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自 白
전화에 이상이 있다고 보고받은 병호는 생각 끝에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곳에 있는 형사들 가운에는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잇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기다려. 벨이 울리더라도 내가 갈
때까지 받지 말고 기다려."
두꺼비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그는 오다 기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전화를 걸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무도 없는데
당신이 왜 정각마다 전화를 걸었지요? 혹시 그 전화 다른
곳에서도 받을 수 있게 장치해 놓은 게 아닌가요? 전화벨이 울린
뒤 조금 있다가 우리 수사관이 수화기를 들었더니 영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대요. 혼선으로 들리는 수도
있지만 혼선치고는 너무도 뚜렷이 들렸대요."
오다 기미는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전화가 만일 브로치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제3의 장소를
찾아낼 수가 있어요. 거기에는 분명히 일당이 숨어 있겠지.
그렇지 않은가요?"
오다 기미가 천천히 얼굴을 쳐들었다. 그녀는 적의에 찬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그곳에다 연락을 취하고 싶겠지. 위험하다고 말이오."
병호의 말에 이어 마스오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까 자백해요."
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면서 다시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병호가 밖으로 나와 막 차에 오르려는데 형사 한 명이
뛰어왔다.
"오다 기미가 입을 열었답니다!"
병호와 왕형사는 되짚어 올라갔다.
일본 아가씨는 마스오 부장 앞에서 울고 있었다.
"이 아가씨, 아무래도 오경감님한테만 마음이 있는지 경감님이
있어야만 입을 열겠다고 합니다."
마스오 부장이 볼멘 소리로 말했다.
기미양은 병호한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그가 돌아오자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병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눈물을 보였다는 것은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이제 자백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거운 몸으로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다는 것은 아기한테도
좋지 않습니다. 빨리 끝내도록 합시다."
그녀는 젖은 눈으로 병호를 쳐다보았다.
"담배 한대 주세요."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담배는 안 됩니다. 아기한테 해롭습니다."
병호는 진심으로 말했다. 순간적으로 감동의 물결이 그녀의
얼굴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뒤이어 당황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녀는 병호의 진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 얼른
판단이 서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더 이상
담배를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전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아기만은 살리고 싶어요.
살려서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요."
모성의 본능이 그녀의 얼굴에 진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일본 형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기를 살려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려면 당신도
살아야지요."
"말씀드리겠어요. 제가 알고 있는 한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병호는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그녀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저를 한국으로 망명하게 해주세요.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것은 꽤 충격적인 제의였기 때문에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마스오 부장이었다.
"흥, 이젠 조국까지 버릴 모양이군. 당신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해."
"난 일본이 싫어요! 일본에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그녀의 태도가 워낙 완강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스오 부장이 다시 말하려는
것을 제지하고 병호는 입을 열었다.
"한국으로 망명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심사에 충분히 통과될
수 있는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망명자들을
환영하고 있고, 망명자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만큼 치안
상태가 완벽합니다."
"망명할 경우 저는 처벌받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당신은 일본에서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아무
범법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경우 그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만일 당신이 모든 것을
자백함으로써 수사에 협조해 준다면 나는 당신이 형사 처벌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아마 당신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한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점은 내가 보장합니다."
"이 아가씨의 망명을 받아줘서는 안 됩니다!"
마스오 부장이 화난 얼굴로 소리치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병호는 마스오를 쏘아보았다.
"망명은 이 아가씨의 자유입니다. 당신이 막을 권한은
없습니다."
양국의 수사관들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쇼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병호는 시계를 들여다본 다음
기미양을 다시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보기에는
오늘이 고비인 것 같군요."
그 말에 오다 기미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담배에 손을 가져갔다가 도로 거두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까 하신 말씀은 맞아요. 그 전화는 제3의 장소와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제2의 은신처와 제3의 은신처에서 벨이
울리다가 끊어지는 것은 제3의 은신처에서 전화를 받기 때문일
거예요. 제3의 은신처는 마지막 은신처예요. 제2의 장소가
위험해질 경우에 대비해서 그곳을 얻어두었던 거예요."
"그곳은 어딥니까?"
"제2의 은신처와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어요 Y아파트 15동
816호예요."
"거기에 지금 일당이 숨어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래요."
"거기에 몇 명이 있나요?"
"두 사람이 있어요. 한 사람은 일본 남자이고 다른 한 명은
영국 남자예요."
"그들의 이름을 말해봐."
마스오 부장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름은 몰라요.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이름을 몰라요. 알려고
해도 안 되고요."
병호는 세 장의 사진과 두 장의 몽타지를 꺼내놓았다. 세 장의
사진은 사쓰마 겐지, 귄터 율무, 오노 다모쓰 등 세 명의
사진이었다. 몽타지는 아직 사진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의
것으로 토머스 러트와 프레드릭 마주르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율무와 오노의 사진은 수사관들이 망원렌즈를 사용하여
H호텔에서 돌아다니는 그들을 몰래 찍은 것들이었다. 그동안
병호는 그 사진들과 몽타지를 기미양에게 몇 번 보였지만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잡아떼었었다.
"이 사람이에요."
기미는 처음으로 사쓰마 겐지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그러자 마스오 부장이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다.
"사쓰마 겐지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단 말이야? 하세카와의
애인이 하세카와가 존경해 마지 않는 사쓰마 겐지라는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돼?"
그러나 기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침착하게 마스오를
바라보았다.
"이름은 모르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흥, 거짓말 작작해!"
마스오가 코웃음쳤다.
"믿지 않아도 좋아요. 당신한테 믿어달라고 하지는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이번에는 몽타지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프레드릭 마주르의 몽타지였다.
"음, 프레드릭 마주르군. 이 사람이 틀림없어요?"
"네, 비슷하게 생겼어요."
"일당은 모두 몇 명이지요?"
"정확한 숫자는 저도 잘 몰라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은 제3의
장소에 있는 그 두 남자뿐이에요. 저는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작전 암호명은 뭐죠?"
"해바라기예요."
"해바라기는 무엇을 노리는 작전인가요?"
병호는 그녀의 입에서 비행기 납치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작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내일 모레......그러니까 28일에 열리는 세계금융가회의를
노린 작전이에요. 그 회의장을 습격해서 세계 거물급 금융가들을
살해하는 게 목적이에요. 그리고 일부는 인질로 잡아 탈출하기로
했는데 구체적인 작전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저한테는
자세한 걸 알려주지 않았어요."
모두가 경악하는 표정이 되었다. 병호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것을 알고 적이 당황했다. 그는 왕형사를 가까이 오게 하여
귓속말로 지시를 내렸다.
"빨리 제3의 장소에 가봐. 완전 포위하고 대기하고 있어."
두꺼비가 형사들을 데리고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 병호는
혼란해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한동안 일어서서 실내를
왔다갔다 했다.
세계금융가회의가 7월 28일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노엘 화이트가 살해당한, 지금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H호텔에서 열린다. H호텔 정문 위에는
세계금융가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알리는 대형 간판이 걸려
있었고, 만국기도 펄럭이고 있었다. 그 회의를 쑥밭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 테러리스트들이 들어왔다는 말인가? 그녀의 말이
맞다면 그 회의장은 피로 물든 학살의 현장이 될 뻔했다. 이번
회의에는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거물급 금융가들은 물론 각국의
경제관계 각료들도 대거 참석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테러리스트들이 이번 회의를 노린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효과면에서 볼 때 이번처럼 좋은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뮌헨 올림픽 현장에도 침투하여
선수들을 사살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모든 것이 어쩐지 너무나 쉽게 밝혀진다는 느낌을 그는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정말 그들은 그 회의장을 노리고 한국에
들어온 것일까? 이 일본 아가씨는 지금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다시 기미 앞으로 다가서서 율무와 오노의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람들을 알고 있나요?"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본 적도 없어요."
"일당이 몇 명인지도 모르고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제3의 장소에 있는 두 사람뿐이니 이 사람들이 일당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네, 몰라요. 바로 제 옆에 있어도 모르게 되어 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 모르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철저히 점조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체포되더라도 다른 동지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뿔뿔이 흩어져서 움직이고 있다 이 말이군요?"
"네, 그래요."
병호는 토머스 러트의 몽타지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병호는 낭패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이자의 이름은 토머스 러트......물론 가짜 이름이지요.
이자는 당신들 조직의 일원을 호텔 방에서 사살하고 도주한
혐의로 현재 수배되어 있는 자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는 아무 것도
몰라요. 저는 그저 지시대로 움직이고만 있었으니까요."
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조직으로 되어 있다면 그럴만도 하겠지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