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가짜 女大生
호텔을 나온 순이는 주차장 쪽으로 급히 뛰어갔다. 가까운
거리인데도 비바람에 금방 옷이 젖어버렸다. 빨간 색의 소형
승용차 안으로 뛰어든 그녀는 가뿐 숨을 몰아쉬고 나서 엔진
키를 돌렸다. 그 차는 석달 전에 큰 마음 먹고 산 것이었다.
물론 일시불로 산 게 아니라 36개월 할부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녀가 운전 면허증을 딴 것은 1년 전이었다. 운전 경력이 짧아
시내에 차를 몰고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대담한 면이 있어 차를 구입하던 날부터 시내로
나와 몰고 다녔다.
이윽고 주차장을 빠져나온 그녀는 차도로 조심스럽게 차를
진입시켰다.
비바람때문에 차들은 속력을 내지 못하고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끝난 성의 유희를 음미하면서 종로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온몸을 불살랐던 쾌락의 뒤끝이 아직도 감미로운
여운으로 몸 속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아주 큰 벌이를 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 바보 같은
일본인한테서 아파트를 하나 사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니,
벌이 치고는 아주 큰 벌이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남은 일은 그
약속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럴려면 그자에게 서비스를 잘해
주어야겠지.
그녀는 오노 다모쓰가 침대 위에서 벌이는 테크닉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는 힘도 좋고 경험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임도 따고 뽕도 딸 수 있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오노 역시
그녀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름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가짜였다. S여대에
다닌다는 것도 물론 거짓말이었다. 일정한 직업도 없지만 굳이
하는 일을 들먹인다면 호텔 주위를 맴돌며 외국인들을 낚는
콜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조직에 묶여 조직적으로
외국인들을 낚는 게 아니라 혼자 아니면 친구들과 어울려 그런
짓을 하는 것이어서 전문적인 콜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임도
따고 뽕도 딴다는 식으로, 같은 값이면 즐기면서 돈도 벌자는
생각에서 그 길로 들어섰던 것인데, 생각보다는 훨씬 반응이
좋아 그녀는 점점 전문적인 콜걸이 되어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앳되고 귀엽게 생겨 전혀 그런 여자 같지가 않았고,
그래서 외국인들이 잘 걸려드는 것 같았다. 오노도 말하자면
그래서 걸려든 외국인이었다.
재작년 대학 입시에 실패한 그녀는 1년 재수 끝에 다시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또 다시 낙방하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얹혀살고 있던 언니 집에서도 나오고 말았다.
시골 고향집에서는 과부인 그녀의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어렵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언니 집을 나온 그녀는
친구가 얻어놓은 자취방에 얹혀 지내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그녀보다 이미 한발 앞서 호텔 쪽에 진출하여 외국인 사냥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순이도 그 친구를 따라 한두 번
호텔에 따라나갔다가 마침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종로를 벗어난 그녀는 B호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거기에
가면 그곳을 무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촉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촉새는 함께 동거하고 있는 친구의 별명이었다. 그녀는
촉새를 만나 한바탕 재잘거리고 싶었다.
20분쯤 지나 B호텔에 도착한 그녀는 커피숍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촉새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외국인 하나 낚아서 지금쯤
호텔 방에서 자지러지게 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 거기에 성냥불을 붙였다.
코피까지 마시고 나서 세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에는
시간이 30분쯤 지나 지루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슬슬 일어서
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웬 남자가 '실례합니다.'하면서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목이 짧고 두꺼비처럼 생긴
30대의 남자였다. 미소를 지으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징그러워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한테는 남자들이 많이 따른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까지
수작을 부리며 달라붙는 남자들 가운데 변변하게 생긴 남자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수작을 부리는 남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 눈앞에 앉아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남자만 해도 꿈에 볼까 두려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두꺼비같이 생긴 남자를 노려보았다.
"실례합니다. 시간을 좀 낼 수 없을까요?"
열이면 열 모두 다 똑같다. 남자들이란 모두 똑같다.
"약속이 있어서 안 돼요."
그녀는 차갑게 내뱉았다. 이래 보여도 나는 한국인들은
상대하지 않아요. 외국인들만 상대한다고요. 난 국제적으로 논단
말이에요.
"바람맞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정말 능글맞은 놈팽이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시간을 좀 내달라는 겁니다."
"시간 없어요."
그녀는 앞에 디밀어진 것을 들여다보았다.
"경찰입니다."
하고 두꺼비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머리칼이 거의 빠진 미국 노인은 시신을 살펴보고 나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들이 틀림없소."
그는 중얼거리면서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러나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FBI요원 마크가 두툼한 손으로 노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자, 나갑시다."
"그놈은 태어나서부터 나를 괴롭혔소. 벌써 죽었어야 하는
놈인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나를 괴롭혔소. 그놈이 죽었다고
해서 내가 슬퍼하는 건 아니요. 도대체 부모와 자식 사이라는 게
뭔데 내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해야 하는지...... 그 놈은 내
자식이 아니오. 내 자식이 아니란 말이오. 어쩌다가 그런
놈이......"
노인은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두꺼비 왕형사는 순이가 내놓은 학생증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위조 신분증을 식별해 내는데 뛰어난 안목을 지닌
그는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방 알아낼 수가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학생증에다 사진만 바꿔치기한 다음 비닐 케이스로
압축한 것이었다.
"아가씨, 정말 S여대생인가?"
"네, 정말이에요."
그녀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두꺼비처럼 생긴 형사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건 가짜야. 지금 나하고 S여대에 가서
확인해 볼까?"
그 말에 그녀는 그만 기가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거짓말하면 안 돼.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 알지? 이것만
가지고도 구속감이야. 몸까지 팔고 다닌 것을 합치면 몇 년은
감옥에서 썩어야 할 걸."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울먹이면서 빌기 시작했다.
두꺼비는 난처한 듯 입맛을 다시다가 이윽고 못 이기는 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 내 부탁을 들어주면 모든 걸 덮어줄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덮어줄 수 없어."
"무슨 일인데요."
그녀는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오노 다모쓰를 계속 만나요. 그리고 그에 관한 것을 빠짐없이
나한테 보고해 줘요.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으면 더욱 좋지만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겠어."
"왜, 왜 그래야 하나요?"
"그건 알 필요 없어. 그 사람이 현재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그래서 아가씨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해줄 수 있겠지?"
두꺼비 형사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어요."
"아가씨 본명이 뭐지?"
"이동자예요."
"음, 좋아."
그는 그녀에게 자동차 면허증을 좀 보자고 말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내놓았는데 거기에는 그녀의 이름이
이동자로 나와 있었다. 자동차 면허증만은 가짜로 만들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거기에 기재되어 있는 인적사항을 모두
수첩에 옮겨 적고 나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또 하나 부탁할 게 있어요."
"뭔데요?"
"오노한테 유화시가 Y여대 학생이 틀림없다고 보고해요."
"그 여자가 누군데요?"
"그건 알 필요 없어요. 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요."
그의 강압적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젊은 형사가 그것을 받더니 병호에게 황급히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다이어먼드 사건입니다!"
병호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전화를 넘겨받았다.
"다이어먼드 주범이 현재 경찰과 대치중에 있습니다! 명동
입구 지하도입니다!"
그것은 그와 함께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을 수사했던 형사의
목소리였다.
"조심해야 할 거야! 자극시키지 말고 어떻게든 설득시키는
쪽으로 나가란 말이야!"
"지금 좀 나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여자를 설득시키려면
아무래도 반장님이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난 지금 바쁜데...... 알았어. 나가지. 그 여자 건드리지
말고 지키고만 있어!"
전화를 끊고난 병호는 급히 점퍼를 집어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은 그가 지금의 사건을 맡기 전에 전력을
기울여 쫓던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주범은 여자였는데 그녀는
청산가리와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H호텔에서 명동 입구까지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명동 입구 지하도는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고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도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서 있었고, 경찰은 그들을 한쪽으로
몰아붙이느라고 애를 먹고 있었다.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들이 총을 든 채 지하도의 양켠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의 거리는 수십 미터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 거리는 텅빈 공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서 웬 여자가 미친 듯 울부짖고 있었다.
경찰관들은 그 여자가 수류탄을 터뜨릴까봐 더 이상 접근하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병호에게 전화를 걸었던 형사가 다가와 그를 지휘자에게
안내했다. 그는 관할 구역의 서장이었다.
"해칠 우려가 있으면 사살할 수밖에 없어요. 상부에서도
허락을 내렸어요."
뚱뚱한 서장이 말했다. 병호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사살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한번 설득시켜 보겠습니다."
병호는 포위망을 뚫고 공간으로 들어섰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가운데 여자의 미친 듯 울부짖는
소리만이 지하도의 벽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황무자(黃茂子)였다. 병호는 그녀를 향해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윽고 그녀의 울부짖는 소리가
뚝 멎었다.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병호를 노려보더니 수류탄을
들고 있는 손을 높이 쳐들며 소리쳤다.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가까이 오면 수류탄을 던질
거야!"
병호는 멈춰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와의 거리는 10미터 정도 될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서너 걸음 더 앞으로 접근했다.
"오지 말란 말이야! 던질 거야!"
그녀는 정말 던질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산발한 머리가
깡마른 얼굴을 덮고 있었고, 머리칼 사이로는 두 개의 큰 눈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연분홍색 블라우스는 찢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흰 속살이 비치고 있었다. 밑에는 청바지 차림이었고
발은 아무 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