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5화 (5/45)

5. X의 의미

경비원이 가고 난 뒤 병호는 객실 담당 지배인과 프런트

계원을 불러들였다.

프런트 계원에게는 현재 H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모든 손님들의

숙박카드를 가져오게 했다.

H호텔에는 객실이 485개 있었다. 그중 손님들이 투숙하고 있는

방은 412개 실이었다.

병호는 412장의 숙박카드 가운데서 2049호실 투숙객의

숙박카드를 집어들었다. 그 카드에 적혀 있는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이름=Thomas Rut(토마스 러트)

* 국적=미국

* 성별=남자

* 생년월일=1951년 4월 10일

* 출생지=이란

* 여권번호=05736057X

카드에 적힌 투숙일자를 보니 이틀 전인 7월 18일에 투숙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미국인이 투숙했군요?"

병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배인과 프런트 계원을 쳐다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하고 프런트 계원이 대답했다.

"떨어져 죽은 사람이 49호실에 투숙했었나요? 이 카드, 그

사람 것 맞습니까?"

병호는 두 사람에게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닌 것 같습니다."

지배인이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닌 것 같다니요?"

병호는 눈을 똑바로 뜨고 지배인을 쳐다보았다.

"투숙객이 많다 보니까 수백 개의 방에 누가 투숙하고 있는지

일일이 얼굴을 기억하기가 힘듭니다. 숙박카드에 사진을

붙여놓는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는 이상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해 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배인의 말을 받아 프런트맨이 입을

열었다.

"네, 그렇습니다. 지배인님은 우리보다 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투숙하러 오는 손님들을 프런트에서 직접 맞고

있는데도 그 손님들의 얼굴을 방 호수에 따라 일일이 기억하기가

힘듭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말입니다. 유명한 사람이

투숙했다거나 또는 좀 특별하게 생긴 사람이 투숙하면 그 방

호수를 기억할 수가 있죠. 그런데 일반 투숙객들은 호수별로

얼굴을 기억하고 있기가 힘듭니다."

병호는 그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테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49호실에서 떨어져 죽은

외국인의 몸에서는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과연 이 카드에 적혀

있는 미국인 토머스 러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그것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근거에서

추락사한 외국인이 49호실 투숙객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했죠?"

"벨맨한테 들었습니다. 벨맨이 마침 49호실 손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 벨맨을 좀 불러주겠어요?"

잠시 후 벨맨이 연락을 받고 올라왔다.

호텔 제복 차림의 그는 여자 뺨칠 정도로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가 49호실 손님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그 이유라는 것이 알고 보니 민망스러운 내용이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저한테 10달러 짜리 지폐를 팁으로 주면서 방으로

식사를 날라다 달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은 안 되고 제가 직접

식사를 가져와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주문한 것을 가지고

갔더니 그 사람이 저를 껴안으면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어요."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수사에 필요해서 그러니까 숨기지 말고 다 이야기

해요. 여긴 남자들만 있으니까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괜찮아요."

병호의 말에 벨맨은 용기를 얻어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걸 꺼내 흔들면서 저보고 옷을 벗으라는 거예요. 제가

싫다고 하니까 저를 침대 위에 쓰러뜨려 놓고 강제로 옷을

벗기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들으면 1백 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겨우 뿌리치고 도망쳐 나왔죠."

"그게 언제 일이었습니까?"

"어제 저녁때 그랬습니다."

"49호실에서 떨어져 죽은 외국인을 봤나요?"

"네, 봤습니다. 봤는데 49호실에 있던 그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틀림없습니까?"

"네, 틀림없습니다. 떨어져 죽은 사람은 금발이던데 49호실 그

손님은 금발이 아니고 흑발이었습니다. 저에게 손을 대려고 한

걸 보니까 호모 같았습니다."

병호는 프런트 계원을 돌아보았다.

"49호실 손님은 어떻게 됐나요? 체크 아웃했나요?"

"아직 체크 아웃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안에서는 토머스 러트의 짐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방 열쇠만 방안에 있었습니다."

쉽게 간단히 생각하면, 49호실 투숙객인 토머스 러트라는

인물이 아직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외국인을 살해하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 호모의 생김새와 옷차림을 생각나는 대로 한번 말해봐요."

"검은 머리에 키는 중키였고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턱에 시커먼 수염을 수북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얼굴은 긴

편이었고 눈은 푸른 빛이었습니다. 옷차림은 로비에서 한번

보니까 검정 바지 위에 흰 저고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 토머스 러트는 혼자서 49호실에 투숙하고 있었고,

23일까지 투숙하기로 예약되어 있었다. 그는 23일까지 숙박료를

이미 지불해 놓고 있었다.

자정이 지났을 때 밖에 나갔던 왕형사로부터 임시본부로

전화가 걸려왔다.

"민태식 씨한테 시체를 확인시켰습니다. 수류탄을 두고 내린

그 외국인이 틀림없답니다!"

왕형사는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방안에 있는 수사관들을 둘러보았다.

"죽은 외국인의 신원이 밝혀졌어요. 이름은 노엘

화이트......"

그러나 412장의 숙박카드 가운데 노엘 화이트의 것은 보이질

않았다.

날짜는 자정이 지나 7월 21일로 접어들고 있었다.

밤새 병호는 잠 한숨 못 자고 바쁘게 지냈다. 그는 수사요원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범인과 일대 일로

대결한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노엘 화이트를 살해한 제일의 용의자는 토머스 러트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수사요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토머스 러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는 왜 노엘 화이트를

살해했을까? 그 혼자서 노엘 화이트를 해치웠을까?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범인이 토머스 러트일 가능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져 갔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호텔 방에 돌아와야 마땅하다. 그런데

날이 샐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종적을 감춘

것이다.

"토머스 러트라는 이름의 미국인 남자를 긴급수배할 것.

여권번호는 05736057X. 일급 살인용의자임. 발견 즉시 체포할

것."

이것은 밤새 전국 경찰에 내려진 토머스 러트에 대한 긴급

수배명령 내용이었다.

경찰은 러트가 아직 서울에 숨어 있을 것으로 보고 특별히

서울 일원에 비상망을 펴는 한편 그가 국외로 탈출할 것에

대비해 공항과 항만을 봉쇄했다.

병호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게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심각한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증거는 피살자가 외국인이고 제1용의자 역시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두번째 증거는 피살자가 수류탄을

가지고 다니다가 그것을 잃어버린 후에 살해되었다는 점이었다.

세번째는 공범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피살된 노엘

화이트는 혼자 상대하기에는 너무 몸집이 큰 사나이였다. 그런

사나이를 혼자 상대하여 처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피살자는 그 상처나 현장 상황으로 보아 단번에 총을

맞고 피살된 것이 아니었다. 방안에는 격렬한 격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살된 사람의 몸에도 그런 흔적은 있었다.

조사결과 피살자는 나중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격투를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권총을 맞고 밑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두개의 총알이 노엘 화이트의 등을 관통하고 있었다.

20층에 투숙하고 있는 손님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지만

총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소리가 나지 않는 총에 맞은 것이 분명했다.

소음권총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범죄자들한테는 그런 무기가 없다. 그만큼 그것은 구하기 힘든

무기이다. 따라서 소음권총을 소지한 자는 특별한 인물로 볼

수밖에 없다. 특별한 임무를 띤 스파이이거나 고도의 훈련을

받은 테러리스트, 아마 그런 부류의 인물일 것이다.

노엘 화이트의 목숨을 끊어놓은 치명적인 상처는 물론 등을

관통한 총상이었다. 그밖에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지만 목에도 꽤

큰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을 검사한 전문가는 거기에 대한 검사

결과를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살인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사용된 무기는 철사줄

보다 더 튼튼한 줄입니다. 그런 줄은 전문가들이 사람을 소리

없이 죽일 필요가 있을 때 사용하는 것인데 뒤에서 번개같이

빠른 솜씨로 목을 휘어감고 죄면 그 줄이 살을 파고들어 수분

안에 목을 끊어놓고 맙니다. 그 줄에 목이 일단 감기면 벗어나기

힘들죠. 줄을 이용한 살인기술은 고도의 훈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게릴라 요원이나 스파이 또는 테러리스트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입니다. 노엘 화이트가 그런 줄에 감겼으면서도

목이 잘리지 않은 것을 보면 살인자가 실수를 했던가 화이트가

공격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했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줄로 화이트를 살해하는데 실패한 범인은 미쳐 날뛰는

화이트를 향해 미처 권총을 빼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소음권총을 발사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처음부터 권총을 이용하려 했다면 굳이 줄로 목을 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줄로 소리 없이 화이트를 살해하는데 실패하자

함께 있던 공범이 권총을 꺼내 그를 쏘았을 것이다. 공범은

화이트의 뒤쪽에 있었고, 그래서 등을 향해 총을 발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총에 맞은 노엘 화이트는 어떻게 해서 20층

높이의 방에서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을까?

그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릴 수가 있었다. 우선 많은

목격자들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풀장 가에서 야외

뷔페를 즐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대형 유리창이

깨지는 것과 함께 피살자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먼저

떨어지기 전에 그보다 먼저 유리창이 깨졌고, 그 유리 파편들이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했다. 그런 다음 1,2분 쯤 지나서야

피살자가 비명을 지르며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방안에는 상처 투성이의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뒹굴고

있었는데 상처가 여기저기 날카롭게 나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으로 대형 유리창을 깬 것 같았다. 대형 유리창은 1센티

정도의 두께여서 주먹을 휘둘러 깰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범인들이 의자로 유리창을 깬 다음 노엘 화이트를

창밖으로 내던진 것일까? 범인들이 잔인하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행동은 범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외부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총에

맞아 죽어가는 그를 굳이 창문을 깬 다음 밖으로 내던짐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그만큼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창문은

노엘 화이트가 깬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출입문이 막히자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날리기 위해 의자로 유리창을 후려쳤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총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창틀 위에는

구두 발자국이 나 있었다. 검사 결과 그것은 피살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급해진 노엘 화이트는 의자로 창문을 부순 다음 창틀 위로

뛰어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해도 순간적인 판단은 할 수 있는 법이다. 노엘 화이트는

20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거기에 대한 해답으로 병호는 풀장을 생각해냈다. 피살자가

다이빙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면 그 방에서 풀장으로 뛰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화이트는 그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 방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중간에

총이 발사된 것이고, 그래서 그는 밑으로 굴러떨어진 게 아닐까?

그가 일부러 밑으로 뛰어내렸다면 그렇게 비명을 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자진해서 뛰어내리기 전에 등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밑으로 굴러떨어졌던 게 아닐까?

목격자들은 소름끼치도록 처절한 비명을 들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저런 증언들과 증거로 보아

범인은 2명 이상일 것이라고 병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범인들은 H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날이 새자 병호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차 속에서 그는 노엘 화이트가 살해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생각에 불과했지만 수류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살해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수류탄이 어떤 목적을

노린 것이라면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대단히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그는 패스포드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경찰에 노출시키고 말았다.

범인들은 수류탄과 노엘 화이트의 패스포드가 이미 경찰의

손에 들어갔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안전을

위해 화이트를 제거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건 그렇다하고

노엘 화이트를 포함한 그들 일당은 도대체 그 수류탄으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을까? 그들이 노린 그 목적을 X라고 하자. 노엘

화이트가 수류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그 X도

포기했을까? 그는 그들이 X를 포기했다고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노엘 화이트를 살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들이 X를 포기했다면 그 길로 바로 국외로 도망쳐버리면 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이트를 살해한 것이다.

도대체 X는 무엇일까?

수류탄이 노리는 것은 파괴와 살상이다. 그들은 파괴와 살상을

노리고 있다. 무엇을 파괴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누구를

죽이려는 것일까? 엄청난 사건이 곧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그를 휩싸안았다.

그는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면서 흑하고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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