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용기
미대사관에서 걸려온 전화 내용은 노드웨스트기편으로 미국
FBI요원 두 명과 노엘 화이트의 유족이 한국에 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도착 시간은 오후 3시경이 될 것이라고
했다. 노엘 화이트의 유족이 오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신원이
밝혀진 것 같았다. 유족은 화이트의 시신을 가져가기 위해 오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병호는 생각했다.
"토머스 러트가 투숙했던 호텔을 찾았답니다!"
왕형사의 말에 병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어느 호텔이래?"
"A호텔이랍니다!"
그것은 러트가 H호텔에 투숙하기 전에 투숙했던 호텔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7월 13일이었고, H호텔에
투숙한 것은 닷새 뒤인 7월 18일이었다. 그러니까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놓고 지금까지
수사요원들이 수사를 해왔던 것인데 마침내 그것이 밝혀진 것
같았다.
"A호텔이 어디 있지?"
"인천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알아내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군."
그동안 수사요원들은 서울의 웬만한 숙박업소는 거의 모두
뒤져보았는데 지금까지 수배 인물들의 흔적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왕형사가 인천에 좀 다녀오지."
"알겠습니다."
"자세히 알아봐. 러트 외에 일당이 함께 묵었을지도 모르니까
자세히 알아봐."
왕형사가 급히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 조금 있자 유화시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하고 있어?"
"목욕 막 끝낸 참이에요."
남자라면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정감 있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지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좀 나와줘."
"머리 말리려면 한 시간쯤 걸릴 텐데요."
"12시 정각까지 나와."
"알았어요."
그녀가 과연 그 독일 남자한테 몸을 허락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화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11시에 장길모에 대해 조사를 나갔던 문형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장길모는 K대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다행히 그와 친하게
지냈던 동창생을 한 사람 만나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 말이
장길모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답니다. 성적도 중간 정도였고
성격도 원만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3년간 군복무까지 마친
뒤 1972년도엔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답니다. 그 뒤로는 그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답니다. 기록에 남을만한 행동 같은 것을
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광산으로 큰 돈을
벌었다가 망한 모양입니다. 원래가 할아버지대에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사는 1979년 3월에 설립됐다가 85년
9월에 문을 닫은 것으로 관계기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사
이름만 등록되어 있었지 별로 실적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잡화를 수출하고 외국상품도 수입하는 소규모 오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12시가 조금 지나 병호는 카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주인 계화가 잔잔한 미소를 보이면서
그를 맞이했다.
실내는 손님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날씨가 이렇게 궂은데 오셨어요?"
계화가 반가움을 감추며 말했다.
"여기서 약속을 했어요."
그는 스탠드에 다가앉아 스카치를 한잔 주문했다.
"요즘 무척 바쁘신가 보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바빠요."
"누구와 만나기로 하셨어요?"
"유순경하고......"
화시에 대해서는 그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화시는 그
카페에 두번인가 다녀간 적이 있었다. 두 번 다 병호를 만나러
왔었는데 그녀에 대한 느낌은 정열적이고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참 예쁘던데요."
계화가 병호의 반응을 떠보려는 듯 말했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경찰 같지가 않아요. 화장이 짙고 옷차림도 화려하고......"
그때 문이 열리고 유화시가 들어섰다. 그녀는 하얀 비옷을
입고 있었다. 비옷을 벗어들더니 스탠드 쪽으로 다가오면서
"바람에 날려가는 줄 알고 혼났어요."
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귀에 매달려 있는 고리 모양의 큰 귀걸이가 그녀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흔들렸다. 그녀는 매니큐어를 칠한 손으로 담배를
집어들더니 거기에다 거침없이 불을 붙인 다음 그것을 빨았다.
"코피 한잔 주세요."
그녀가 거침없이 말하자 계화는 잠자코 커피를 만들기 위해
저쪽으로 갔다. 그녀는 유화시 앞에 주눅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젯밤 별일 없었나요?"
병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화시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띄웠다.
"별일 없을 리가 있겠어요."
당연하다는 듯 하는 말에 병호는 어리둥절했다.
"별일이 있었단 말이야?"
"네, 있었어요."
시원스런 대답에 그는 더 이상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체적으로 물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해 줄 그런
아가씨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녀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바람에 그는 좀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충격을 받아 그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녀의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보였다.
계화가 코피를 가져왔다.
"이 코피 저쪽으로 좀 옮겨주세요. 우리 저쪽으로 옮겨요."
화시가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자 계화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는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색이었지만 병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금방
표정을 부드럽게 하면서 코피잔을 들고 화시를 따라갔다. 병호도
스탠드에서 물러나 자리를 옮겨갔다.
"저 여자 밥맛 없어요."
계화가 코피잔을 놓고 돌아가자 화시가 병호에게 말했다.
"난 밥맛 있어 보이는데......"
병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반장님이 저 여자 좋아하시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저 여자도
반장님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 저런 타입
싫어요. 밥맛 없어요."
주저 없이 말하는 바람에 병호는 난처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이쪽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저쪽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
"흥, 아무려면 어때요."
"어젯밤 있었던 일이나 이야기해 봐요."
화시는 코피를 마시고 나서
"반장님이 마시는 거 저도 한잔 시켜줘요."
하고 말했다.
병호는 계화에게 스카치 한잔을 더 주문했다.
"어젯밤은 악몽이었어요.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었어. 하지만 어쩔 수가 있어야지."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뭔가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그 사람......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아직도
감을 못 잡겠어요."
"어젯밤 뭔가 알아내지 못했나?"
"알아냈으면 제가 벌써 반장님한테 연락을 드렸을 거예요."
계화가 술잔을 가져왔다. 그녀가 술잔을 내려놓고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화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어요. 혼자 견뎌내자니 죽을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어요. 결과는 독일인과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하고 오노하고도 인사를 나누었다는 것
정도지만......"
"오노 다쓰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떻게 알았어?"
"아주 자연스럽게 알게 됐어요. 독일인하고 한참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데 그자가 나타났어요.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오노가 놀라지 않았어?"
"몹시 놀라는 것 같았어요."
"그들이 의심하지 않았을까?"
"의심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어요.
확실히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를 그대로 둔 걸 보면 별로
의심하지 않았나 봐요. 의심했다면 저를 내버려뒀겠어요?"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 인물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화시를 해치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었어요. 그게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불쾌한 사람들이었어요."
"한 가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지.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오노 다모쓰는 르포 라이터로서 베트콩과는 1백
일이라는 르포를 썼는데......월남전 때 그곳에 직접 가서
베트콩 소굴에서 지낸 이야기를 그쪽에 동정적으로 쓴
내용이라는 거야. 좌파 색체가 농후한 르포로, 발표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야. 그 한 편으로 그는 르포 라이터로
자리를 잡게된 모양이야. 마스오한테 오노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했어."
"그렇다면 오노는 공산주의자인가요?"
화시가 얼굴이 굳어지면서 물었다.
"그건 모르겠어. 공산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쪽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인물로 보는 게 좋을 거야."
화시는 어깨를 움츠렸다.
"말씀 듣고 보니까 좀 겁나는데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만두라는 말씀은 안하시는군요."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 뭔가 알아낼
때까지 말이야. 그게 내 솔직한 욕심이야."
화시는 원망스러운 듯 그를 쳐다보다가 술을 입속으로
흘려넣었다.
"제가 어떻게 되는 건 상관하시지 않는군요. 반장님은 너무
잔인하시고 일밖에 모르셔요."
"미안해. 여자한테 위험한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어쩔 수 없잖아. 화시만한
적임자가 없어. 다른 사람을 접근시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시간도 많이 걸려. 우리한테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어. 다행히
태풍이 오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우리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벌써 무슨
일인가 터졌을지도 모르지."
화시는 새 담배에 불을 당겼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겠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뭐가 문제야."
"그 독일인이 제 몸을 요구하고 있어요. 너무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어서 피할 수가 없을 정도예요. 어젯밤에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두번째에는 피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럴 경우 어떻게
해야죠?"
병호는 거기에 대해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젯밤에는 무사히 넘겼다는 말인가. 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노 다모쓰도 저를 쳐다보는 눈이 심상치가 않았어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한 발짝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 뭐가
되는 거죠?"
병호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몸까지
제공해서는 안 된다. 부하에게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반대로 말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보상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화시한테는 아무 보상도 돌아가지 않아."
그녀는 그를 깊은 눈길로 응시하다가 잔에 남은 술을 깨끗이
비웠다.
"꼭 보상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예요."
"알고 있어."
그때 계화가 병호를 불렀다. 그녀의 손에는 수화기가
들려있었다.
왕형사한테서 온 전화였다. 수사본부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본부로 가봐야겠어."
테이블로 돌아와 앉지도 않고 말하자 화시도 따라 일어섰다.
계화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 느끼면서 병호는 카페를 나왔다.
그가 콜롬보차에 오르자 화시도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탔다.
비바람이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차창을 후려치고
있었다. 병호는 조심스럽게 차도로 차를 몰아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용기가 솟아요. 물러나고 싶지가
않아요. 시간이 갈수록 도전해 보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일어요."
병호는 건널목 앞에서 차를 세웠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 능력을 시험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그만두는 게 좋겠어. 상대방이 몸까지 요구할 줄은 몰랐어.
그 정도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든가
아니면 포기하겠어."
윈도브러시가 차창에 쏟아지는 빗물을 쉴새 없이 쓸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