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비어 있는 아파트
Y아파트 5동 건물은 경찰병력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경찰은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게끔 그곳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탄을 장전한 총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범인들이 총격을 가해올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8시가 지난 시각이었기 때문에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모두 집안에 들어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총격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경찰이 미리 모두
대피시켜 놓았던 것이다.
5동에는 따로 그곳만을 지키는 경비원이 없었다. Y아파트단지
입구와 후문 쪽에만 형식적으로 경비원이 있을 뿐이었다. 처음
단지가 생겼을 때는 동마다 경비원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관리비를 절약하기 위해 각동의 경비원들을 없애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경비는 절약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각 가구의 동태를
관찰할 수 있는 체계가 와해되고 말았다.
한 예로 각동에 경비원이 있었다면 경찰은 5동 909호실에 대해
사전에 좀더 자세한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비원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집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909호는 910호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로
이웃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집 사이에 엘리베이터 문이
있었고 계단이 있었다.
왕형사는 909호에 들어가기 전에 910호를 방문했다. 젊은
부인이 그를 맞았는데 그녀는 909호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서너 달 전에 어떤 아가씨가 그곳에
이사왔다는 것, 그리고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끔씩 찾아와
며칠씩 묵다가 간다는 것, 그 아가씨는 오후에만 외출하는 것이
아무래도 술집에 나가는 것 같다는 정도였다.
"혹시 다른 외국인들은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어요."
"지금 그 아가씨 집에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서로 왕래가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알아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동안 서로 눈인사도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통해
909호의 동태를 알아본다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일본인을 마지막 본 게 언제였나요?"
"어제 오후에도 봤어요.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밖을
내다봤는데, 그 아가씨하고 일본 남자가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 뒤로는 보지 못했어요."
왕형사는 여러 장의 사진을 꺼내 그녀에게 보였다. 그것은
사쓰마 겐지의 여러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그의 여러 가지
변장한 모습을 찍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진에 나타난 모습들은
서로 달라보였다.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던 910호의 주인은 그
가운데서 머리를 짧게 기르고 콧수염을 단 얼굴 사진을
가리켰다.
"바로 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가끔씩 드나드는
일본인이에요!"
910호를 나온 왕형사는 909호 앞으로 다가서서 철문에 귀를
대고 집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초인종을 눌렀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거칠게 눌러댔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열쇠 전문가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왕형사는
문 손잡이를 비틀어보다가 열쇠 전문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열쇠 전문가는 5분도 못 돼 자물쇠를 열었다. 경찰관들은
일제히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왕형사도 권총을 빼들었다.
그는 재빨리 문을 열어 젖히면서 벽에 몸을 가렸다.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집안의 어둠 속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왕형사는 한참 동안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다가 벽에서 가만히 몸을 드러냈다. 그리고 현관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비어 있는
집안이라는 느낌이 피부에 와닿았다.
집안은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두꺼비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도
안심하고 뒤따라 들어왔다.
이윽고 그들은 집안의 전등불들을 모두 켜놓고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여러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남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양주병과 술잔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재떨이 속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들어 있었다. 담배꽁초들을
검사해보니 하나같이 양담배였다. 술잔은 모두 네개였다. 네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안방에 더블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흐트러진 그 위에는 베개 두개가 아무렇게나 뒹굴어
있었다. 그 아파트는 방이 세 개 있었다. 제일 작은 방에는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었다. 또 하나의 방에는 요 두 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도 베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네 개의 베개는
네 개의 술잔이 말해주듯 그곳에 네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일당은 모두 네 명이라고 두꺼비는 생각했다. 그때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제일 작은 방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왕형사는 그쪽으로 달려가보았다.
"여길 보십시오!"
형사 한 명이 벽에 붙어 있는 옷장을 가리키며 흥분해서
말했다. 옷장문은 열려 있었다. 두꺼비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주춤해서 뒤로 물러섰다. 벌거벗은 여자가 한 명 옷장벽에
고개를 꺾은 채 앉아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목에는 넥타이가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다.
"옷에 덮여져 있어서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옷을
드러내니까......"
강력계에 배치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형사가 흥분한 나머지
제대로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형사들은 시체를 옷장에서 드러내 방바닥에 눕혔다. 반듯이
눕혀놓고 싶었지만 시체가 경직되어 있어 새우처럼 웅크린
자세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죽은 그녀가 아파트 주인인 하수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웃집 여인에게
시체를 확인해줄 것을 부탁하자 그녀는 넌더리를 치면서 한사코
그 청을 거절했다. 하긴 부녀자에게 시체를 보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귀가한 그녀의 남편이 사정을 알고
자기가 시체를 한번 보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도 909호
아가씨의 얼굴을 그동안 몇 번 보았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마침 반장을 맡고 있는 뚱뚱한 중년
부인도 함께 시체를 확인해 보겠다고 나서주었다.
경찰의 안내를 받아 909호로 들어와 시체를 살핀 그들은
피살자가 909호 아가씨가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그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마침 그녀의 주민등록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신원은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가 있었다. 주민등록증에 적힌
그녀의 본명은 하수라가 아닌 하춘자였다.
오병호는 직접 오다 기미를 심문하고 있다가 왕형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모두 체포했나?"
"한발 늦었습니다. 빈 집이었습니다. 일당은 네 명인 것
같습니다. 탁자 위에 술잔이 네 개 놓여 있었고 베개도 네 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옷장 속에서 하수라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뭐라고?"
"발가벗은 상태에서 넥타이로 목이 졸려 있었습니다. 질식사인
것 같습니다."
"죽은 지 오래 됐나?"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는 않고 하루쯤 된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병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거기서 사라진 놈들은 세 명이겠지. 하수라가 죽었으니까
말이야."
"하수라의 주민등록증에는 본명이 하춘자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왜 여자를 죽였을까요?"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죽였겠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나쁜 놈들 같으니!"
"그 여자에 대해서 더좀 알아봐야겠습니다. 어느 술집에
나갔는지 그 술집을 찾아내야겠습니다."
"그런데까지 손을 쓸 여유가 없어. 태풍은 완전히 잤어.
급하단 말이야. 그런 건 다른 사람한테 맡겨."
"알겠습니다. 오다 기미는 입을 열었습니까?"
병호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일본 아가씨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병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한국에까지 와서 말썽을 부리는 거지? 말썽을 부리고
싶으면 일본에서 할 것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거지? 패션
관계 일로 한국에 왔다는 건 위장에 불과해. 우리는 모든 걸
알고온 거야. 그러니까 쓸데 없이 고집부리지 말고 서로를 위해
시간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나가자구."
마스오 부장이 이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국 경찰은 거칠어. 여긴 일본이 아니야. 나한테 모든 걸
털어놓으면 내가 중간에서 잘 이야기해 주겠어."
"그렇다면 나를 지금 당장 내보내주라고 요구하세요. 나는
지금 아무 범법행위를 하지도 않았는데 부당하게 체포되어 갇혀
있어요. 같은 일본 국민으로서 나를 좀 도와주세요."
"사쓰마 겐지가 숨어 있는 곳을 대주면 석방을 건의할 수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거야."
"이 나라에는 법도 없나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이 있지요."
하고 병호가 말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큰 두 눈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오다 기미는 이 한국인은 왜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당신이 매시 정각에 전화를 걸었던 그 은신처에서 조금 전에
시체가 발견됐어요. 젊은 여자 시체가 말이오. 한국
아가씨였어요. 그 아가씨는 사쓰마 겐지와 동거생활을 한
여자였어요. 발가벗기운 채 넥타이로 목졸려 죽었어요. 집안에는
시체만 있었어요. 모두 이미 도망치고 없었어요. 당신들은
동거생활하던 여자까지 죽일 정도로 그렇게 잔인합니까?"
오다 기미는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나쁜 놈들......"
옆에서 마스오 부장이 분노에 차서 중얼거렸다.
"당신들은 지금까지 다섯 명을 죽였어요. 앞으로 몇 명을 더
죽일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일거라고
생각해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작전이 개시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일 게 틀림없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병호가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그녀도 영어로 대꾸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병호의 두 눈이 더욱 슬픈 빛을 띠었다.
"오다 기미씨, 제발 부탁입니다. 빨리 사실대로 말해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 전에 말입니다.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는 걸 당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겁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뭔가 오해하시는 거 아닌가요?"
"오해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조사를 했고......
면밀히 검토한 결과 당신이 속해 있는 조직이 비행기를 납치하기
위해 한국에 잠입해 온 것을 알아냈습니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당신의 동지들은 하나같이 비행기 납치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정말 한국 경찰관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만화 같은
이야기를 꾸며내어 그것을 사실로 잘도 꿰어맞추니 말이에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싸움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순순이 입을 열지 않으면 비상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자한테 고통을 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도 고려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감이지만 하는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야만인이군요."
"우리가 야만인이라면 당신들은 살인자들입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죄없는 외국인을 이렇게 불법감금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 고문까지 가한다면 우리 일본 정부가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일본 정부는 이렇게 가만 있습니다."
병호는 일본인 수사관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스오를
비롯한 수사관들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