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체포
B호텔에 도착한 해바라기 10호는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아들고
곧장 505호실로 올라갔다.
그 호텔은 강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선 그녀는
질펀하게 흐르고 있는 흙탕물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물은 무서운 기세로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한꺼번에 휩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한 손을 내려 다시 가만히 아랫배를 만져보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그것을
될수록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도무지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사쓰마 선생님한테 알려야 하느냐, 아니면 숨겨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다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 사실을
그분에게 알릴 때가 아니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
기회를 봐서 이야기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 10분 전이었다. 전화를 걸어야할 시간이었다. 이 호텔은
지금쯤 포위되어 있을까?
이윽고 그녀는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호텔이었기 때문에 좁은 로비에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고, 그래서 호텔 안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로비 한쪽
구석에 공중전화가 한 대 설치되어 있었다. K호텔에서 보았던
젊은 여자와 남자가 로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연인들처럼 웃고 있었다.
두꺼비처럼 생긴 사람이 공중전화통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 뒤에 가만히 다가섰다. 그녀는 그가 지껄이고 있는
한국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실례......"
뒤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다는 듯 그는 자기가 너무
오래 전화통에 매달려 있었음을 사과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전화통 앞으로 다가서면서 곁눈질로 뒤를 흘끗
쳐다보았다. 두꺼비는 가지 않고 동전을 딸랑거리면서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집으려다 말고 그에게 걸 데가
있으면 마저 전화를 걸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아, 아닙니다. 어서 거십시오. 난 천천히 걸어도 됩니다.
통화가 길기 때문에 먼저 거십시오."
"아니예요. 먼저 거세요."
그녀는 일본말로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영어로 바꾸어 말하자 그래도 모르겠다는 듯
머리와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는 아주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수화기를 집어들고 구멍 안에 동전을
집어넣은 다음 다이얼을 눌렀다. 통화중임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전화를 양보하기 위해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때 두꺼비처럼 생긴 사내도 막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로비를 가로질러 코피숍 쪽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프런트
데스크 뒤쪽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7시 3분. 다시
동전을 집어넣고 다이얼을 눌렀다. 전화벨이 울리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신호가 떨어지자 그녀는 영어로 자신의 암호를 댔다.
상대방도 암호를 말했다.
"B호텔에 와 있어요. 아직 아무 일 없어요."
"그들은?"
"확실해요.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실수 없도록 잘 해요. 모든 게 10호한테 달려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녀가 전화를 걸고 있는 동안 왕형사는 오병호가 기다리고
있는 호텔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전화번호를 알아냈습니다!"
두꺼비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지?"
"그녀가 다이얼 번호를 누르는 것을 뒤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는 머리 속에 외어둔 번호를 수첩에다 재빨리 적어넣었다.
그는 슬쩍 지나치는 숫자 같은 것을 외는데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빨리 주소를 알아봐!"
병호도 흥분해서 말했다.
두꺼비가 알아낸 전화번호는 585-479×번이었다. 그는 해당
전화국에 전화를 걸어 그 전화번호의 주소를 알아보았다. 경찰이
주소를 알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전화국에서는 그 요청을
신속하게 알려주었다.
"강남구 S동 135번지 Y아파트 5동 909호입니다."
두꺼비는 전화국 직원이 불러주는 주소를 적은 다음 전화를
끊었다.
"본부에 전화를 걸어."
병호의 지시에 두꺼비는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수사본부가 나오자 병호는 수화기를 받아들고 명령을 내렸다.
"강남구 S동 135번지 Y아파트 5동 909호를 완전포위하고
별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 눈치채지 않게 포위해! 관할서에
전화를 걸어 지원을 부탁해!"
그곳이 범인들의 은신처라고 단정지을 만한 증거는 아직
없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두꺼비가 암기한
전화번호가 맞는 한.
해바라기 10호는 방안에서 'W의 비극'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책의 내용이 도무지 머리 속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고 읽으려고 해도 생각은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존재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들이 경찰임은 이제 분명한 사실로 밝혀졌다.
두꺼비같이 생긴 그 남자의 연기는 아주 그럴 듯하다. 그런데
그들은 쉽게 달려들지 않고 있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인다. 차임벨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7시 36분. 바람은 많이 자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Y아파트로 달려간 왕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7시
45분경이었다.
"주인이 누군지 알아봤어?"
"네, 알아봤습니다. 하수라라는 아가씨가 주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웃집 사람들의 말로는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 같다고
합니다. 가끔 일본인 남자가 들락거리는 것 말고는 다른
외국인들의 출입은 보지 못했답니다."
"그 일본인 남자는 요즘도 들락거렸나?"
"네, 어젯밤에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수라라는
아가씨가 그 일본인의 현지처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집안에는 사람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 안에서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할까요?"
"무조건 체포해. 개별적으로 체포해서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어."
"알겠습니다. 집안에는 언제쯤 들어갈까요?"
"기다려. 내가 갈 때까지."
7시 55분.
해바라기 10호는 505호실을 나왔다. 전화를 건 다음 K호텔로
갈 생각이었다. 그녀는 아래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 있는
골중전화에는 여자가 한 명 붙어 있었다. 10호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밖에도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중전화는 부스
안에 놓여져 있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은신처로 전화를
걸었다. 이쪽의 암호를 먼저 말하자
"예루살렘......"
상대방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것은 사쓰마 겐지의
목소리였다.
"아, 선생님......"
"어때요?"
전혀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별일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통화하고 싶었어요."
"잘할 수 있겠지?"
"네, 문제 없어요."
"그들은 지금도 있나?"
"그런 것 같아요. 그들이 행동을 개시할 것 같아요."
"정신을 차리고 잘 해야해. K호텔로 가봐."
"일이 끝나면 우리 어디로 여행......"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부스에서 나와 주차해 있는 택시에 올랐다.
태풍은 이제 완전히 지나간 것 같았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있었고 바람도 약하게 불고 있었다. 병호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비행기가 뜬다는 것은 그것이 납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까지 미행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 여자가 택시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체포해!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방에서 나온 그는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리고 대기한 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두 대의 차가 10호가 탄 택시를 미행하고 있었다. 병호가
탄 차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맨 앞에서 미행하던 차는 무전연락을 받고 속력을 내어 택시
옆으로 접근했다. 라이트를 깜박이면서 택시 옆을 지나친
미행차는 갑자기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서면서 속력을 줄였다.
중년의 택시 운전사는 화를 내면서 클랙션을 울려댔다. 그는
왼쪽 차선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쪽은 다른 차에 막혀
있었다. 그 차에 앉아 있는 남자가 운전사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차를 길 옆에다 대시오! 빨리!"
앞차가 정지해 있었기 때문에 택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그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택시를 차도 한쪽으로 몰아붙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던 여자
승객이 택시가 멈춰서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미친 듯
도망치지 않는가!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승용차에서
뛰쳐나온 남자들이 그녀를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얼마
가지 못해 잡히는 것을 보고 그때까지 얼빠진 모습으로 서 있던
운전사는 한 사내를 붙들고 항의조로 물었다.
"도대체 뭡니까?"
"경찰이오."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운전사는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갔다.
두 명의 우악스럽게 생긴 남자들이 그녀의 팔을 양쪽에서
움켜잡고 끌고오더니 승용차 속으로 짐짝처럼 밀어넣었다.
차에 탄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하는라고 모두 차를 세워놓는
바람에 차도는 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 속에 끼여 병호도
차속에 앉아 오다 기미가 강제로 차에 실리는 것을 마치
구경꾼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수사본부에 도착한 병호가 오다 기미에게 일본말로 처음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당신의 동지들이 숨어 있는 은신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점잖은 물음에 물론 대답이 제대로 돌아올 리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난 일본이에요. 무슨 이유로
나를 체포한 거예요?"
그녀는 오히려 사납게 되물었다.
병호는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왕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쪽은 끝났어. 그쪽을 해결해. 은신처에 있는 자들을 모두
체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