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2화 (32/45)

32. 수상한 전화

가짜 여대생 이순이는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오노

다모쓰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오고 있었다. 밤 늦게까지 그녀를

못살게 굴더니 마침내 깊이 곯아 떨어진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30분쯤 더

기다렸다가 가만히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스탠드의 갓은 희미한 붉은

색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가만히 서서 일본

남자를 바라보다가 서둘러 옷을 입었다. 전화기는 침대 곁에

놓여 있는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쪽으로

접근할 듯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았다. 경찰은 정보를 알려올 때

눈치채지 않게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었다.

그녀는 마침내 방 열쇠를 집어들고 가만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복도는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비로소 진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경찰의 지시대로 착실히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적이 놀랐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어길 생각은

조금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층 로비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 그 앞에는

금발의 한 외국인과 한국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젊은 여인들이

서 있었다. 외국인은 꽤 취한 듯이 보였고 한 여인을 끌어안고

있었다. 순이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 그들이 대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순이의 뒤에서 문이 소리없이

닫혔다.

로비는 한산해 보였다. 그녀는 여유있게 공중전화기 쪽으로

다가갈 수가 있었다.

"오병호 반장님 아니면 왕형사님 좀 부탁해요.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귀뚜라미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신호가 떨어졌을 때 그녀는 재빠른 어조로 자신있게 말할 수가

있었다. 귀뚜라미는 경찰이 지어준 그녀의 암호였다.

"오병호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무척

포근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오병호라는 사람은 어쩐지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안녕하세요? 귀뚜라미예요."

"아, 귀뚜라미......"

"시간이 없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어요. 그 일본 사람 말이

오늘 저녁때쯤 떠날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한 달쯤 후에 돌아올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 달 후쯤 돌아온다는 것은 거짓말

같아요."

"몇 시 무슨 비행기로 떠나지? 어디로 떠난다고 했지?"

"도꾜로 갈 거라고 했어요. 몇 시 무슨 비행기로 떠날지는

아직 모른다고 했어요. 예약이 밀려서 아직 확실한 건 알 수

없다고 했어요. 나중에 시간을 알려주겠다고 했어요."

"고마워요. 수고 많았어요. 그런데 몇 시에 무슨 비행기로

떠나는지 그걸 좀 알아봐요. 그걸 꼭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니까."

"네, 알았어요.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보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어요. 이 전화도 그 사람 잠든 사이에 겨우 빠져 나와

거는 거예요."

그렇게 말해놓고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수고 많았어요. 아주 조심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돼요.

위험하니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귀뚜라미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순이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놓고 병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정보를 토대로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우선 아직까지 오노 다모쓰한테서 어떤 혐의점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었다. 그 점은 귄터 율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율무를 맡고 있는 유화시와 황무자로부터는 아직

아무 연락도 오지 않고 있었다. 그쪽에서 정보가 들어오면

양쪽의 정보를 분석검토해서 어떤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 취항하고 있는 항공사는 모두 몇 개지?"

"대한항공까지 합치면 현재 17개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습니다."

왕형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는 만물박사로 통하고 있었다.

그만큼 다방면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것이 많았다. 그는

재빨리 병호 앞에 자료를 갖다놓았다. 그것은 각 항공사의

이름과 항로, 출발 및 도착시간, 운임 등이 기록된 자료였다.

병호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태풍이 지나갔기 때문에 각 항공사는 운항을 재개하고 있었다.

범인들이 만일 태풍때문에 그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면 운항이

재개되자마자 한국을 빠져나가려고 서두를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병호는 생각했다. 놈들은 어느 항공사의 비행기를

노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몇 시에 출발하는 비행기일까?

그는 몸을 일으켜 실내를 왔다갔다 하다가 왕형사를 쳐다보고

지시를 내렸다.

"운항이 재개된 전항공사의 승객예약 상황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체크해 봐. 그리고 예약자들 가운데서 수배자 이름을

찾아봐."

"오노와 율무의 것도 찾아봐야죠?"

"그야 물론이지."

병호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는

옆방으로 건너갔다.

오다 기미는 그때까지 한국 형사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병호는 그녀를 재울 수가 없었다. 그녀를 재워도 좋을 만큼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을 안

재우는 것 외에 소리를 지른다든가 위협적인 말을 한다든가 하는

정도로 그녀의 입을 열게 하려고 형사들은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는 생긴 것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강인한

의지력으로 자신을 버텨내고 있었다. 남자 같았으면 벌써

손찌검이라도 해서 입을 열게 했을 것이지만 그녀는 연약한

여자인데다 놀랍게도 임신중이었다.

그녀가 임신중이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의사의 진찰을

통해서였다. 피의자를 신문하기 전에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혈압을 잰다든가 하는 등 기본적인 항목에 대해

건강진단을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한데다 음식 냄새에 입덧을 하는 것 같아 급히

진찰을 해본 결과 임신 4개월이라는 진단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입을 열기 위해 그녀에게 가혹 행위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를 신문하는데는 한국팀보다도 일본팀이 더 적극적이었다.

마스오 부장은 잠 한숨 자지 않고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면서 그녀를 위협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해보았지만

그녀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병호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엇이

연약하게 생긴 젊은 아가씨를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로보트처럼 만들었을까. 그녀의 신념은 무엇일까. 그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그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봐요. 그 아기가 행복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당신이 정상적인 생활을 해야 해요.

아가씨한테는 그 아기를 행복하게 키워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

아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큰 죄악이에요. 그 어떤 사상이나

가치도 뱃속의 아기보다는 더 중요하지 않아요. 엄마라면 아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해요. 아가씨는 지금 아기한테

죄를 짓고 있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기는 모두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이지요.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십시오.

과연 어떤 보석이 그처럼 영롱하게 빛나겠어요."

그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혼란이 스쳐가는 것을 병호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시 굳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어떠한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제3의 은신처에 남아 있는 사나이들은 경찰에 체포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현재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약속대로 러트는 7월26일이 되기 전인 25일 자정에 첫번째

전화를 걸어왔다. 그 전화는 제2의 은신처와 같은 회선이었기

때문에 전화를 걸면 양쪽에서 동시에 전화벨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러트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경찰을 제3의 은신처로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러트와 통화를 끝내고 나서 한

시간이 지났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경찰이 제2의 은신처에서 전화를 도청하여 그들이 숨어 있는

제3의 은신처의 위치를 알아냈을 것으로 보고 체포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방문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의 방문이 있으면 다른 곳에 대기하고 있는 마티스 박사에게

연락, 그는 즉각 부산에 있는 토머스 러트에게 상황을

보고하도록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티스 박사는 Y아파트 단지가 마주보이는 호텔에 투숙해

있었다. 그는 아파트 단지 쪽으로 향해 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만일 경찰이 제3의 은신처에 나타나면 세 발의

총성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총소리는 들리지 않고

있었다. 시계는 7월 26일 1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부산에 대기하고 있는 베니스의 비둘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5호의 전화를 다시 한번

요청합니다. 이번에는 30분 간격으로 걸어주십시오."

"알았어요."

제2의 은신처인 Y아파트 5동 909호에는 4명의 형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25일 자정에 걸려왔던 전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넘겼다. 오반장이 받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전화는 세 번 울리다가 도중에 끊어졌었다. 보통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한참 동안 울리다가 도중에 끊어지게 마련인데 그 전화는

겨우 세 번 울리다가 끊어졌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형사들은

손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 전화가

걸려오면 받아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본부에 있는 병호에게

물어보았다. 병호는 펄쩍 뛰면서 절대 안 된다고 다시 엄명을

내렸다.

두번째로 전화벨이 울린 것은 1시 15분경이었다. 이번에는

다섯 번 울리다가 벨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리지

않았다.

"다섯 번 울리다가 전화벨이 끊어졌습니다."

형사는 본부에 보고했다. 병호는 계속 지키라고만 말했다.

형사들은 투덜거렸다. 그곳에 죽치고 있어봐야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 오반장은 전화도 받지말고 자리만 지키고

있으라고 한다. 젊은 형사들이 몸이 근질근질해서 투덜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세번째 전화벨이 울린 것은 1시 45분경이었다. 그때에도 다섯

번 울리다가 끊어졌다. 전화가 끊어진 지 2분쯤 지나 성미급한

형사 한 명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어로 대화하는 말소리가 뚜렷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전화는 끊어졌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놀란 눈으로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이 전화 아무래도 이상해."

그는 영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누가 이 전화를 다른 데서 받는 것 같아. 영어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너무도 뚜렷이 들렸어. 이 전화 혹시

브로치되어 있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어? 아마 혼선이겠지."

나이 든 형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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