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2화 (2/45)

2. 임시본부

거리의 가로등과 쇼윈도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해가 졌는데도 거리에는 여전히 후덥지근한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금발머리를 짧게 올려친 젊은 외국인

남자는 길 건너편에 있는 25층짜리 특급호텔을 두려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끼고 있는 안경이 불빛에 반사되어 잠깐 동안

하얗게 빛났다. 허우대가 큰 외국인이었다. 위에 걸치고 있는

노란색 티셔츠의 등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밑에는 꼭 끼는

낡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사파리를

오른쪽 어깨 위에 걸치면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8시

15분전이었다. 예정된 시간에서 무려 여섯 시간이나 지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두려운 눈빛으로 길 건너편에 우뚝 솟아

있는 H호텔을 올려다보았다.

그 호텔은 그와 그의 일행이 임시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경험상 외딴 곳보다는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호화

호텔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그곳을

임시본부로 정했던 것이다.

그는 그들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그 호텔 안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이유는 물건을 잃어버린데 대한 책임을 지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지들을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망은 곧 배신이기

때문에 더욱 가혹한 보복을 받게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여권까지 잃어버렸기 때문에 조직의 도움이 없이는

한국을 빠져나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거기에 대한 벌을 받은 다음 도움을 청하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 그는 마침내 길을 건너갔다.

호텔 로비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로비를 한번 훑어본

다음 그는 구내 전화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방은 20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호가

울리기가 무섭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이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로렌스입니다."하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끼리 통하는 그의

또다른 가명이었다.

"로렌스, 어떻게 된 일이야?"

격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상적인 말은 영어로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더듬거리듯 말했다.

"무슨 문제야?"

영어가 갑자기 아랍어로 바뀌었다.

"저기......."

"잠깐! 거기 어디야?"

"로비에 있습니다."

"왜 올라오지 않고 거기에 있어?"

"단 둘이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지 말고 올라와."

"먼저 이야기를 끝낸 다음 올라가겠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결과에 따라서는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심각한 말이었다. 상대방은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그릴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혼자 내려오셔야 합니다."

화이트는 다짐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지치고 불안한

눈으로 로비를 휘둘러보고 나서 그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릴은 드넓었다. 한쪽에는 무대까지 갖추어져 있었는데 그

무대 위에서는 여가수가 부드럽고 달콤한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침대 속에서 저런 음색의 신음 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홀을 가로질러 창가의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창밖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위로는 인공으로 만든 폭포가

무지개빛 조명을 받으며 세차게 물을 쏟아붓고 있었다. 조명과

폭포수가 이루어내는 그 현란한 아름다움에 그는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옷자락을 스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웨이트리스가 미소를 지으며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는 웃으며 조금 있다가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가는 웨이트리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국 아가씨들은 정말 귀엽고 아름답다. 저런 아가씨를 끌어

안고 밤을 지새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복부에서 뜨거운

욕망이 꿈틀거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허벅지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는 무릎을 오므렸다가 다시 벌렸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여자한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작전기간 동안에는 철저하게 금욕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명령을 어기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그것은 한번의 섹스의 댓가치고는 너무 엄청난

것이다.

이윽고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작달막한 사나이가

어느 새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왕방울 같은 두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그를 쏘아보았다. 금발이 자세를

바로하자 작달막한 사나이가 자리에 않았다. 그의 머리는

곱슬곱슬 했다. 피부가 거칠고 억세보이는 인상을 지닌

사나이였다.

조금 전의 그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영어로 무엇을 들겠느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그들은 똑같이 파인쥬스를 시켰다. 금발은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을 마시고 싶었지만 작전기간 동안에는

술마시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주문하는 것이 올 때까지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발은 불안한

기색이었고 고수머리는 분노를 숨긴 채 탐색하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발은 맞은편에 바위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사나이한테

이제부터 해야할 자신의 변명이 과연 제대로 먹혀들어 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고수머리의 사나이는 이번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대장으로서

모두가 무서워하는 냉혹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여러 작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한

역전의 용사였다. 나이는 아직 채 마흔이 안 됐지만 온갖 고난과

풍파를 헤쳐나오는 동안 생긴 깊은 주름살 때문에 실제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였다. 그는 위에 흰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앞단추를 단추구멍에 끼워놓고 있었다. 안에 받쳐입은 것은 체크

무늬의 와이셔츠였다. 넥타이는 자주색이었다. 왼쪽 가슴께가

불룩해 보이는 것이 그 안에 피스톨이 감춰져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웨이트리스가 쥬스잔을 놓고 가자 대장이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지으며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거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런데 넌 우리를 여섯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게 했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화이트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맞닿을듯이 가까워졌다. 금발머리 청년은 두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속에......"

그는 차마 그 다음 말을 잇기가 어려워 머뭇거렸다.

"가방 속에 뭐가 있었지?"

고수머리 사나이가 아랍어로 날카롭게 물었다.

"패스포드와 파인애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밖에 수첩과

자질구레한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금발은 사색이 되어 상대방의 표정을 살폈다. 파인애플은

수류탄을 의미했다. 고수머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그를 쳐다보다가 컵을 들어 단숨에 쥬스를 쭉 들이켰다.

"어디서 어떻게 잃었지?"

"택시 속에 두고 내렸습니다. 면목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컵을 만지작거렸다.

고수머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발은 숨을 죽였다. 상대방이

몹시 격노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가 있었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다했지?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지?"

거친 숨소리가 목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택시 번호를 알고 있나?"

"모릅니다. 택시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가방을 놓고 내린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택시를 찾아다니느라고 이렇게

늦었습니다."

"그래서 찾았나?"

"그런 실수에 대해서 어떤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고수머리는 나직이 뇌까렸다.

"아, 알고 있습니다."

"넌 우리 전체를 위험에 빠지게 했어. 이번 작전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

"저 혼자만 위험하지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 겁니다."

"바보 같은 놈!"

그는 낮게 부르짖으며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힘을

억제하며 두드렸기 때문에 탁자 위에서 컵들이 달그락거리다가

말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금발의 말투가 도전적으로 변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대장의 눈이 휘번득거렸다.

"함께 행동할 수 없겠지요. 저는 저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로 가겠다는 거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겠지요. 망명 같은 거

말입니다."

그 말은 곧 배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망명은 곧 조직에 대한

모든 정보를 불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를 털어놓으면

모두가 위험에 빠진다. 조직이 와해되는 것이다. 고수머리의

얼굴이 납덩어리처럼 굳어졌다. 그것이 차츰 풀리는 것 같더니

얼굴 전체가 묘하게 뒤틀리면서 웃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아주 순진한 데가 있어. 너는 너무 솔직해서 탈이야."

"나중에 다 알려질 일인데 숨겨서 뭐합니까. 솔직히 털어놓는

게 사태를 수습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사실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로렌스, 내가 널 제일 아끼고 있다는 걸 네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고수머리는 굳은 표정을 풀고 진지한 얼굴로 화이트를

쳐다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화이트도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넌 가장 우수한 대원이야. 널 잃는다는 것은 열 명의 다른

대원을 잃는 것보다도 더 큰 손해야. 본의 아닌 실수를 가지고

사랑하는 부하를 제거할만큼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그렇다면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금발이 감격해서 물었다.

"용서하고 말고. 좋은 경험을 했을 거야. 앞으로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해."

"감사합니다."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대장을 바라보았다. 대장이 그렇게

우러러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방으로 가자구. 올라가서

보고해야지."

대장이 일어서려고 하는 것을 그가 막았다.

"만일 그 여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하죠?"

"그리지아는 나한테 맡겨. 내가 적당히 둘러댈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화이트의 어깨를 툭 치고 나서 먼저 일어섰다.

금발은 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일어나 그 뒤를

따라갔다.

"어떻게 말씀하실 겁니까? 서로 말을 맞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베이터 속에서 금발은 걱정스러운 듯 고수머리를

쳐다보았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말란 말이야! 넌 잠자코 있기만

하면 돼!"

대장이 역정을 내는 바람에 화이트는 입을 다물었다.

실수를 봐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조직의

관리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화이트는 대장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리지아는 소퍼에 앉아 사과를

깎아먹고 있었다. 화이트는 뒤에서 문고리가 걸리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난장이가 어느 새 문에 기대서 있었다. 그는

난장이는 아니었지만 키가 유난히 작아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문고리가 걸린 것을 보고 화이트는 비로소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방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거기에는 난장이 외에 또 두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그들은 화이트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때

맞추어 욕실에서 나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로렌스가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렸답니다. 지금까지 그 택시를 찾아다니느라고 이렇게

늦었답니다."

고수머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택시를 찾았나요?"

그리지아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브라운 빛깔이

감도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찾지 못했답니다."

"그 가방 속에는 뭐가 있었지요? 본인이 직접 말해요."

그리지아가 명령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사과에 닿았다.

그녀의 흰 얼굴은 흑발에 감싸여 있었다. 그녀는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였다. 대원을 지휘하는 것은 고수머리였지만 중요

사항에 대한 마지막 결정권은 그녀한테 있었다. 그녀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패스포트와 파인애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밖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화이트는 불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고도 무슨 염치로 기어들어왔지?"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우린 장난하러 여기에 온 게 아니예요."

그녀는 칼로 사과 한쪽을 싹둑 잘라내어 그것을 금발에게

던졌다. 그것은 금발의 발치에 가서 떨어졌다.

"먹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거니까."

그것은 최대의 모욕이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떨리는 손으로

사과 조각을 집어들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목숨을 바쳐......"

"닥쳐!"

대장이 소리쳤다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했군요?"

금발이 억울한 듯 말했다.

"거짓말한 게 아니야. 난 규칙대로 하는 것뿐이야. 네놈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게다가 밖에서 나를 위협했어. 용서해

주지 않으면 망명하겠다고 말이야."

방안에 차가운 침묵이 깔렸다.

금발의 청년은 비로소 동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는 떨면서 사과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비열한 놈!"

난장이가 뒤로 다가가 권총 끝으로 그의 뒤통수를 찔렀다.

금발의 청년은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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