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22화 (22/45)

22. 女子의 마음

아직 어두워질 시간이 아닌데도 하늘은 캄캄해지고 있었다.

비는 폭우로 변하고 있었다. 바람에 창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듯 덜컹거리고 있었다. 번갯불에 어두운 하늘이

순간적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천둥 소리에 낡은

건물이 무너질듯 흔들렸다.

병호는 걱정스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여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상 위에는 맥주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거의가 빈 것들이었다. 그녀가 계속 목이 탄다고 하면서 맥주를

사달라고 했기 때문에 맥주캔이 자꾸만 늘어나게 된 것이었다.

병맥주를 사는 게 싸게 먹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그녀가 병을 깨서 자해 행위라도 할까봐 캔맥주만 사오게 했다.

병호는 그녀와 똑같이 맥주를 마셨다. 그들은 경쟁이나 하듯

서로의 표정을 살피면서 맥주를 마셔댔기 때문에 서로가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병호가 피의자를 심문하면서 그렇게 술을 마시기는

처음이었다. 별로 묻지도 않고 마주앉아 술만 마셔대자 참다

못해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뭘 알고 싶으세요?"

"별로 알고 싶은 것도 없어."

그는 입속으로 땅콩을 던져넣었다.

"거짓말 말아요!"

그녀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정말이야."

그는 별로 동요하는 빛도 없이 말했다.

"여기에 앉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거든. 난 싫은데 말이야.

그리고 난 다른 일때문에 바빠요. 당신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난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요. 솔직히 말해 난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수 년 전 그는 그녀를 체포한 적이 있었다. 치기배 조직을

검거했을 때 그녀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러고 나서 2년쯤 지나 그는 다른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어 온 그녀를 사무실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병호 쪽이었다. '여전하시군요,

오형사님.'하고 그녀가 조롱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날 것이지.'하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 세번째 만난 것이다.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가 두번째로 만났을

때 당신이 한 말을 난 결코 잊을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차라리 남자로 태어날 것이지 한 말 말인가?"

"잊지 않으셨군요. 그 말이 그렇게 모욕적으로 들릴 수가

없었어요. 그때 받은 상처를 언젠가 되돌려주리라 마음먹고

있었어요."

술기때문인지 그녀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성냥불을 드윽 켜더니 보라는 듯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병호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효과가 있었나 보군. 그때 그런 말을 한 건 당신을 보는 순간

너무 화가 나기도 했었고, 그래서 모욕을 주려고 그랬던 거지.

모욕을 느꼈었다니 다행이군."

그녀는 들고 있던 캔을 책상 위에 탁 놓고 발딱 일어섰다.

격한 감정으로 해서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고 몸까지 떨리고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은 이글거리는 두 눈 뿐인

것 같았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다가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불안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밖으로

뛰어내릴 수 있을 것이다. 3층이기 때문에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자살을 기도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비바람 때문에 닫아두었던 창문을 그녀가 드르륵 열었다.

그리고 상체를 기울여 아래를 내다본다. 그녀는 살인 강도범으로

체포되었다. 더구나 전과가 있는 만큼 이번에 교도소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살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그녀는 여전히 창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와 얼굴은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녀가 갑자기 몸을 돌려 말했다. 그는 그녀 쪽으로 가만히

다가갔다.

"제가 여기서 뛰어내리기를 바랐죠?"

그는 잠자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왜 그대로 내버려뒀죠?"

"당신이 뛰어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반쯤 덮고 있는 젖은 머리칼을

한쪽으로 쓸어주었다. 처음 그녀는 멈칫했다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정말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으세요?"

"한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

그는 창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의 두 눈을

들여다보듯이 하고 물었다.

"정말로 그 노파를 죽였나?"

"그런 노파는 죽어도 싸요."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코르니코프 같은 말을 하는군."

"그래요. 그런 할망구는 죽어도 싸요. 하지만 난......"

그녀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뭐지?"

"난 그 할망구를 죽이지 않았어요. 제 말을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아요."

"난 사실을 알고 싶어."

병호는 그녀의 한쪽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녀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대지 말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처럼 거세지가 않았다.

"살인범이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고 처음부터 자백하지는

않겠지.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뜻이 아니예요. 난 정말 죽이지 않았어요."

"그럼 누가 죽였지?"

"몰라요."

"모르다니? 당신이 모르면 누가 알지?"

실내는 어느 새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그녀의 옆모습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었다. 얼굴이

마른 탓인지 옆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믿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노파는 이미 죽어 있었어요. 넥타이로 목이 졸린 채

죽어 있었어요. 그리고 금고문도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는

보석함도 비어 있었어요. 다이어먼드는 물론 보이지도 않았어요.

노파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어요. 결국 우리가 죄를

덮어쓰게 된 거죠."

병호는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아?"

"통하지 않겠죠. 하지만 사실이 그런걸요."

그녀는 홱 몸을 돌려 그를 쏘아보았다.

"제가 오형사님을 부른 건...... 오형사님만은 제 말을 믿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제 말을 못 믿으시겠어요?"

"글쎄......"

그녀가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가 다시

창가로 돌아와 섰다.

"나는 함정에 빠진 거예요. 우리가 그 집에 갈 거라는 걸

누군가 알고 먼저 선수를 친 거예요. 그리고 우리한테 죄를

뒤집어씌운 거예요. 우리 사이에 배신자가 있었던 게 틀림

없어요."

병호가 손뼉을 쳤다.

"그러고보니까 이상한 점이 있었어. 노파가 살해되고 내가

수사를 시작했을 때 나한테 어떤 여자가 전화를 걸어왔었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전화를 걸어왔는데...... 노파를 죽인

사람이 황무자 일당일 거라는 거였어. 그건 아주 귀중한

정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을 추적하게 된 거지. 그리고

그 집 가정부한테 당신 사진을 보였더니 당신이 범인이라고

증언했어. 당신은 틀림없는 살인범으로 확인된 거야. 당신, 그

가정부의 증언을 뒤엎을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요?"

"없어요. 그 가정부는 외출했다 들어오다가 우리와 마주쳤던

거예요. 우리는 할 수 없이 그 가정부를 묶어놓고 나왔어요.

그러니 우리를 범인으로 볼 수밖에 없었겠죠."

"진범이 잡히지 않는 한 당신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든가

아니면 사형을 당하겠군."

"그럴 수는 없어요! 절대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는 갑자기 흥분해서 머리를 흔들었다.

"내 손으로 진범을 잡고 말 거예요?"

"어떻게? 당신은 이제 꼼짝할 수 없게 됐는데."

"억울해요. 그동안 난 진범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경찰이

그걸 방해했어요. 나를 이렇게 붙잡아놓고 진범을 못 잡게 하고

있어요."

"당신이 진범이니까."

"난 아니예요! 아니란 말이에요!"

마치 사나운 짐승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병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양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녀는

몸부림치면서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더니 마침내 그녀가

비틀거리면서 병호의 품에 몸을 내맡겼다. 그와 함께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비통한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울음 속에는 깊은 한이 맺혀 있는 듯했다. 그녀의 몸의

떨림이 고스란히 그의 몸 속으로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실컷 울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울음을 그칠

때쯤해서

"진범이 따로 있다면......내가 그 진범을 찾아보지."

하고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거두고 호소하는 듯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장은 안 돼. 난 지금 몹시 바쁘거든. 아주 큰

사건에 매달려 있어요. 대참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건이지.

자, 이리 와서 앉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책상 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순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다소곳이

앉아서 그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범이 잡히면 당신은 가택침입죄에 해당하는 처벌만

받겠지."

"고마워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실내는 상대방의 표정을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병호는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올렸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교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태풍때문에

정전이라고 했다. 조금 있자 사환 아이가 양초를 들고왔다.

양초에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책상 위에 고정시켜 놓자

연분홍색의 찢어진 상의에 가려진 그녀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보였다.

"당신......수류탄에 대해 좀 알고 있나?"

"네,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번도

사용해본 적은 없어요."

"수류탄 껍질은 어디서 났지?"

"얻은 거예요."

"누구한테?"

"우리 조직원 중에 넙치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애한테서 얻은

거예요. 그애 말이 산에서 녹슨 것을 주웠대요. 그걸 하도

만지고 기름으로 닦고해서 반질반질해졌어요."

"처음부터 빈 껍데기였나?"

"아니었나 봐요.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빼내버리고 그렇게 만든

거라고 했어요. 전 거기다가 지폐나 동전 같은 것을 넣고

다녔어요. 그애한테서 수류탄 다루는 법을 배웠어요. 그애는

군대에 있을 때 그걸 배웠다고 했어요."

병호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당신을 수류탄을 들고다니는 무시무시한

여자로 알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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