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자 강패 4
1장
“아후……뭐 이리 배울 게 많은 거야?”
강패는 책상 앞에 앉아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머리를 벅벅 긁었다.
펜을 잡은 손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다리도 흔들거리는 것이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아직 10퍼센트도 다 배우시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북한으로 넘어가시려고 그럽니까?”
민준이 살살 약 올 리는 투로 말했다.
“이 새끼가…….”
뚝!
안 그래도 공부를 하기 싫어 죽겠는데, 살살 약을 올 리는 민준의 말에 강패의 손에 들려 있던 펜이 또다시 부러져 나갔다.
“휴, 벌써 열 개째입니다. 고작 이틀 지났는데 벌써 이러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민준이 새 펜을 호주머니에서 꺼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강패가 도끼눈을 뜨고 쳐다봤지만 오늘 할당량을 다 채우기 전까지는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젠장! 다른 애새끼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고! 발자국 소리도 그렇고! 미친 거 아니야? 여기서 어떻게 이걸 공부하라는 거야!”
강패가 신경질 난다는 표정으로 책을 집어던졌다.
펄럭거리며 책이 땅에 떨어졌지만 민준은 짜증내지 않고 책을 주워서는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소리가 여기서 들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전 하나도 안 들리는데요?”
“아우. 그건 네놈이 나이에 맞지 않게 귀가 너무 어두운 거고! 이렇게 쿵쾅거리는데!”
강패가 다시 신경질을 버럭 냈다.
강패의 예민한 청각과 기감에는 국정원의 한 안가에 마련된 대한독립군 훈련장이 다 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훈련하면서 내는 소리, 기척 등이 모두 들린다며 강짜를 부리고 있었지만 민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 거까지 신경 쓸 정도면 잠은 어떻게 잡니까? 잔말 말고 그냥 하세요.”
“……이런 젠장!”
늘 이랬다.
단 이틀만이었지만 강패가 민준에게서 배워야 하는 ‘학생’으로 전락한 이후 단 한 번도 민준을 말로 이기지 못했다.
“빌어먹을 놈. 젠장할 놈. 융통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놈.”
새로운 레퍼토리를 준비해 왔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자 강패가 구시렁댔다.
그 구시렁이란게 민준이 뻔히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지만 민준은 개의치 않았다.
“다들 잔말 말고 집중하세요. 오늘 오후에도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오늘 오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시는 분은 또다시 나머지 수업입니다.”
하아아…….
교실 안에 남은 이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민준의 말이었다.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새나왔지만 민준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강패 님은 특히 분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후에 일도 하러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기랄!!”
우득!
불과 몇 분 전에 민준이 주었던 펜이 강패의 손에서 부러져 나갔다.
“여러분은 나머지 공부 때문에 남으신 분들입니다. 스스로 더 공부는 안 해도, 가르쳐 주는 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실 안에 앉은 사람들을 민준이 둘러보며 말했다.
그 교실 안에는 강패까지 합쳐서 총 다섯 명이 있었는데 제각기 성별과 나이, 생김새는 달랐지만 신기하게도 표정은 똑같았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
자신이 왜 이 펜을 잡고, 공책과 책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단연 그중에서도 가장 불퉁거리는 것은 강패였지만 말이다.
“부산까지 가시려면 빨리 외우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강패 님.”
게다가 강패는 단기속성 코스를 밟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라면 국정원 내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민준을 강사로 삼아 막대한 양의 공부를 하루에 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북한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속성으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강패가 배워야 하는 분야는 말 그대로 ‘방대’했다.
아직 실전에 관한 것은 배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지식만 습득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원래 최소 2년 코스입니다. 그런데 강패 님은 이걸 열흘 안에 배우겠다고 하셨으니, 특별대우를 해 드리는 겁니다.”
“끄응…….”
계속해서 쫑알대는 민준이었지만 강패는 침음성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깐죽대는 것이 얄밉긴 했다. 하지만 민준이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잠자코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수틀려서 안 하겠다고 하면 또 골치 아프지.’
북파 공작원들은 이 코스를 2년에 걸쳐서 받는다고 했다.
그런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열흘 만에 속성으로 배울 수 있게 교육을 짠 것이 민준이었다.
“소영 씨가 오늘 일반 병실로 옮겼다고 합니다. 빨리 푸셔야 보러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민준의 사람을 다루는 스킬이 탁월했다.
적절히 채찍과 당근을 사용하니, 강패가 배겨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툴툴대면서도 소영이란 말에 강패의 눈과 손이 바빠졌다.
*
*
*
부산 국제공항의 출국 게이트를 향해 걸어오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칼같이 벼린 두 눈을 번뜩이는 경호원을 옆에 단 여자와 그 일행으로 보이는 듯한 무리였는데 그들에게 사방에서 강렬한 시선들이 와 부딪쳤다.
“와…… 대박…….”
“뭐, 뭐야. 연예인인가? 지망생?”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여자들의 미모에 입을 쩍 벌렸다.
다섯 명으로 이뤄진 조촐한 일행이었지만 파급력만은 수십 명과도 맞먹었다.
어찌나 눈길을 사로잡는 외모던지, 개중에는 카메라를 꺼내 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아, 여기가 부산이란 말이지?”
가장 선두에 나서서 걸어가던 여자가 멋스럽게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자 주위 남자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에도 눈에 확 띄는 미모가, 선글라스를 벗으니 더욱더 돋보인 것이다.
양귀비는 천연덕스럽게 교태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이자 양귀비는 입가를 가리면서 우아한 듯, 관능적인 듯 알게 모르게 미소를 살짝 지어 보였다.
“우, 웃었어!!”
“웃었어! 대박!”
“우와아!!”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여자들의 눈이 도끼눈이 되어 양귀비를 쳐다봤지만 질투에 불타는 그녀들도 양귀비를 보자 입을 조개처럼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성형이니 뭐니 깎아내리겠지만 그녀들의 눈앞에 있는 양귀비는 도저히 그런 중상모략이 먹힐 것 같지 않았다.
“자자자, 빨리들 와. 시간이 없어.”
유창한 일본어로 양귀비가 말했다. 그러자 독심과 만날 때 같이 있었던 남궁호와 황보혁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때는 검을 차고 있었지만 지금은 세련되게 정장을 입은 집사 같은 느낌이었다.
“안녕하십니…… 헉…….”
2차 검색대에 있던 직원이 인사를 하려다 말고 숨을 헉 들이마셨다.
양귀비를 가까이서 본 직원의 표정이 혼을 빼앗긴 사람의 표정처럼 바뀌었다.
“오늘 돌아다닐 곳이 많다고. 이곳에 왔으니 쇼핑도 하고…… 바다도 보고.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독심을 볼 때와 지금의 양귀비는 많이 달라 보였다.
활동성을 강조한 옷을 입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최대한 화려하고 고급스럽게 치장하고 있었다.
딱 봐도 수백만 원을 호가할 것 같은 장식들을 달고, 몸의 라인을 살려 주는 맵시 있는 옷을 입은 양귀비는 재벌집 딸내미 같은 행색이었다.
게다가 옆에는 집사로 보이는 세련된 남자를 거느리고, 그녀를 수행하는 두 명의 여자를 또다시 거느린 양귀비가 재잘대면서 자신의 핸드백을 검색대 위에 놓았다.
찡긋.
“허…… 허억!!”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는 직원에게 해 보이는 교태스런 윙크까지.
직원이 헛숨을 들이키며 가슴을 움켜쥐는 것을 본 양귀비가 장난스런 웃음을 머금은 채 검색대를 통과했다.
“멍청이.”
검색대를 통과해 나온 핸드백을 집어 든 양귀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신들의 일행을 닦달했다.
“빨리 가자! 어서! 이렇게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오늘 저녁에 가야 할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니까!”
“예, 아가씨.”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는 이들을 보면 누구나 다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을 의도한 것인지 양귀비는 황보혁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출국 게이트를 나간 뒤에도 상황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양귀비를 보며 놀라는 남자들과 그런 양귀비를 질투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는 여자들.
그들의 시선이 따갑도록 느껴졌지만 양귀비는 철없는 부잣집 딸내미 역할을 충실하게 하며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재밌어.”
“수고하셨습니다. 아가씨.”
“뭐, 재밌다니까?”
차에 타고, 문이 닫히자 양귀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없는 여자 같았다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양귀비는 요염했다.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으로도 요염함과 관능미가 흐르고 있었지만 황보혁과 남궁호는 제법 익숙한 모양인지 흔들리지 않았다.
“너희들도 수고했어.”
“아닙니다. 아가씨.”
양귀비는 황보혁과 남궁호를 빼고도 늘어난 두 명의 일행들에게 말했다.
“빨리 개방 측에 연락해서 그놈의 소재지를 파악해. 그리고…….”
날카로운 무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황보혁과 남궁호에게 말을 하던 양귀비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바깥을 바라보는 양귀비의 시선을 따라간 황보혁과 남궁호는 순간 흠칫 놀랐다.
“저건…….”
“야쿠자…… 아니, 동영 놈들 아닙니까?”
일본과 가까운 대도시인 부산이라서인지 유독 일본인들의 비율이 높았다.
한류 붐이 일면서 관광 목적을 가진 관광객들로 붐비기도 했지만, 일본과 맞닿아 있는 항구도시인 만큼 야쿠자가 노리는 도시이기도 했다.
양귀비는 자신의 눈에 띈 한 무리를 보면서 눈을 빛냈다.
“동영 놈들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온 거지?”
“글쎄요…….”
남궁호가 턱을 긁으면서 답하지 못하자 양귀비가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에게 말했다.
“개방 부산지부장에게 연락해서 동영의 움직임을 파악해 달라고도 전해 줘.”
“예. 알겠습니다.”
태블릿 PC를 꺼낸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그곳에 집중하자 양귀비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야쿠자 무리를 쳐다봤다.
“무슨 건수가 있으니까 기어들어 왔겠지?”
야쿠자에게 있어 부산은 먹음직스러운 곳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토착 조직들의 세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외부 조직의 침입이 어려워서 단념하곤 했었다.
그런데 야쿠자가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 이상씩 몰려다니다니?
“게다가 동영 놈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다 야쿠자였지만 양귀비의 눈에는 보였다.
개중 몇 명은, 평범한 야쿠자가 아니라 동영 소속의 닌자들이었다.
“따라가 보도록 할까?”
양귀비가 남궁호에게 넌지시 묻자 남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시간이 좀 남을 테니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남궁호가 동의하자 양귀비의 눈이 반짝였다.
“야쿠자와 동영이라…… 대한민국의 부산에. 재밌겠어. 호호.”
따분한 대륙에서 있느니 나오겠다고 한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 양귀비가 교소를 터뜨렸다.
*
*
*
“네놈 말 때문에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정말 믿을 만한 정보야?”
센은 차에 타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간 크게도 대한민국에서 야쿠자에 접촉한 조직이 있다고 해서 나오긴 나왔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거래 품목으로 내건 것이 영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대마와 헤로인을 공수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음지에서 할 수 있는 활동 중에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것은 아무래도 마약이었다.
대한민국 내에서도 마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찰과 검찰의 단속이 너무나도 심해 사실상 대량의 마약 거래는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기껏해야 외국인들이 많이 논다는 이태원이나 클럽가에서의 소량 거래 정도?
“이익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높아서 우리 야쿠자에서 포기한 품목인데. 그런 마약을, 대한민국 조폭에서 거래를 하자고?”
소량 거래는 중간에서 거래를 하는 이들이나 작게 거래를 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히 많은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야쿠자처럼 덩치가 큰 조직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 저도 물품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한번 가셔서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본국의 야쿠자 총단에서 온 센 앞에서 츠요시는 머리를 조아렸다.
총단에 속한 야쿠자에 비해 자신은 외곽에서 도는 쩌리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총단으로의 진출이 가능해 보였다.
“뭐, 나쁘지 않지. 조센징들한테 마약 맛을 보여 주는 것도. 클클.”
만약 정말 그 조직이 거래하려는 것이 마약이라면 센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마약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대한민국보다는 일본에 많았다.
야쿠자에 연락을 해 온 대한민국 조폭들이 원하는 것이, 자신들이 공수해 온 마약의 전량 매입과 한국 내 판매에서의 도움이었으니 말이다.
“걸리적거리면 흡수해 버려도 되는 거고.”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거대 조직이 서울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부산이 서울만큼 제법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3대 조직인 기린파와 흑룡파 그리고 남도파가 서울에 전력을 기울이는 중에 야쿠자에 비견될 만한 조직이 있을 리 없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게다가 흑룡파는…… 얼마 전에 와해되었습니다. 완전히.”
시가를 빼 무는 센에게 츠요시가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 말했다.
센은 츠요시의 말에 놀란 눈으로 츠요시를 쳐다봤다.
“와해? 흑룡파가? 3대 조직 중에 하나가?”
센의 놀란 시선을 받으며 츠요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은 죽었답니다. 그리고 남은 잔당을 외칼이란 놈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했는데…… 남도파와 기린파에 의해 완전히 지리멸렬했답니다.”
츠요시의 말에 센이 아까운 듯 혀를 쯧 찼다.
“젠장. 그럼 남은 녀석들의 덩치가 더 커졌다는 소리잖아? 이래서야 원…….”
워낙 독종 같은 기질이 강한 한국의 조폭들을 생각하며 센이 아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번 거래만 잘 성사되면 야쿠자의 한국 진출도 가능합니다. 그것도 서울에요.”
츠요시의 말에 센이 다시 그를 쳐다봤다.
“남도파와 기린파가 먹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흑룡파입니다. 그 모든 것을 삼킬 수는 없어 구멍이 많이 뚫린 상태지요. 그곳만 잘 파고든다면…….”
말끝을 흐리는 츠요시였다. 센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뭐야. 여기야?”
잘 굴러가던 차가 한적한 부두로 접어들자 멈춰 섰다.
창문 바깥으로 차가 멈춰 선 곳을 본 센은 인상을 찌푸리며 잘근 씹은 시가 끝을 퉤 뱉었다.
“이 새끼들은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단 말이야? 냄새 나게 여기서.”
상대 조직에서 잡았다고 하는 약속 장소가 한적한 부두의 창고였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울리는 이곳은 외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딱 봐도 ‘범죄의 온상’처럼 보였던 것이다.
센은 한국 영화가 문제라고 생각하며 차문을 열고 내렸다.
차에서 내린 센과 츠요시는 야쿠자들과 함께 끼긱대면서 열리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고 했다.
휙!
“음…….”
센과 츠요시를 수행하던 야쿠자 중에 한 명이 인상을 찌푸리고 옆 창고의 위와 그 뒤 창고의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창고 안으로 따라들어 갔다.
스슥.
“제법이군. 기감이 제법 좋은 녀석이야. 호홋.”
아무도 없던 창고 지붕에 공항에서의 차림을 그대로 한 양귀비가 허깨비처럼 내려섰다. 그 뒤로는 남궁호와 황보혁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야쿠자 놈들과…… 북한이라. 독심, 또 무슨 발칙한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호호.”
눈을 빛낸 양귀비가 남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일도 네가 살펴보고 보고하도록 해. 꽤나 귀여운 짓을 하는 것 같아.”
“알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남궁세가의 가식인 남궁호를 부린 양귀비가 교태스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그 사람을 만나러 가 볼까?”
팟!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만 생각해도 흥미가 돋는 듯, 새빨간 혀로 앵두 같은 입술을 축인 양귀비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창고 지붕 위에서 사라졌다.
*
*
*
“웨어울프도 꼴이 말이 아니군.”
디아즈는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러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개소리 하지 말고 나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러셀은 디아즈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디아즈는 태연하게 그 독설을 받아넘겼다.
“몸은 좀 어때. 다 나았나?”
“젠장. 고작 뼈에 금이 간 게 삼 일이나 가다니. 대체 놈의 정체가 뭐지?”
러셀이 신경질 난다는 듯 석고로 고정해 놓은 팔을 창틀에 퉁퉁 두들겼다.
사실 러셀의 회복력이라면 뼈에 금이 간 것 정도는 몇 시간이면 나을 상처였지만 강패에게 당한 상처는 쉽사리 낫지 않았다.
“글쎄. 환생의 연구소에 남아 있던 자료들이 모두 불타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알아내려면 CIA쪽이나 국정원을 털어야 할 것 같은데…….”
디아즈가 턱을 매만지면서 애매하다는 듯 말하자 러셀이 눈썹을 찌푸렸다.
“국정원? CIA나 FBI는 그렇다 쳐도, 한국의 국정원을 말하는 건가?”
러셀의 질문에 디아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국정원의 차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꽤 거금을 들여 CIA에서 환생의 연구소에 관한 정보를 사들였다고 하더군. 물론 껍데기만 팔았겠지만 뭐, 아무것도 없는 우리보단 낫겠지.”
디아즈의 말에 러셀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에 있는 환생의 연구소에 국정원에서 왜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
“뭐, 한국 놈들도 인간 병기를 만들어 낼 준비를 하고 있나 보지.”
“아니야…… 아니야…….”
러셀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던 디아즈가 불쑥 말했다.
“웨어울프가 이제는 제법 머리도 쓰다니. 놀라운데?”
“뭐?”
디아즈의 말에 러셀이 울컥한 듯 도끼눈을 떴지만 디아즈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네 말대로다. 아주 많이 이상하지.”
“그럼…….”
디아즈의 머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항상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했으며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는 디아즈의 판에서 러셀은 항상 가장 강력한 말일 뿐이었다.
그런 디아즈가 러셀이 궁금해 하는 것을 미리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 잘난 미국 정부에서 인간 병기를 굳이 한국인으로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자원을 받아도 쓸데없는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미국인 자원자들이 수천 명, 수만 명이 나왔을 거야. 목숨이 간당간당하다고 해도.”
고작 2, 3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합중국이 내세운 가장 거대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애국심이었다.
나라의 기틀을 자리 잡고 영국이 아닌 미합중국임을 자국인들에게 알 리기 위해 애국심은 미국인에게 있어 가장 고귀하고 명예로운 것이었다.
그것이 때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디아즈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게다가 놈은 외국인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정보가 없더군.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처럼.”
디아즈의 추측에 러셀이 반대했다.
“하지만 언제 미국 놈들이 국가와 인종을 따져서 실험을 했던가? 자국민에게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보다는 별탈 없는 외국 놈을 하나 붙잡아서 실험하고 깔끔하게 없애 버리는 게 편하지 않았을까?”
러셀이 말했지만 디아즈는 자신의 백금발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면서 건성으로 답했다.
“더 조사해 볼 필요는 있어. 미국에서 만들었건, 어쨌건 간에 놈은 세상에 나와 있고 한국에 있다는 게 문제지.”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네 상처가 더디게 치료되는 것도 놈의 능력일지도 몰라.”
툭.
러셀은 디아즈가 말하면서 던진 서류 봉투를 기브스를 안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어제 청와대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됐어.”
“그런데?”
한 손으로 잘 꺼내지지 않는 서류 봉투 안의 종이를 꺼내려고 낑낑대면서 러셀이 디아즈를 쳐다봤다.
“경부 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서 급격하게 방사능 수치가 올라갔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 방사능이 사방으로 퍼지는 방사능이 아니라 제련된 핵물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일정 반경 이내에서만 머물러 있다고 하던데.”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꺼낸 러셀이 어지럽게 그려진 그래프와 복잡하게 설명된 보고서를 보고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결론은?”
머리가 아파진 것인지, 흥미가 사라진 것인지 러셀이 서류 봉투를 휙 하니 내던졌고 디아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청와대 머저리들은 북한의 소행이 아닌가 의심했지. 테러를 하기 위해서 핵물질을 대한민국 내로 반입했다고. 그런데…….”
디아즈가 말끝을 흐렸지만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듯 러셀의 눈이 빛났다.
“놈이란 건가. 놈이 쓰는 게 방사능이라고?”
러셀은 강패의 전신에서 활활 불타오르던 순백의 성화를 생각하면서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게 설명이 안 되지. 그리고 놈이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안 되고.”
다른 사람이라면 미친놈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디아즈와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신들부터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기에 강패처럼 방사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특이할 것은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는 놈과 부딪칠 때 완전무장을 하고 부딪치도록 해. 설설 한다고 해서 놈한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놈의 전투 스타일을 알았으니 문제없어.”
러셀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번 기회에 한국에도 지부를 열기로 했으니 겸사겸사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고.”
“WIM을?”
러셀이 아미를 찌푸리면서 묻자 디아즈는 피식 웃었다.
“아니, 이름은 바꿀 거다. 컨택터스라고. 구성원도 다 한국인으로 채울 셈이야.”
“무슨 생각이지?”
이죽대는 디아즈를 보면서 러셀이 으르렁대듯 물었다. 하지만 디아즈는 별뜻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아무리 놈이라고 해서 대전차포를 맞아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 말이야.”
능글맞게 말하는 디아즈의 모습에 러셀이 역겹다는 듯 몸을 훽 돌렸다.
“몸은 오늘 내일 중으로 다 나을 듯하니, 그때 정보를 넘겨라.”
으르렁대는 듯한 러셀의 목소리에 디아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에 따라 백금발이 아름답게 찰랑거렸다.
“그러도록 하지. 몸조리 잘하도록 해. 웨어울프.”
“흥!”
러셀이 콧방귀를 꼈지만 디아즈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환한 미소를 짓고서는 러셀의 방을 빠져나갔다.
*
*
*
달칵.
“후우…….”
강패는 병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렇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오늘은 뭐 사 왔어요? 아이스크림 사 왔어요?”
무언가가 가득 들은 비닐봉지를 든 강패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소영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자 강패의 가슴이 더 크게 요동쳤다.
‘강패!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마라! 진정해!’
이미 강패의 심장은 이성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패가 소리를 쳐 봐도 강패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지금 네 상태로 찬 거 먹으면 안 돼. 그냥 주는 거나 먹어.”
“피…….”
심장이 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인지 강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소영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것인지 강패가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매일 여기까지 오고, 힘들지 않아요?”
소영은 강패를 한결 따뜻해진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가 입원한 후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병문안을 와 준 강패였다.
소영은 아직 강패에게 묻지 않은 것이 있었지만 굳이 지금 묻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에게 물어볼 기회는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됐다.
“할 일은 해야지.”
강패는 소영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비닐봉지에서 케이크를 꺼내 들었다.
재미가 새로 촬영 들어간 드라마가 해운대가 배경이었기에 강패는 매일 국정원에서의 수업이 끝나면 경호를 하기 위해 부산까지 와야 했다.
“굳이 여기까지 안 와도 되는데…… 뭐, 나야 좋죠!”
활짝 웃는 소영의 얼굴을 곁눈질로 힐끗 바라본 강패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창 바깥을 내다보았다.
“몸은…… 좀 괜찮나?”
투박하게 물어보는 강패가 귀엽다는 듯 소영이 살풋 웃으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요. 조금 뻐근한 거 빼고는…… 아직 움직일 순 없어도요!”
“다행이군.”
무뚝뚝하게 말하는 강패와 활짝 웃으며 말하는 소영이었지만 둘의 관계는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때마침 창밖에서는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고 그로 인해 병실은 따뜻한 봄기운으로 가득 찼다.
“빨리 나아라.”
“버, 벌써 가게요?”
강패가 일어나자 소영이 아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영의 이런 눈빛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심심한 1인실 생활에서 매일 찾아오는 강패의 방문은 소영에게도 매일 고대하던 것이었다.
“가서 교대해 줘야지.”
강패가 재미 옆에서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고민했는데 시기적절하게 대타가 나왔기 때문에 강패가 운신의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세인이가 주말에 놀러오겠다고 하더군. 녀석은 개학했는데도 그렇게 놀기 바빠서야…… 쯧…….”
강패가 혀를 끌끌 찼지만 소영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요? 다행이에요. 심심했는데…….”
몸을 비비 꼬는 것을 보니 좀이 쑤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날 현장을 뛰어다니던 소영이 이렇게 병원에 쥐 죽은 듯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함부로 움직여서 덧나면 골치 아파진다. 그냥 조용히 침대에 붙어 있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강패였지만 그 안에는 소영을 걱정하는 진심이 담뿍 담겨 있었다.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강패였지만 소영은 방긋 웃었다.
“이제 얼굴 좀 보고 이야기하죠? 강패 사장님? 저 이렇게 누워 있어도 유급 휴가인 거죠?”
익살스럽게 말하는 소영을 힐끗 쳐다본 강패가 피식 웃었다.
그녀의 넉살이 강패의 마음에 제법 들었다.
“보너스도 주마.”
강패가 휘적휘적 걸어 나가는 모습을 소영이 섭섭한 눈으로 쳐다봤다.
“후우…….”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한숨을 내쉰 소영은 강패가 놓고 간 케이크를 열더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무릎에 놓았다.
“케이크 한 조각 같이 먹고 가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래도 고마워요!!”
움찔.
소영의 말을 들은 것인지 강패가 문을 닫다가 말고 그 자리에 멈칫 멈춰 섰다.
이내 피식 웃어 보인 강패는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재미 녀석. 오늘은 특별히 귀여워 해 주마.”
주위 간호사들이 자신을 흠모의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강패는 그것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한층 밝아진 표정의 강패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
*
*
“흐흐…… 흐흐흐…….”
침을 질질 흘리며 초점이 사라진 남자는 극도의 쾌락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주위는 어두컴컴한 데다가 희미한 조명만이 어슴푸레하게 사물의 윤곽을 밝히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베이스 사운드는 발밑을 울릴 정도로 컸으며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몸을 최대한 밀착시킨 채 음악에 맞춰 낯 뜨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 이거 죽인다!!”
초점이 흐려져 있던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내 들었다.
약통의 뚜껑을 연 남자는 희열에 찬 눈으로 밀가루 같은 고운 입자의 하얀 가루를 손에 털었다.
“으흐흐…….”
주위에는 남자와 비슷한 모습의 남녀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는데도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을 장면하는 남녀도 있었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람들은 외부 자극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눈이 풀어지고, 사지를 축 늘어뜨린 그들의 표정은 모두 쾌락에 젖어 있었다.
쿵쾅! 쿵쾅!
베이스 소리에 맞춰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 움큼을 더 집어먹은 남자의 눈이 더욱더 풀렸다.
열이 오르는 것인지 목을 조이는 셔츠를 거칠게 잡아 뜯은 남자는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금세 후끈거리는 열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 열기는 더울 때 느껴지는 짜증나는 열기가 아니라 발끝부터 노곤하게 녹이는 듯한 열기였다.
남자는 자신의 웃통을 벗었다.
“뽕이나…… 엑스터시보다 더 죽이는데?”
발음도 잘 되지 않는 듯 혀가 꼬인 남자가 하얀 분말이 든 통을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크흐…… 크흐으…….”
웃통을 벗은 남자가 룸의 문을 열고 스테이지 쪽으로 나갔다.
후끈한 열기에 뒤덮인 클럽은 욕정과 쾌락의 도가니였다.
웃통을 벗은 남자에게 주위 사람들이 열광했지만 남자의 눈은 이미 풀려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척이며 걷던 남자는 클럽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3월달의 차가운 밤공기가 남자의 몸을 후려쳤지만 남자는 추위를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추운 겨울 밤에 웃통을 벗고 돌아다니는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해운대로 비척거리며 걸어갔다.
“크흐…… 배고파…… 배고파…….”
남자의 입에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
*
*
“이런 젠장. 빌어먹을. 젠장 맞을. 떠그랄. 육시랄. 개 같은…….”
“아, 형! 그만 좀 해요!”
재미는 자신의 뒤에서 구시렁대면서 끊임없이 욕을 해 대는 강패에게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뭐? 그마아안? 그마아안 좀 해에에?”
하지만 그것이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것인지 강패의 눈이 희번득거리자 재미가 움찔했다.
강패의 눈치를 한번 살핀 재미는 두 손을 모아서는 싹싹 빌었다.
“형. 한번만 도와줘요. 이 부산까지 와서 호텔에만 박혀 있는 게 말이 돼요? 그것도 나 혼자? 매니저 형이라도 있으면 덜 심심한데…….”
“시끄러.”
“너무해요, 혀엉…….”
강패는 재미의 말이 또 길어질 것 같자 단박에 끊어 버렸다.
그러자 재미가 불쌍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건 소녀팬들에게나 통할 법한 표정이었지, 강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기껏 한다는 게 뭐, 클럽? 연예인이? 너 미친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요! 이런 기회는 흔히 오는 게 아니라니깐요? 그리고 옆에 형도 있고 제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제는 회사에서도 대우를 받는 재미였지만 강패는 가차 없었다.
독설에 가까운 막말을 해 대는 강패에게 재미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은 내 경호원이지 회사에 고용된 경호원이 아니라구요! 제가 가자는 곳으로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재미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이 히든카드인 것인지 재미의 표정에는 득의양양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따라왔잖아.”
“그…… 그건 그런데…….”
“따라오라고 해서 내가 뭐, 말렸냐? 난 그냥 욕한 것밖에 없다?”
찬물을 끼얹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강패가 말했다.
재미가 단박에 할 말을 잃고 우물거렸다.
“니가 약을 하든 여자를 끼고 난교 파티를 벌이든 상관 안 해. 그냥 그 옆을 졸졸 따라다녀야 되는 게 짜증난단 말이다!”
“형! 그렇게 안 놀아요! 형도 놀아 본 적 없잖아요! 겸사겸사 놀아요 형도!!”
강패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재미도 같이 언성을 높였다. ‘놀라’고 하는 재미의 말에 강패가 인상을 찡그렸다.
“놀기는 개뿔! 지금 한시가 아까운데! 젠장!”
“아후! 시끄러! 이럴 바에는 심심하긴 해도 태극 아저씨가 훨씬 낫겠어요!!”
“뭐? 그럼 태극 불러 줘? 내가 부르면 화장실에서 똥 싸다가도 뛰쳐나올 놈인데? 어?”
강패와 재미가 실없는 말로 티격태격하면서도 부산 밤거리를 활보했다.
서울에 뒤지지 않는 규모인 부산 역시 잠을 자지 않는 도시란 말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였고 바닷가라는 특수성과 어울려 서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쿵쿵쿵쿵!
“오오오! 형! 여기 좀 봐요! 여기가 클럽이에요, 클럽!”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재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고 좋아하는 재미의 모습을 보며 강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러다 진짜 경호원이 되는 건가?’
처음에는 책으로만 배운 죽은 지식을 산지식으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강패는 어느새 경호원으로서 직무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더럽게도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많네.”
클럽을 보면서 흥분하는 재미와는 달리 강패는 인상을 찌푸리며 재미를 가렸다.
재미와 키도 비슷하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강패의 체격상 재미를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게다가 강패가 기운을 흘리자 긴가민가하며 다가오던 여자 하나가 또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귀찮아.”
호텔서부터 클럽까지의 거리는 고작해야 몇 백 미터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번화가였기 때문에 어둡다고는 해도 재미의 변장에 백 프로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눈이란 녀석은 생각보다 예민한 놈이어서 변장을 했다고 해도 틀면 나오는 재미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열 명이 지난 후부터는 접근하는 사람의 수를 세지 않았던 강패가 재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형! 어서 들어가요, 우리. 어서요!”
“알았어, 임마! 들어가서 후회나 하지 마라!”
소맷자락을 끌어 대는 재미를 제지할 생각도 없었다.
강패는 자신이 맡은 일은 경호지, 매니저가 아니기 때문에 클럽에 가는 재미를 말릴 생각도 없었다.
쿵쾅쿵쾅!
지하로 내려가자 바깥에서는 은은하게 들리던 음악 소리가 열 배는 더 크게 들렸다.
번쩍이는 사이키 조명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그리고 몸을 비벼대는 남녀들로 가득 찬 클럽 안은 재미를 들뜨게 만들었다.
“우와…… 우와, 우와!!”
“…….”
고오오!
재미는 클럽 안에 들어서자 별천지 온 것마냥 사방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나이도 제법 먹었지만 뮤직 비디오나 드라마 촬영할 때를 제외하고는 클럽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사생활 하나까지 간섭 받는 재미에게 클럽은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자신의 행동을 규제할 매니저도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경호원도 옆에 있었고!!
쿵쾅쿵쾅쿵쾅!!
신이 나서 디제잉을 해 대는 디제이의 손짓에 따라 음악이 자유자재로 바뀌었다.
쿵쾅대는 베이스는 그대로였지만 그사이를 파고드는 다양한 멜로디는 재미로 하여금 몸을 들썩이게끔 했다.
“클럽이라…… 캬바레랑은 확실히 다른데?”
강패는 실타래처럼 은근히 기운을 뽑아내면서 클럽 내부를 스윽 훑었다.
클럽이란 곳이 남녀가 서로 춤을 추는 곳이라길래 1940년대에 유행하던 캬바레를 상상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난잡한 모습이었다.
“요정에서 술 퍼마시면서 노는 놈들이랑 비슷하군.”
노는 사람들의 모습도 제각기였다.
서로 몸을 밀착시키고 민망하게 부벼대는 남녀도 있었고 자신만의 춤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여자를 찾기 위해 눈을 번뜩이는 남자들도 보였다.
“쓰읍, 오지 말라니까.”
강패가 혀를 쯧 차자 근처로 다가오려던 여자가 움찔했다.
재미와 강패 사이로 교묘하게 30센티미터를 놔두고 원이 빙 둘러쳐져 있었고 강패는 그 원을 흡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 이 정도면.”
“형! 형도 한잔 해요!”
어느새 칵테일 바까지 온 것인지 재미가 큰 소리로 강패를 향해 말했다.
술이란 말에 강패가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라. 그러고 보니까 술을 마신 적이 한 번도 없었네.”
술을 반드시 챙겨서 마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는 술을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가끔은 술이 당기는 날이 있었기 때문에 즐겼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한 번도 술이 생각난 적이 없었다.
“담배도 그렇고 말이야.”
제정신으로 생활하는 것이 거의 힘들었던 1940년대에 술과 담배만큼 지친 독립군의 정신과 몸을 달래 주는 것이 없었다.
어차피 재정이 열악했기 때문에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지만 적막이 잦아든 전쟁터에서 피는 담배와 술맛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요!”
주위 30센티미터 반경으로 사람들이 오지 않았지만 클럽에 처음 온 흥분감 때문인지 재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재미가 그러건 말건, 강패는 재미가 건넨 술잔을 받아 들고는 들이켰다.
“캬아!”
경호원이 경호 중에 술을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술 한잔 따위에 취할 리 없다고 자부하며 들이킨 강패는 저절로 나오는 탄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죽이는데?”
목을 찌르르 울리며 넘어간 술이 뱃속에서 불을 일으키자 강패가 더운 숨을 토해 냈다.
게다가 뒷맛도 깔끔하고 향긋한 것이, 전장터에서 수통에 담아 먹던 싸구려 럼주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오오, 형 술도 잘 먹네요?”
재미도 생긴 것과는 다르게 술을 제법 하는 것인지 꽤나 독할 것이 분명한 술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강패가 희한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재미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뭐,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이래 봬도 멤버 들 중에서 술 제일 잘 마셔요! 그것도 양주로만. 히힛.”
콧김을 뿜으면서 주량을 자랑하는 것을 보니 만날 애였다.
그런 재미를 보며 피식 웃은 강패는 자신이 쳐 놓은 30센티미터 장막에 또 다른 기감이 잡히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 뭐야아?”
“누가 밀어?”
“어떤 새끼가 미는 거야?”
“이 변태는 또 뭐야?”
바글바글 몰려 있던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누군가가 거칠게 밀면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든 것이다.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몸이 밀리자 욕을 내뱉었고 파고든 사람이 웃통을 벗은 남자란 것을 알자 언성은 더욱더 높아졌다.
“큼.”
우웅!
강패가 쳐 놓은 30센티미터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강패가 헛기침을 하면서 기세를 더욱더 높였다.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사람들이 그곳을 피했기 때문에 재미와 강패 주위 40센티미터로 사람들이 나갔지만 웃통을 벗은 남자는 달랐다.
“크으으, 배고파…… 배고파…….”
“어? 형?”
“뭐야, 저놈은?”
강패의 얼굴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바지도 벗어 버리고 속옷 하나만을 달랑 걸친 남자가 초점이 풀린 눈으로 강패와 재미를 쳐다보고 있던 것이다.
미친놈이 자신이 쳐 놓은 장막을 무시했다는 것에 강패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우웅!
“배고파…… 배고파…… 목 말라…… 흐으…… 더워…….”
움찔, 움찔.
인상을 쓴 강패가 괴한에게 자신의 기세를 집중시켰지만 괴한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오히려 그것에 자극된 듯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이 강패와 재미에게로 향했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데…… 뭐야 대체?”
몸의 근육이 눈에 보일 정도로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몸은 위험 신호를 알아챘다는 것인데 괴한의 얼굴에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배고파…… 배고파…….”
비척, 비척.
“변태야!!”
“뭐야, 저 또라이 새끼는!!”
주위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괴한의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속옷만을 걸친 채 재미와 강패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혀…… 형.”
재미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불안한 목소리로 강패를 불렀다. 강패는 그런 재미를 힐끗 쳐다보고는 틱틱대듯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데 오지 말자고 했지?”
“혀…… 형.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강패가 구시렁댔다.
재미는 불안한 눈빛으로 초점 없는 눈을 한 채 다가오는 괴한을 가리키며 강패를 흔들었지만 강패는 걱정할 것 없다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우리가 뭐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뭘. 그냥 목이 마른가 보지. 냅둬.”
아무것도 모르는 재미의 눈에도 괴한은 수상해 보였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강패는 몸을 홱 돌려서는 태연하게 바에 몸을 기댔다.
‘김 씨가 쓰던 거랑 대충 비슷한데…… 흑룡 놈도 저렇게 변했었지.’
몸은 돌렸지만 강패의 배꼽 부근에서 부글대는 순백색의 기운은 실타래처럼 뻗어져 나와 괴한의 온몸을 더듬고 있었다.
자신이나 재미를 향해 뚜렷한 살기나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상인이 아니란 것은 강패도 알았다.
‘시뻘건 눈은 아닌데…… 증상은 비슷하다라.’
괴한의 증상이 마치 흑룡이나 흑웅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눈에서 적색 안광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을 제외한다면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외관은 비슷했다.
비척거리면서 바 근처까지 다가온 괴한의 입에서 걸쭉한 침이 흘러나왔다.
이미 웅성거림은 클럽 전체로 퍼져 나갔고 주위 사람들이 빙 원을 두른 채 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크아아…… 배고파아!!”
휙!!
강패 근처까지 다가온 괴한이 두 팔을 들고서는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강패에게 갑자기 달려든 괴한은 올린 두 팔로 강패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배고파아!!”
“혀…… 형!!”
덥썩!
그러고는 괴한은 입는 있는 힘껏 벌린 채 강패의 목을 물어뜯었다.
“으…… 으아아!!”
퍽! 퍼벅!!
갑작스런 괴한의 행동에 재미가 놀라 머리를 두들겼지만 괴한은 입술을 들썩일 뿐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질 않았다.
하관에 근육이 불끈 솟은 괴한은 있는 힘껏 턱에 힘을 주고 있었고 재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괴한의 머리를 쳐 댔다.
“꺄아아악!!”
“미, 미친놈이야!!”
“정신병자가 나타났다!!”
멀쩡히 있던 사람의 목을 문 괴한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는 클럽 스피커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개미떼처럼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을 수는 없었다.
와사삭! 와삭! 와삭!!
괴한의 입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 퍼졌다.
강패는 움찔거리지도 않고 있는 것이 영락없이 죽은 듯한 모습이었다.
패닉에 빠진 재미는 기계적으로 괴한의 머리통을 후려갈겨댔지만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으아…… 끄아아!! 끄아!!”
“맛있냐?”
“혀…… 형!!”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패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열심히 씹어 대던 괴한은 고통스런 비명성을 내면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이상한 취향이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지, 유리잔을 왜 씹어 먹어?”
언제 내민 것인지 강패의 손에는 받침대밖에 남지 않은 유리잔이 들려 있었다.
모습이 낯익은 것이 재미가 먹으라고 준 잔이었던 것이다.
“끄아…… 아프다…….”
연한 살로 가득한 입 안에서 유리를 깨먹었으니 괴한의 입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일반인 같으면 바닥에서 굴러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괴한은 고통스러워하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비척댔다.
“정체가 뭐지, 이놈은?”
받침대밖에 남지 않은 유리잔을 집어던진 강패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형! 놀랐잖아요!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보통 놀란 것이 아니었는지 재미의 얼굴은 반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강패가 피식 웃었다.
“설마. 저런 미친놈한테 내가 당할까.”
“그럼요. 그럼요! 형이 당할 리 없죠! 그렇게 조폭들을 휙휙 날려 버렸는데!”
호들갑을 과하게 떠는 것을 보니 적잖이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재미의 그런 모습을 보던 강패는 눈을 돌려 부들거리며 입에서 피를 흘리는 괴한을 쳐다봤다.
“어이. 술 처먹었으면 그냥 곱게 집에 가서 잠이나 자. 배가 고프면 돈 주고 음식을 사 먹던가. 왜 사람을 뜯어…….”
자신의 목을 물어뜯으려던 괴한을 보던 강패가 무엇이 생각난 것인지 미간을 좁혔다.
눈이 풀리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평소에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거라면…….
“약이군.”
왜 그 생각을 못한 것인지, 강패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이요?”
“그래, 약. 마약. 마약을 한 놈인데.”
강패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재미는 화들짝 놀랐다.
연예인이라고는 하지만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마약범을 본 적은 없을 터였다.
마약이란 것을 접해 보기도 쉽지도 않고.
하지만 강패는 달랐다.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 나온 이들이 가장 손쉽게 전쟁의 트라우마를 이겨 내는 방법이 있었다.
마약.
술이나 담배보다 훨씬 더 정신줄을 놓아 버릴 수 있는 방법이기는 했지만 독립군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품목이기도 했다.
살인의 광기에 휘말린 사람이 마약을 하게 되면 그건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살인마가 될 뿐이었다.
“더러운 기억만 떠오르네. 제기랄.”
강패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뙤놈들이나 딸각발이들을 상대할 때 독립군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이 자행했던 것이 마약을 먹인 인간 병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던 그것들을 생각하자 강패는 기분이 확 잡쳤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초점은 풀리고. 이건 짐승이군.”
괴한이 약을 한 놈이라고 판단되자마자 강패의 손속에는 자비가 사라졌다.
퍼어억!!
강패의 주먹이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괴한의 복부에 정통으로 틀어박혔다.
괴한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몇 미터를 나가떨어졌다.
“우…… 우웨에엑!! 커허어억!!”
누운 상태에서 사지를 바들바들 떨어대며 괴한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강패의 주먹이 위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인지 내장을 토해 낼 기세로 구토를 하는 남자의 입에선 피와 토사물이 뒤섞여서 흘러나왔다.
“마약이라. 마약. 이 정도로 개판이던가?”
강패는 재미를 끌고 클럽에서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막장이 된 나라라고는 하지만 마약이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닌다고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명한 클럽에 마약을 한 사람이 돌아다닌다?
“준족에게서도 말이 없는 걸 보면…… 최근에 퍼진 거란 소리겠지.”
민준이나 준족에게서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다.
마약 소지자를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라면 그들이 말해 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국정원에서조차 파악하지 못한 최근에 마약이 퍼졌다는 소리다.
“전쟁통도 아닌데 약. 약이라…… 큭큭.”
강패의 손에 끌려나가는 재미는 충격적인 장면을 봤기 때문인지 더 놀고 싶다는 둥의 어리광을 피우지 않았다.
강패는 재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가면서 입술을 말아 올렸다.
“잘 살게 된 게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재미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중얼거린 강패는 재미를 질질 끌며 호텔로 향했다.
“재밌는 세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