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테러리스트
유화시(劉和詩)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점심때 그러니까 1시 경이었어요. 지하에 있는 책방에서
율무와 오노 다모쓰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어요."
비로소 병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부드러운
눈에 날카로운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화시는 침을 꿀컥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책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얼른
보기에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책방에 들러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빼보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악세서리 코너에서 물건을 고르는 척하면서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그들은 계속 나란히 붙어서서 책을
고르는 것보다 이야기하는데 더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어요.
이야기하는 것도 제스처를 써가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눈은 책에 가 있으면서도 입만 달싹거리는
것이었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게
보이게 말이예요."
호텔 지하에는 조그만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양복점, 잡화점, 책방, 악세서리 코너, 가방점, 스포츠 용품점
같은 것들이 들어서 있었고, 한쪽에는 서너 개의 식당도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 한 5분 정도 그렇게 나란히 서서 속삭였을 거예요.
먼저 오노가 책을 하나 사들고 밖으로 나갔어요. 율무는 책을
사지 않고 담배를 사는 것 같았어요. 그는 오노가 나가고 5분쯤
있다가 책방을 나왔어요. 그뒤 그들이 만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아까 수영장에는 오노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어요. 서로 마주쳐도 모르는 체하고
지나쳤어요. 마주치는 기회가 많았지만 한번도 인사하거나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이상한 일 아니예요?"
그녀는 동의를 구하듯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남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두꺼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이상하게 보기 시작하면 모든게
다 그렇게 보인다구요. 그건 그렇고, 아까 수영장에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 유순경 몸매가 제일 늘씬했어요."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화난 얼굴로 두꺼비를
노려보았다.
병호는 유화시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자신을 속으로
나무라면서 그녀에게 깊은 눈길을 주었다.
"나는 유순경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두 사람에 대해서는 계속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화시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 보라는 듯이
그녀는 두꺼비를 쳐다보았다. 병호가 다시 말했다.
"그 두 사람을 계속 관찰해봐요. 혼자서는 무리일 테니까 몇
사람 지원조를 붙여주지. 수영장에서는 어떻게 율무한테
접근했어요?"
"제가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어요. 그쪽에서 말을 걸어오게
만들었어요. 마침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의자 옆에 빈 자리가
나오기에 재빨리 헤엄쳐 건너가 거기에 가서 앉았어요. 그랬더니
율무가 말을 걸어왔어요. 저보고 헤엄을 아주 잘 친대요.
그러면서 저보고 아름답다나요. 콜라를 사주기에 못이기는
체하고 받아마셨어요. 자기는 비즈니스 관계로 혼자 한국에
왔는데 일을 끝내고 지금은 한가하게 쉬고 있는 중이래요.
한국은 살기 좋은 나라 같은데 도시공해가 너무 심한 것 같고
거리가 멋지지가 않대요. 영어 실력이 짧아서 다른 말들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자기는 며칠 후에 독일로 돌아갈
거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혼자 지내기가 심심한데 친구가 되어
줄 수 없느냐고 했어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완강히
거절하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 말하는 표정이 진지해
보였어요. 그리고 착한 인상이었어요. 제가 전화를 받고
수영장을 나오려고 하니까 제 뒤를 따라 오면서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두꺼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화시는 그를 흘기면서 말했다.
"약속할 수는 없다고 했어요. 혹시 모르니까 룸 넘버를
아르켜달라고 했더니 그것을 아르켜주더군요. 전화하겠다고
했어요."
"그 초대에 응해봐요."
병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에요."
"조심해요."
병호의 얼굴에 걱정하는 빛이 나타났다.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그녀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율무와 오노의 통화를 도청해 보도록 해. 그리고 그들이 눈치
못 채게 그들의 사진을 찍어 둬."
"알겠습니다."
하고 두꺼비가 하품을 참으면서 대답했다.
임시수사본부로 쓰로 있는 H호텔 2050호실은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병호는 두개의 방을 터서 사용할 수 있는 2015호실로
본부를 옮겼다.
오후 5시가 지났을 때 그는 네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일본에서 건너온 수사관들이었다. 병호는 그들을 한쪽 방으로
안내한 다음 중간문을 닫았다.
마스오(滿洲夫)라는 40대의 깡마른 사나이가 병호를 마주보고
앉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곁에 둘러앉거나 창가에 가서
기대섰다. 마스오가 그들 가운데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듯했다.
그는 검은 테의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있어서 학자 같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병호와 마스오는 영어로 이야기했다.
"사쓰마 겐지에 관한 기록입니다."
마스오는 두툼한 파일을 그 앞에 꺼내놓았다.
"감사합니다."
병호는 감사를 표한 다음 파일을 집어들고 뚜껑을 펴보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러 장의 사진이었다.
"사쓰마의 사진들입니다."
하고 마스오가 말했다.
사진에는 사쓰마의 여러 모습들이 찍혀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 티셔츠 차림, 양복 차림, 빨간 운동모를 눌러쓰고
있는 모습, 장발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 등이 나와
있었다. 그것들은 한 사람을 찍은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쓰마는 변장을 잘합니다. 이것이 제일 확실하게 나온
사진입니다."
마스오는 머리를 짧게 깎은 사진을 내보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눈썹이 별로 없고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온 길쭉한 얼굴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살기가 느껴지는 광포한
모습이었다.
"사쓰마는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이 해대는 자입니다."
병호는 마스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록을 대강 훑어보았다.
그것은 일어와 영어로 작성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만도 다섯 명을 살해했습니다. 은행 강도질을 하다가
두 명을 사살했고, 극우파 인물인 아사하라를 백주 대로상에서
칼로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경찰관 두 명도 권총으로
사살했습니다."
지명수배되자 사쓰마는 1971년 국외로 탈출하여 잠적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3년 7월이었다. 그해 7월 21일
승객 1백23명과 승무원 22명을 태운 파리발 도꾜행
일본항공(JAL)소속 점보기가 경유지인 암스테르담 공항을 이륙
직후 4인조 무장괴한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쓰마가 바로 그 4명 중에 끼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일본에 투옥되어 있는 적군파 동지들의 석방과 인질들의 몸값
39억 9천8백만 엔을 요구했는데, 당시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
공항까지 날아가 범인들과 협상을 벌인 운수성의 사토
정무차관에 의해 범인 가운데 사쓰마가 끼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협상이 끝나자 범인들은 리비아의 뱅가지공항으로 이동,
인질들을 석방시킨 다음 비행기를 폭파시켜 버렸다.
"범인들은 리비아 정부에 투항했는데, 리비아 측이 그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4년 후에야 그 처리
결과가 나타났는데, 사쓰마는 다시 건재한 모습으로 비행기를
납치했습니다."
일본측 수사관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1977년 9월 28일 5명의 테러범들이 파리발 도꾜행 JAL 소속 DC
- 8기를 공중 납치했다. 승객 1백42명과 승무원 14명이 탄 그
비행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은 소련제 AK - 47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사쓰마임이
나중에 확인되었다. 방글라데시의 대카공항에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킨 그들은 일본에 투옥되어 있는 적군과 대원들과
인질들의 몸값 6백만 달러를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그들은 알제리의 베이공항으로 날아가
알제리정부에 투항했다.
"그 뒤 사쓰마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에 죽은 줄 알았는데......
일본과 가까운 서울에 잠입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마스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나타났다. 그가 사쓰마를 몹시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말 그놈이 서울에 있다면......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놈이 한국 경찰에
걸려들었습니까?"
마스오 부장은 그것이 궁금하다는 듯 병호를 쳐다보았다.
병호는 거기에 대답하기 전에
"사쓰마 겐지라는 이름은 본명인가요?"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놈의 본명은 아모우 시로야마(天羽城山)라고
합니다. 사쓰마 겐지라는 이름은 과거에 놈이 사용하던 가명의
하나입니다."
"그자는 하이재킹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가 보지요?"
병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묻자 마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가담한 하이재킹이 확인된 것만도 두 건이나
되니까...... 그 방면에 경험을 쌓았다고 볼 수 있지요.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건수가 많을 겁니다.
서울에 잡입한 걸 보니까 일본으로 다시 들어오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말에 병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내 생각에는...... 그가 일본에 잠입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무슨 일인가 터뜨리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수사관들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병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쓰마 겐지라는 이름이 우리 수사망에 걸려든 것은 어떤
외국인의 피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겁니다."
병호는 노엘 화이트 피살사건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극비사항이라고 전제한 뒤 수류탄이 발견된 사실도
말해주었다.
"하이재킹이군요!"
이야기를 듣고난 마스오가 창백한 얼굴로 낮게 소리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표가 어떤 비행기인지,
그리고 디데이가 언제인지 그걸 알아내야겠는데 도무지......"
머리를 흔드는 병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놈이 서울에까지 잠입해온 걸 보면 일본과 가까운 곳에서
일을 터뜨림으로써 적군파 조직이 아직 건재하다는 전시효과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실 1977년 이후 적군파의 활동은
눈에 띄게 약화되어 그 존립 자체마저 의심이 갈 정도였습니다.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는데, 마침내
마각을 드러낼 모양이군요. 그런데 놈이 서울에서 일을 터뜨릴지
아니면 도꾜에서 터뜨릴지 그게 아직 드러나지가 않았군요. 그걸
알아내야 할 텐데......"
거기에 대해서는 병호도 뭐라고 단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쓰마 일당이 서울에서 비행기를 납치할 가능성이
많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서울에서는 지금까지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취약지역으로 생각되어 왔던 것이다.
"사쓰마 겐지 일당으로 생각되는 자들이 한국에 잠복해 있는
이상 하이재킹은 서울을 기점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봉쇄 조치는 취했겠지요?"
"네, 그들은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그 위조여권으로는 한국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만일 다른 위조여권을 사용하면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야 그렇지요."
병호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수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상
다른 여권을 사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작업을 해야겠군요."
"그야 당연하죠."
병호는 수사내용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보안조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류탄이 시내에서 발견된 걸 보니까 이미 무기가 반입된 것
같군요."
마스오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병호에게 던졌다. 병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무기가 들어올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걱정입니다."
"아무리 철통같이 감시를 해도 그들은 뚫고 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근교에 있는 로드공항의 감시 체제는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제일 많이 눈독을
들이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1972년 5월 30일에 일본 적군파 세
명이 바로 거기서 자동소총을 난사해서 무고한 사람 24명을
살해했지 않습니까. 그때 그들은 수류탄도 던졌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죠."
마스오의 이야기에 병호는 한숨을 내쉬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