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4화 (34/45)

34. 제3의 은신처

오다 기미를 앉혀놓고 꼬치꼬치 신문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제일 급한 것은 범인 일당을 체포하는 일이었다.

병호는 기미를 신문하는 것을 중단하고 수사본부를 나와

Y아파트로 향했다. 먼저 출발한 왕형사로부터는 계속 무전연락이

들어오고 있었다.

"15동 816호를 완전 포위했습니다. 816호에서는 아직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기다리고 있어. 제2의 장소에 가서 통화하는 것을 엿들어

보고 나서 행동을 개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Y아파트 5동 909호에 도착하자 그곳에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

중 한 명이 병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2시 정각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다섯 번 울리다가

끊어졌습니다."

"들어보았나?"

"네, 역시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목시계는 2시 2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2시 30분이

되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병호는 전화를 지켜보고 있다가 그것이 다섯 번 울린 끝에

멈추는 것을 보고 가만히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놀랍도록 선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예루살렘......"

그것은 전화를 받은 쪽의 응답이었다.

"해바라기 5호......,10호 한테서는 아직도 연락이 없나?"

"없다. 체포된 게 분명해."

"체포됐다면 우리도 위험하지 않은가?"

"그 여자는 그렇게 쉽게 불지 않아. 보기보다는 아주 강한

여자야. 연락이 끊긴 지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더구나 10호는

임신중이잖아."

"그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말라니까. 10호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여자는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어. 내가 자기를 구해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야. 내가 구해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어떻게 구하겠다는 거야?"

전화를 걸어온 자의 목소리는 몹시 긴장되어 있었다. 반면

전화를 받은 자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영어회화는 매우 딱딱하고 어설프게 들렸다. 그것은 동양인의

목소리 같았다.

"작전에 성공하기만 하면 10호를 구하는 건 문제도 아니야."

"아니, 작전을 그대로 수행하겠다는 건가?"

"물론이지. 10호가 체포됐다고 해서 해바라기를 취소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우리는 예정대로 28일에 회의장소를 덮치는

거야. 그리고 인질을 잡고 협상을 벌이는 거야. 인질을 잡으면

10호를 구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인질을 살리려면 10호를

풀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야."

"우리 셋이서 어떻게 그 넓은 회의장을 커버하겠다는 거야?

인원이 너무 부족해."

"인원이 부족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어.

본부에서는 그대로 결행하라는 거야. 우리 잘못으로 우리는 대원

세 명을 잃었어. 두 명은 우리 손으로 처치했고 한 명은

체포됐어. 그대로 돌아가면 우리는 책임을 면할 수 없어.

우리한테 어떤 벌이 가해질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야.

그리고 5호 너는 우리가 해바라기를 포기한다해도 무사히 여기를

빠져나갈 수 없어. 너는 노엘 화이트의 살해범으로 현재

지명수배되어 있기 때문에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건 네

자신이 더 잘 알 거야. 네가 한국을 빠져나가려면 해바라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수 밖에 없어. 인질을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무사히 한국을 빠져나갈 수 있어. 소기의 성과도 이룰수

있고 말이야."

5호는 잠시 침묵했다. 동양인의 목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새로 해바라기를 짜야하니까 이리로 와줘야겠어."

"난 지금 지명수배되어 있기 때문에 움직이기가 어려워.

더구나 이 시간에 움직이면 주목을 받기 쉬워."

"그렇다고 우리가 거기까지 갈수는 없잖아. 여기가 그래도

안전한니까 이리로 와줘."

"날이 새면 첫차로 올라가겠어. 지금은 차도 없어. 거기

위치를 알려줘."

"강남구 S동 Y아파트 15동 816호...... 택시를 타고 주소를

알려주면 안내해줄 거야."

"오후 1시까지 도착하지 않든가 아무 연락이 없으면 나한테도

불행한 일이 일어난 줄 알라구."

"알았어. 1시까지 기다렸다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를

떠나겠어."

"가만! 난 거기에 가지 않겠어!"

"왜 그래?"

"아무래도 거긴 위험해. 10호가 밤새에 자백할지도 모르잖아.

너희들도 위험하니까 빨리 거기를 떠나는 게 좋을 거야. 10호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 여자는 무쇠가 아니야."

"그럼 어디서 만나지?"

"난 서울 지리를 잘 몰라."

"그럼 이렇게 해. 택시를 타고 중앙박물관에 가자고 해.

중앙박물관에 들어가면 대리석으로 된 메인홀이 있어. 거기서

만나 시간은 12시에서 1시 사이...... 메인 홀이야."

"좋아. 1시까지 기다렸다가 오지 않으면 가라구. 출발하기

전에 다시 한번 연락하고 싶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지?"

"다시 연락하기는 어려울 거야. 우리도 곧 여기를 떠나야

하니까. 혹시 모르니까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봐."

"알았어."

전화가 끊어지는 것과 동시에 병호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파트 창문을 열어놓고 무전기로 왕형사를 불렀다.

"지금 바로 놈들을 체포해! 주민들 깨어나지 않게 조용히

해치워! 놈들은 곧 거기를 떠난다고 했어. 기다리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한 명씩 체포하는 게 좋을 거야. 10분 정도

기다려보다가 안 나오면 들어가 봐. 놈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조심해."

그러나 조용히 그들을 체포하는 것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병호로부터 지시를 받은 두꺼비는 15동 816호 문앞에

대기했다. 엘리베이터는 정지시켜 놓았고, 계단에는 M16을 든

경찰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두꺼비는 문 왼쪽에, 그리고

전투복 차림의 특공요원 한 명은 문 오른쪽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두꺼비는 권총을 빼들고 있었다. 특공요원이

들고 있는 M16의 총구는 문쪽으로 향해 있었다. 문은 오른쪽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거의 10분 동안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숨막히는 긴장감과 정적이 10분쯤 계속되더니 이윽고

816호의 문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왕형사는

특공요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침침한 불빛 아래 특공요원의 두

눈이 맹수처럼 빛났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조금씩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드러냈다. 거의 동시에 특공요원은 들고

있는 총으로 상대방의 가슴을 찔렀다. 사쓰마 겐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총소리가 고막을 찢을듯이 주위를 울렸다. 특공요원은

총을 떨어뜨리면서 뒤로 벌렁 나가떨어졌다. 사쓰마 겐지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열린 문을 미처 닫지는 못했다.

왕형사는 특공요원의 복부에서 분출하고 있는 검붉은 피를

보았다.

"계획대로 됐어."

안으로 들어온 사쓰마 겐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한 놈 쏴버렸어. 문앞에까지 와서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지."

회색 눈의 사나이는 아무 대꾸 없이 집안의 불을 끈 다음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티스 박사가 대기하고 있는 호텔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세 발의 총성이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던 아파트 단지를

뒤흔들었다. 새벽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주민들은 놀라서 뛰쳐

일어났다. 특히 15동 주민들의 놀라움은 아주 컸다.

병호가 15동에 도착했을 때 특공요원 한 명이 등에 업혀 막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특공요원은 이미 죽었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떨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총에 맞았습니다."

병호는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그는 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가 7층까지 올라갔을 때 8층으로 통하는 계단에

특공요원들이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테러에 대비해서

특별히 훈련된 정예요원들이었다.

"한 놈이 나오다가 쐈습니다!"

왕형사가 816호 문 옆에 선채로 병호를 향해 말했다.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았나?"

"네, 안에 모두 있습니다."

병호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열린 출입구를 향해 영어로 말했다.

"우리는 한국 경찰이다! 너희들은 완전 포위됐다!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에도 아래에도 모두 철통같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도망칠래야 도망칠 수가 없다! 도망치려는 자는 사살당할

것이다! 해바라기 10호도 이미 체포됐다! 우리는 너희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도 다 알고 있다! 세계 은행가 총회는

무사히 치러질 것이다! 5분 내로 자수하라! 무기를 버리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밖으로 한 명씩 나와라! 자수하지 않는 자는

사살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출입구 쪽으로 총알이 비오듯이

날아왔다. 경찰도 출입구를 향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마티스 박사는 총소리를 들으며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신호가 떨어지자 그는'해바라기 9호......'속삭였다.

"베니스의 비둘기......"

여자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그녀는 그 시간에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계획대로 됐습니다. 총소리가 들리죠?"

"들려요. 포위됐나 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좀 오래 버텨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어떻게 할까요?"

"박사님은 거기에 그대로 계세요. 연락을 드리겠어요."

"기다리겠소."

전화를 걸고 난 그는 창문을 닫고 나서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816호 안으로는 계속 최루탄이 날아들고 있었다. 집안은 금방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다. 특공요원들은 가스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일본인과 영국인은 최루탄 연기를 피해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문을 닫아 걸고 나서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들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하나는 그들의 행동이 위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목적은 경찰의 관심을 그들에게

묶어둠으로써 다른 대원들이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질긴 놈들인데요."

왕형사가 계단 아래 쪽에 서 있는 병호에게 말했다.

"방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면 최루탄도 소용없습니다."

특공대 지휘관이 말했다.

"들어보십시오. 기침 소리도 안 들립니다. 방안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 요원들을 투입시키겠습니다."

"좀 더 기다려봅시다."

병호는 한 사람이라도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공요원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한 명 희생됐기 때문에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병호가 염려하는 것은 특공요원들이 범인들을

모두 사살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아파트에는 방이 모두 두 개 있습니다. 줄을 타고 내려

가서 방안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으면 어떨까요?"

병호의 제의에 지휘관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옥상에 대기하고 있던 특공요원들은 즉시 행동에 들어갔다.

로프를 이용해서 건물벽을 기어내려가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기관단총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두 명의 요원이 건물의 앞과 뒷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아파트는 15층 높이였기에 7층 높이를

내려가야만 했다. 앞벽으로 먼저 내려간 요원이 안방을 향해

먼저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총소리 때문에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는 정확히 방안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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