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목발 짚은 사나이들
병호는 별 생각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K피부과의원을
찾아보았다. 아무리 뒤적여보아도 K피부과의원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치우고 114에 물어보았지만
그런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병원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장길모의 집을 방문했던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K피부과의원이 분명해?"
그들이 장길모의 집 부근에 잠복해 있을 때 그 집에 들어갔다
나온 앰뷸런스의 옆구리에 적혀 있던 것이 K피부과의원이
틀림없느냐는 물음이었다.
"네, 틀림없습니다."
안경을 낀 형사가 대답했다.
"차 번호를 적어두지 않았나?"
"깜박 잊고 그만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형사들은 머쓱한 표정이 되어 병호의 시선을 피했다.
"그 집 전화번호는 알아왔겠지?"
"네, 알아왔습니다."
"지금 그 집에 전화걸어 봐. 나오면 나를 바꿔줘."
안경 낀 형사가 장길모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것을 지켜보면서
병호는 장길모라는 인물이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지 않고
어쩐지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를
맡았던 형사들은 그에 대해서 어느 것 하나도 분명히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의 주소지에 들러 그의 부모까지 만나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지 않는데요."
안경 낀 형사가 수화기를 든 채 병호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비바람치는데 어디 갔다는 말인가?"
병호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형사들은 초조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너무
겉핥기식으로 일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그 집에 가보고 올까요?"
멀쑥하게 키만 커보이는 형사가 병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병호는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결국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장길모라는 인물은 가족들을 먼저
미국으로 이민보내고 그는 나중에 갔는데, 아내와 이혼하는
바람에 지금은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살고 있는 신세란 말이지.
그리고 그는 무역업을 하고 있고,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뻔질나게
해외 나들이를 하고 있어. 그리고 그는 부모가 있는 집에
주민등록만 해놓았다 뿐이지 통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아버지가
나병환자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아주
불효막심한 사람이야. 그의 부모는 장길모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라 되도록 숨기려고 하는 의도가 보이고 있어. 난 만나보지
못했지만 자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느낌이 든단 말야."
"네, 저희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아들이 부모집에 발을 끊었다고 하지만 아들의 회사
이름이나 전화번호마저 모르는 부모가 있을까? 장길모는
외아들이라고 했어.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살고 있는 그 노인들한테 생활비를 대주는 사람은
그밖에 누가 또 있겠어. 발을 끊었다는 말도, 어디 사는지
모른다는 말도 모두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 장길모가 몇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면 지금쯤 미국 국적을 취득했을 거란
말이야. 그런데 호텔 숙박카드에 적힌 내용을 보면 그는 아직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아직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든가 아니면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안경을 낀 형사가 말했다. 병호는 끄덕이면서 그에 대한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처음 기록은 법무부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등재되어 있는 그의 출입국 관계 기록이었다.
그가 처음 출국한 것은 15년 전인 1972년부터였다.
외무부여권과에는 출국 목적이 미국 유학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78년까지는 출입국이 뜸했는데 그 이듬해부터는
빈번하게 출입국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출국 목적은 무역
관계였다. 그러다가 미국 이민 비자를 받고 출국한 것이 1982년
3월이었다. 그러나 그뒤에도 그는 뻔질나게 국내에 드나든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컴퓨터로 알아본 신원조회 결과는 전과
하나없이 깨끗했다.
"금년에만도 그는 매월 한번 꼴로 드나들었어. 그가 경영하고
있다는 그 무역회사를 찾아보는 게 좋겠어. 경찰에 그의
신원진술서가 비치되어 있을 거야. 여권을 발급받을 때 제출한
서류 말이야. 거기에 보면 그의 회사 이름이 나와 있을지도
몰라. 무역 관계로 출국한 것이 79년부터니까 그때를 중심으로
서류를 찾아봐."
외무부 여권과에 가서 서류를 찾아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병호는 손쉽게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한 것이다.
안경을 낀 형사와 키 큰 형사가 밖으로 급히 사라지자 병호는
다시 장길모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군."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수화기를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건 너무 심한데......"
두꺼비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그는 촌닭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가 남자 형사와 교대한 것은 조금 전이었다.
"어머, 어쩌면 저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업무상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말 저건 너무해요."
촌닭의 덤덤한 얼굴에 그렇게 뚜렷한 표정이 나타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고 플로어를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로어 위에서는 유화시가 독일인 귄터 율무와
함께 블루스곡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들 두 사람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하는 규칙 같은 것은 아예 무시한 채
몸을 밀착시킨 상태에서 애욕어린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화시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고 외국인은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채 돌아가고 있었다. 플로어 위에는 그들외에 몇
쌍이 더 있었지만 그렇게 진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쌍은
그들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들한테 쏠려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이 불어대는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위의 시선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욱 몸을 밀착시키면서 플로어 위를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에 저럴 수가 있어요? 진해도 저렇게 진할 수가 있어요?"
촌닭이 흥분해서 말했지만 흥분하기는 왕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으로 몸둘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저라다가 오늘밤 사고나겠어. 저 아가씨 깜박 잊은 모양이야.
저건 임무수행이 아니라 완전히 기분내고 있는 거야."
"가만 있지 말고 가서 말려요."
"어떻게 말리라는 거야."
그는 촌닭에게 눈을 흘긴 다음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후 7시 45분 도꾜발 서울행 JAL기는 예정보다 15분 늦은
10시경에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머리에 녹색 베레모를 쓴 남자는 맨 마지막으로 로딩 브리지를
빠져나왔다. 그는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다리는
통나무처럼 기프스가 되어 있었다. 한걸음씩 떼어놓을 때마다
그는 그 통나무 다리를 무겁게 끌어가곤 했다. 얼굴은 주름살로
쭈글쭈글 했고, 매의 부리처럼 구부러진 코가 인상적이었다.
눈은 노리끼했고, 베레모 밑으로 흘러나온 머리칼과 턱 밑의
염소수염은 온통 잿빛이었다. 어깨까지 꾸부정한 것이 몹시
노쇠한 모습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에 걸고 있는 조그만
가죽 가방이 덜렁거렸다. 체크 무늬 바지 위에는 베이지 색의
사파리를 입고 있었다. 노쇠한 모습치고는 깨끗하고 부유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의 곁에는 젊은 여성이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금발에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건강미가 넘쳐흐르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청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등에는 조그만 배낭을 하나 지고
있었다.
입국 검사대의 보안관은 맨 마지막에 젊은 아가씨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녹색 베레모의 외국인 노인을 따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금발의 아가씨가 노인의 목에 걸려 있는 가방 속에서 대신
패스포트를 꺼내 보안관 앞에 내놓았다.
"아가씨 것도 주십시오."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금발의 아가씨는 웃으며 패스포트를
꺼내놓았다. 보안관은 두 사람의 패스포트를 기계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스위스 국적의 패스포트를 가지고 있었다.
"두 분 관계는 어떤 사이인가요?"
보안관이 영어로 물었다. 괜한 것을 묻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 아빠예요."
금발의 아가씨가 하얀 치열을 내보이며 웃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외국인 방문객에게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세계시인대회에 참석겸 관광차 왔어요. 우리 아빠는 유명한
시인이에요."
그녀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유명한 시인이라는 말에
보안관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며칠 후 서울에서
세계시인대회가 개최될 것이라는 것을 그도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다리는 어쩌다가 그렇게 됐습니까?"
그는 많이 걱정해 주는 표정으로 물었다.
"도꾜에서 다쳤어요.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부득불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온 거예요. 우리 아빠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아주 훌륭한 아빠를 두셨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두개의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쾅쾅 찌고 나서 그것들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온 그들은 짐을 찾는 곳으로 내려갔다.
원형 컨베어 위에서는 많은 짐들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사람들이 늘어서서 자기 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녹색 베레모의 노인이 파이프에 담배를 재고 있는 동안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아가씨는 컨베어 위에서 짐을 찾아가지고 카트
위에 싣고 있었다. 짐은 트렁크 하나와 헝겊으로 만든 가방이
전부였다. 그녀는 카트를 밀고 세관 검사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 뒤를 녹색 베레모가 파이프를 입에 문 채 힘겹게 따라갔다.
세관원은 그들의 짐을 대충 훑어본 다음 통과시켰다. 마침내
그들은 검사대를 빠져나와 대합실로 나갔다.
출구 앞 대합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었다. 마중나온
사람들이었다.
대합실 밖에는 비비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를
피해 테라스 쪽에 몰려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의
아가씨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녹색 베레모가
따라나왔는데 그때 그 앞을 흑발을 날리는 여인이 막았다.
"닥터 마티스!"
그녀는 낮으나 힘차게 노인을 불렀다.
"오, 그리지아!"
그들은 팔을 벌려 얼싸안았는데 그 바람에 노인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베레모가 금발의 여인을 그리지아에게 소개하자
그리지아는 금발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지아는
회색의 바바리를 입고 있었고 검은 테의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짱이 나온다고 하잖았나요?"
"그는 나올 수 없게 됐어요."
그들은 검은 색의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 운전석에서 머리를
짧게 기른 젊은 남자가 뛰어나와 카트 위의 짐들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는 아무하고도 인사를 나누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무뚝뚝하게 자기가 할 일을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모두
차에 타자 차를 출발시켰다.
마티스와 그리지아는 뒷 자리에, 그리고 금발의 아가씨는 앞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공항을 벗어나자 사쓰마 겐지는 음악을 틀었다. 질좋은 음향이
침묵에 싸인 차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차창을 어지럽게 때리는 빗방울이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렌터카는 다른 차들의 흐름 속에
섞여 천천히 김포가도를 달려갔다.
"저 아가씨는 누구예요?"
그리지아가 베레모의 귀에다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아랍말이었다.
"내가 고용한 아가씨요. 나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이 혼자서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이지. 저 아가씨가 나를 많이
도와줬어요. 내 딸 행세를 하면서......"
"그럴듯하군요."
"모든 것이 부드럽게 통과됐지."
베레모는 불꺼진 파이프를 뻑뻑 소리나게 빨았다.
"저 아가씨는 뭣하러 한국에 왔나요?"
"무작정 여행중인가 봐요. 아시아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했어요."
"당신의 부탁을 잘 들어주던가요?"
마티스는 끄덕이면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모든 게 돈의 힘이지요. 이것으로 안 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마리안느!"
정신 없이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금발 아가씨가 고개를
뒤로 돌려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물결치고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자, 약속대로 이걸 받아요. 보너스 백 달러를
합쳐 4백 달러야."
"어머나,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백 달러짜리 네 장을 받아들면서 그녀는 고마워 어쩔줄을
몰라했다.
"어디서 내려줄까?"
"전 시내 아무데서나 내려도 상관 없어요."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행중이기 때문에 4백 달러의
수입은 매우 유용한데다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