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은신처
장길모는 거실에 서서 안으로 들어서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거실 안은 어둠침침했다. 커튼을
쳐놓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자기 아버지한테 묻는 말치고는 무례하달 정도로 날카롭고
퉁명스러운 어조였다.
"경찰에서 왔다 갔다. 너를 찾더구나."
노인은 자신의 흉한 모습을 될수록 보이지 않으려고 아들을
외면했다.
"뭐라고 했어요?"
아들의 무례한 말버릇에 노인은 익숙해져 있었다.
"없다고 했어. 여기 오지 않은 지가 오래 됐다고 했어."
"그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요?"
장길모는 눈을 부라렸다.
"다른 말이란 게 뭐 있겠니. 네 직업을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했지. 무역을 좀 하고 있다고. 가족 관계도 묻기에 지금은
혼자라고 했지."
"이혼한 이야기도 했어요?"
"경찰이 묻는데 그럼 말 안할 수가 있어야지. 가족들을 먼저
미국으로 보냈는데 결국은 가족이 헤어지게 됐다고 했지.
아이들은 네 아내가 기르고 있다고 했어."
"그런 쓸데 없는 말은 왜 했어요?"
아들은 벌컥 역정을 내면서 아버지를 노려본다. 그렇지 않아도
참혹하게 생긴 노인의 얼굴이 더욱 비참하게 일그러지고, 그
곁에서 노파는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아들의 눈치를 살핀다.
"동회에 가서 주민등록표를 본 모양이더라. 이 집에는 왜 세
식구만 사느냐고 묻길래......그걸 설명하느라고 그런
이야기까지 하게 됐지. 하지만 주민등록만 여기다 해놨지 너는
여기서 살지 않는다고 했어."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했지요?"
"아아니,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겠니. 너한테 불리한 말을 왜
하겠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길모는 무서운 눈으로 노인들을 노려보다가 위협조로 말했다.
"제발 누가 묻거든 무조건 모른다고 하세요. 나는 여기 오지
않는다고 하고 내 소식도 일절 모른다고 하세요. 무조건
모른다고 하란 말이에요. 제발 시키는 대로 해요.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예요! 누구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아들이 화를 내자 노부부는 어쩔줄 모르면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아들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들에게 아들은 난폭했다. 그는 비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고 흰 창이 많은 두 눈에는 번득이는
빛이 있었다. 그가 돌아서 나가려고 하자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경찰이 왜 너를 찾지?"
아들이 홱 돌아서서 아버지를 쏘아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노인은 도로 움츠러들었다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경찰이 너를 한번 만났으면 하더라. 연락이 되거든
전해달라고 하면서 이걸 주고 가더라."
노인은 아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명함이 한 장
들려 있었다. 길모는 그것을 거칠게 잡아채서는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하게 굳어져갔다.
"이런 건 뭐하러 받아둬요?"
그는 명함을 구겨서 던져버리고 나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계단 중간쯤에서 되돌아
내려오더니 거실바닥에 떨어져 있는 구겨진 명함을 도로
집어들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도 거실이 있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두개의 방이
있었다. 그는 오른쪽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냉방이 잘 돼
있어 시원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들은
거의 창백하게 굳은 표정을 심상치 않다는 듯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리지아가 흑발을 쓸어올리면서 영어로 물었다.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온 가는 햇빛이 그녀의 흰 얼굴 위를 가로질러 갔다.
그녀는 소퍼에 앉아 있었다.
"경찰이 왔다간 모양입니다."
길모는 유창한 영어로 대답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표정이 흔들렸다. 그들은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경찰이 어떻게 알고 왔지?"
고수머리가 눈을 굴리며 물었다.
"눈치를 챈 것 같지는 않고...... 형식상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로렌스의 죽음을 수사하다 보니까 당시 그 호텔에 투숙했던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게 된 게 아닐까요? 형식적으로라도 다
만나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잘 말해서
돌려보냈습니다."
"뭐라고 말했나요?"
"우리 아들은 이 집에 살고 있지 않고 소식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알겠다고 하면서 그냥 돌아갔답니다. 만일
의심이 갔다면 그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집안을 조사해
보고 이것저것 캐물었을 겁니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모두가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하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방안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을 보고 장길모는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너무 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마음 푹 놓고 지내십시오."
"미스터 짱!"
그리지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그를
언제나 짱이라고 불렀다. 길모는 움찔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한국에서의 은신처는 전적으로 당신한테 맡겨져 있어요. 당신
책임이란 말이에요."
"네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곳을 우리한테 제공했단 말이지요? 알아요. 당신은
이곳이야말로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증명됐어요. 경찰이 당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여긴 안전한 곳이 아니라 위험한 곳이에요!"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글라스를 거칠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글라스 안에 있던 얼음 조각들이 달그락거렸다.
길모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지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내 말을 믿어주세요.
왜 내 말을 믿지 않습니까?"
"경찰이 왔다 갔다는 사실이 문제야."
고수머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 사실이 중요하단 말이야. 경찰이 이 집을 포위했을지도
모르잖아. 우리보고 고스란히 체포되란 말인가?"
난장이가 방을 가로질러갔다. 그는 침대 위에 올라앉더니 두
다리를 흔들어댔다. 그의 조그만 두 눈이 교활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데로 옮깁시다."
회색 눈의 사나이가 말했다. 그의 눈빛은 우울해 보였다.
길모가 손을 흔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와서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기밖에는 옮길만한 데가 없어요.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한 사람이
아니고 많은 인원이 잠복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소를 찾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압니까. 제발 내 말을 믿어줘요!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있어줘요! 우리 아버지 얼굴을 보면
모두가 도망쳐요. 그보다 더 좋은 방패막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은신처를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르니까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운동선수처럼 머리를 짧게
기른 그의 얼굴은 몹시 강파르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모두가
그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너무 그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반응이 오히려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 옮길 은신처가 여기보다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더구나 미스터 짱은 여기보다 더 나은 장소는
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울 지리를 잘 모릅니다.
모든 것을 미스터 짱에게 의존하고 있는 마당에 그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계획을
처음부터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입니다. 연기를 하든가
포기를 하든가 말입니다."
"그건 안 돼요!"
사쓰마 겐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지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사람들을 차갑게 둘러보았다.
"계획을 변경할 수는 없어요! 취소할 수도 없어요! 그대로
강행할 거예요!"
고수머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신처를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여기에 있기로 해요. 그대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미스터 짱은 제2의 은신처를 빨리 마련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장길모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만일 이곳이 경찰의 습격을 받게되면 당신은 책임을
져야해요.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어요."
"알겠습니다."
장길모는 창백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세 번 울렸다가 끊어졌다.
조금 후에 다시 울렸는데 이번에는 두 번 울렸다가 멎었다.
다음에는 네 번 울렸다가 멈추었다.
네번째 울렸을 때 길모가 마침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동시에
그리지아도 다른쪽 수화기에 손을 가져갔다.
"마티스입니다."
묵직한 영어 발음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아, 박사님......미스터 짱입니다."
길모는 재빨리 대답했다.
"주문하신 설계도는 오늘 저녁 7시 45분발 JAL기편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어디서 출발합니까?"
"도꾜입니다."
"그럼 9시 45분경에 도착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은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중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머리에 녹색 베레모를 쓰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도꾜에는 지금 비바람이 몹시 불고 있습니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이쪽은 날씨가 좋습니다. 가뭄이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습니다."
"25일 전후해서 태풍이 지나간다는 기상예보가 있습니다. 한번
알아보십시오. 태풍이 오면 비행기도 운행을 못하겠지요."
"그야 당연하죠."
"자, 그럼......건투를 빌겠습니다."
길모와 그리지아는 동시에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태풍이 온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점 없던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고, 정원의 나무가지들이 한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태풍이 온답니까?"
고수머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25일 전후해서 도꾜를 지나갈 모양이에요. 마티스의
전화예요."
"그렇다면 한국에도 오겠군요?"
"정확한 것은 아직 몰라요."
그녀는 벽에 걸어놓은 세계지도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길모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기상대에 전화 걸어봐요."
하고 말했다.
길모는 전화번호부를 뒤적여 중앙기상대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걱정스런 눈길로 그리지아를 바라보았다.
"25일 오후에 태풍이 온답니다. 이번 태풍은 A급 태풍으로
한국을 정면으로 강타할지 스쳐지나갈지 아직 정확히 모른
답니다. 스쳐지나간다 해도 항공기와 배는 다닐 수 없을 거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왜 하필 25일이야!"
고수머리가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치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지아는 팔짱을 낀 채 홱 돌아섰다. 빨간 티셔츠 위로
젖가슴이 불룩하게 솟았다. 하체를 가리고 있는 청바지가
찢어질듯 팽팽했다.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에요. 태풍이라니, 왜 하필 그날
태풍이 오는 거죠?"
그녀는 남자들을 둘러보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난장이가 갑자기 다리를 흔들면서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
그의 웃음 소리는 기분 나쁠 정도로 음산하게 방안을 울렸다.
"웃지 말아요!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그리지아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난장이는 입을 다물었다.
D데이는 7월 25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A급 태풍이
몰려온다는 것이었다.
"공항에 전화걸어봐요. 25일에 비행기 운항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봐요."
지시를 받은 장길모는 김포국제공항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날이 돼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든 노선의 비행기
운항이 중지될 가능성이 크답니다."
전화를 걸고 난 길모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일본인이
피스톨을 꺼내놓고 닦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데요."
회색 눈의 사나이가 말했다.
비바람이 어느 새 정원의 수목들 위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D데이를 연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수머리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 일이 뒤틀리기만 하지."
그리지아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거실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밑으로 끌어내리자 풍만한 하체가 드러났다.
그녀는 희고 둥근 엉덩이를 변기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쉬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