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8화 (38/45)

38. 제2의 가능성

"귀뚜라미한테서 전화왔습니다."

병호가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채 막 눈을 좀 붙이려고 했을때

왕형사가 그를 깨웠다.

"저한테 말하라니까 오반장님한테 직접 말하겠답니다. 아주

깜찍한 아가씨입니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병호에게 넘겨주었다.

"그 일본 남자가 몇 시 비행기로 출발하는 지 알아냈어요!"

귀뚜라미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아, 그래요. 천천히 말해봐요."

"오늘밤 9시 35분 비행기로 떠난다고

했어요."

"어느 나라 비행기로 떠난다고 했어요?"

병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차분했다.

"JAL기로 간다고 했어요. JAL이면 일본항공이에요?"

"그래요. 일본항공사의 영어 머리글자예요. 그런데 그 사람

어디로 간다고 했어요?"

"도꾜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그 비행기는 어디까지 가는 비행기이지?"

"도꾜까지 가는 비행기이겠죠 뭐."

그녀는 그 비행기의 종착지가 어디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도꾜에 들렀다가 다른 데로 갈지도

몰라요. 아무튼 수고했어요. 고마워요."

"그 사람 갈 때 저도 공항까지 가기로 했어요. 그 사람이

공항에 전송하러 와도 좋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가봐요. 그밖에 다른 할 말은 없나요? 그

사람한테서 무슨 이상한 거 발견하지 못했나요?"

"그런 건 발견하지 못했어요."

귀뚜라미와 막 통화를 끝내고 나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병호가 직접 전화를 받았는데 유화시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오늘 밤 귄터 율무가 한국을 떠나는 것은 확실해요. 떠나는

시간과 비행기편을 알아냈어요."

"말해봐요."

"출발 시간은 21시 35분이고, 이용할 항공기는

JAL450편기예요. 그 비행기는 로마까지 갈 거예요. 율무는

로마까지 간다고 했어요."

"틀림없어?"

"이미 표를 예약해 놨다고 하면서 저보고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조금 전에 귀뚜라미한테서도 연락이

왔는데 오노도 같은 시간에 일본항공편으로 떠난다고 했어."

"그럼 두 사람이 함께 떠나는군요?"

"시간이 같은 걸 보니까 그런 것 같아."

"저도 그 사람하고 함께 떠나겠다고 했어요."

병호는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멍하니 있는데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그 사람 따라서 로마에 다녀올까 해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로마에 다녀오겠다고 했어요. 빨리 여권을 내주세요."

병호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말문이 막힌 상태로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로마에는 왜 가겠다는 거야? 이유가 뭐야?"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잖아요. 끝까지 따라가서 뿌리를 뽑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어요. 지구 끝까지 따라갈 거예요."

"지금 그렇게 한가한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병호는 정색하고 물었다. 그녀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예요. 전 정말 그 사람을 따라갈 거예요.

보내주세요."

"미쳤군."

하는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그는 겨우 참았다.

"괜히 그러는 게 아니예요. 그들은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요."

"증거가 있나?"

"증거는 없지만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범인들은 모두 일망타진됐어요.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돌아와요."

"저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 아가씨는 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게 굴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한 시간쯤 지나 유화시는 병호 앞에 나타나 똑같은 요구를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고 쳐. 혼자 따라가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더구나 한국 밖에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짓할만큼 우리가 한가하고 여유가

있는 줄 알아요?"

곁에 있던 두꺼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한 마디 했다. 화시는

발끈했다.

"필요한 경비는 제 돈으로 해결하겠어요."

그녀의 결의가 단호한 것을 보고 병호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서 그녀의 주장을 무턱대고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들어줄만하면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을 고쳤다.

"수사를 위해 외국에 나가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그 경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해요. 시간과 경비와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야. 무턱대고 나간다는 것은 좋지 않아요."

"무턱대고 나가겠다는 건 아니예요."

"나갈만한 증거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사소한 거 하나라도

확보했어야 설득력이 있을 거 아니야."

두꺼비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화시는 그를 쏘아보다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지난 밤에 율무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것을

엿들었는데...... 선플라워 식스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밖에

다른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남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선플라워 식스라면 해바라기 6호라는 말 아닙니까?"

왕형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는데......"

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시는 핸드백 속을 뒤지더니

무엇인가 조그만 것을 꺼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발견했어요. 그 사람 호주머니 속에서

발견한 거예요."

"아니, 이거......?"

병호는 그 조그만 것을 손바닥 위에 놓고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총알이었다.

"어떻게 이걸 손에 넣었지?"

왕형사가 흥분해서 물었다.

"그 사람이 잠들었을 때 호주머니를 뒤졌더니 이게 나왔어요."

"그럼 그대로 놔둬야지 이걸 가지고 나오면 어떻게 해? 그

사람이 의심하면 어떡 할려고 그래?"

"찾지도 않던데요 뭐."

화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병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병호는 압수품들을 넣어둔 박스에서 탄환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소련제 토카레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것을 유화시가

가져온 탄환과 비교해 보았다. 두 개는 서로 일치했다.

"똑같군요!"

두꺼비의 목소리는 사뭇 떨리고 있었다. 병호는 따뜻한 눈길로

유순경을 바라보았다.

"이건 매우 중요한 발견이야. 유순경은 대단한 일을 해냈어.

정말 수고했어요."

병호의 얼굴에도 흥분한 빛이 나타나 있었다. 만일 유화시가

이 조그만 증거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을까

생각하니 그는 모골이 다 송연했다.

왕형사도 유순경이 해낸 일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갑자기 일신되어 있었다.

"유순경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어. 매우 위험한 일인데 정말

잘해냈어."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뭘."

화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걸 발견했으면 미리 좀 알려주지 않고 왜 이제야 내놓는

거지?"

"떠벌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혼자 해내고 싶었어요."

"혼자 어떻게?"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깜박거리다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놈들을 당장 체포하죠."

왕형사의 말에 병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들 외에 일당이 더 있는 게 분명해. 놈이 암호를 대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걸 유순경이 들었단 말이야. 놈들도 모두

잡아내야 해."

"오노 다모쓰한테 건 전화일 수도 있잖아요."

"그건 가능성일 뿐이야. 그들 두 명을 지금 체포하면 남은

일당을 놓칠지도 몰라. 남은 일당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판에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 유순경이 그들을 따라

함게 출국하겠다는 건 충분히 일리가 있어요."

화시의 얼굴 가득히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는 승자의 표정으로

왕형사를 쳐다보았다.

"이제 제 말뜻을 이해하시겠죠?"

"황무자도 이걸 알고 있나?"

"모르고 있을 거예요. 제가 말하지 않았거든요."

"알려야 해."

"알리면 행동하는데 제약을 줄까봐 알리지 않았어요."

"주의를 줄 필요가 있어."

하고 병호가 말했다.

"그 여자는 지금도 율무와 함께 있을 거예요."

"그들은 깊은 관계까지 가졌나?"

두꺼비가 짖궂게 물었다. 화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건 아실 필요 없잖아요. 호랑이 굴 속에 들어갔는데

온전하겠어요?"

"그러다가 한 패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보다는......그 여자가 위험해."

병호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이미 각오했던 것 아닌가요?"

그 말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왕형사가 대신 말했다.

"그래도 경고를 해주는 편이 좋을 거야. 지금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귀띔이라도 해주는 게 좋아요."

"전 그 여자가 싫어요."

그녀는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황무자만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려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의를 주겠어요. 일은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병호를 쳐다보았다. 병호의 결단을

촉구하는 표정이었다.

병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어. 하나는 대원들이

체포되고해서 계획을 포기하고 JAL 450편기로 도망치는 경우야.

그 경우에는 별로 문제될 게 없겠지. 문제는 그들이 JAL

450편기를 노릴 경우야. 그들의 진짜 목적이 세계금융가총회장이

아니고 JAL기라면 문제가 심각해. 그 경우 숨어 있는 일당이

모두 그 비행기에 탈 거란 말이야. 그리고 어디론가 비행기를

납치해 가려고 하겠지."

유화시도 왕형사도 얼굴 표정이 금방 굳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 경우에는 정말 문제가 크겠는데요."

"JAL기가 우리 비행기가 아닌 게 다행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할 수는 없어.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만일

제2의 가능성이 발생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크게 망신당하는

거야. 놈들은 우리를 농락할대로 농락한 끝에 계획대로 비행기를

납치하는 거고 소기의 목적을 이루게 되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죠?"

"우리도 함께 그 비행기를 타는 거야. 유순경한테만 맡길 수

없어."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시는 손뼉을 쳤다. 그녀는 마치

즐거운 여행을 앞두고 기뻐하는 소녀 같았다.

"반장님과 저도 그 비행기를 타자는 겁니까?"

두꺼비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우리밖에 탈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다른 수사관들까지

동원할 수는 없어. 확실한 가능성도 없는데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는 없지 않아? 놈들이 도망가려고 그 비행기를 탄다면 우리는

공연히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돌아오게 되는 거야."

"그렇군요."

"일본측 사람들은 동원해도 문제가 없겠지. 자기들

비행기이니까 말이야. 마스오 부장한테 말해봐야겠어. 자넨 빨리

우리 세 사람 여권을 준비해. 비행기표도 예약하고 말이야."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형사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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