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로마행 JAL 450편기
난장이는 김해국제공항 일본항공 카운터에서 세 장의 항공권을
받아들면서 씨익하고 웃었다.
"땡큐!"
"안녕히 가세요."
일본항공 여직원은 난장이 남자의 웃음이 징그러웠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밝게 인사했다. 그녀는 난장이의 뒷모습이 국제선
터미널 빌딩 밖으로 사라지자 세 장의 항공권을 구입한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난장이 사내의 이름은 하니
가랄. 국적은 미국이었고 나이는 42세였다.
그는 다른 두 사람의 항공권까지 구입했다. 동행을 대신해서
혼자 나온 것 같았다. 동행은 두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은
여자였다. 남자의 이름은 하인리히 분케. 독일 이름 같은데
국적은 미국이었다. 나이는 48세.
여자의 이름은 질다 그리지아. 역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나이는 36세.
그들이 구입한 항공권은 서울발 코펜하겐행 JAL 450편기
항공권이었다.
그 비행기의 기종은 보잉 747기이고 출발시간은 7월 26일 21시
35분이었다. 카운터를 보고 있는 그 일본항공 여직원은 그
난장이 사내에게 국내선 편으로 서울에 올라가 로마행 JAL기로
갈아타면 된다고 친절히 일러주었었다.
오후 2시 조금 지나 부산 S동 H비치아파트 205동 1208호실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리지아는 가만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해바라기 6호......"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그리지아는 지중해
빛깔을 닮은 푸른 눈을 생각하면서 응답했다.
"베니스의 비둘기......"
"어떻게 됐나요?"
"오늘 21시 35분에 출발하는 JAL 450편기로 결정됐어요.
서울발 로마행이에요. 우리는 코펜하겐까지 끊었어요. 그쪽은
로마까지 끊으세요."
"기종은?"
"보잉 747."
"잘 됐군요."
"그럼 비행기에서 만나기로 해요. 빨리 항공권을 구해야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착오나지 않게 신중히 행동해야 해요."
그녀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5분쯤 지나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해바라기 9호......"
그것은 마티스박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리지아는 조금
전과 똑같은 내용의 말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국제테러조직 일망타진."
"한국 경찰 일대 개가."
"피로 물들 뻔한 세계금융가총회."
병호는 석간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기사 제목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 센세이셔널한 기사들이 웬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과연 그들은 일망타진된 것일까.
체포된 자들을 분리신문한 결과 그들은 하나같이 오는 28일에
개최될 예정인 세계금융가총회장을 습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이름이
'검은 6월단'이라고 밝혔다.
"검은 9월단이 아닌가?"
왕형사가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병호는 잠자코
프레드릭 마주르를 쳐다보았다. 잿빛 눈의 사나이는 눈을 반쯤
감은 채 하품을 했다.
"검은 6월단이야."
"검은 9월단하고는 어떻게 다른가?"
"검은 6월단은 아부 니달이 만든 조직이야."
"아부 니달이 누구야?"
잿빛 눈의 사나이는 조소어린 표정으로 왕형사를 흘겼다. 아부
니달이 누군지도 모르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마스오 부장이
"아부 니달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인물입니다.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기로 유명한데 그때문에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의 배척을 받고 있은 형편이죠.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그에게 자금을 유용했고 권력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일찌기 궐석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 아라파트의 공적인 셈이지요. 그는 온건파
지도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이 팔레스타인의 모든 조직을
장악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거죠. 서방 정보기관은 그를
원자탄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잔혹하고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아부 니달은 왜 이번 작전에 참가하지 않았지? 그는
어디 있는가?"
병호가 테러리스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는 모든 작전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잿빛 눈의 사나이가 말했다.
체포된 자들은 구체적인 질문에 들어가면 하나같이 입들을
다물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서는
일절 대답하려들지 않았다.
결국 경찰이 알아낸 것은 그들이 세계금융가총회장을 습격하려
했으며 아부 니달이 이끄는 '검은 6월단'소속의
테러리스트들이라는 것 정도였다.
병호는 테러리스트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들을 점검해 보았다.
권총 두 자루와 수류탄 하나, 그리고 대검이 두 자루였다.
전문가에게 보인 결과 권총은 구경 7.62밀리 소련제 토카레프로
밝혀졌다. 그리고 수류탄은 죽은 노엘 화이트가 택시에 두고
내렸던 것과 같은 체코제였다.
병호는 왕형사를 따로 불러냈다.
"어떻게 생각해?"
"국제 테러리스트들이라도 별수가 없더군요."
왕형사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나?"
"일당이 모두 체포된 마당에 뭐가 또 있겠습니까?"
병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야. 우리는 그들의 자백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어.
그들이 검은 6월단 소속이고 세계금융가총회장을 습격할
계획이었다는 것도 그들의 자백에 의해 알게된 거야."
"그야 그렇죠."
"문제는 그들의 자백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우리가 하나도
확보하고 있지 않다는 거야."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망타진된 마당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들의 자백이 거짓말이라면 그들 일당이 모두 체포
됐다는 것도 믿을 수가 없어. 난 그들의 자백을 전적으로 믿고
싶지 않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증거가 하나도 없어. 뭔가
부족하단 말이야. 그들이 회의장을 노렸다면 적어도 회의장
약도를 그린 메모지 정도는 발견됐어야 해. 그런데 그들의
소지품 가운데서 그런 것은 발견되지 않았어. 그리고 그들은 그
계획에 대해서 상세히 물으면 하나같이 입을 다문단 말이야.
입을 다무는 이유가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거짓말이라면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져 있을 리가 없고,
그러니 질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자신에 차있던 왕형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비쳤다.
"글쎄요. 듣고보니까 그런 것 같군요."
"그들의 자백이 사실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함정에 빠질지도 몰라. 이미 함정에 빠진지도 모르지.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러."
"유화시와 황무자를 어떻게 할까요? 철수시키는 걸
보류시킬까요?"
"그대로 둬봐."
병호는 노엘 화이트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생각했다. '에어......'라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었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유순경은 지난 밤 황무자와 함께 호텔에서 밤을 새고 지금은
집에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집에 틀어 박혀
나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황무자는?"
"독일 남자와 함께 H호텔에 머물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직까지
특별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무
연관성도 없는 자들을 놓고 말이야."
"유순경이 바람을 잡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두꺼비가 볼멘 소리로 말했다. 유화시가 수사를 핑계로 외국
남자와 어울리고 있는 것을 그가 몹시 못마땅해 하고 있다는
것을 병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려보는 것도 손해볼 것은 없지 않아? 유순경의
말을 들으면 그자들은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귀뚜라미한테서도 비슷한 보고가 들어오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황무자까지 투입시킨 것은 어느 정도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니까
기다려보기로 해. 오늘중으로 무슨 결정적인 소식이 있을 거야."
거의 같은 시간.
유화시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간밤의 일이 악몽처럼
되살아나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제정신을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어떻게 자신이 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마셨던 탓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 자신이 행한 짓이 흡사 포르노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강제로 당하는 척하면서 나는 그룹섹스를 즐겼던 게 아닌가.
더러운 것. 그녀는 무릎 위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목적을
망각한 채 섹스에 탐닉하다니. 그것도 외국 남자와...... 더구나
셋이서.......
거실 쪽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벨소리가 그치더니 조금
후 문이 열렸다.
"전화 왔다."
그녀의 어머니가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없다고 하세요."
"아주 급한 일이란다. 황 뭐라고 하는 여자가 걸어왔어."
"없다고 하라니까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응하고 나서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서
나가자 갑자기 생각을 고쳐먹고 뛰쳐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침에 들어온 화시가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방안에 웅크리고 있자 몹시 걱정했었다. 그녀는 딸이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이 밖에서 밤을 새고 들어오는 것을 직업이
그러니만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화시의 직업이
하필이면 경찰관, 그것도 형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항상 못마땅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자기가 좋아서 다니는 것이니까 할 수 없이
두고 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직업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이
드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시는 황무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수화기를 도로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꾹참고 귀를 기울였다.
"간밤에는 정말 실례가 많았어요.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렇게
된 모양이에요. 내 생각에는 율무가 술에다 약을 타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이미 지나간 일을 따져서 뭘 하겠어요.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난 지금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아요."
"급한 일이라는 게 뭐예요? 할 말 없으면 전화 끊겠어요."
화시는 냉정히 대꾸했다.
"아, 끊으면 안 돼요.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인데 아가씨,
피차 일반 아니예요? 화내지 말고 잠깐 기다려요. 율무가 할
말이 있대요."
"헬로우......"
율무의 목소리가 징글맞게 들려왔다. 화시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미스 유, 사랑해요."
그녀는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미스 유, 내 말 들어요? 미스 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말하는 거예요. 나하고 함께 로마에 가요. 로마에 가서 우리
멋지게 사랑하자구."
화시는 비로소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는 긴장해서 귀를
기울였다.
"나 로마행 비행기를 예약했어요. 미스 유가 가겠다면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요. 갈래요 안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