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1화 (31/45)

31. 이상한 관계

시간은 이미 7월 26일로 접어들어 있었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화시는 플로어 위에서 서로 달라붙어 떨어질줄 모르고 있는

두 사람을 질투의 감정을 품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업무다.

저 외국인은 비행기를 납치하려는 테러리스트들과 한패일지도

모른다. 황무자는 그들 조직에 침투하기 위해 저러고 있는 거다.

그녀는 고역을 참고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화시는

질투의 감정이 꿈틀거리는 것을 끝내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여자의 본능일지도 몰랐다.

병호가 넌지시 작전에 참가해줄 것을 요청해 왔을 때 황무자는

놀랍게도 적극적으로 나와주었다. 그녀는 그런 일이라면

자기야말로 적임자라고 하면서 발벗고 나서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풀렸던 것이다. 만일 그녀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거나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였다면

병호는 그녀를 굳이 이번 작전에 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화시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영역을 침범당하고 자기의

능력을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병호의 말은

위험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튼

그녀는 서운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거기다 황무자는

율무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녀가 보는 앞에서 농도 짙은

연기를 거침없이 해내고 있어 그녀로 하여금 질투까지

느끼게하고 있다.

율무 쪽에서는 새로 등장한 도발적인 여인에게 정신이

팔릴만도 했다. 그는 굶주릴대로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굶주린 정욕을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든 사람은 다름아닌

유화시였다. 그녀는 번번이 그를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달아오르게 만들어 놓고 끝에 가서는 교묘하게 몸을 빼내는

것이어서 그때마다 그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고 바짝바짝

피가 마르곤 했다. 그녀가 교묘하게 몸을 빼내면서 하는 말은

아주 그럴 듯했다. 남녀가 오랫동안 애정을 유지하려면 가능한

한 육체관계를 갖지 말아야 하며, 한국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에는 결코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한테 몸을

허락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는

몸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와

결혼할 뜻이 있음을 암시했다.

율무는 당장 그녀를 정복하기는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결혼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만난 지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점잖게

그의 프로포즈를 거절했다. 그는 발끈해서 말하기를 사랑을

느끼는 것은 순간적이기 때문에 만난 지 하루만에도 결혼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단둘이 교회에 가서 목사 앞에 서서

결혼서약을 하고 선물만 주고받으면 결혼식이 끝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는 서양식의 간단한 결혼식을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혼 제의는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화시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그녀를 정복한 다음에는

한국을 떠나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가 한곳에 정착해서

가정을 꾸릴만한 입장이라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만도 했다.

그녀는 그만큼 멋지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정을 가질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화시는 그의 프로포즈를 점잖게 거절하면서도 결혼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다.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의 부모님들도 만나보고 싶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말을 부연했다. 그

말은 곧 그와 함께 그의 나라에 가보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덧붙여 말하기를 거기에 드는 비용은 그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자기가 해결하겠노라고 했다. 그와 함께 가고 싶다는 말에

그는 처음에는 펄쩍 뛰었으나 나중에는 생각이 달라져 슬그머니

후퇴했다.

그가 그녀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유화시를 차라리

한국으로부터 데리고 나가는 것이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따라나서겠다는 것은 그에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일단 한국만 빠져나가면 강제로라도 그녀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실컷

데리고 논 다음 차버리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조직의

소모품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일단 유보해둔 상태에서 느닷없이 그녀로부터 그녀의 친구를

소개받았던 것이다.

새로 소개받은 그녀의 친구는 몸짓이나 표정부터가 화시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도발적이고 유혹적이었으며 당장에라도

그와 육체를 불태울 것 같은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율무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체에 굶주린 그는 당장 눈앞에 굴러들어온 낯선

여성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는 도덕주의자도

아니었고, 오히려 화시가 보는 앞에서 황을 넘봄으로써 야릇한

기분까지 느끼고 있었다. 화시를 당장 차지하지 못할 바에야

황이라도 건드려야겠다고 그는 어느 새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화시한테 당하기만한데 대한 분풀이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묵살한 채 새 여인과 놀아남으로써 그녀의

질투심을 부채질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번 시도해 볼만한 일일 것 같았다.

화시를 겨냥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녀의 친구 역시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화시가 신선한 매력을 지닌

아가씨라면 그녀의 친구는 완숙한 매력, 이를테면 잠자리에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은 열정을 지닌 매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에 와서 그가 가장 분명히 발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 여성들이 서구 여성들과는 다른 분위기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 매력의 한

부분이나마 맛보고 싶었다.

"언제 떠나세요?"

황무자가 안타까운 나머지 뜨거운 한숨을 내쉬면서 영어로

물었다. 그녀의 영어회화 실력은 제법 상당한 수준이었다.

남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밀착된 그들의 육체는 이제 참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 있었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들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일......아니, 이제 26일이니까 오늘 저녁때쯤 떠나요."

"그렇게 빨리?"

그녀의 젖무덤이 부풀어올랐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욱 바싹

죄었다. 그녀의 하체가 밀려왔다. 그도 하체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감미로운 음악이 그들을 비단결처럼 감싸 흐르고

있었다.

"가야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사랑해요."

그녀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그의

눈 밑에서 떨고 있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만나자마자 사랑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주고받는 그들의 말을

누가 옆에서 들었다면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비록 위선이라해도 매우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여기서 나가요. 다른 데 가서 키스해 줘요."

"내 방으로 갈까?"

"네, 좋아요."

"저 친구는 어떡하지? 떼어버릴 수 없을까?"

그가 골치 아픈 존재라는 듯이 화시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한번 이야기해 볼께요."

땀에 젖은 모습으로 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우선 맥주부터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늘 저녁때 떠날 예정이래요. 정확한 시간은 아직 물어보지

못했어요."

황이 화시의 구에다 대고 속삭였다. 속마음과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던 화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다시 미소를 띄었다.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한대요. 자기 호텔 방으로 가기로

했어요."

화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일어나고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당하면 어떻게 할려구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어요. 난 그런 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요. 그 정도 각오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예요."

화시는 그녀의 말에 놀라고 감동했다.

"정말 용감하군요."

"경찰이 나한테 기대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니겠어요? 나는

창녀와 같은 여자니까요."

"아니예요! 그건 아니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분의 뜻은

그게 아니예요!"

화시의 완강한 부인에 그녀는 코웃음쳤다.

"오병호씨가 물론 노골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그분의 눈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어요. 그런 말은

집어치워요.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알겠어요. 이 외국인 매력적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런 느낌은 들어요. 단 악마가 아닐 때 말이에요.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조심하세요."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난 노련하니까요."

율무는 두 여인이 한국말로 속삭이는 모습을 잔뜩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남자와 난 호텔 방으로 갈 거니까 우리 여기서 헤어지기로

해요."

"안 돼요. 그건 안 돼요."

무자는 의아한 눈으로 화시를 쳐다보았다.

"어떡 하겠다는 거예요? 만일 방해할 생각이라면 난 여기서

당장 그만둘 거예요."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요."

"이 사람하고 발가벗고 사랑 게임을 할 텐데 그 자리에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아니겠죠?"

"아뇨. 함께 있고 싶어요."

화시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그룹섹스를 하자는 거예요?"

화시는 얼굴이 붉어졌다.

"분위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아니예요."

"그럼 뭐지? 섹스까지 감시하겠다는 건가?"

황무자의 입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낯간지러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아니예요. 그건 아니예요. 아무래도 함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저는 상관하지 말고 마음대로 행동하세요."

이번에는 무자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담배를

몇 모금 빨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오히려 재미있어 할 거예요. 하지만 난 여자예요.

아무리 내가 막돼먹은 여자라고 하지만 여자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어떻게 그짓을 하겠어요. 명령이라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짐승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두 여인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쳤다. 화시는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무자도 화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죄송해요. 제가 말을 잘못했어요. 전 빠질 테니까 두분이

가보세요."

그러자 무자가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생각을

바꾼 듯했다.

"함께 가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함께 가는 게 좋겠어요."

"안 돼요. 싫어요."

화시가 다시 무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결심이

선 듯했다.

"나를 생각해줄 필요는 없어요. 난 당신한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내가 경찰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아까는 내가 내 분수를 모르고 그런 말을

했어요.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미 여자가 아니예요. 치마만

둘렀다 뿐이지......"

"왜 그렇게 자학적인 말씀을 하세요? 그러지 말아요."

"자학적이라니, 천만에 말씀......자, 우리 함께 가기로 해요.

이 친구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이제 그만 입씨름하고

일어서기로 해요."

황무자가 율무에게 그들의 사랑 게임을 화시가 보고싶어

한다고 말하자 율무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이내 환호성을

질렀다.

"그거 정말 멋진 일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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