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女大生 순이
인천에 있는 A호텔에 다녀온 왕형사는 꽤 흥분해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가져온 정보라는 것이 매우 귀중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러트는 A호텔에 지난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투숙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숙박기록부에 다행히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죽은 노엘 화이트의 기록도 거기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애?"
병호의 입에서 담배가 굴러떨어졌다. 왕형사가 얼른 그것을
집어서 재떨이에 비벼껐다.
"네, 그렇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프레드릭 마주르와 오다
기미도 A호텔에 투숙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오병호는 두 눈을 꿈벅거리며 두꺼비를 쳐다보다가
"귄터 율무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의 기록은 없습니다. 노엘 화이트는 입국하던 날인
7월 14일부터 계속해서 A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그러다가
살해당한 날인 7월 20일 오전에 체크 아웃하고 호텔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토머스 러트의 인상착의는 몽타지와 거의
동일합니다. 몽타지를 보였더니 호텔 직원들은 금방
알아봤습니다."
"프레드릭 마주르와 오다 기미는 얼마 동안 A호텔에 있었지?"
"입국한 날부터 H호텔로 옮기기 전까지 있었습니다."
"4명 모두 독방을 썼나?"
"네, 각자 독방을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천에 있는 A호텔은 그렇게 알려진 호텔이 아니다.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특급수준은 못되고 2류 정도는
되는 낡은 호텔이다. 더구나 외국인들이 투숙하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곳에 피살자와 수배중인 외국인들이
투숙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비록
독방을 쓰면서 서로 모른 체하고 지냈다 해도 공범관계임을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독방을 쓴 것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공범이 다치지 않게 하고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려는 배려에서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토머스 러트, 프레드릭 마주르, 오다 기미, 그리고 사쓰미
겐지가 공범관계라는 것은 분명해진 것 같군."
"네, 확인된 셈입니다."
"오다 기미라는 여자가 추가된 것은 정말 뜻밖이야."
"이제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그걸 빨리 알아내야
합니다."
"태풍이 끝나기 전에 알아내야 할 텐데......"
병호는 창문을 후려치는 비바람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그들이 인천의 A호텔에 투숙했다는 기록을 찾아내는데도
이렇게 오래 걸렸어. 이런 식으로 수사하다가는 코앞에 두고도
못 찾을지 몰라."
"호텔측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 일이 아닌데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리 있겠어. 결국
경찰이 직접 나서서 숙박업소를 뒤질 수밖에 없는데 정식
수사요원이 아닌 이상 일선 경찰서 순경들도 그렇게 열을 내서
찾아다닐 리가 없단 말이야. 전국 경찰에 보다 강력한 수사협조
지시를 내려달라고 부탁해야겠어. 그들이 인천에 묵은 걸로 봐서
서울 아닌 다른 지방 도시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으니까 말이야."
"일당은 모두 4명일까요?"
"4명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 내가 보기에는 더 있을 것 같아."
전화벨이 울리더니 전화를 받은 수사관이 수화기를 병호에게
넘겼다. 그것은 오노 다모쓰를 미행하고 있는 수사관이 걸어온
전화였다.
"오노가 어떤 젊은 여자하고 만나고 있습니다. 여대생 같은
아가씨인데 지금 아래층 라운지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 아가씨를 미행해."
"알겠습니다."
병호는 왕형사와 다른 수사관 한 명을 아래층으로 내려보냈다.
오노 다모쓰와 여대생처럼 보이는 아가씨는 인공 폭포가
보이는 창가에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일본인과 상대하고 있는 아가씨는 앳되게 생긴 얼굴에 가무
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몸집이 자그마하고 귀엽게 생긴
아가씨였다.
오노가 알고 있는 그녀의 신상이라는 것은 그녀의 이름이
이순이라는 것, 그리고 S여대 가정학과에 다니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덧붙일 것이 있다면 섹스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줄
안다는 것, 그리고 돈을 좋아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가 그녀를 알게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호텔 엘리베이터
속에서 알게 되었는데, 그때 엘리베이터 속에는 마침 그들 두
사람만 타고 있었고, 그가 말을 걸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응해왔던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어렵지 않게 그 한국 여대생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한 달 전 한국에 왔을 때에도 그녀와 만나
관계를 가졌었다. 이번에도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그녀부터
찾았는데 그녀는 관계를 가질수록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그녀는
어디서 배웠는지 일본말을 더듬거리며 약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주로 일본말로 이루어졌다. 사흘전 그녀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어느 섬으로 놀러가기로 했다면서 돌아와
연락주겠다고 하고 그와 헤어졌었다.
"재미있었나?"
그녀를 보자 강한 욕망을 느끼면서 오노가 물었다.
"네, 아주 재미있었어요."
순이는 하얀 치열을 드러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탄력있는 조그만 몸뚱이를 생각하자 그는 얼른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율무의 여자보다는 못하지만 이만하면
싫증나지 않고 데리고 놀만한 상대라고 그는 생각했다. 기회가
주어지면 여자들을 서로 바꾸어 상대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호주머니에서 종이조각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영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화시 Y여대 사학과 4학년."
"이게 뭐예요?"
"내 친구 애인인데 부탁받았어. 정말 Y여대에 재학중인지
알아봐줘. 나보고 알아봐 달라고 했어."
"우리 학교라면 몰라도 남의 학교 학생인데 좀 곤란하잖아요."
그녀는 난처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지 말고 꼭 알아봐줘.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잖아."
"왜 그런 걸 알려고 하는 거죠?"
그녀가 쥬스잔을 흔들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아가씨하고 살림을 차릴려나봐. 그럴려면 확실한 걸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 아가씨는 참 좋겠다."
그녀는 비에 젖은 점퍼를 벗었다. 노란 티셔츠 안에서
젖가슴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뭐가 좋다는 거야?"
"살림까지 차려주니까 얼마나 좋겠어요."
"그게 그렇게 좋은가. 내가 살림 차려줄까?"
순이는 웃으며 머리를 흔들다가 슬그머니 말했다.
"난 조그만 아파트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친구하고
자취하고 있는데 혼자 지내고 싶어요."
"그 정도라면 내가 하나 마련해줄 수 있어."
"정말이세요?"
그녀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물었다.
"정말이고 말고."
오노는 점잖게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오노의 손을 꼭 잡았다.
"그거 알아봐줘. 급히 필요해."
"알았어요. 내일까지 알아봐드리겠어요."
라운지를 나온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갔다.
15층을 지키던 객실담당 종업원이 그들이 방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 곧바로 수사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방금 1528호실로 들어갔습니다."
1528호실에서 순이가 일본 남자의 미칠듯한 욕구를 열심히
받아들이고 있을때 수사본부에서는 병호가 미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두 명은 FBI요원들이었고 다른 한
명은 피살된 노엘 화이트의 유족이었다. 미국측 수사관들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큰 거한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작달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엘 화이트의
유족이라는 사람은 마른 얼굴에 머리칼이 거의 빠진 노인이었다.
그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병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노엘 화이트의 부친입니다."
거한인 마크가 노인을 병호에게 소개했다. 노인은 병호와
악수를 나누면서
"내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곧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병호는 미국측 수사관들을 옆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사건 발생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하이재킹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노엘 화이트의 진짜 이름은 빌 시모네입니다. 그의 사진을
보내주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신원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작달만한 수사관인 대니가 말했다. 그는 수트케이스 속에서
타이핑한 자료를 꺼내 그것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의 실제 나이는 서른두 살입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인 검은 9월단과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 내에서 83년 9월 유대인 방어연맹의 실력자 한 명을
납치해서 살해한 혐의로 수배를 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아랍인들, 특히 유학생들과 손을 잡고
조직의 테러활동을 도왔는데, 85년 3월 유대인 은행가 한 명을
대로상에서 살해한 뒤 외국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뒤로는 소식이 끊겼습니다."
병호는 노엘 화이트의 위조여권을 꺼내보였다.
"이것으로 그는 14개월 동안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더군요.
뉴욕을 출발한 것이 85년 4월 15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에 입국한 것이 지난 7월 14일이었습니다."
작달막한 사나이는 위조여권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나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머스 러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까?"
"몽타지만 가지고는 알아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계속
조사중입니다만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빌 시모네와 러트는 같은 조직의
사람들 같았습니다. 화이트, 그러니까 시모네는 7월 14일에
입국했고 러트는 하루 전인 13일에 입국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방 도시인 인천까지 가서 같은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물론
방은 각자 따로 썼지만 말입니다. 러트는 17일까지 그 호텔에
머물다가 18일에 서울로 와서 이 호텔 2049호실에 투숙했습니다.
시모네는 그 호텔에 계속 머물다가 20일 오전에 체크 아웃하고
그 호텔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러트의 방에서
살해당했습니다. 그 방에서 추락했는데 이미 그때는 등에 두
발을 맞은 상태였고 목에도 깊은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그럼 왜 러트가 그를 살해했을까요?"
"시모네가 중요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병호는 노엘 화이트의 유품을 가져오게 했다.
"이 가방이 시모네의 것입니다."
그는 탁자 위에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쏟아놓았다.
"그의 유품은 그가 죽기 전에 우연히 제 손에 들어오게
됐었지요. 그가 모르고 이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을 택시
운전사가 들고와 신고했는데 그 속에 이런 게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체코제 세열수류탄을 찍은 사진을 미국인들에게 보였다.
"실물은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런 걸 잃어 먹었다면 책임을 면하기가 어려웠겠군요. 그가
왜 살해당했는지 이해할만 합니다."
하고 마크가 말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모네를 그런 식으로 해치운 걸 보면 러트 혼자만이 아닌
다른 공범들이 있겠군요?"
대니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일당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4명 이상의 일당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점에 대해서 알아
봤나요?"
마크가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지금 수사중입니다."
병호는 가볍게 응수하고 나서 대니를 돌아보았다.
대니는 시모네의 유품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더니 재크
나이프를 집어들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골든 라이언......"
중얼거리고 난 그는 거기에 있는 글자들을 수첩에 옮겨 적고
나서 가지고온 소형 카메라로 나이프를 여러 장 찍었다.
"우선 시체를 확인해야겠습니다."
그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병호는 형사 두 명에게 그들을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로비를 지키던 왕형사가 병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오노 방에 들어갔던 아가씨가 방금 아래층으로 내려왔습니다.
혼자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그 아가씨를 포섭하는 게 어떨까?"
"한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