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0화 (30/45)

30. 움직이는 그림자들

해바라기 10호로부터 걸려오기로 되어 있는 전화는 20시에

걸려온 것을 마지막으로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걸려오지 않고

있었다. 매시 정각에 걸려오기로 되어 있는 그것은 21시에도,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난 22시에도 걸려오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도 전화연락이 없으면 이쪽에서 호텔로 전화를 걸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고수머리의 대장은 전화통을 바라보았다. 그 전화는 Y아파트

5동 909호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숨어 있었다. 그곳은

제3의 장소였다. 5동 909호로부터 3백 미터 쯤의 거리에 있는

그곳은 15동 816호였다. 3백 미터 거리 이내에서는 양쪽에서

하나의 전화를 서로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따로

전화를 설치하지 않고 하수라의 집 전화에다 연결해서

사용하기로 한 것은 시간이 없는데다 경찰의 접근을 조금이라도

지체시켰다가 그쪽으로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909호에는 경찰이 와 있는지도 몰라요. 그 전화를

사용하면 경찰이 당장 이곳으로 달려올걸요."

일본인이 말했다.

"일단 공중전화로 1호와 통화하고 나서 이 전화를

사용해야겠군."

하인리히 분케의 말에 모두가 굳게 입을 다문 채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기만 했다. 모두가 걱정스런 표정들을 짓고

있었고, 하나같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고수머리 사나이는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Y아파트 단지에는 다행히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검정색 운동모를 눌러쓴 그는 주목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밤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지가 않았다. 비도 바람도 그쳐 있었다. 구름이 걷히면서 그

사이로 별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공중전화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비어 있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를 걸어야 할 데는 네군데나 되었다. 그는 먼저 K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교환이 나오자 영어로 1918호실을

바꿔달라고 말했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가는데도 1918호실은

반응이 없었다.

"1918호실, 전화 받지 않습니다."

교환 아가씨가 영어로 말했다.

고수머리 사나이는 전화를 끊은 다음 이번에는 B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B호텔 505호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세번째로 전화를 건 곳은 Y아파트 5동

909호와 15동 816호였다. 585-479×번에 전화를 걸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전화기의 벨이 동시에 울리게 되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신호는 떨어지지가 않았다. 만일 5동 909호에

경찰이 잠복해 있다해도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산의 은신처로 전화를 걸었다.

부산 S동 H비치 아파트로 건 전화는 금방 신호가 떨어졌다.

"해바라기 2호......"

"베니스의 비둘기......"

그리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10호한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고 있어요.

8시에 마지막으로 걸려오고 그 다음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어요.

양쪽 호텔에서도 전화를 받지 않아요."

"지금 이건 공중전화인가요?"

"네, 그래요."

"제2의 은신처는 상태가 어때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어요. 10호가 자백을 했다면 이미

경찰이 점령하고 있을 겁니다."

"그쪽은 날씨가 어때요?"

"태풍은 완전히 가라앉았어요. 날씨도 걷히고 있어요."

그는 백 원짜리 동전을 집어넣었다.

"오늘밤부터 국제선 비행기의 운항이 재개되고 있어요.

탑승관계를 알아봤는데 지금 예약이 밀려서 우리는 내일

오후에나 타게될 것 같아요. 자세한 것은 내일 아침에

알려주기로 했어요. 아무튼 내일 오후에 한국을 출발하는 걸로

알고 계획을 짜야할 거예요."

"김포에서 탑승할 겁니까?"

"아니예요. 여기 김해공항에서 탈 거예요. 그러니까 대장은

빨리 부산으로 내려와야 해요. 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이쪽으로 와요. 밤 열차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어요."

"알겠습니다. 다른 대원들은 계획대로 경찰에 잡히게 할

건가요?"

"물론 그렇게 해야 해요. 12시 정각에 이쪽에서 러트가

그쪽으로 전화를 걸 테니까 받으라고 해요. 경찰을 유인하는

전화니까 잘 알아서 통화시간을 끌도록 해봐요."

제3의 은신처로 돌아온 분케는 대원들에게 통화내용을

이야기하고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다음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가 택시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25분경이었다. 잠시 후 그는 11시 40분에 출발하는 부산행

무궁화호 침대칸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 시간에 가짜 여대생 순이는 오노 다모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오노는 깡마른 몸을 지니고 있었지만 운동으로 단련이

됐는지 온몸이 근육질로 덮여 있었고 힘이 좋아 그와 성관계를

가지고 난 뒤에는 순이는 언제나 녹초가 되어 한동안 몽롱한

상태 속에서 누워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도 그녀는 그와

같은 상태 속에서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오노라는 남자는 결코 한번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근육은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다시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이윽고 그가 몸을 돌려 그녀의 배 위로

올라오려고 하는 것을 그녀가 막았다.

"아이, 좀 쉬게 내버려둬요."

"오늘밤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순이는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내일 떠날 거야."

"왜 갑자기 떠나시는 거예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두 눈이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래. 하지만 곧 다시 올 거야."

그녀는 손을 뻗어 스탠드의 불을 켠 다음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몽실몽실하게

솟아오른 젖가슴 사이에도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불을 켰다.

"아파트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

"아, 그건 지금 당장은 어렵지. 아파트를 사려면 돌아갔다가

다시 올 때 돈을 가져와야지. 곧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그도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에는 시커먼 털이 나 있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녀가 잔뜩 볼멘 소리로 말했다.

"나를 의심하나?"

"모르겠어요."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여자한테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아."

매섭게 생긴 두 눈 끝에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언제 오실 거예요?"

"한 달 내로 오겠어. 그때 아주 멋진 아파트를 구해줄께."

"기다리겠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남자의 품 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남자의 몸 위로 올라갔다.

"내일 도꾜로 가시는 거예요?"

"음......"

"몇시 비행기로 가세요?"

"예약이 밀려서 몇 시 비행기가 될지 아직 알 수 없어. 아마

저녁때쯤 떠나게 될 거야."

"시간을 알려줘요. 공항에 나가서 떠나시는 거 보고 싶어요."

"그럴 필요 없어."

"싫어요!"

그녀가 그의 몸 위에서 앙탈하자 일본인은 마지못해 내일

시간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거의 같은 시간.

귄터 율무 앞에는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플로어 위에서는 젖꼭지와 국부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금발의

외국 여인이 음악에 맞춰 온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이태원에 있는 외국인 전용 클럽에 앉아 있었다.

"제 친구예요. 미스 황이라고 해요."

유화시가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을 율무에게 소개했다. 황이라고

소개받은 여인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율무는 그

손을 잡아흔들다가 손등에 가만히 입술을 갖다댔다. 그가

손등에서 입을 떼고 얼굴을 쳐들었을 때 그의 푸른 두 눈은 어느

새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황이라는 여인은 도발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위에는 어깨가

모두 드러나고 가슴이 깊게 팬 검정색의 셔츠만을 입고 있었고

아랫도리는 초미니의 회색 스커트로 가려져 있었다.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는지 셔츠 위로는 굵은 젖꼭지가 그대로 불거져

있었고 스커트는 하체의 풍만한 볼륨을 감당하지 못해

금방이라도 찢어질듯 팽팽했다. 전체적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것들이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옷을 벗어버리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얼굴의

화장도 진했고, 남자를 쳐다보는 눈도 요염해 보였다.

그녀는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의 주범인 황무자였다. 그녀가

그곳에 여형사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의 돌연한 변신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

놀랐을 것이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의 그녀의 모습과 지금의 도발적인

모습과는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달라보였다. 체포되었을 때의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강파르고

사나왔으며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성으로

하여금 흥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애욕에 굶주린 나머지

오로지 섹스만을 추구하는 도발적이고 매력적인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피워물면서 오른쪽 다리를 쳐들어 왼쪽 다리

위에 척 걸쳐놓자 허연 허벅지는 물론 엉덩이께가 훤히

드러났다. 두 허벅지 사이로 빨간색의 팬티조각이 아슬아슬하게

보이고 있었다.

독일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쏘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보고 유화시는 앞으로 전개될 사태에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일에 황무자를 투입시킨 것은 전적으로 오병호의

아이디어였다. 오병호는 그녀가 수류탄을 다룰 줄 안다는 점,

그리고 그녀의 담대함을 높이 사 그녀를 전격적으로 이번 일에

투입시켰던 것이다. 거기에는 유화시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배려도 숨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강도살인범으로 체포된 그녀를 체포 하루만에 풀어내 다른

사건에 투입시켜 이용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강도살인 혐의를 확실히 벗었다면 몰라도 아직

그렇지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다이어먼드 살인사건 전담반은

병호의 이야기를 듣고는 펄쩍 뛰었었다.

그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일뿐 아니라 만일 비밀리에

그런 짓을 했다가 들통이라도 나고 그녀가 도망이라도 쳐버리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느냐는 것이 그들이 제일 우려한 점이었다.

그것은 엄연히 범법행위였다.

생각 끝에 병호는 보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황무자가 진범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아직 없지만

조만간에 그것을 책임지고 확보할 것이라는 것, 이번 사건에

그녀를 아주 중요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만일

그로 인해 부작용이 일어나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이 질 것이라는 것 등을 간곡히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는 보스는 의외로 순순히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병호는 보스를 달리 보게 되었다.

유화시는 독일 남자의 관심이 황에게 쏠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조금은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업무라고 생각하자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