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3화 (3/45)

3. 외국인의 죽음

사과 조각은 그대로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빨리 먹으라니까!"

여인이 포개놓은 다리 하나를 흔들면서 말했다. 검정 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미끈해 보였다. 위에는 코발트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흰 상아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귀에도 무거워 보이는 귀걸이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빨갛게

매니큐어를 칠한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이트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원망서린 눈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사과를 씹기 시작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그녀와 가졌던

화려한 밤을 생각했다. 그의 밑에 깔려 환희에 몸부림치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불과 열흘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수없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면서 마치 개를

대하듯 사과 조각을 던져주고 먹으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최대의 모욕이었다. 그리고 죽음의 선고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와 관계를 가졌던 남자를,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남자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 표변에 화이트는 놀라고 있었다.

그날 밤의 일을 생각해서라도 죽음만은 면해 주는 자비를

베풀어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화이트는

혹시 그녀가 잊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죽는 마당에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지아, 그 날 밤 일을 잊었습니까? 당신은 내 품에 안겨서

나를 사랑한다고 수없이 되풀이해 말했지요? 그 일을

생각해서라도 한번만 나를 용서해 줘요. 용서해 주면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어요."

그는 울면서 말했다. 그리지아는 마지막 사과 조각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로렌스, 가여운 로렌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보군요. 나와

사랑을 나눈 사람이 어디 한 둘인지 알아요? 이 방에 있는

남자들 모두가 나와 사랑을 나누었어요. 나는 물론 그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건 빈 말이 아니예요. 정말 나는 모두를

사랑해요. 로렌스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침대에서의 이야기예요. 그것을 공적인데 적용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나는 내 남편이나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 봐준다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해를 끼치는 행위이고 우리 모두의 안전을 해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하고

결속될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규율이 적용되기

때문이에요. 로렌스, 착각하지 말아요. 내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예요. 하지만, 하는 수 없어요.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말아요. 그건 남자답지 못한 너무 비굴한 눈이에요. 내가

당신처럼 비굴한 남자와 관계를 가졌다니 부끄러워요."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리지아!"

금발의 청년은 여자 쪽으로 개처럼 기어갔다.

"빨리 없애버려요!"

운동선수처럼 머리를 짧게 기른 동양인이 소리쳤다. 그는

일본인이었다.

"우리 조직은 이런 경우에 아주 엄격합니다. 자결할 기회를

주고, 본인이 자결을 거부하면 대신 죽여줍니다."

일본인이 덧붙여 말했다. 그는 다른 조직의 대원으로 이번

일을 위해 서울에서 합류한 사람이었다.

"우리도 그럼 자결할 기회를 주도록 해요."

그리지아가 사과를 깎던 칼을 금발 앞에 던졌다. 뒤에서

난장이가 뒤통수에다 권총을 들이댔다.

"허튼 수작하면 쏴버려!"

고수머리가 말했다.

금발은 칼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움켜쥐고 한동안 몸을

떨어대다가 이윽고 그것을 복부에 갖다댔다. 사람들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떨어대기만 할

뿐 끝내 그것으로 자기 배를 찌르지는 못했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칼이 굴러떨어졌다.

그때 뒤에서 난장이가 가는 줄로 그의 목을 휘어감았다.

난장이는 빠르고 힘차게 그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난장이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줄로 소리 없이

사람목을 죄어 죽이는데 뛰어난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솜씨는 아주 정확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실수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목을 죄는데 사용하는 줄은 특수한 줄이었다.

그것은 실처럼 가늘면서도 결코 끊어지지 않는 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을 파고드는 특징이 있었다. 난장이가 그 줄로 힘껏

목을 죄면 2분 안에 상대방의 목을 끊어놓을 수가 있었다.

기습을 당한 금발은 뒤로 나자빠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두

손으로 줄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줄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목과 손가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붉은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냉담한

눈으로 금발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줄은 피에 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금발의 얼굴이 점점 보라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금발의 상체가 뒤로 활처럼 휘어졌다. 피가 그의 노란

티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금발이 끙하고 힘을 주면서

뒤로 뻗었다. 난장이는 그의 등에 깔려 뒤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금발의 목에 감겨 있던 줄이 풀렸다. 금발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회색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자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금발을 겨누었다.

"안 돼! 총소리가 나면 안 돼!"

그리지아가 소리쳤다. 일본인이 재크나이프를 펴들었다. 회색

눈의 사나이는 권총 끝에 소음 파이프를 끼우기 시작했다.

고수머리는 안타까운 눈으로 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로렌스, 용사답게 죽어라. 소용 없는 짓이야."

"죽을 수 없어!"

금발은 소리치면서 의자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휘두르면서

창문 쪽으로 접근해 가더니 그것으로 대형 유리창을 후려갈겼다.

유리창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깨졌다.

"로렌스, 안 돼!"

그 아래에는 호텔의 풀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까마득히

아래쪽에 있었다. 풀장의 주위에는 야외 뷔페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풀장으로 뛰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금발이 창틀 위로 올라섰다. 그를 붙잡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회색 눈의 사나이가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탄환은

금발의 등을 관통했다. 소음 파이프를 끼우고 발사했기 때문에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회색 눈은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등에 두 발의 총탄을 맞은 금발은 비틀하다가 창문 아래로

사라졌다. 처절한 비명이 길게 이어지다가 바깥 소음 속으로

묻혀버렸다.

금발의 몸뚱이는 가득 음식을 차려놓은 식단 위로 떨어졌다.

그전에 사람들은 머리 위에서 대형 유리창이 깨져 유리 조각이

떨어지는 바람에 한쪽으로 피해 있었다. 거구가 20층 높이에서

굉장한 속도로 떨어져 부딪치는 바람에 식단 위에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여기

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야외 뷔페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용감한 호텔 경비원 한 명이 부서진 식단 위에 엎어진 금발을

끌어내려 바닥에 바로 눕혔다. 금발은 그때까지 죽지 않고

가늘게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와 음식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금발이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비원은 그를 잡아 흔들며 그의 입에다

바싹 귀를 갖다댔다.

"말해봐요! 스피크! 스피크!"

그는 얻어들은 서툰 영어로 소리쳤다. 금발이 입술을

움직였다.

"에어......에어......"

그것은 거의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였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다시 한번 말해 봐!"

"에어......"

처음보다 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다음 금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은 그대로 벌어져 있었고 두 눈은 허공을 향해 열려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20층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고 나서 호텔 경비원들과

종업원들이 잠겨 있는 2049호실 문을 마스터키로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1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형 유리창이 깨져나간 쪽에는 밤의

열기가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나가요! 경찰이 올 때까지 모두 나가 있어요! 어떤

것에도 손을 대면 안 돼요!"

객실담당 지배인이 사람들을 모두 밖으로 몰아낸 다음 문을

잠갔다. 그리고 문앞에 두 명의 경비원을 세워놓았다.

복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었다. 20층에 투숙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층에서 구경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무서워요. 정말 끔찍한 일이에요."

미국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어깨를 움츠리면서 옆에 서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네, 정말 소름끼치는 일이에요."

브라운 색깔의 안경을 낀 여인이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구경꾼들 속에 섞여 있었다.

"빨리 호텔을 나가야겠어요. 이런 호텔에서 무서워서 어떻게

지내요."

미국인 중년 부인이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코발트색의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

조금 후 경찰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구경꾼들을 쫓았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지아도 못 이기는 척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비상

계단을 통해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뒤돌아보는 법없이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은

남자가 유혹을 느낄 만큼 늘씬해 보였다.

조금 후 그녀는 1933호로 들어섰다.

방안에는 고수머리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수라장이 된 야외 뷔페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경찰이 왔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스타트가 불안한데요."

그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이마에 깊이 잡혀 있는

주름살이 꿈틀거렸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모두가 연기를 하든가 포기하든가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입니다. 대원들 의견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고......

마음이 안 놓입니다. 모두가 동요하고 있어서 과연 작전이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녀는 몸을 홱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 따위 말이 어딨어요? 한 사람 죽었다고 이렇게 대장부터

동요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모두 죽고 한 사람만 남더라도

작전은 결행할 거예요. 나 혼자 남더라도 결행할 거예요. 분명히

말해 두는데......이번 작전을 포기하지도 않고 연기하지도 않을

거예요. 예정대로 결행한다고 말하세요. 당신은 대장이에요.

대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으면 어떻게

부하들이 따라오겠어요. 정말 한심해요."

대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왕방울 같은 눈이

디룩거렸다.

"겁에 질려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는 화가 나서 바지에 두 손을 찌른 채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겁에 질린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한 손을 흔들어댔다.

그리지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연기를 내뿜으면서

대장의 움직임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는 용기만 있지

머리 쓰는 것은 좀 둔한 편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패하면 개죽음을 당할 필요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그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그녀는 그가 계속 말하게

내버려두었다.

"한국 경찰은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포착했어요. 파인애플,

로렌스의 패스포트, 로렌스의 죽음......그밖에 로렌스의

유품들이 지금 경찰 손에 들어가 있어요. 어떤 음모가 계획되고

있다는 것을 경찰은 금방 알 수가 있는 거예요."

"경찰 수사는 그 이상 발전할 수 없어요. 한국 경찰의

수사력은 전근대적이고 형편 없다고 들었어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녀를 두고

'지옥의 악마'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말을 몹시 싫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들끼리는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때가 많았다.

그녀의 겉모습은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유빛 피부에 새까만 머리, 검은 눈썹, 검은

눈, 오똑한 코 등이 그녀의 윤곽을 뚜렷이 만들어놓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크고 검은 두 눈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자들은 투명하게 빛나는 그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그 눈속으로 깊이 빨려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어느 때의 그 눈은 투명한 빛이 사라지고

꿈꾸듯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마치 죽음의 호수를 연상케

한다. 그녀의 성적 매력에 몸살을 앓는 대원들이 많았다.

그녀의 열정과 몸의 유연성,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높은 신음

소리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를 완전히 정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남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그 많은 남자들을 데리고 놀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한국 경찰의 수사력을 그렇게

낮게 평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국은 치안 상태가 최상에 속해

있는 나라입니다. 밤 늦게 돌아다녀도 아무 사고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경찰력이 안정된 바탕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잖아요. 한국 경찰이 우리의 목적을

알게 될 거라 이 말인가요? 그래서 우리가 거사도 하기 전에

우리를 일망타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녀가 너무 정확히 지적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하는 거예요. 나는 하고 말거예요. 다른 사람들한테

그렇게 전해요."

그녀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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