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류탄
오병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에서는 7월의 태양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었다. 가뭄은 너무 오래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건널목에 서서 적색등이 녹색등으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 파출소가 있었다. 그 파출소에 들어가
본부에 경비전화도 걸고 물도 한잔 얻어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공복을 느꼈지만 아무 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사람들 속에 섞여 길을 건너갔다.
"어서 오십시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파출소 소장이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고 말했다.
"덥지요?"
"덥군요,"
병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먼저 냉수를 한 컵 들이킨 다음 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그 여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체포 직전에 그만......"
수사본부장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것은 상대방이 몹시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병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갈 곳이
없는 미아처럼 느껴졌다. 본부로 바로 직행하여 상사의 얼굴을
대하기는 정말 싫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강도살인사건의 용의자 한 명을 미행했었다.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이라고 불리고 있는 그 사건의 일당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그중 세 명이 남자였고 나머지 한 명은
여자였다. 여자가 낀 강도살인사건이었기 때문에 여느 사건보다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더구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 여자가
두목이라고 했다. 체포된 자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체포될 때에
대비해서 몸에 항상 청산가리와 수류탄을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경찰이 경계한 것은 청산가리보다도 수류탄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구입했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만일 그것을
자폭용으로 사용할 경우 그녀 혼자만 죽는 게 아니고 경찰을
비롯해서 그 주위에 있는 일반 사람들까지 희생될 가능성이
컸다. 병호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를 발견하고서도
덮치지 못하고 미행만 하다가 그만 놓쳐버렸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를 미행하다보면 다른 자들까지도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욕심이었지만 그
유혹이 오히려 더 강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은 어느 돈 많은 노파를 살해하고
보석류를 강탈해간 사건이었는데 그 보석류 가운데 싯가 3억
원을 홋가하는 5캐럿짜리 다이어먼드 세 개가 있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파출소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하오 2시 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더워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병호는 마땅히 갈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출입문이고 창문이고 모두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거리의
소음이 귀가 먹먹할 정도로 들려오고 있었다.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막 일어서는데 파출소 앞
차도에 택시가 굴러와 멎는 것이 보였다. 빈 택시였다. 마침 잘
됐다싶어 밖으로 나가는데 운전사가 택시에서 내린다.
"안 갑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중년의 운전사는 너무 더운 탓인지 상기된 얼굴에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작은 여행 가방을 든 채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병호는 택시 뒷좌석으로 들어가 운전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차에는 엔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운전사는 한참이 지나도 파출소에서 나오지 않았다. 병호가
도로 택시에서 내리려는데 그제서야 운전사가 차로 돌아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여의도로 갑시다."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 운전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굳어 있던
그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병호는 볼 수가 있었다. 잠시
후 건널목에 멈춰섰을 때 운전사가 입을 열었다.
"정말 진땀 뺐네."
백미러를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병호는 졸음이
밀려왔다.
"외국 손님인데 가방을 두고 내렸지 뭡니까. 궁금해서
열어봤더니 가방 안에 수류탄이 들었지 않아요. 그게 터질까봐
십 년 감수했죠."
그는 수류탄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택시가 다시
움직였다. 병호는 눈을 크게 뜨고 운전사의 뒤통수를 노려
보았다.
"파출소에 갖다줬더니 야단법석이 났어요."
"그 파출소로 돌아갑시다! 빨리 갑시다!"
운전사는 병호가 경찰임을 알고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 출발 장소로 돌아가면서 그는 내내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15파출소에 도착한 병호는 파출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운전사도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병호가 가지 못하게 붙들었기
때문에 그는 일당을 벌 수 없게 되었다고 툴툴거렸는데, 병호가
일당을 계산해주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태도를 바꾸어 협조적으로
나왔다.
외국인이 놓고 내렸다는 여행 가방은 소장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소장과 순경들은 긴장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서에 보고했습니다."
소장이 병호에게 말했다.
외국인의 가방에서 수류탄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사건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병호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누구보다도 더욱 실감있게 피부에
와닿는 사건이었다. 그는 마침 수류탄을 휴대하고 다니는
살인용의자를 추적하고 있는 만큼 수류탄이라는 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서는 판이었다.
다른 수사관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그는 수류탄이 들어 있는
가방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장은 못마땅한 눈치었지만
병호로서는 상대방의 눈치 같은 것을 살피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그는 수첩에다 하나하나 자세히 적어갔다. 지문이 묻지 않게
면장갑을 끼고 나서 먼저 가방부터 살폈다. 누런 가죽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진 그 가방은 어깨에 걸 수도, 들고 다닐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까맣게 때가 끼고 닳고 닳은 가방이었지만
국산 가방은 아닌 것 같았다. 가방 한 귀퉁이에는 'PIELLE'라고
새겨진 쇠로 된 마크가 부착되어 있었다. 가방 안에는 수류탄과
함께 여러 가지 물건들이 뒤엉켜 있었다.
수류탄은 파이프용 담배 가루를 담아두는 깡통 속에
담배가루와 함께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담배 가루만 들어 있는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까
이상하게 무겁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뚜껑을 열고 담배가루를
헤쳤더니 그게 나왔습니다."
운전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그는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바람에 자주 손가락 끝으로 그것을
밀어올리곤 했다.
병호는 담배가루를 조금 집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향내가 짙은
것이 한 대 피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수류탄을 꺼냈다. 얼른 보기에도 그것은 외제 수류탄 같았다.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뜻을 알 수 없는 영문 약자가 찍혀
있었다. 안전핀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것을
가만히 쥐어보았다. 장갑을 끼었는데도 차갑고 섬뜩한 감촉이
손바닥 가득히 느껴졌다. 수류탄을 깡통 속에 도로 넣은 다음
뚜껑을 끼웠다.
그는 축축이 습기가 배어 있는 구겨진 손수건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누런 바탕에 검붉은 장미가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거기에는 코딱지 같은 것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었다. 코에
가까이 대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지저분한 놈이군."
그는 중얼거리면서 재크나이프를 집어들었다. 칼날은 흰 뿔에
금장식이 정교하게 입혀진 손잡이 속에 감춰져 있었다. 손잡이
옆에 장치되어 있는 단추를 누르자 철컥하면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햇빛 속에 노출되자 그것은 눈부시게 빛을
반사했다.
한번 찌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만큼 날카롭게 생긴
칼날이었다. 손잡이 한쪽 중간부분에는 황금 사자상이 붙어
있었다. 날의 한쪽 면에는 아라비아 숫자와 함께 'GOLDEN
LION'이라는 표시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날의 다른 면에는
'MADE IN U.S.A'라는 글귀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수첩을 꺼냈다. 검은 표시로 된 수첩으로 겉에는 아무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대강
훑어보았다. 수십 개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영문자가 표기되어 있는 이름들은 하나같이 암호 같은 것들
뿐이었다. 이를테면 'K.K.K' 'S.9' 'Lion'이런 식이었다.
글씨체는 난잡해 보였다.
수첩의 뒤 표지 안쪽에 파란색 표지의 여권이 끼워져 있었다.
미국 여권이었다. 여권에 적혀 있는 이름은 'Noel White'.
나이는 29세. 여권번호는 07624815×번.
병호는 여권에 붙어 있는 명함판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끼고 있는 안경렌즈에 빛이 반사되어 그것이
인상을 흐려놓고 있었다. 군인처럼 금발 머리를 짧게 올려치고
콧수염을 길렀는데 턱이 억세 보였다. 렌즈에 가려진 두 눈은
노리끼리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 사람이었나요?"
병호는 사진을 운전사에게 보였다.
운전사는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가방 바닥에는 꽤 많은 동전이 깔려 있었다. 그것은 여러 나라
동전들이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쓰고 남은 것들을 버릴
수가 없어 가방 속에 넣어둔 것 같았다.
가방 속에는 소형 책자가 두 권이나 들어 있었다. 한 권은
남녀의 성교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포르노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이재킹(비행기 납치)를 다룬 만화였다. 포르노책보다도
만화가 더 볼만한 것 같았다. 그것 역시 포르노물이었지만
거기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만화 속의 대화는 영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만
보아도 스토리의 진행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공중 납치하여 기내에서 승객들이 보는
가운데 스튜어디스들을 강간한다는 내용 같았다. 강간하는
장면이 실감나고 박진감 있게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기관단총과 권총 또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들고 있는 수류탄을 보는 순간 병호는
하나의 예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예감에 불과했다.
"몇시에 어디서 그 사람을 태웠나요?"
병호는 만화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이태원 S쇼핑센타 앞에서 태웠습니다. 그때가 1시 쯤 됐을
겁니다."
"동행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어디서 내렸나요?"
"명동 입구에서 내렸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다른 손님을 태우지 않고 바로
기사 식당을 찾아 갔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식당이죠. 식사를
마치고 차에 오르다가 그 가방이 뒷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고한 겁니다."
파출소 안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본서에서 달려온
수사관들이었다. 병호는 아는 얼굴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뒤이어 병호가 소속되어 있는 시경찰국 쪽에서도 사람들이
달려왔다. 택시 속에서 수류탄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경찰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건 체코제 세열(細裂) 수류탄입니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수류탄을 보고 나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병호는 뒤쪽에 서서 들었다.
"이건 성능이 아주 우수한 겁니다. 지금까지 나온
수류탄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겁니다. 살상력이
대단한 겁니다."
그 소리를 뒤로 들으며 병호는 15파출소를 나왔다.
거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다. 10분쯤 걷다가 그는 가로수
그늘 속으로 들어가 거리를 메우고 있는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다이어먼드 살인사건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스러지고
있는 것을 알고 그는 적잖게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관심은 체고제 세열 수류탄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사건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감이었지만 그는 그 육감을 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사진으로 본 노엘 화이트의 얼굴을 머리 속에 그려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가 않는다. 어느 새 희미한 영상으로 남아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사진을 두고두고 보지 않고
잠깐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화이트는 수류탄이 들어 있는 그 가방을 일부러 택시에 놓고
내렸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병호는 머리를 흔들면서
찌푸린 눈으로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화이트는 깜박 잊고 그것을 놓고 내렸을 것이다. 택시에
물건을 놓고 내리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한 순간 정신을 딴데
팔기라도 하면 그런 경우를 당하기 십상이다. 수류탄과 여권이
들어 있는 가방이라면 그로서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것을 택시에 잊고 내릴 수가 있을까?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택시에 거액의 돈이 들어 있는 돈가방을 놓고
내리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금쯤 화이트라는 그 미국인은 미친 듯 그 가방을 찾고
있겠지. 아니다. 그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미 그는 도망칠 궁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