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4화 (4/45)

4. 유언

그날밤 오병호는 카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앉아 있었다.

밤 9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는 스탠드 위에 동전을 두개

놓고 앉아 있었다. 그는 열심히 그것들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만지작거리기도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것들은 외국 동전들이었다. 하나는 5프랑 짜리 프랑스

동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10페세타 짜리 스페인 동전이었다.

프랑스화의 앞면에는 나뭇잎이, 그 뒷면에는 씨뿌리는 여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스페인화의 앞면에는 왕관과 휘장이

그려져 있었고 그 뒷면에는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옆 얼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그가 노엘 화이트의 가방 속을

검사할 때 아무도 몰래 슬쩍한 것들이었다. 그 가죽가방

바닥에는 적지 않은 동전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그는

아무렇게나 두개를 집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화이트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는 증거들이었다.

그는 스페인에도 있었고 프랑스에도 있었다. 그리고 또 그밖에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극동의

한국에까지 와서 수류탄이 들어 있는 가방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뭘 그렇게 들여다보세요?"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바텐 일을 보고 있는 여인이 물었다.

병호는 대답대신 미소를 지으며 동전들을 만지작거렸다.

"그게 뭐예요? 어디 좀 봐요."

동전을 받아든 그녀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외국 동전 아니예요?"

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잔을 들어 위스키를 입속에

조금 흘려넣었다.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이거 하나만 저 줄 수 없어요?"

그녀가 프랑화를 내려놓고 스페인 동전을 손으로 꼭 쥐었다.

"안돼요."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가 너무 분명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어머, 아주 중요한 것인가 보죠? 동전 수집하세요?"

"아니, 그렇지는 않아요."

그는 동전들을 집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서비스예요."

그녀가 빈 잔에 위스키를 따르며 말했다. 그녀는 그의

글라스에 얼음 조각을 한 개 떨어뜨리고 나서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사건 아직 해결되지 않았나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건이란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카페의 오랜 단골인 만큼 그녀는 그의 표정의 변화에 아주

민감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손님들보다도 그에게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신경을 쓰기는 병호도 마찬가지

였다. 신경을 쓴다기보다도 그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그 카페에 드나드는 것도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좋아한다는 것을 내색하거나 말로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속마음 깊숙이 그녀에 대한 감정을

가라앉혀 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카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이혼한 전력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가 이혼한 것은 3년 전인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였다. 그때 그녀에게는 네 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다. 남편은

그 딸과 약간의 위자료를 그녀에게 주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남편의 새 여자는 재미교포 처녀였다.

안계화(安桂花)는 1년 동안의 외롭고 괴로운 방황 끝에 지금의

카페를 차렸다. 병호는 그 카페에 처음부터 출입했다. 그리고

여주인 계화가 마음에 들어 계속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도 그는 특별한 손님이었다. 아니, 이제는

손님이라 할 수 없는, 그녀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특별히 취급되거나 또는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도, 그리고 그녀도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실내에는 별로 손님이 없었다. 그 카페가 손님들로 흥청거리는

것을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뒷골목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카페는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호로서는 손님이 별로 없는 그 조용한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전화벨이 울리더니 계화가 전화통을 병호 앞에 갖다 놓는다.

"전화왔어요."

병호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나서 수화기를 받았다. 그것은

왕문수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왕형사는 그가 허물 없이 대하는 그의 부하이자 파트너였다.

"거기 계시는군요."

"이리 오지 그래. 한 잔 하게."

"거기 갈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이 또 터졌습니다."

"무슨 일이야? 오늘은 그만해 두고 좀 쉬자구."

"아무래도 저하고 함께 어디 좀 가야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이 시간에 어딜 가자는 거야?"

"H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피살된 사람이 금발의

젊은 외국인이랍니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는데 알아보니까

수류탄을 두고 내린 노엘 화이트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H호텔에서 만나!"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계산을 치른 다음 아무 말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신 없이 뛰어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카페의

여주인이 멀거니 쳐다보았다.

밖으로 나온 병호는 골목에 주차해 놓은 고물차(일명 콜롬보

차)를 차도로 끌어냈다.

병호가 H호텔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피살체는 호텔 풀장 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방치되어 있다기보다는 이미 숨이

끊어졌기 때문에 추락 당시의 현장 상황을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기 위해 그대로 그곳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옳았다.

풀장 주위에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경찰관들로

차단벽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차단벽 안에서는 계속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어느 새 알고 달려온 기자들이 한

컷이라도 더 찍으려고 피살체에 벌떼처럼 달라붙고 있었다.

병호는 차단벽을 뚫고 들어가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경찰관이

피살체 위로 시트를 덮으면 기자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것을

젖히곤 하는 바람에 큰 혼란이 일고 있었고, 그때문에 사체를

자세히 관찰하기가 힘들었다.

"화이트의 인상착의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느 새 다가왔는지 왕형사가 그의 곁에 붙어서서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병호는 말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사체는 눈 뜨고 보기에는 너무도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에 길게 상처가 나있고 등에 두 발의 총알을 맞은 것

같습니다. 여길 보십시오."

왕형사는 등에서 가슴 쪽으로 뚫고나온 두개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았다. 그런 다음 손을 위로 쳐들었다.

"저깁니다. 20층에서 떨어졌습니다. 대형 유리창이

박살났습니다."

빌딩의 바로 밑에서 올려다보니 창문이 떨어져나간 20층의

방이 까마득히 높아보였다. 사람들이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0층 49호실입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와지더니 앰뷸런스가 호텔 구내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오병호와 왕문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으로 올라갔다.

"화이트가 분명하다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왕형사가 말했다.

그는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살이

쪄서 배가 튀어나오고 코와 입이 큰데다 부리부리한 눈 위에

검은 테의 안경까지 걸치고 있어서 그의 인상은 영락없이

두꺼비를 연상케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두꺼비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는데, 본인이 그 말을 싫어하기 때문에 그의

동료들은 그가 듣지 않는데서만 그를 두꺼비로 부르고 있었다.

그 인상때문에 그는 여성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고 그래서

서른이 넘도록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있었다.

"화이트가 틀림없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

엘리베이터를 나서면서 병호가 말했다.

그들은 2049호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의 복도 입구에는 정복 경찰관들이 서 있었고, 그들은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었다.

2049호실은 경찰 수사관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가

맡고 있는 분야에 따라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더니 전화를 받은 수사관 한 명이 병호를 찾았다. 병호는

그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거기 있군요."

늙은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아, 네, 지나다 들렀습니다."

병호는 수화기에다 대고 공손히 말했다.

"여느 살인사건하고는 성격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어. 국제회의가 빈번하게 열리고

외국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외국인이 그런 식으로 살해

됐다는 건 이미지 메이킹에 아주 나쁜 영향을 준단 말이야.

외국인들은 그런데 아주 델리케이트한 반응을 보이거든."

병호는 상대방이 이야기를 할 때 외국어를 섞어쓰는 것을 좀

삼가줄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대화 속에 외국어를 많이 섞어쓰는 버릇이 있는데,

병호는 언젠가 한번 그 점을 지적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그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스피드하고 명쾌하게 그 사건을

해결해 보여야겠어. 그래야만 한국 경찰의 이미지를......"

"저기 말씀하실 때......"

"......실추시키지 않을 거란 말이야. 아무래도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 같으니까 각별히 신경을 써서 신속히 범인을

잡아내줘요."

"저보고 이 사건을 맡으라는 말입니까?"

"이미 시작하고 있지 않나. 지금 맡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H호텔 건을 맡도록. 관할서는 물론 각

경찰서에서 민완형사들을 모두 차출해서 합동으로 수사를 벌이는

거야. 이미 지시를 내렸어. 나는 데스크 위에 앉아 있는

로보트니까 오형사가 지휘를 하란 말이야. 부족한 것은 모두

말해.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까. 각서에서 차출한 인물들을

컨트롤하는 게 좀 힘들겠지만......"

그 다음 말은 너무 시끄러워서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좀더 크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

놓고 복도로 나가 왕에게 말했다.

"보스가 나보고 이 사건을 맡으라는 거야."

"잘 됐군요."

두꺼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병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새로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상관을 보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어떤 조직의 보스처럼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수류탄을 신고한 운전사 말이야.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병호가 수첩을 꺼내려고 하자 왕이

"민태식입니다."하고 말했다.

"음, 민씨를 빨리 데려와서 피살체를 확인시켜."

피살체의 얼굴은 피투성이였기 때문에 노엘 화이트의 여권에

붙어 있는 사진만으로는 확인이 어렵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죠?"

"관할서에 연락해 봐."

그는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격렬한 격투가 벌어졌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회색

카피트에는 여기저기 피가 묻어 있었고, 탁자며 의자 같은

것들이 제멋대로 나뒹굴어 있었다.

병호는 2049호실 바로 옆방인 2050호실에 임시수사본부를

설치했다. 그의 보고를 받은 보스는 방값이 꽤 비싸지

않겠느냐고 말했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라고

그의 말을 일축했다.

"얼마든지 지원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다그치는 말에 상대방은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병호는 먼저 달려와 대충 조사를 마친 관할서의

수사관들로부터 간단히 보고를 받은 다음 호텔 경비원을

불러들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보고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격이다.

불려들어온 경비원은 이재문(李在文)이라고 하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외국인이 떨어졌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서 그 사람을 안아

들었습니까?"

"네, 음식을 진열해 놓은 식단 위에 떨어졌기에 안아서 밑에다

내려놨지요."

"그때까지 그 사람이 살아 있었나요?"

"네, 살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한테서 무슨 말인가 들었다면서요?"

"네, 들었습니다."

"어떻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기에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말해보라고 소리쳤지요. 스피크 스피크하고

소리치니까...... 그 사람이 에어 에어 했습니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몇 번 그렇게 말했습니까?"

"처음에 두 번 했고, 나중에 또 한 번 에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모두가 병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호는 시계를 보았다.

밤11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는 깊은 눈길로 이재문을 응시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겁니다. 그 외국인이 죽기 전에 분명히

에어라고 했습니까?"

"네, 분명히 에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습니까?"

"그 다음 말은 없었습니다."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표정이 아니던가요?"

"네, 그랬습니다. 몹시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비원은 그에게 거수경례를 한 다음 물러갔다.

병호는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수사관들을 둘러보았다.

"피살된 그 외국인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에어라는 말은

공기라는 뜻인데......"

"그 뒤에 다른 단어가 붙으면 뜻이 아주 달라집니다."

젊은 수사관이 말했다.

"그 달라진 뜻을 알아내야 해. 그게 열쇠일지도 몰라."

병호는 그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들을 다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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