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살인자들
모두가 비바람 치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궂은 날씨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이제 상황은 D데이를
정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크나큰
불안요인이 되고 있었다.
일본인이 창가에서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있던 난장이가 그를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사쓰마 겐지가
주머니에서 재크나이프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재미 있다는 표정이었다. 사쓰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장이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난장이가 가는 줄을
꺼내드는 것을 보고 일본인은 장길모의 뒤로 다가섰다. 그는
길모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금의 은신처에 그대로 남아 있자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길모의 목숨을 노리고 도둑
고양이처럼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가 길모의 왼쪽 어깨 위에 왼손을 올려놓자 길모가 그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그의 입장을 두둔해 준 그 일본인에 대해
길모는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는 호감어린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면서 턱을 앞으로 내밀었다.
'윽!'하는 소리에 고수머리와 회색 눈의 사나이가 몸을 돌렸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고수머리가 고함쳤다. 일본인은 한 발 뒤로 물러났고,
난장이는 여전히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길모는 입을 더 크게 벌린 채 일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는 더 이상 일본인에 대한 호감어린 빛이 돌고 있지
않았다. 부릅떠진 두 눈은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일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거친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몸에서는 경련이 일고 있었다. 그가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자 난장이가 뒤에서 줄로 그의 목을 휘어
감았다. 등에 박힌 칼에 닿지 않으려고 줄을 잡아당겼기 때문에
길모의 몸은 활처럼 뒤로 잔뜩 휘어졌다. 줄이 칼날처럼 살을
파들어가자 목은 금방 검붉은 피로 젖어들었다.
"무슨 짓이야? 그만두지 못해?"
고수머리가 다시 소리쳤을 때 화장실에 갔던 그리지아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목소리가 너무 커요."
그녀는 고수머리에게 주의를 주고 나서 죽어가는 장길모를
쳐다보았다.
길모는 뒤로 끌려가면서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목에 감긴
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지아는 길모의 애원하는
눈길을 냉담하게 밀어냈다.
고수머리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대장이었다.
결정권은 그리지아에게 있지만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그였다.
그런데 그의 명령도 없이 장길모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중지하라고 했는데도 난장이는 길모의 목을 더욱 힘주어 죄고
있었다. 고수머리는 권총을 뽑아들더니 난장이를 겨누었다.
"당장 그만둬!"
그러자 그리지아가 말했다.
"그 권총은 치워요. 내가 죽이라고 했어요."
고수머리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권총을 밑으로
내렸다.
"언제 그런 지시를 내렸습니까?"
"아까 방에서 나가기 전에 나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했어요."
하고 일본인이 말했다.
"나한테두요."
난장이가 히히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길모의 몸부림은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그를 침대 쪽으로
끌고간 난장이는 침대 위로 올라가 계속 그의 목을 죄었다.
난장이의 손은 억세보였고 팔뚝은 무쇠처럼 단단해 보였다.
길모가 마침내 무릎을 꺾으면서 주저앉자 그제서야 난장이는
손을 놓고 침대에서 뛰어내려왔다.
목 둘레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핏물이 길모의 옷을 온통
적시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풀려 있었고 입은 여전히 벌려져
있었다. 입에서는 그렁그렁하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소리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그의 죽어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에 익숙한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방안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문을 열려고 하지를 않았다.
"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벌써 두 명이나 죽었어. 그것도 적의
손에 죽은 게 아니라 우리 손에 말이야."
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길모가 갑자기 상체를 일으키는 것
같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그리고 심하게 경련하더니 차츰
움직임이 둔해져갔다. 일본인이 한쪽 발로 그의 허리를 짚으면서
등에 박힌 재크나이크를 뽑아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를 살려두면 우리가
위험해져요."
"난 그리지아 당신이 그에게 제2의 은신처를 부탁하기에 그를
죽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를 안심시키려고 그랬던 거예요."
"나도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했어요."
하고 일본인이 말했다.
"경찰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경찰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자리를 옮긴다 해도 짱이 경찰에
체포되면 모든 걸 불고 말 거예요. 어차피 그를 살려둘 수는
없었어요. 그가 없음으로써 작전에 지장이 좀 있겠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리지아는 마치 죽은 짐승을 보듯 미간을
찌푸리며 한국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는 인간의 죽음
따위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냉혹함이 있었다. 장길모는
숨이 끊어졌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이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아버린 것 같았다.
"저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요?"
고수머리가 그리지아에게 물었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란
장길모의 부모를 말하는 것이었다.
"없애버려야지요."
하고 일본인이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들은 우리 얼굴을 알고 있어요. 자기 아들이 죽은 걸 알면
경찰에 협조할 겁니다."
고수머리와 그리지아의 시선이 부딪쳤다.
"없애버려요."
그리지아가 차갑게 한 마디 했다.
"지저분하게 죽이지 말아요."
하고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고수머리는 고개를 끄덕하고 나서 회색 눈을 바라보았다.
"마주르, 내려가봐."
프레드릭 마주르는 침대 밑으로 손을 넣어 무엇인가 꺼냈다.
그것은 피스톨이었다. 그것은 누런 가죽집 속에 들어 있었다.
가죽집에는 어깨걸이가 달려 있었다. 그는 가죽집에서 구경
9mm짜리 이탈리아제 베레타를 꺼냈다. 그것은 손질이 잘 돼 있어
어둠침침한 곳에서도 번들거렸다. 그는 침대 밑에서 또 무엇인가
꺼냈다. 그것은 원통형의 조그만 가죽집이었다. 누런 색의
가죽집에서 그는 쇠파이프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피스톨
끝에다 돌려 끼우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아주 조용했다. 그는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사나이였다. 회색 머리에 회색 눈이 그의 인상을 피가 통하지
않는 석고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다.
소음 파이프를 끼우고 난 그는 조용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들
중 아무도 그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대장이 회색 눈의 사나이
외에는 그 누구도 지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주르는 5분도 못 돼 돌아왔다. 그의 표정에서는 방을 나갔을
때와 다른 변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피스톨 끝에서 소음
파이프를 빼냈을 때 화약 냄새가 났다. 그는 파이프와 피스톨을
아까처럼 도로 침대 밑에 밀어넣었다. 그리지아도 고수머리도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형사 유화시가 집에 들렀다가 다시 H호텔에 나타난 것은
저녁 8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집에 가서 정성들여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손질하고 나니 어느
새 시간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흰 원피스에 가는 허리를 검은
띠로 졸라맨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면서도 고혹적으로 보였다.
그녀를 한번 본 남자들은 거의가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눈여겨 쳐다보곤 했다.
로비로 들어선 그녀는 프런트 데스크 쪽으로 걸어가
구내전화로 1825호실을 불렀다. 전화를 걸기 무섭게 신호가
떨어지면서 율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후 화시는 스카이라운지에 자리잡고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율무는 이미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너무 아름답습니다."
화시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그녀에게 찬탄의 눈길을
보내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뜨거운 시선에 그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멋진 외국인
남자로부터 자신의 미모에 대한 찬사를 듣고보니 사실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감시
대상만 아니라면 그녀는 밤새에 무슨 일인가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곳은 프랑스 식당이었다. 그녀는 율무가 주문해 준
이름도 모르는 식사를 하면서 표나지 않게 그를 관찰하느라고
애를 먹어야 했다. 그 레스토랑의 한쪽 구석에는 미행조의 형사
두 명이 역시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기 위해 남녀 한쌍으로 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남자 쪽이 잘 생긴데 반해 여자 쪽은 개성미가 없는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시와 마주
바라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미행조의 여형사는
세련미를 풍기는 화시와는 달리 아주 촌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촌닭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화시는 촌닭이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서투른 솜씨로 스테이크를 자르느라고
애를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미스 유, 어느 대학에 다니고 있어요?"
"Y여자대학에......"
그녀는 서툰 영어로 대답했다.
"몇 학년입니까?"
그녀는 손가락 4개를 펴보였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습니까?"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졸업 후에는 무얼 할 겁니까?"
"대학원에 진학할 거예요. 그래서 대학교수가 될 거예요."
외국인 남자는 감탄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인은 있나요?"
그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볼우물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그 남자와 결혼할 건가요?"
하고 물었다.
"아직 몰라요. 난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싶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율무에게는 그녀가 붙잡기 힘든 야생조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를 단단히 골려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지 않겠습니까?"
그가 정중히 물었다. 춤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네, 좋아요. 하지만 시간을 정해요. 10시에는 집에
가야해요."
독일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빨리 가야 하나요?"
"우리 부모님은 매우 완고하신 분들이에요. 10시까지 들어
가지 않으면 쫓겨나요. 쫓겨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10시까지
들어가는 건 부모님과 저와의 약속이에요. 난 약속을 깨뜨리는
건 아주 싫어요."
"알겠습니다."
식당을 나온 그들은 10층에 자리잡고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내려갔다.
"너무 아름다워요."
엘리베이터 속에 단 둘이 탔을 때 독일인이 그녀의 귓속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그녀가 미소짓자 그는 한손을
뻗어 그녀의 가는 허리를 껴안으려고 했다. 화시는 몸을 돌려
비켜서면서 매혹적인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안 돼요."
"너무 아름다워서 그랬습니다."
아름다운 꽃은 꺾지 말고 감상하는 게 좋은 게 아니예요,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영어로 말할 수가 없어 그대로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트클럽은 여름 날씨만큼이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테이블은 거의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차 있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그들은 무대도 잘
보이지 않는 구석자리로 가서 앉았다.
디스코 음악이 귀청을 찢을 듯 쾅쾅 울리고 있었고, 거기에
맞춰 많은 사람들이 플로어 위에서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번개처럼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 속에 사람들의 팔 다리와
머리통과 몸뚱이가 따로 떨어져 허공에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무대 위에서는 금발의 남녀 외국인 가수들이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독일인과 화시는 맥주 한잔씩을 마시고 나서 플로어로 나갔다.
율무는 눈에 띄게 춤을 잘 췄다. 그러나 거기에 못지 않게
화시도 멋지게 몸을 흔들어댔다. 그들 두 사람의 춤추는 모습은
아주 잘 어울리는 한쌍으로 금방 남들의 눈에 띄었다. 그들은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플로어에 남아 땀이 날 때까지
몸을 흔들어댔다.
세 곡을 추고 나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율무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의 손은 뜨거웠고 입과 코에서는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몹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한국에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볼우물을 지으면서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당신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난 34세......아직 결혼하지 않았어요."
그때 음악이 블루스곡으로 바뀌었다. 독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