녀는 발악을 하면서 문쪽으로 두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목이 막혀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몸은 자꾸 뒤로

끌려가기만 했다. 그녀는 손톱으로 남자의 팔뚝을 할퀴었다.

살점이 찢어지는 것을 그녀도 알 수 있었지만 남자는 팔을

풀기는 커녕 더욱 힘껏 그녀의 목을 조였다.

"넌 누구지? 가방 안에서 뭘 봤지?"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카피트 바닥에

닿았다. 그는 그녀를 바닥에 엎어놓은 다음 무릎으로 그녀의

등을 눌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