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유혹의 밤
여형사 유화시는 독일인 남자와 몇번째 플로어에 나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플로어에 나갔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디스코를 추고 나서
이어서 탱고를, 그리고 다시 그의 품에 안겨 블루스를 추면서
그녀는 이제 그만 추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10시에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었는데 지금 시간은 10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는 집요하게 그녀에게 늘어붙고 있었다. 마치
오늘밤에 그녀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듯이. 그가 그렇게 집요하게
늘어붙는데는 그녀의 책임도 컸다.
그녀의 행동이 그가 몸살이 나게끔 자극적이었던 것이다. 그가
허리를 끌어안으면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가 격정을 이기지 못해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면
그녀 역시 쌔근거리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곤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벽쪽으로 돌아설 때마다 독일
남자는 허리를 두르고 있던 손을 내려 그녀의 탄력 있는
엉덩이를 만져대곤 했다.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뜨거운 것이
안타깝게 꿈틀거리면서 그녀의 허벅지를 자극해 오는 것을
그녀는 뚜렷이 느낄 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자극적으로 응했다.
두 사람의 육체는 얇은 여름 옷을 사이에 두고 안타깝게
부딪치며 몸부림쳤다.
"나와 함께 내 방에 가서 한잔 합시다."
"안 돼요. 그럴 수 없어요."
그들은 같은 대화를 무의미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열망하는 눈빛과 몸부림을 충분히 감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호텔방에 가자고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여자는
따라갈듯하면서도 선뜻 응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방에 갈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은 안 돼요. 우리는 오늘
만났잖아요."
"좋아요. 그건 나도 참을 수 있어요. 나를 믿고 갑시다."
"믿어도 되나요?"
"나를 믿어요."
"나는 당신이 독일 신사라고 생각해요."
음악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디스코곡이 터져나왔다.
화시는 율무를 따라 나이트클럽을 나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갔다.
1825호실 앞에 섰을 때 화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취기에서 깨어났다. 많이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술과
육체적인 자극, 퇴폐적인 분위기, 그리고 드릴이 뒤섞여 그녀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호텔 방문
앞에 서자 그때까지의 기분은 눈녹듯이 사라져버리고 대신
공포감이 그녀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돌아설 시간은 충분히 있다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독일인이 문을 연 다음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를 안으로 밀어넣었던 것이다.
불이 들어왔고, 방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흐트러져
있는 침대가 그녀의 눈을 자극했다.
율무는 즉시 그녀에게 돌진했다. 그와 미친 듯 키스하는 사이
그녀의 옷은 재빨리 벗겨져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자신이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쾌락의 열기를 물리치기에는 그녀는
너무 나약했다.
"안 돼요! 안 돼요!"
힘없이 저항하는 그녀를 외국인은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그는
짐승처럼 저돌적으로 그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의 말
따위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알고는 비로소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녀의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온통 근육질로 덮여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굶주려왔던 것
같았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그녀는 얼른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그 얼굴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온화하고
부드럽던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이 잔인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정복하기 위해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불덩이 같은 것이 기를
쓰고 그녀의 몸속으로 진입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해졌다. 임무수행을 위해 그에게 몸을 열어주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에게서 신사다운 태도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각오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거의
무모할 정도로 모험심에 들떠 그에게 접근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 저런 것을 따지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생각해 볼 겨를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위험에 처했을
때 상대방의 급소를 때리는 방법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경찰에 들어와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방법을
사용하기가 주저스러웠다. 그런 솜씨를 발휘하다가는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치도 없었다. 밖에는 지원조의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면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율무는 놀라서 도망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다리를 버티고 있을 힘이 없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두 다리가 크게 벌려졌다.
그녀는 숫처녀는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바쳐 열렬히 사랑한
남자가 서너 명 있었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난생 처음
남자에게, 그것도 외국인에게 겁탈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막 정사가 시작될 순간 차임벨 소리가 들려왔다. 독일 남자는
멈칫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화시는 얼른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시트로 몸을 가리면서 율무를 쳐다보았다. 율무는
벌거벗은 채 문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꽤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누구십니까?"
그가 영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밖에서 남자 목소리의 짧은
응답이 왔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율무는 되돌아와 바지만 급히 껴입고 나서 다시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깡마른 중년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멈칫하고 섰다.
일본인 오노 다모쓰였다.
"어머나!"
화시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시트로 몸을 감쌌다. 오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번득이는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재미를 보고 계셨군."
그가 일본말로 중얼거렸다.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분에 화시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율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맞아들이면서 얼굴에 비굴한 웃음을 띄웠다.
오노는 흰 티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깡마른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고, 눈썹이
거의 없었다.
"내가 방해했나?"
그 말에 독일인은 멋적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는 맛있는
사탕을 입속에 넣었다가 미처 한번 빨아보지도 못한 채 도로
뱉어낸 것 같은, 몹시 아쉽고 억울해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인이군. 한국 아가씨인가?"
"그래. 대학생이야."
그들은 마치 물건을 앞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아."
"풀장에서 봤을 거야. 거기서 알았으니까."
"맞아. 그래. 거기서 봤어. 솜씨가 좋군.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말이야."
그들은 함께 화시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트로 몸을 가리긴
했지만 어깨와 허벅지는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멋진 아가씨야."
오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화시는 그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던졌다. 그것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미소였다.
"옷 입을 테니까 보지 말아요."
그러나 그들은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리려고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오노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레지어를 들어 한 바퀴
돌리더니 그것을 화시에게 던졌다. 화시는 상체를 가리고 있던
시트를 내리고 돌아앉아 브레지어로 풍만한 젖가슴을 감쌌다.
오노가 이번에는 팬티를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그것은 빨간
색의 팬티였다. 그것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더니 두 눈을 스르르
감는다. 이윽고 눈을 뜨고 화시를 쳐다보다가 웃으며 그것을
그녀에게 던졌다.
화시가 팬티를 입고 났을 때 두 사람은 창가에 서서 귓속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한테는 그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가 않았다.
"작전중에는 여자와 관계하는 것이 금지돼 있지 않아?"
"알고 있어.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너무 매력적이야. 난
하루라도 여자가 없으면 몸살이 나. 그런데 벌써 열흘 넘게 여자
손목 한번 잡지 못했어."
율무가 불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시는 옷을 들고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저 계집애는 믿을만한가?"
"우연히 알게된 여자야. 안심해도 돼."
"하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을 거야."
율무는 끄덕이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Y여대에서 한국 역사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어."
하고 말했다.
"몇 학년?"
"4학년이라고 했어."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오노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화시의 핸드백을 집어들더니
그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주민등록증을 꺼내들었다.
"학생증은 없고 이것뿐이야. 이건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야. 1960년 생이니까 지금 26세야. 대학
4년치고는 나이가 너무 많아. 내가 알고 있는 한국 여대생도
4학년인데 그애는 22세야."
"늦게 들어갈 수도 있잖아."
"그렇게만 보지 말고 조심하란 말이야. 그러지 말고 내쫓아
버려."
"그럴 수 없어. 겨우 여기까지 데리고 들어왔는데 그럴 수
없어. 저렇게 매력적인 애를 사귀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그렇긴 해. 그리지아가 알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율무는 심각한 표정으로 일본인을 쳐다보다가
"알아도 할 수 없지 뭐. 작전에 지장이 없게만 하면 되잖아."
하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 여자는 너무 융통성이 없어. 너무 딱딱거려. 도대체
여자가 이런 작전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부터가 잘못이야."
일본인은 독일인의 투덜거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목소리가 너무 커."
"저 아가씨는 영어를 약간 더듬거릴 정도야."
"그리지아는 실력자야. 지금 와서 불만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이미 작전은 진행중이야. 시계를
돌려놓을 수는 없어."
"그 여자의 장기는 잔인성이야. 그거 빼놓으면 아무 것도
없어."
"조금 전에 박사가 도착했어. 무사히 도착한 모양이야. 그걸
조립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오라는 거야."
"제기랄!"
"작전이 연기될지도 몰라."
"왜?"
독일인은 눈을 크게 뜨고 일본인을 쳐다보았다. 오노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이것때문이야. 그 날 하필 태풍이 여기를 지나간다는 거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나봐. 그렇게 되면
비행기 운항이 중지되거든."
"빌어먹을!"
율무는 주먹으로 창을 두드렸다. 두꺼운 대형 창문에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도대체 왜 일이 이렇게 틀어지기만 하는 거지? 이래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우린 돌아가야 하지 않아?"
일본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그리지아는 포기할 수 없다고 했어. 기다렸다가
기어코 해치우고 말겠다는 거야."
"누굴 죽이려고? 모두 죽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야?"
독일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는 씩씩거리다가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맥주병을 들고와서는 병째로 그것을
입속에 틀어넣고 꿀컥꿀컥 마시기 시작했다. 한 병을 단숨에
마시고 나서 거칠게 숨을 몰아쉰 다음
"난 개죽음 당하고 싶지 않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일본인이 욕실 쪽을 흘끔 살폈다. 욕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가 문을 밀고 욕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머!"
욕조 속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그녀가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왔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따뜻한 물속에 앉아 있었다. 목과 어깨,
그리고 젖가슴은 페인트를 칠한 듯 흰 비누 거품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도발적인 모습이었다.
"난 싫단 말이야!"
독일인의 목소리가 욕실 안에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왜 그래요?"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일본인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실례하겠소.'하면서 변기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그는 바지에서 발기한 것을 꺼내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어머, 저럴 수가......"
그녀는 놀란 표정이면서도 남자가 소변을 끝낼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