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죽음의 집
장길모의 신원진술서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었다. 병호는
형사들이 가지고온 장길모의 신원진술서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장길모의 컬러 사진도 붙어 있었다. 그 얼굴은
불쾌감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 신원진술서는 1979년 4월에
작성된 것이었다. 가족관계란에는 그의 처와 두 명의 자식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직업란에는 무역이라고 적혀 있었고, 회사
이름은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사였다. 거기에는 물론 회사의
주소와 전화번호도 명기되어 있었다. 병호는 수화기를 집어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한참 신호가 간 뒤 졸음에 겨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거기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사입니까?"
"아니예요."
이쪽에서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병호는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다. 똑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병호가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자 신경질적으로 응답해왔다.
"아니라는데 왜 자꾸 전화거는 거예요? 전화번호를 똑똑히
알고 거세요."
"전화가 바뀐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왕형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유형사가 그 독일 남자와 함께 1825호실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간 지 30분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내버려둬. 자기가 잘 알아서 하겠지 뭐."
"위험하지 않을까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병호는 일어섰다.
신원진술서에 기재되어 있는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사의 주소는
을지로 3가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주소지를 찾아가보니
그곳에는 보험회사 빌딩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빌딩의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그 빌딩 안에는 그런 회사가 없다고 했다.
그 빌딩은 지은 지 4년밖에 안 된 건물이었다.
"포기해야겠는데......"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서 중얼거리던 병호는 형사들을
돌아보았다.
"할 수 없어. 지금 장길모의 집으로 가보지."
세 사람은 콜롬보차 속으로 뛰어들었다.
병호가 직접 차를 운전했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바람이 차창을 후려치고 있었지만 그는 노련하게 그 낡아빠진
차를 운전해 나갔다.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는 유령회사인가? 아니면 다른 곳에
사무실이 있나?"
병호가 운전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안경 낀 형사가
"전화번호부를 뒤져봐도 그런 회사는 없었습니다. 내일 무역
관계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에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세무 기관에도 알아봐요. 납부 실적이 있으면 컴퓨터에 나올
거야."
트럭이 물을 튀기며 달려가는 바람에 콜롬보차는 더러운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망할 자식......"
병호는 트럭을 향해 중얼거리고 나서 차를 왼쪽으로 꺾었다.
J동의 그 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키가 멀쑥하게 큰
형사가 담벽에 달라붙어 집안을 살펴보았는데, 집안에서는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초인종을 한참 눌러댔지만 응답도
없었다.
"노인들이 이렇게 깊이 잠들 리가 없어. 집이 비어 있든가,
아니면......"
그가 말 끝을 흐리자 키 큰 형사가 힘겹게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쪽문이 열렸고 병호는 안경 낀 형사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비바람이 마당에 들어찬 울창한 정원수들을 마구 휘저어놓고
있었다. 정원수들 사이에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아 그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들의 옷은 금방 비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현관 앞으로 접근했다.
현관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 병호가 현관 앞에 서 있는 동안
키 큰 형사와 안경 낀 형사가 양쪽으로 갈라서서 집 주위를
돌아갔다.
안경 낀 문형사는 유난히 덜컹대는 창문을 밀어보았다. 창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면서 커튼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그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자 키 큰 조형사가 돌아왔다. 그들은
서로 먼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우기다가 결국 문형사가 창틀에
달라붙었다. 조형사가 그의 엉덩이를 받쳐주자 그는 어렵지 않게
창틀 위로 몸을 끌어올린 다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키 큰
형사는 현관 쪽으로 돌아가 병호에게 곧 현관문이 열릴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문형사는 어둠 속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렸지만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안에서 나는 인기척을 포착해 보려고 귀를
세웠지만 제 세상을 만난 듯 누비고 다니는 쥐새끼들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집안에는 소름끼치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어둠과 정적에
갇힌 그는 숨쉬기조차 불편했다. 더듬이처럼 손을 앞으로
내저으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그는 아예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현관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기어가던 그앞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처음 느낀 것은 물컹한
감촉이었다. 그는 멈칫했다가 다시 손을 뻗어 주의깊게 그것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의 얼굴임을 알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가 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잠든
사람치고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손 끝에 와닿는
감촉도 섬뜩할이만큼 차가웠다. 그는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1회용 라이터를 꺼내 켜보았다. 그리고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입에서는 절로 '악!'하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는
불을 끄고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낮에 보았던 그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마
부분을 피로 얼룩져 있었다. 소름끼치는 정적의 정체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형사는 멀리 돌아 현관 쪽으로 허둥지둥 기어갔다. 제발
그와 같은 시체를 두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너무
놀랐기 때문에 그는 가슴이 아려왔다. 사람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느꼈을 때 마침내 현관에 이르렀다. 먼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그것이 쉽게 찾아지지가 않았다.
생각을 바꾸어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 비틀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죽은 시체를 봤습니다."
병호는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거실에 불이 들어오자
맨먼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장길모의 아버지입니다. 나병환자입니다."
문형사는 그렇게 속삭이고 나서 자기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손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을 만졌으니 어쩌면 병균에
전염됐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세 사람은 시체가 누워 있는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시체는
엎어져 있는데 얼굴을 모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 얼굴은 나병환자 특유의 일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총을 맞은 듯한 구멍이 나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이마와 얼굴 한쪽에 엉겨붙어
있었다. 회색의 카피트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그것은 안방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방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노인은 거기서 기어나와
거실에서 숨진 듯했다. 병호는 그쪽으로 가보았다. 조형사가
방안의 불을 켰다. 방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는 노파의 모습이
보였다. 방안에는 피비린내가 남아 있었다.
"장길모의 모친입니다. 이층에 올라가 보겠습니다."
문형사와 조형사가 이층으로 뛰어올라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집안을 울렸다. 노파 역시 관자놀이께에 구멍이 나있었다.
범인은 관자놀이에다 권총을 갖다대고 발사한 것 같았다.
저항력이 없는 노인들을 그렇게 간단히 죽인 것을 보면 범인은
아주 무자비한 자인 것 같았다. 하얗게 센 머리가 피에 엉겨붙어
있는 것을 보고 병호는 그 안스럽고 비참한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반장님! 빨리 올라와 보십시오!"
이층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는 대낮같이 불이 밝혀져 있었다. 병호는 한쪽 방으로
들어갔다.
"장길모 같습니다."
문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장길모의 주검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목은 반쯤 잘려나가 있었고, 온몸은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노엘 화이트를 죽인 놈의 솜씨입니다. 줄로 목을 감아 조인
겁니다."
조형사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시체를 뒤집었다.
등에는 깊은 상처가 하나 나 있었다.
"여긴 칼에 찔린 상처입니다. 칼은 뽑아서 가져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병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냉정한 눈으로 방안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여길 떠나고 나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하고 안경 낀 형사가 말했다.
"왜 죽였을까?"
조형사가 물었다.
"그야 장길모가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니까 먼저 선수를 친
거지.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노인들까지 죽인 걸 보면 무자비한 놈들이야."
"노인들이 그들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 죽였겠지. 그들은
자기들의 비밀이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인정사정 없이
제거하고 있어. 실수도 용서하지 않아."
병호는 방안에 남아 있는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에 창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무섭게 비바람이 몰려들어왔다. 그는 도로
문을 닫았다.
"전화를 걸어."
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나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문형사가 본부에 전화거는 것을 듣고 있다가 그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는 시트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것을
걷어내고 나서 침대 위를 찬찬히 살피다가 그는 이윽고 무엇인가
집어들었다. 그것은 검은 머리카락이었는데 길이가 30센티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건 여자 머리카락 같은데......"
그는 또 하나의 머리카락을 집어들었다.
그것 역시 길어보였다. 윤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 젊은 여자의
것인 듯했다.
"일당 중에 여자가 끼어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면 여기에 적어도 네 명 이상이 있었다는 말이
되겠는데요. 줄로 목을 조인 놈, 칼로 등을 찌른 놈, 권총으로
노인들을 살해한 놈, 그리고 여자까지 말입니다."
문형사의 말이었다.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하일 수도 있어.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으로 보고 수사를 해야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병호는 머리카락 한개를 또 집어들었다.
그것은 잿빛의 머리카락이었다. 짧은 것이 남자 머리카락
같았다.
"여기에도 하나 있습니다."
조형사가 소파 등받이에서 검은 머리카락 한개를 집어들어
보였다.
"이건 곱슬머리인데요. 남자 머리카락 같습니다."
방안 곳곳에서 머리카락들이 발견된 것을 보면 범인 일당은
그곳에서 꽤 상당한 시간 동안 머물렀던 것 같았다. 방안은
한번도 청소가 되지 않은 듯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 7월
20일 노엘 화이트를 살해한 후 일당이 이곳으로 은신처를
옮겼다면 그들은 여기서 사흘 동안을 보낸 셈이라고 병호는 그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동안 여기서 뭉기적거리고 있었다면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남겼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것을 말해주는 듯 탁자 위에 재떨이 속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치울 수 있었을 터인데도 그대로
두고간 것을 보면 그런 것에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담배꽁초에 묻어 있는 타액이나 머리카락,
그리고 지문 같은 것들을 확보한다 해도 범인 일당이 모두
외국인들일 경우 그들에 대한 자료가 국내에는 하나도 없으니
그것을 별로 효용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병호는 생각했다.
"여긴 놈들의 제1의 은신처였던 것 같아. 놈들은 여기가
위태로워지자 다른 곳으로, 그러니까 제2의 은신처로 옮겨갔어.
우린 그 은신처를 찾아내야 해."
병호는 두번째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장길모는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는데 결국 살해당했어.
장길모도 현재로서는 같은 일당이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일당이
외국인들이라면 현지인을 포섭해서 이용할 필요가 있었겠지.
그것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그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준 현지인이 죽었으니 그들은
곤란을 겪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에게 제2의 은신처를 제공해 준
현지인이 또 있을지도 몰라."
장길모는 뻔질나게 나다녔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테러조직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어떻게 해서, 그리고 왜 그들과
손을 잡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날이 새면 장길모에 대해 상세히 알아봐. 그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틀림없이 친구들이 있을 거야. 출신학교를 찾아가 보는
게 쉽겠지."
그의 신원진술서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출신 학교명이 적혀
있었다.
병호는 침대에 걸터앉아 방바닥에 엎어져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범인들이 잔인무도한 자들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지적할 사항이 못 된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과단성이다.
그들은 제거하면서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접근해 가고 있다.
바로 그 점이 무서운 것이다. 그들이 정해놓은 D데이는
언제일까? 그리고 그들이 노리는 비행기는 어떤 것일까?
"공개 수사를 하면 어떨까요?"
문형사가 병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병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일어나 창문을 홱 열어젖혔다.
"태풍이 오면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