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MAC - 10
통나무처럼 기프스가 되어 있는 다리를 난장이가 망치로
두드리자 그것은 금방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매부리코를 가진
노쇠한 사내는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리며 살살 때리라고
말했다. 부서지고 금이 간 기프스 조각을 걷어내자 비닐 봉지에
싸인 쇠붙이가 나왔다. 그것은 여러 개의 부속품들 같았다. 그
무거운 것들을 기프스로 다리에 붙여 서울까지 운반해온
매부리코의 사나이를 모두가 대견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매부리코는 자유로워진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주물러댔다.
"어떻게나 무거운지 혼났어.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어.
나리따 공항에서는 체크당하는 줄 알았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매부리코는 구석에 세워놓은 목발을 들어
아래 부분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어냈다. 다른 쪽 목발에서도
테이프를 떼어낸 다음 아래쪽을 쥐고 돌리자 그것이 빠져나왔다.
목발의 속은 비어 있었다. 그것을 세우자 안에서 쇠파이프가
굴러떨어졌다.
그것과 함께 톱밥에 섞여 총탄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다른
쪽 목발도 분리되었고, 그 안에서는 더 많은 총탄들이
쏟아져나왔다. 마지막으로 그는 목발에서 손잡이 부분을
떼어냈다. 거기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어내자 흰 테이프에 감긴
네모진 길쭉한 상자 같은 것이 나왔다. 테이프를 떼어내자
그것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놀랍게도
탄창이었다. 다른 쪽 목발의 손잡이도 탄창이었기 때문에 탄창은
모두 해서 두 개나 되었다.
귄터 율무는 그 매력적인 한국 아가씨를 생각하면서 탁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부속품들을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한국인 여대생을 정복하기
직전에 놓아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만 몸살이 난 것이다. 그처럼
피를 마르게 하고 가슴을 태우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때 같았으면 그녀를 때려눕혀서라도 강간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여자들을 그런 식으로
해치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니, 거의가 그런 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와 오랜 시간을 끌면서 데이트하고
사랑을 속삭인다는 것은 그의 취미에 맞지 않았다.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또한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여자와의 사랑놀음에 시간을 끌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만나자마자 여자를 해치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니 자연
강제력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한국 여대생한테만은 강제력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중요한 이유는 현재 작전중인데다 장소 또한 너무도
위험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고함이라도 쳐서 한국
경찰에 체크당하면 작전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대원들의
안전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 겁탈에 성공한다 해도 당한
그녀가 뒤에 말썽을 부리면 문제가 커질지도 모른다. 그런저런
생각들이 그의 충동을 억제했고, 그래서 그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녀를 잔뜩 흥분시켜 그녀로 하여금
자진해서 몸을 열어주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막판에 몰렸을 때 그녀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 채 거의 몸을 열어놓고 있었고,
그는 안으로 밀어넣기만 하면 되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오노가 찾아왔던 것이다. 그자가 그렇게 저주스러운 적이
지금까지 없었다. 죽이고 싶도록 그가 미웠다.
"망할 자식......"
그는 중얼거리면서 부속품들을 하나씩 맞추어갔다.
오노는 그곳에 오지 않았다. 그곳에 모두 모인다는 것은
만일의 경우 모두 몰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분산해서 숨어 있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쇠파이프를 끼웠다. 그것은 짧은
총신이었다. 옆에서 회색 눈의 사나이가 탄창에다 총알을 끼워
넣고 있었다.
부속들이 하나하나 조립되면서 드러난 모습은 기관단총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총알이 채워진 탄창을 받아 몸통의
아래부분에다 철컥하고 끼워넣었다.
그는 총기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는데 뛰어난 솜씨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마음대로 고치는 재주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그것을 집어들더니 그리지아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리지아는 속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속살이 비치는 흰
와이셔츠만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앞 단추를 풀어놓은 채
와이셔츠 자락을 앞으로 해서 배 위에다 묶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풍만한 가슴의 선과 배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율무를 쳐다보았다. 그리지아의 눈빛이
공포로 더욱 거매졌다. 그녀의 젖가슴이 터질듯이 부풀어올랐다.
그녀는 놀란 탓인지 미처 입을 열 생각도 못한 채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무슨 짓이야?"
고수머리의 사나이가 빠른 어조로 근엄하게 말했다. 율무는
씨익 웃으면서 총구를 내렸다.
"이건 우지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값도 쌉니다."
그는 전문가답게 말했다. 우지는 이스라엘제로 기관단총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었다.
"이건 맥10인데 보다시피 총신이 이렇게 짧은 것이 특징이지만
성능은 아주 우수합니다. 미국의 마피아들이 최근 즐겨 사용하는
것인데, 콜트45 피스톨보다 약간 크고 무게는 3.6킬로그램밖에
안 나가요. 한번 들어봐요."
그는 그것을 그리지아에게 던졌다. 그녀가 재빨리 받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하마터면 그녀의 젖가슴에 가서 부딪칠
뻔했다. 그녀는 그것을 움켜쥐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뺨은 모욕감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율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건 반자동으로 나온 걸 자동으로 고친 겁니다. 자동으로
쉽게 고칠 수가 있기 때문에 인기가 좋아요. 자동으로 바꾸면
분당 1천2백 발을 쏘아붙일 수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다
소음기를 달면 옆방에서 나는 재봉틀 소리 정도밖에 소리가 나지
않아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미국에서는 자동권총을 구입하려면
지방 및 연방당국에 등록해야 하고 지문을 찍어야 하고 2백
달러의 세금을 물어야 해요. 거기에 비하면 반자동은 그런
까다로운 조건이 없어 구입하기가 용이해요. 그런 허점이 있기
때문에 갱들은 일단 반자동인 맥10을 구입한 다음 자동으로
바꾸지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그리지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슴을 풀어헤친 모습으로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멋진데요. 무기를 팔려고 포즈를 취한 모델 같은데요."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그리지아는 들고 있던 총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나를 놀리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거기에는 대꾸하지 않고 독일인은 다시 기관단총을
집어들었다.
"매력적인 여자처럼 마음에 쏙 드는 총입니다. 이거 하나만
있으면 비행기 하나쯤 납치하는 건 문제가 아니예요. 수백 명을
꼼짝 못하게 묶어놓을 수가 있어요. 이것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가 보여줄 때가 있겠지."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리지아가 말했다. 그녀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난장이가 재빨리 성냥불을 붙였다. 난장이는 아이처럼 성냥불을
보고 즐거워했다.
"태풍이 오면 비행기가 뜨지 않아요. 당연히 우리 작전도
취소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율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취소되지는 않아요. 태풍이 잘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거예요. 취소되는 게 아니라 잠시 연기하는 것 뿐이에요."
율무는 머리를 흔들었다.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 돌아가고 있어요. 제대로 되어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경찰이 이미 우리 정체를 알아내고 뒤쫓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런 판에 태풍이 자기를 기다렸다가 작전을
개시하자는 건 말도 안 됩니다. 태풍이 언제 잘지도 모르고,
만일 태풍에 발이 묶이면 우리는 그야말로 오도가도 못하고
독안에 든 쥐가 되고 맙니다. 그 문제는 재검토 되어야 합니다.
독단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다가는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리지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결정된 일이예요. 기다렸다가 하는 거예요. 그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지 말아요."
"모두 같은 생각이라면 나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같은 생각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결정한 게 아니예요. 내
독단적으로 결정한 거예요. 왜냐하면 최종 결정권은 나한테 있기
때문이에요. 내 결정은 곧 명령이에요. 나는 명령을 내린
거예요."
방안에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 긴장감과 함께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을 율무의 코웃음이 깼다.
"흥, 명령이라고요? 그런 걸 당신 혼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에요."
"도대체 당신이 작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작전이
성공할 수 있는지 실패할지를 분간할 수 있는 안목이 도대체
있습니까?"
그리지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정없이 율무의 뺨을
후려쳤다. 율무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다시 한번
그의 뺨을 갈겼다. 율무가 그대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이
그녀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의 뺨을
철썩철썩 갈겼다.
아무도 그녀의 행동을 말리려 하지 않았고, 율무는 얼마든지
때려보라는 듯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지아는 손이 아파 더 이상 때릴 수 없었다. 몸을 격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에 한쪽 젖가슴이 옷 밖으로 완전히 노출되었다.
그녀는 두 손을 내려뜨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한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나 혼자서라도 해내고 말 거예요.
명령이에요. 내 명령을 거역하면 난 당신을 처단할 수밖에
없어요. 결정을 해요. 지금 당장......"
율무는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차츰 눈을 밑으로 내려 그녀의
젖가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두 손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지아가 발로 탁자를 밀어냈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접근했다. 남자는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으로 그녀의 한쪽 젖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런 의식 아닌 의식은
그들 사이에 가끔 있어온 터였다.
그리지아는 두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감싸안고 신음을 토했다.
그녀의 허리가 뒤틀리고 머리가 흔들렸다. 두 사람은 거기에
그들 외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시간은 7월 24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천둥 소리와 함께
창문으로 흔드는 비바람 소리는 더욱 요란스러워지고 있었고,
가끔씩 창문이 번갯불에 밝아졌다가 도로 어둠 속에 잠기곤
했다.
그들은 어느 아파트에 은거해 있었다. 제1의 은신처가
위험해지자 장길모와 그의 부모를 해치우고 제2의 은신처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 아파트는 꽤 넓었고, 바로 한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 아파트의 명목상 주인은 술집에 호스티스로 나가는 어느
아가씨였다. 하지만 실제 주인은 사쓰마 겐지라고 할 수 있었다.
사쓰마 겐지는 몇 달 전 요정에서 그녀를 알게 되어 현지처로
삼은 뒤 그녀에게 아파트를 구해 주었던 것이다.
하수라(河秀羅)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요정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새벽녘에야 집에 돌아오곤 했고, 아예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물론 사쓰마가 한국에 오면 요정에 나가지 않고 얌전히 집에서
그의 시중을 드는 것이지만, 지금 그녀는 사쓰마가 한국에 와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파트 내부는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모두가 사쓰마의
돈으로 꾸민 것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많은 돈을 투자해 놓고
있었다. 그것은 이런 때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는 사쓰마가 그녀를 몹시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착각할수록 사쓰마로서는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얼굴은 예쁘지만 백치 같은 데가 있었다. 그
점이 또한 사쓰마의 마음에 들었다.
1시가 조금 지났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수라의 모습이 현관에 나타났다. 날씨가 궂어 요정에
손님이 없었기 때문에 일찍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집안에 들어선 그녀는 소퍼에 앉아 있는
사쓰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서울 7월 24일 아침.
날이 새자 비바람은 더욱 거센 기세로 지상의 모든 것들을
휩쓸어버릴듯이 불어대고 있었다.
태풍이 한반도의 중부권을 강타하기로 된 날은 하루 뒤인 7월
25일이다. 오형사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기상대 직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제주도에 상륙했습니다. 동북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오후에는 남해안을 강타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부권은
내일 오전에 지나갈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까지는 태풍의 위력이
많이 약화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어느 정도로 떨어질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태풍이 약화되면 비행기는 뜰 수 있을까요?"
"그건 우리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비행기가 뜰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갑자기
약화되지는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꺼칠해진 턱을 어루만졌다.
새장 속의 새가 갑자기 맑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호루라기 소리 같기도 하고 맑은 물방울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 같기도 한, 그러나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소리였다. 병호의 귀에는 문조의 울음 소리가 더없이 구슬프고
외롭게 들렸다. 암놈과 함께 있을 때는 울음 소리가 맑고 밝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암놈이 죽고 난 지금 수놈의 울음 소리는
전혀 그전과 같지 않았다. 짝을 지어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아직까지 그렇게 해주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집에
들를 시간이 없었고, 바쁘게 돌아가다보니 그만 새에 대해서
깜박 잊고 말았던 것이다.
"미안하다. 다음에 집에 올 때는 잊지 않고 꼭 귀여운 암놈을
사오마. 넌 아주 예쁘고 귀여운 아내를 갖게 될 거다."
그는 소퍼에 비스듬히 누워 마치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조금 후 그는 김포공항 국제선으로 전화를 걸었다.
"현재 공항에는 국제선 전노선의 이착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안내 전화를 맡고 있는 여직원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내일은 어떻습니까?"
"이런 날씨가 계속된다면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내일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날씨에 큰 변화가 없는 한 비행기 운항은
불가능할 겁니다."
제발 비행기가 뜰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태풍이 불어닥치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비행기 납치사건 같은
것이 발생할 리 없기 때문이다. 범인들은 납치 기도를 포기하고
물러갈 것이다. 그들이 물러가겠다면 굳이 붙잡을 필요는 없다.
가겠다면 얼마든지 보내주어야 한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손을 뻗었다.
"보스가 찾고 있습니다."
왕형사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크다.
병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어. 현재 출국 사항은 어때?"
수배자 중 출국한 자가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비행기가 뜨지 못하니 출국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병호는 생각했다.
그는 소퍼에 비스듬히 누운 채 형사수첩을 들여다보며
수배자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그 수배자들은 수배 범위를
최소한으로 좁혀 현재 경찰이 집중적으로 쫓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두 7명이었는데 장길모가 죽는 바람에 6명으로
줄어들었다.
1. 토머스 러트=미국인. 제1의 용의자. 노엘 화이트가 피살된
H호텔 2049호실에 투숙했던 자로 사건 발생과 동시 행방을
감추었음. 미국측 통보에 따르면 그의 인적사항은 모두 허위로
드러남. FBI의 통보를 기다리고 있는 중.
2. 사쓰마 겐지=일본인. 일본적군파 대원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수배중인 자임. 본명 아모우 시로야마. 잔인무도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자임. 일본측 수사진을 통해 사진 확보. 노엘
화이트가 피살된 하루 뒤인 7월 21일에 H호텔에서 종적을 감춤.
3. 프레드릭 마주르=영국인. 위조여권 소지자로 판명됨. 7월
21일에 H호텔에서 종적을 감춤.
4. 귄터 율무=독일인. 무역업자. 소지 여권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자임. 7월 14일, 피살된 노엘 화이트와 같은
비행기편으로 입국하여 7월 18일부터 현재까지 H호텔에 투숙중.
뚜렷이 하는 일이 없으며, 계속 관찰중.
5. 오노 다모쓰=일본인. 르포 라이터. 노엘 화이트와 같은
비행기편으로 입국. 신원조회 결과 일본측으로부터 이상이 없는
자로 통보되어옴,. 현재 하는 일없이 H호텔에 투숙중이며, 계속
관찰중.
6. 오다 기미=일본 여자. 패션 디자이너. 노엘 화이트와 함께
입국. 7월 17일 H호텔에 투숙했다가 21일에 행방을 감춤.
일본측으로부터 이상이 없는 자로 통보되어옴.
병호는 마지막 이름에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여섯 명 가운데 가장 그 윤곽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인물이었다.
러트, 사쓰마, 마주르 등은 일차적으로 모두 위조여권을 지닌
범법자들로 밝혀졌다. 그리고 율무와 오노는 현재 H호텔에
투숙해 있고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체포가
가능하다. 그런데 오다 기미는 그 어느 쪽에도 들어 있지 않다.
신원조회 결과는 정상으로 나타났고, 직업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것도 밝혀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21일 이후의 행방이 묘연하다. 출국한 흔적도 없다.
국내에 있는 것이 틀림없는데 수배망에 걸려들지 않고 있다.
행방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그렇지 않은데
경찰이 단지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병호는 H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일본측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스오 부장이 병호의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병호는
긴장해서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다 기미양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기에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본국에서 오다양에 대해 정밀 조사를 편 끝에
오다양이 일본적군파와 관계가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지금 곧 가겠습니다."
40분 후 병호는 일본측 수사관들이 묵고 있는 209호실 문을
두드렸다.
마스오 부장은 그에게 오다 기미에 대한 메모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오다양의 사진과 그녀에 대한 자료는 이 호텔 통신실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팩시밀리로 보내달라고 했으니까 조금
후에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오다양은 일본적군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 관계로 해서 경찰에 체포된
적도 없고 수배 리스트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전과도 없는
깨끗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적군파 간부였던 하세카와
우이치(長谷川宇一)라는 인물의 애인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하세카와는 1980년 5월에 체포되어 현재 복역중인데 일기에
사쓰마 겐지의 뒤를 따르겠다고 적어놓을 정도로 사쓰마를
흠모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은행 송금 차량을 탈취하다가 두
사람이나 죽이고 현재 종신형을 받고 복역중인데, 체포될 당시
오다양과 열렬한 관계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교도소로 하세카와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곁에 있던 일인 형사가 덧붙여 말했다. 병호는 두 눈을
꿈벅이다가
"오다양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다.
"네, 그건 사실입니다. 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 세계에서는
꽤 인정을 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다양은 21일 이 호텔에서 나간 후 행방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출국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쓰마를 만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스오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덧붙여 말했다.
"교도소에 있는 하세카와와 사쓰마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연락책으로 암약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것은 통신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오다양의 자료가 도착됐답니다."
전화를 받은 형사가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노 다모쓰에 대해서는 새로운 정보가 없습니까?"
"특별히 이상한 건 없습니다."
"그는 르포 라이터라고 했는데......그 사람이 쓴 르포 중
유명한 것으로는 뭐가 있습니까?"
병호의 물음에 마스오 부장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유명한 르포 라이터가 아닙니다. 별로
기억에 남는 글을 읽은 기억이 안 나는데요."
"베트콩과의 1백 일이라는 르포가 있습니다. 월남전 때 월남에
직접 가서 베트공 소굴에서 그들과 함께 1백 일 동안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것, 그들의 철학 같은 것을 깊이있게 다룬 것인데 그
한 편으로 그는 유명해졌습니다. 베트콩 입장에서 쓴 것이라
그쪽에 상당히 동정적이고 사상적으로도 좌파 색깔이 진한
글입니다."
독서 같은 것보다는 먹는데 더 취미가 있을 것 같아 보이는
뚱뚱한 형사의 말이었다. 좌파라는 말이 흡사 벌레처럼 병호의
귀를 후비고 들어왔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말이었다. 그가 그런
글을 썼다면 그대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유화시의 행동이 어쩌면 무의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통신실에 내려갔던 일인 형사가 도꾜로부터 팩시밀리를 통해
들어온 오다 기미의 자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거기에는 오다의
사진도 있었다.
길쭉한 얼굴에 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의 상반신을 병호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웃고 있는 모습이 적군파 대원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여자치고는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조금 마른
인상에 눈이 가늘어 보였다. 아름답다고 볼 수 없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28세였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 그대로입니다."
자료를 먼저 훑어보고 난 마스오가 그것을 병호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그 자료는 일어로만 작성되어 있었다. 일어에 정통하지 못한
그는 그것을 조금 읽어보다가 그만두었다. 그것을 보고 마스오
부장이 영어로 그것을 고쳐서 읽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노 다모쓰에 대한 자료를 좀더 얻을 수
없을까요? 가능하다면 베트콩에 대해서 쓴 그 르포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만......"
"그 르포를 구해드리겠습니다."
뚱뚱한 일인 형사가 말했다.
"오노를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스오가 물었다. 병호는 난처한 듯 그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그는 지금 이 호텔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말씀을 듣고보니까 그냥 넘긴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군요"
"알겠습니다. 오노에 대해 더 좀 조사해서 자료를
구해드리겠습니다."
병호는 마스오에게 오노 다모쓰를 현재 한국 경찰이
관찰중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방을 나와 임시수사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2015호실로
들어가자 왕형사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그를 보고
"보스한테서 또 반장님 찾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굉장히 화를
냈습니다. 아직 연락 안하셨습니까?"
병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다 기미의 자료를 그에게
내주었다.
"이걸 번역시켜. 일본에서 팩시밀리로 온 건데......오다
기미가 적군파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아."
"그래요?"
두꺼비는 놀란 표정으로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일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다.
"오노 다모쓰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병호는 오다 기미와 오노 다모쓰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왕형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유형사에게 주의를 줘야겠군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난 왕형사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유형사는 지금 어디 있지?"
"집에 있을 겁니다."
"내가 좀 보잔다고 해. 이 호텔에서는 안 돼."
왕형사가 유화시에게 전화를 거는 동안 병호는 보스와
통화했다. 수사본부에는 두 대의 호텔 전화 외에 수사용으로
긴급히 가설된 전화가 세 대나 더 있었다.
보스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빨리 연락이 되지 않은
것과 보고를 제때 하지 않은 점 등을 들먹이며 병호를
몰아세웠다.
"세 사람이나 살해됐는데 아직까지 보고하지 않다니 어떻게 된
거야? 그런 사건이 발생하면 즉각 보고해야 될 거 아니야?"
"너무 바빠서 그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쇠약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는 잊지 않고......"
"어떻게 된 게 해결은 되지 않고 확대일로야. 그 인터내셔널
킬러들의 소행이 분명한가?"
"네, 그런 것 같습니다만......"
"빨리, 빨리 그자들을 체포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체면이 말이 아니야. 그 정도로 지원해 주면 효과가 있어야
하잖아."
"네, 그렇지 않아도......"
"놈들을 빨리 일망타진해. 그런데 놈들은 왜 한국인을
세명이나 죽였지? 그 이유가 뭐야?"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찬스를 살릴줄 알아야 해. 그걸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는 거야."
"네, 그렇죠."
"찬스를 살리란 말이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찬스니까
말이야."
보스와 통화를 끝내고 나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미대사관에서 왔습니다."
병호는 넘겨주는 수화기를 긴장한 표정으로 귀에 갖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