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9화 (9/45)

9. 여형사

7월 23일 오후.

H호텔 구내에 있는 풀장 옆을 지나는데 두꺼비가 병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저 아가씨......화시 아닙니까?"

병호는 두꺼비가 턱으로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풀장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어디에 화시가 있다는 거야?"

병호가 두리번거리자 두꺼비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기 파란 파라솔 밑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아가씨 말입니다.

검정 수영복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아가씨 보이지

않습니까?"

"아, 보여."

병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옆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먼 발치에서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햇볕에 가무 잡잡하게 그을린

피부는 검정색 비키니 수영복과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하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늘씬한데요."

두꺼비가 군침을 흘리며 말했다.

병호는 화가 났다. 모든 수사관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수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판에 햇병아리 여형사가 호텔 풀장에서

한가롭게 수영이나 즐기고 있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보기에도 그녀의 몸매는 매력적일

정도로 늘씬해 보였다.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풀장 앞으로

다가서더니 몸을 똑바로 세웠다.

"정말 근사한데요. 저런 아가씨는 사실 경찰에 있기

아깝습니다."

두꺼비는 감탄하는 눈길로 화시의 몸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끌고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수영을 즐기고 있어."

병호가 화난 표정으로 말하자 그제서야 두꺼비도 제 정신을

차리고 한 마디 했다.

"네, 저건 좀 문제가 있겠는데요. 아무리 여자라고 하지만

남들은 정신 없이 돌아가는데 혼자서 저렇게 일도 하지 않고

풀장에서 노닥거리고 있다는 건 보기에 안 좋은데요. 불러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하셔야겠습니다."

"당장 불러와."

그때 여형사가 물속으로 첨벙 소리를 내면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맞은편으로 아주 능숙하게 헤엄쳐 나갔다.

"수영도 아주 잘하는데요. 언제 저렇게 수영을 배웠지."

두꺼비가 다시 감탄하는 어조로 말했다.

맞은편 물가에 닿은 화시는 벽에 부착되어 있는 쇠사다리를

붙잡고 위로 올라갔다. 물에 젖은 그녀의 몸매는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빈 의자로 다가가더니 그 위에

탐스러운 엉덩이를 올려놓는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외국인

남자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그 말에 그녀가

응수를 하면서 하얀 치열을 살짝 드러내고 웃는다. 금발의

외국인이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면서 다시 뭐라고 말하자

그녀 역시 스스럼없이 거기에 대꾸한다. 외국인 역시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코밑에는 멋지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바위처럼

넓고 단단해 보이는 가슴은 온통 털로 뒤덮여 있었다.

"저거 보십시오. 외국놈 하나 낚은 모양인데요. 가서 데려

오겠습니다."

두꺼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쪽으로 가려는 것을 병호가

막았다.

"잠깐! 내버려 둬."

두꺼비는 병호의 변덕스러움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그냥 둘 겁니까?"

"내버려 둬.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자, 여기를 뜨는

게 좋겠어."

그들은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안에다 수사본부를 설치해 두었기 때문에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편리한 점이 더 많았다.

왕형사를 먼저 본부로 보내고 나서 병호는 1층에 자리잡고

있는 그릴로 갔다. 그릴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그는 중간쯤에

앉아 있다가 창가에 자리가 비자 그쪽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쥬스를 한 잔 시켰다.

바닥에서 천장 높이에 이르는 대형 유리창을 통해 인공폭포가

쏟아내고 있는 많은 양의 물줄기가 시야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 저쪽으로 풀장이 보였다.

여형사 유화시는 아까의 그 외국인과 여전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유난히 두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외국어회화 실력이 변변치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두개의 의자는 처음보다 그 간격이 아주

좁혀져 있었다. 외국인 남자가 자기 의자를 그녀 곁으로 당긴 것

같았다.

화시는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다 포갰다. 하체의

볼륨이 남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안타깝게 흔들렸다. 외국인의

시선이 자신의 허벅지에 쏠리고 있음을 느끼면서 그녀는 다리를

풀었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포개보았다. 외국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허벅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지요?"

"율뮤......귄터 율무......당신은?"

외국인이 처음으로 물었다. 그들은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화시......"

"화시?"

그렇게 말하면서 외국인은 이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신 컬리지 걸인가?"

화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대학생이에요."

그녀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그녀의 영어실력은 형편

없었기 때문에 아주 기본적인 대화만이 가능했다.

웨이트리스가 방울이 달린 팻말을 들고 지나갔다. 쇠방울에서

달랑달랑하는 소리가 났다. 팻말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화시는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이 자기 이름인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안녕."

그녀는 외국인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인 다음 홱 돌아서서

카운터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외국인이 자신의 엉덩이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도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수화기를 들자마자 병호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하고 있는 거예요."

그녀는 별로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수영장에서 외국 남자와 노닥거리는 것도 일인가?"

그녀는 재빨리 건물 안쪽을 바라보았다.

"노닥거리는 게 아니예요. 전 아주 신중하게 일하고 있는

중이에요."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창가에 병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서서 창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어머,

엉큼한 사람. 저럴 수가 있담. 처음부터 다 봤을 거 아니야.

"본부로 빨리 올라와요."

"놀고 있는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막 한 사람 낚았단

말이에요."

"그 사람 누구야?"

"독일인 있잖아요. 귄터 율무라는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접촉했단 말이에요."

"이거 봐요. 누가 그런 식으로 접근하라고 했나. 형식적으로

한번 면담해 보라고 했지. 누가 미인계를 사용하라고 했어."

그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저는 저대로의 방식이 있어요."

하고 내뱉듯이 말한 다음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화시......"

탈의식 쪽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섰다.

독일인이 어느 새 뒤에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정색을 하고 외국인을 바라보았다.

"화시......시간 좀 낼 수 없습니까?"

그가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시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안 돼요. 가야해요."

그녀가 돌아가려고 하자 그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는 끈질긴 데가 있었다.

"지금 바쁘면 저녁에 만나줘요.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요."

"약속할 수는 없어요. 룸 넘버를 아르켜줘요. 전화하겠어요."

"1825......"

그녀는 탈의실로 들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낯선 외국인 남자를 한 명 사로잡았다는 데서 오는 만족한

회심이 미소였다.

어제부터 그녀는 그 독일인 남자를 노렸었다. 어제 병호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를 방으로 찾아갔었지만 외출중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하고 물러서면서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녀의

방식대로 한번 상대방한테 접근해 봐야겠다고. 남자 형사들은

그녀를 여자라고 숫제 무시하려고 들었다. 그녀에게는 지금까지

일다운 일이 한번도 맡겨진 적이 없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아주 쉽고 안전한 것, 그리고 남자들의 뒤치다꺼리가 그녀에게

맡겨질 뿐이었다. 모험심이 남달리 많은 그녀에게는 그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임시수사본부로 쓰고 있는 2050호실로 들어가자 경감이

뒷모습을 보이며 창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꺼비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경감이 돌아섰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 독일인을 어떻게 알게 됐지? 경찰이라고 했나?"

"아뇨. 신분을 밝혔으면 수영장까지 따라갈 필요가 없죠.

어제부터 그 사람 동태를 감시했어요. 그 사람은 외출했다가

어제 저녁때에야 돌아왔어요. 오노 다모쓰도 비슷한 시간에

돌아왔어요. 프런트에 부탁해 놓았기 때문에 그들을 알 수가

있었어요. 먼저 독일인한테 접근하기로 하고 기회를 노리다가

오늘 그 사람이 수영장에 가는 걸 보고 접근했던 거예요. 겨우

유혹했는데 반장님이 부르는 바람에 데이트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거예요."

"그것 참 안 됐군. 그래서 뭘 좀 알아냈나?"

"아뇨. 한국에 무슨 일로 왔느냐고 하니까 비즈니스로 왔다고

했어요."

병호는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가

쳐들었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해요.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력을

아껴야 해요. 공연한 일에 시간과 인력을 낭비해서는 안돼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 귄터 율무에 대해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어요. 일본인에 대해서도요. 공연한 일이었다고

판단되면 즉시 그만두겠어요. 반장님, 저한테도 기회를 한번

주세요. 제 능력을 한번 발휘할 수 있게 말이에요. 저는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어요."

방안에 있던 남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맨처음 박수를 친 사람은 두꺼비였다. 그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은

오경감 한 사람뿐이었다. 화시는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알았어요. 한번 해봐요.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병호는 다시 창쪽으로 몸을 돌렸다.

화시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을 내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 독일인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단 말이에요.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와야겠어요."

"그러다가 정말 그 남자한테 반해서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그렇게 말한 사람은 두꺼비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전 애인이 있단 말이에요."

"골 키퍼가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나."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의아한 표정이다가 이윽고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맹렬한 기세로 두꺼비한테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실내에는 한 줄기 소나기

같은 시원한 폭소가 터졌다.

병호는 그들의 웃음 소리가 등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면서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는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걸려들어야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걸려들지 않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외국인은 전국 어디를 가나 그 신분이

노출되게 마련이다. 일단 수배대상에 오르면 숙박업소가

아니더라도 노상에서 검문검색을 당하기 때문에 금방 걸려들고

만다.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그들을 발견했다는 보고는

아직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토머스 러트, 사쓰마 겐지, 프레드릭 마주르 -- 이들 세 명을

체포하기 위해 현재 전 경찰력이 동원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좀처럼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만일 숙박업소에 투숙해 있지 않고 어느 민가에

잠복해 있다면 당분간 찾아내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또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위조여권을

사용하고 있을 경우이다. 그 경우에도 찾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뒤에서 유화시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노 다모쓰는 1938호실에 투숙하고 있고 귄터 율무는

1825실에 투숙하고 있어요.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 것

같아요. 그런데 어제 제가 그들의 방을 찾아 갔을 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외출하고 없었어요. 그때가 아침 9시 조금

지나서였어요. 그리고 저녁때 거의 같은 시간에 돌아왔어요."

"우연이겠지 뭐."

하고 두꺼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또 하나 있어요."

거기에 반발하듯 화시가 날카롭게 말했다. 병호는 그녀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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