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26/30)

6장

“이제 여기서 지내시면 적당할 듯싶습니다.”

“호오, 제법…….”

민준의 뒤를 따라 깨끗하게 정리된 맨션으로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강패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장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곳이니 불편함 없이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주변에는 항상 요원들이 대기할 테니, 전하시고픈 말이 있으시면 그 요원들을 통해 하면 됩니다.”

“흐음……. 감시가 아니라?”

“어, 어흠…….”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하는 강패의 얼굴을 본 민준은 머쓱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모든 조폭들을 지하보도로 밀어 넣고 깨끗하게 정리한 강패가 다시 지하보도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그를 반긴 것은 민준과 그 옆에 어색하게 서 있는 소영이었다.

“감시를 시키려면 제대로 시키던가. 그렇게 어설퍼서 누구 하나 감시할 수 있겠어?”

강패의 말에 민준은 다리가 풀려 휘청거릴 뻔했지만, 그가 인간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괴물이란 것은 이미 확인했기 때문에 재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안보와 첩보를 책임지는 곳이 국정원이니만큼 모든 요원들은 고도로 훈련된 요원들이여만 했고, 자신의 분야에 능통해야만 했다.

특히 현장 요원 같은 경우는 미행이나 감시 등, 온갖 훈련들을 고도로 받은 요원들이라 자신이 미행을 당하거나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강패는 그것을 오히려 애들 장난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 카메라로 하는 거면 나도 모르겠다.”

손을 휘휘 저은 강패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어으. 푹신하구만.”

그 뒤를 따라 소영이, 기절한 만여와 세인을 어깨에 짊어진 요원들이 따라 들어왔다.

강패는 개의치 않고 기지개를 폈다.

“그래서, 준족 녀석이 내게 바라는 게 뭐야?”

오랜만에 몸을 실컷 풀어서일까?

노곤함을 느끼던 강패는 눈을 감은 채로 옆에 서 있던 민준에게 물었다.

민준은 순간 당황해 하며 더듬었다.

“바, 바라는 게 있을 리가…….”

“아. 전 방에 들어가서 두 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민준의 당황한 기색은 소영에게도 읽힌 것인지, 소영은 만여와 세인을 돌보겠다는 말을 하며 빠져나갔다.

강패가 피식 웃었다.

민준은 준족의 젊을 때와 키만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과거 준족이 자신 때문에 당황하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럼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것이 있는 건가?”

강패가 작게 열린 눈 사이로 민준의 얼굴을 흘낏 보면서 말하자, 민준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할아버님께서는 부담을 드리지 말라고 하셨지만…….전 강패 님께서 국정원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이라……. 내 도움…….”

강패가 고개를 꺾으면서 중얼거리자 민준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모두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할아버님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강패 님이 두렵습니다.”

“내가?”

강패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민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힘. 강패 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힘. 개인이 가져서는 안 될 그 힘. 국가가 아니라면 통제할 수 없는 그 힘. 그 힘이 두렵습니다.”

“…….”

강패는 민준을 그저 지그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번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불이 붙은 것인지, 민준은 더욱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강패 님께 65년 전 같은 의무감을 기대할 수 없으리란 것, 너무 뻔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대체 강패 님은 그 힘을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민준이 진지한 어조로 묻자 강패가 푹신한 쿠션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민준은 계속해서 말했다.

“왕으로 군림하시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희대의 악당이 되고 싶으십니까. 산 속에서 도나 닦으면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살겠다는 말씀은 안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 제법 잘 아는 것 같군.”

민준이 씨익 웃었다.

“이미 강패 님이 살아계셨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할아버님께서 알고 계시는 거의 모든 정보를 데이터화 해 두었습니다.”

“재밌군.”

강패도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왕이 되고 싶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아니, 바꿔서 내가 희대의 악당이 된다고 하자. 그래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또 네 말대로 내가 산속에 들어가 산다고 하자. 그럼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

강패의 말에 민준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과거 내가 대한 독립을 위해 살아갔기 때문에 이 힘을 올바른 데 썼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이제 그 힘을 사용할 목적을 잃었으니 내가 불완전하다? 안전하지 못하다? 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말하던 강패가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대한 독립이 있었기 때문에 내 힘이 옳게 쓰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올바름의 기준이었을 뿐이다. 대의가 날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 대의였던 것이지.”

“…….”

“건방지게 내게 조건 따위를 걸지 마라. 등가교환의 법칙? 그건 상대방과 내가 동등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지. 방법 자체가 글러 먹었어.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이 간단한 공식은 6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바 없는 것 같더군.”

으리으리한 내부를 가진 집.

그 안에 갖춰진 가구들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장인이 최고급 재료들로 만든 것들이었기에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강패의 눈에는 지하보도나 여기나 거기서 거기였다.

푹신한 최고급 거위털 쿠션을 베고 자나 자신의 팔을 베고 자나, 두터운 이불을 덮고 자나 지하보도에서 신문지 하나 뒤집어쓰고 자나, 강패에게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를 뿐.

“그래서…….”

강패의 몸에서는 범인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법한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민준은 꿋꿋이,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강패의 두 눈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신 겁니까?”

“뭐?”

“그래서 그렇게 힘을 남발하고 다니신 겁니까? 안 되는 일이면 주먹을 쓰고, 폭력을 쓰면서? 굳이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폭력을 쓰면서 상대를 강제적으로 찍어 누르면서요? 그 어린 고등학생들한테까지도 그런 손속을 써 가면서요? 사람 하나를 반병신으로 만들면서까지요? 그게 지금 대의라고 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정의라구요? 그게 당신의 올바름의 기준입니까?”

“…….”

이번에는 강패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그러자 민준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어 강패를 공격했다.

“대한 독립이란 명제가 있었기 때문에 강패 님의 힘은 대한민국의 대의에 쓰였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강패 님이 한국에 오시고 나서 벌인 일들의 대의는 대체 무엇입니까.”

“내 대의는…….”

강패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민준은 그조차도 끊으면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행동들의 정의는 대체 무엇입니까. 지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더군다나 당신의 능력에 걸맞는 거대한 돈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고작해야 몇 억 따위가 당신의 정의입니까?”

“…….”

민준의 말은 논리 정연했다.

민준의 말마따나, 강패가 한국에 들어와서 벌인 일은 큰 목적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틀린 부분도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아주 큰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너 말이야.”

“네. 강패 님.”

잠시 민준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강패가 히죽 웃어 보였다.

“준족 녀석이 칭찬할 만큼 똑똑해. 아주. 내가 본 사람 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똑똑해.”

“가,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칭찬에 민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게다가 대부분 똑똑한 놈들은 꽉 막혀서 융통성 없이 답답한데, 네놈은 그런 것도 없단 말이야? 말도 또박또박 잘하고, 여기저기 아픈 데만 쿡쿡 쑤시는 것에 타고난 놈이야 넌.”

강패의 계속되는 말에 민준은 어정쩡한 태도로 몸을 수그렸다.

“그런데 말이야.”

“……!”

강패의 목소리가 이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그러나 민준은 순간 어디선가 거대한 손이 자신의 어깨와 목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 왔다.

“정의가 뭐냐. 네가 말하는 그 대의는 기준이 뭐냐. 그런 건 누가 정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

강패는 변함없이 히죽대고 있었지만, 민준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형의 기운에 눈동자만 굴려 강패를 쳐다보았다.

“65년 전에는 그래도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조선이고, 그 조그만 반도 하나 차지했다고 으스대는 쪽바리들이 보기에 눈꼴사나워서 대한독립군에 가입했지. 그래. 그럼 난 정의롭고 대의에 따라 행동한 거야? 난 정의롭고 대의에 따랐는데, 쪽바리들은 왜 ‘대재앙’이라고 부른 걸까?”

“…….”

민준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압력이 한층 무거워지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쪽바리들 편에 섰으면 그들의 정의가, 대의가 되는 거고? 그럼 너는 날 뭐라고 불렀을까? 세상 참 살기 편하군.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어디 있어? 설마 애들처럼 우리 편이면 착한 놈이고, 저 쪽 편이면 나쁜 놈이고?”

“…….”

강패가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잘 들어라. 이 세상의 정의와 대의는 힘 있는 자의 것이야. 그것이 인간 윤리에 위배되건 맞는 길이건 상관없어. 힘이 있는 놈이면 그놈이 정의고 대의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던데, 아닌가?”

초강대국인 미국, 그리고 그런 미국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중국. 그 외에도 이 세계를 이끌어 간다고 난리를 치는 몇몇의 나라들에 의해 이 세계를 둘러싼 법이 정해지고 있었고, 미국과 중국의 입김에 의해 세계 정책이 뒤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난 강자야. 힘이 있는 놈이라 이거지.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이 대의고,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며 그것이 바로 정의다.”

“크으…….”

무식하리만치 단순한 논리.

당장에라도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민준이지만, 그에게는 지금 자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기운에 항거할 만한 기운이 없었다.

“자, 그럼.”

“…….”

히죽이는 강패와 두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민준은, 순간 하얀 섬광이 강패의 눈에서 일어난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부탁해 봐. 너보다 강한 힘을 가진 강자에게,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방법으로.”

“……허억! 허억……!”

일순간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형의 압력이 씻은 듯 사라지자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풀리려는 다리를 간신히 붙잡으면서 비틀거렸다.

강패는 오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면서 힘들어 하는 민준을 쳐다보았다.

“네놈은 똑똑하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겠지. 자, 해 봐. 내 마음에 들면 계약 성립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기되겠지. 그러면 아마 네놈은 바로 머리맡에 폭탄을 달고 사는 것처럼 찝찝해질 테지만, 그거야 내 상관할 바 아니고.”

“후우, 후우…….”

민준은 순간적으로 강패의 얼굴을 한번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민준의 주먹이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뿐,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할아버님 말씀대로 당신은 무식합니다. 단순하고 직설적이에요.”

“그래? 준족 녀석이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단 말이지?”

언제 그런 살벌한 기세를 뿜었냐는 듯, 강패가 민준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한숨을 푹 내쉰 민준이 강패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의 말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무식하고, 직설적이고, 극히 주관적이며 이기적이기까지 하니…….”

“흐음……. 내 모든 걸 데이터화 했다더니, 이런 것까지는 데이터화가 안 되나 보지?”

강패가 민준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빙글거렸다.

강패를 쳐다보던 민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강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강패는 눈을 슬며시 뜨고 그런 민준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강패 님을 보스로 모시겠습니다. 강패 님의 수족이 되어 강패 님의 그 힘을 옳은 방향으로 쓰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자신을 가만히 주시하는 민준을 보며 강패가 하얗게 웃었다.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어린 시절 준족의 얼굴이 민준의 얼굴 위로 겹쳤다.

“역시 닮았어. 너와 네 할애비는. 큭큭.”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그 할아비에 그 손자였다.

유쾌해진 강패가 키득거리자 민준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 주시는 겁니까, 아닙니까?”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지만 못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인지, 민준의 얼굴은 시종 뚱했다.

그에 강패는 더욱 크게 킥킥거렸고 민준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이, 준족이. 그만 들어오지?”

킥킥대던 강패가 웃음을 가라앉히고 소리치자 현관문이 열리더니 준족이 휠체어를 타고 들어왔다.

놀란 민준이 현관문과 강패를 번갈아 쳐다봤다.

강패가 또다시 킬킬대자 준족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렇게 자랑한 아이입니다. 잘 돌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패 님.”

“큭큭큭, 준족. 나이 좀 먹었다고 근엄한 척은 집어치워. 그나저나 너랑 네 손주 녀석, 성격이 어쩌면 그리 똑같을 수가 있는 거지?”

준족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지만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민준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물었다.

“하…… 할아버님. 어떻게…….”

“난 이제 늙었다. 그리고 국정원도 물이 고인 연못이 된 지 오래고. 강패 님이라면 네 그릇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을 게다. 잘해 보거라.”

“할아버님…….”

민준이 고개를 푹 숙이자 준족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화목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던 강패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 배고파. 넌 일도 안 하냐? 손자 보냈으면 됐지, 왜 쪼르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좋은 분위기에 산통을 깨는 듯한 말투였지만 준족은 익숙하다는 듯 민준의 손을 놓았다.

“강패 님께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준족이 민준을 힐끔 쳐다보았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에 오겠다는 말을 하며 집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찬장에서 과자를 찾아낸 강패가 소파에 앉아 부스럭거리며 봉지를 잡아 뜯었다.

“호오. 이게 리모컨이란 거군.”

과자를 하나 집어 먹은 강패가 리모콘을 들고서는 신기한 듯 보더니 텔레비전을 켰다.

-오늘 오후 X시경, 종로 한복판에서 일어난 고등학교 일진들의 패싸움으로 인해 일진의 조직 폭력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일어난 사건은 조직화된 일진들이 각각의 구역에 대한 권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써…….

“응?”

텔레비전에 익숙한 화면이 나오자 강패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

화면에는 낯익은 지하보도와 강패가 때려눕힌 고등학생들이 응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일진의 조직화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를 끝으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간 뉴스를 보던 강패가 준족을 쳐다보았다.

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측에서도 나섰지만, 조선 그룹 측에서도 나섰습니다.”

“……조선 그룹?”

“네. 아신다면 설명이 쉽겠군요.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의 대기업입니다. 그 입김이 대단해서 언론을 통제하는 것쯤이야…… 어쩌면 국정원보다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 그룹이라…….”

강패가 일하러 나가던 공사장의 공사를 주관한 것이 조선 그룹이란 것은 강패도 아는 바였다.

파업하던 이들이 그토록 외쳐 대던 게 조모강과 조선 그룹이었으니.

“조모강이 그곳의 주인인가?”

“그런 것도 아셨습니까?

준족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강패를 쳐다봤다.

강패가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공사장 인부들이 파업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흑룡파와 부딪친 이유도 그 때문이고.”

“…….”

“됐고, 하려던 말이나 하고 얼른 가라. 안에 애들 깨겠다.”

“안에 계신 분들 때문에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나도 안에 있는 녀석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잘됐군. 말해 봐라.”

“형님과 방 안에 있는 저 아이……. 혹시 아시는 사람입니까?”

“아이? 어떤 아이?”

“소영이 말고…… 더 어린아이 말입니다. 형님이 구해 내신 그…….”

준족이 가리키는 아이가 세인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은 강패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음……. 죄송하지만 어떻게 아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강패의 수긍에 준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모강이라는 이름은 단순 재계 서열 5위의 조선 그룹의 회장이기 때문이 아닌, 그의 넓은 인맥으로 인한 영향력 때문에 더욱 대단했다.

그가 마음만 먹고 도움을 요청한다면 당장에 발 벗고 나설 고위 국회의원들이 한둘이 아니었기다. 때문에 국정원으로서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조모강이 강패를 눈독 들이고 있는 것이라면?

아니, 최소한 강패의 진면목의 아주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있다면, 인재 욕심이 많다고 알려진 그가 강패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그것보다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준족이 걱정하는 것은 자칫하다 조선 그룹과 강패의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었다.

강패의 진면목을 알 리 없는 조모강은 강패를 품으려고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대한독립군 시절 독립군 대장에게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강패였다. 뻗대고 맞서면 맞섰지, 순순히 조모강의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사이가 틀어지게 되는 것인데, 강패로 하여금 대한독립군의 수장을 맡길 생각인 준족에게 그 상황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 아이, 조모강의 유일한 손녀입니다. 조선 그룹의 차기 후계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준족이 말에 강패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강패였지만, 밥 차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냄새나는 노숙자들 옆에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세인이 재벌이라는 소리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재벌이 뭐가 아쉬워서? 아니, 그것보다 저 아이는 재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준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가의 아이치고는 제법 개념이 잡힌 아이라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봉사 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그 아이가 조모강의 손녀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흐음……. 그래?”

첫 만남부터 거리낌 없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설마 재벌일 것이라고는 강패도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준족의 눈길에 강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모강이 형님께 접근해 올지도 모릅니다.”

“조모강이? 나한테? 왜?”

준족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양반이 자기 손녀는 애지중지한다고 합니다. 돈에 관해서는 속물이지만 혼자서 기업을 일으킬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니, 형님을 보고서는 두 가지 반응이 나올 겁니다.”

“……두 가지 반응이라?”

형님이라고는 하고 있지만 준족이 살아온 기간은 강패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 연륜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강패가 희미하게 눈썹을 꿈틀거리자 미소를 머금은 준족이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형님을 의심하고, 손녀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눈이 멀어 분노할 겁니다.”

“그럼 다음은?”

“두 번째는…… 경호원들에게 말을 전해 듣고 형님을 어떤 식으로는 옭아매서 품으려고 할 겁니다.”

“뭐?”

강패가 눈을 치켜뜨자 준족이 더욱 진하게 미소 지었다.

강패가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돈 냄새 나는 늙은이는 싫어. 돈에 미친 추악한 늙은이라면 더 싫고. 내가 품을 수 있는 건 딱 저 아이까지다.”

“……그래도 너무 반목하지는 마십시오, 형님.”

“글쎄. 그 조모강이란 노인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하아, 형님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강패가 빙긋 웃으면서 빈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그보다 너, 아니, 특능 부대는 어떻게 된 거지?”

강패의 질문에 준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6.25 전쟁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뙤놈들이나 쪽바리들한테 견제당한 일제강점기에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특능 부대가 있는데 나라에 전쟁이 나고 타국의 양분이 되다니……. 이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뭐라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습니다, 형님.”

“아니, 들어야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특능 부대가 갈라서지 않는 이상, 특능 부대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이 나라에 없어. 그런데 나라가 그렇게 반으로 갈리고 외국의 원조를 얻는다? 말이 안 돼, 말이.”

그동안 계속 생각해 봤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반드시,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특능 부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남북으로 갈린 것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나라를 꾸릴 수 있게 됐을 거라고, 강패는 확신하고 있었다.

“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준족.”

강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니,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도가 아니었다.

감정의 편린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무감정한 목소리에 준족이 몸을 바짝 굳혔다.

“내게, 자격이 없나?”

얼핏 쓸쓸한 말에 준족이 아니라는 듯 황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말끝을 흐리던 준족은 무표정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강패의 까만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힘겹게 내뱉었다.

“대장님의 마지막 전언이셨습니다. 그뿐입니다.”

힘겹게 말을 내뱉은 준족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놈의 영감탱이.”

강패는 무표정을 풀고서는 퉁명스레 툭 내던지듯 말했다.

하지만 준족이 내뱉은 한 마디는 강패의 머릿속에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특능 부대에 그다지 유쾌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것.

어떤 모종의 이유로 인해 특능 부대는 와해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 불리는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동시에 외세가 남북으로 분리된 한반도를 장악하는데 나서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것 한 가지만 말해다오.”

누구는 고작 3년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강패가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누군가가 말하기에는 불과 3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천애고아로 살아온 강패에게 있어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강패는 그들로부터 강렬한 동질감을 느꼈다.

“귀신 새끼들이나 뙤놈들도 같이 일을 벌인 것이겠지?”

일반 군인이 특능 부대를 제압할 수 있다?

개소리다.

일반 군인들에 의해 그토록 쉽사리 무력화된다면 특능 부대는 일찍이 만주 정부 시절 중국군에 의해서 모두 몰살되었을 터다.

개개인의 능력은 현대화기 앞에서 무력할지 몰라도 뭉친 특능 부대의 힘은, 뙤놈들이나 귀신 새끼들이 작정하고 덤벼들지 않는 이상 이길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자신들의 나고 자란 곳이 아닌 만주에서도 그랬다. 조국의 강산에서 특능 부대는 결코 그저 그런 무력에 와해될 존재들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칼들도…… 너무 많았습니다.”

준족은 목을 쥐어 짜내듯 간신히 말했다.

강패의 눈이 순간적으로 부릅떠졌다. 대충 짐작이 간 것이다.

강패의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내려앉았다.

“토사구팽…….”

“……놀아난 것이었습니다. 다시, 그들의 손에 의해.”

수십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분한 듯, 늙은 준족의 목소리에 희미한 노기가 실렸다.

“형님, 그러니 형님께서 대한독립군을 반드시 맡아 주십시오. 형님이 그들을 이끄셔야 합니다. 일본이나 중국, 아니, 미국에까지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그들을 키워 주십시오. 이 나라의 골수까지 파고든 그들로부터 대한민국이 버텨 내기 위해서는 형님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강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강패를 준족은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강패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싫다.”

“형님!”

“너, 준족이.”

“…….”

강패가 말을 끊으며 준족을 바라봤다.

검버섯이 피고 주름져 늘어졌기 때문인지 표정조차도 잘 드러나지 않는 준족이지만 눈동자만은 간절했다.

“노구를 핑계로 나한테만 일을 맡기고 넌 놀 생각이냐?”

“예?”

갑작스런 강패의 말에 준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패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 준족을 내려다보았다.

“그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 보모는 네가 끝까지 맡아라. 난 내 나름대로 새로 만들어야겠다.”

“형님! 그냥 그 아이들을 맡으시면…….”

일방적인 통보에 준족이 당황했지만 강패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날 자유로이 움직이게 해다오. 그때처럼. 나를 받쳐 줄 몇 명만 있으면 된다. 내 반드시, 두 번 다시 대장 영감이나 너 같은 놈들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면 충분하다. 그래, 충분해.”

“형님…….”

“네가 그토록 자랑하던 똑똑한 손주 놈도 내 밑으로 들어왔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대재앙인 나와, 명석한 그놈의 두뇌면…….”

잠시 뜸을 들인 강패가 살며시 열린 방문을 쳐다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충분하겠지. 이 나라 골수까지 파고든 놈들을 털어 내기에는.”

*

*

*

밖에서 두런두런 나는 목소리에 만여와 세인을 돌보고 있던 소영은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저 인간은?”

골똘히 생각하던 소영이 중얼거렸지만 어차피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많이 먹고, 책을 엄청 보고, 싸움을 기가 막히게 잘하고…….”

지난 몇 주 동안 강패를 감시하면서 얻은 단편적인 정보는 그것이 다였다.

“분명 수상한 점이 있기는 있단 말이야.”

마치 자신을 아는 듯 행동하는 것하며, 자신을 비롯한 국정원 현장 요원 다섯 명을 순식간에 때려눕힐 정도의 실력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보다도 더욱더 수상한 것은…….

“CIA나 처장님은…….”

CIA가 다짜고짜 총을 뽑아든 것하며, 이곳에 같이 온 민준이 강패를 극진하게 모시는 모습은, 그녀에게 모두 생소한 것들이었다.

“꾀죄죄하게 생겨서는 수염도 덥수룩한데…….”

소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밖에서는 계속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소영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그 틈 사이로 바깥을 바라봤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강패가 정확히 소영을 바라보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저 남자?”

마치 자신이 바깥을 쳐다볼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 아닌가?

쉭!

“……!”

팡!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동시에 소영이 옆으로 튕기듯 굴렀다.

방금 전까지 소영이 앉아 있던 자리를 만여의 발이 훑고 지나간 것이다.

소영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기에 망정이지 저 발에 머리라도 맞았으면 최소 기절, 심하면 뇌진탕일 터였다.

소영의 눈썹이 상큼 치켜 올라갔다.

“뭐, 뭐에요!”

“넌 누구냐! 여기는 어디지!”

언제 기절했었냐는 듯, 만여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소영을 노려봤다.

자신과 똑같은 기술에 당한 만여다. 정신을 차린 후 그 수치심보다도 세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소영을 공격했지만, 놀랍게도 소영이 그 기습 공격을 피해 낸 것이다.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세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본 만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소영은 잔뜩 날을 세운 만여의 모습에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기습적으로 쏘아지는 만여의 다리에 기겁하며 두 팔을 교차시킬 수밖에 없었다.

퍼억!

“꺅!”

두 팔을 교차시켜 막았음에도 묵직한 충격에 소영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중심을 잃지 않은 것은 소영이 제대로 된 국정원 요원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만여의 모습에 소영의 속에서도 불이 치솟았다.

“비켜!”

그러건 말건,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 만여가 다시 발을 뻗었다.

훙!

“다짜고짜 발을 날리다니…….”

하지만 이번에는 소영도 대비하고 있었다.

다리를 한 팔로 막은 소영이 그대로 만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덥석!

자신보다 한 뼘은 큰 만여의 셔츠 칼라를 움켜쥔 소영이 그대로 허리를 숙이며 틀었다. 길쭉한 다리가 뒤집히면서 만여의 몸이 허공을 부유했다.

하지만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영의 예상과는 달리, 만여는 넘어가는 짧은 순간 소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공무집행 방해 조……. 에! 윽!”

퍽!

소영의 몸이 흔들리자, 만여가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무릎으로 소영의 가슴팍을 찍어 찼다.

“으윽!”

가까스로 만여의 무릎을 막아 낸 소영이었지만 그 충격까지는 이기지 못하고 뒤로 비척비척 밀렸다.

문 앞에 있던 소영이 방 한구석으로 밀려나자 만여는 재빨리 세인을 어깨에 짊어지고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소영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감히 공무원을 쳐?”

휘익!

밀려나던 힘에 버티지 않고 오히려 벽을 몸으로 치면서 튕겨 나온 소영이 발끝으로 만여의 무릎 뒷부분을 찼다.

외부 충격에 가장 민감한 부분 중 하나인 무릎 관절에 소영의 발끝이 닿자, 만여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만여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세인의 몸 역시 같이 출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인의 몸이 만여에게서 떨어져 허공에 붕 떴다.

관성에 의해 앞으로 튕겨지듯 붕 뜬 세인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저대로 떨어진다면 크게 다칠 것이 분명했다.

“아가씨!”

만여가 비명을 질렀다.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흐잇차!”

순간, 강패가 불쑥 나타나며 공중에서 부유하던 세인을 그대로 안아 들었다.

“너, 너는!”

만여는 뒤에 소영이 있다는 것도 까먹고 눈을 부릅떴다.

일인 전승이라는 태극도와 똑같은 기술을 쓰던 남자.

동시에 자신을 너무나도 쉽게 꺾어 버린 남자가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뭐야, 기껏 구해 놨더니 이젠 아예 망가뜨리려고 작정했군?”

혀를 찬 강패가 너무 놀라 움직이지 못하는 만여를 보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 핀잔에 정신을 차린 만여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뒤에서 덮치는 소영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당신, 공무집행 방해죄야! 공무원에게 다짜고짜 폭력을 휘둘러?”

“이…… 이익!”

“어어! 힘주지 마! 부러진다? 부러져?”

만여가 제정신이고, 세인이 없는 상황이라면 이리도 간단히 소영에게 제압될 리가 없었다.

비록 소영이 국정원 자체 평가에서, 특히 격투기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만여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날 지하보도에서 강패가 봤던 만여의 모습은 가히 신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늘씬한 미녀 두 명이 땅에 엎어져서 낑낑대는 모습은 강패의 눈을 즐겁게 하기 충분했다.

“호오, 더해 봐. 잘하면 보이겠다. 호오.”

강패는 이제 본격적으로 즐기겠다는 듯, 아예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만여의 늘씬한 다리를 쳐다보았다.

지하보도에서도 치마 옆을 강제로 터서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는데, 땅바닥에 누워 몸부림치다 보니 더욱더 아슬아슬해진 것이다.

“보…… 보지 마!”

“보지 마욧! 지금 뭐하는 거야! 이 치한!”

상황을 인식한 만여가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를 질렀다. 만여를 제압하려고 하던 소영도 이 순간만큼은 한마음이 되어서 함께 소리를 질렀다.

“어허허. 역시 젊음이 좋은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때 준족이 강패 뒤에서 스윽 나타났다.

만여와 소영 모두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소영은 준족이 국정원 차장이라는 사실에, 만여는 다른 남자, 그것도 노인 앞에서 이러고 있다는 것에 패닉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읏!”

만여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몸을 뒤틀자 준족을 보고 굳었던 소영이 반응하지 못하고 잡았던 팔을 놓쳐 버렸다.

몸을 벌떡 일으킨 만여는 허겁지겁 치마를 내려 자신의 다리를 가렸다.

“쯧쯧, 그렇게 몸 드러나는 거 신경 쓰는 애가 아까 거기선 그렇게 날뛴 거야?”

“꺄악!”

열심히 다리를 가리던 만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강패의 목소리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시뻘게진 얼굴로 다짜고짜 다리를 휘둘렀다.

“응? 얘 있는데?”

“……!”

휘익!

우당탕탕!

강패가 품에 안긴 세인을 불쑥 내밀자 만여는 황급히 다리의 경로를 바꿨다. 때문에, 흐트러진 자세로 꼴사납게 넘어져 버렸다.

강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봐, 또 다 보이잖아.”

“……!”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만여가 다급히 치마를 내렸지만 이미 보일 것은 다 보인 후였다.

“너, 너……!”

얼굴이 잔뜩 붉어진 만여의 모습은 조선 그룹 내에서 쉬쉬하는 ‘마녀’가 강림한 모습이었지만, 강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으, 으응…….”

그때 강패의 품에 안겨 있던 세인이 깼다.

그 순간 만여의 모습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만여는 걱정스러운 모습이 가득한 채로 강패의 품에 안긴 세인을 쳐다봤다.

“여, 여긴…….”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세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여가 서둘러 세인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아가씨! 제 말 들리세요? 괜찮으세요?”

“……류 전무님?”

만여는 세인이 자신을 알아보자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만여를 보던 세인은 문득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게 안겨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아, 아저씨?”

고개를 들어 강패와 눈이 마주친 세인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강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꼬마, 너 왜 그래?”

이상한 행동에 강패가 세인을 안은 팔을 더 올려서 짤짤 흔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귀부터 시작해서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뭐하는 거야!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요람에 태운 아기도 아니고, 세인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에 기겁한 것은 만여였다.

만여가 강패에게서 세인을 빼앗듯이 빼냈다. 강패의 팔에서 벗어나며 세인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세인은 곧 빨개진 얼굴로 만여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많이 놀라신 모양이네요. 열이 잔뜩 올라 있어요. 본가로 돌아가셔야겠어요.”

“난 괜찮…….”

두 발로 땅에 딛고 선 세인이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자신을 쳐다보는 강패를 보고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역시 미소를 짓고 있던 준족과 눈이 마주치고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국정원장보다 실세인 차장이었다. 아니, 실제로는 대외적인 업무만을 하는 원장이고, 임기제인 원장과는 달리 국정원 내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국정원 최고 권력자였다.

“3처 강소영 요원?”

“넷! 차장님!”

준족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실에 놀란 소영이 바짝 군기 잡힌 자세로 답했다.

준족이 푸근하게 웃어 보였다.

“편하게 해도 됩니다. 대한독립군 소속, 맞지 않습니까?”

‘대한독립군‘이라는 말에 소영의 눈이 조심스레 강패와 세인, 그리고 만여를 훑었다. 바짝 긴장한 상태가 된 소영을 본 준족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강패 님은 이미 알고 계시니 상관없습니다.”

“……예?”

준족의 말에 소영이 벙찐 표정이 되었다.

“가, 강패…… 님이요?”

강패가 대한독립군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보다 저 꾀죄죄해 보이는 남자가, 노숙자인 남자가 차장인 준족에게 극존칭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예, 강패 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형님’이 아니라 ‘강패 님’으로 부르고 있는 준족이었지만, 그녀가 왜 놀라는지 모르지 않아서 그저 씁쓸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65년 전 자신이 알았던 형님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라도 대충 넘어가는 것이 나았다.

“아, 아니. 왜 차장님께서 저 남자한테 강패 님이라고…….”

예상한 질문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기에, 준족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개인적인 프라이버시입니다.”

“아…… 네…….”

프라이버시라는데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소영이 주춤거리면서 물러서자 준족이 말했다.

“대한독립군의 수장을 맡기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을 하신 분입니다. 능력은 제가 보장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

연달아 들리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소영은 이제 놀랄 기운도 없었다.

극존칭에 이어서 대한독립군의 수장이라니.

‘아무리 많이 쳐줘도 삼십 대로 보이는 저 남자가?’

하지만 그녀의 상관이자 국정원의 최고 수장인 준족이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같이 지내보시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예. 그렇……. 네? 같이 지내요?”

소영은 준족의 말에 국정원 차장 앞이라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강패의 존재는 극비리에 부쳐야만 했다. CIA에서 접근해 오고 있는 와중에 이 사실이 정치권에 흘러들어갔다가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터였다.

그것은 바깥에는 공개되지 않을 종류의 파장이라 준족으로서는 반드시 막고 싶었다. 해결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 거센 폭풍 속에서 버티기에 그는 너무 늙었다.

“강패 님을 보좌할 요원이 필요합니다. 이미 제 손주 녀석인 3처장이 저분을 모시기로 했지만 그 외에도 보좌할 사람들이 필요하지요.”

간접적으로 ‘네가 가라.’라는 준족의 말에 소영의 표정이 굳었다.

국정원에서도 극비리에 속하는 대한독립군에 속해 있는 그녀였고, 그곳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준족이었으니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동시에 준족이 자신의 손자마저도 내놓을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는 강패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파견으로 처리해 놓으면 경력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배울 것이 많은 분이시니까요.”

소영의 표정은 거듭 기괴해졌다.

그냥 형식적으로 극존칭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준족은 정말 강패를 경외하듯 모시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소영이 고개를 숙이며 승낙했다..

강패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별다른 선택지가 있지도 않았다. 준족이 인자하다고 정평이 나 있기는 했지만, 동시에 필요 이상의 말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런 준족이 자신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붙여 이야기한 것이라면, 그건 사실 명령과 다를 것이 없었다.

“부디 많이 배워 오시기 바랍니다.”

예상대로 부탁을 가장한 명령이었는지, 준족은 정해진 수순을 밟듯 고개를 끄덕이고 휠체어를 몰아 강패에게로 가 버렸다.

준족을 일별한 소영이 만여와 세인 사이에서 툭탁거리는 강패를 굳은 얼굴로 쳐다봤다.

‘대체…… 당신 정체가 뭐지?’

*

*

*

“회장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국정원에서 온 연락이니 안심하셔도…….”

평창동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 입구 앞.

차에서 내리는 조모강을 운전기사가 부측했다.

조모강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자신의 손녀를 해하겠다고 협박하던 흑룡의 말에도 차분함과 무신경함을 유지했던 조모강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녀가 국정원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 그것이 모두 가면이었다는 것을 드러냈다.

지금의 조모강은 손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명의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자네는 경호팀장의 모습을 못 보았나? 류 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그런데 그 연락 한 통 받고 안심하라고? 제정신으로 말하는 건가?”

국정원에서 연락이 오자마자 조모강은 비서 한 명과 운전기사만을 대동하고 빛살처럼 회사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운전기사를 닦달해 강남에 위치한 조선 그룹 본사에서 강북에 위치한 평창동까지 불과 사십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정원에서 왜 손녀를 도와주었는지는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물론 냉정한 사업가일 때의 조모강이라면 국정원에서 결코 순수한 의도에서 손녀를 구해 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조모강에게는 손녀를 그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만여를 보내기는 했지만 상대는 대한민국의 서울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흑룡파였다. 아무리 정치권이나 경찰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보다 빠를 순 없었다.

“회장님. 그래도 조금 진정을 하시고…….”

비서실장이 옆에서 조모강을 말리려고 했지만, 조모강은 비서실장을 거칠게 밀쳐 냈다.

저택의 입구에 석상처럼 서 있던 국정원 요원들이 조모강의 얼굴을 알아보고 무전기를 통해 말하자 문이 열렸다.

달칵!

“세인아. 세인아!”

조모강이 열린 문을 통해 무작정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 조 회장님 아니십니까.”

우뚝.

널찍한 정원을 한걸음에 내달릴 기세던 조모강이 자신을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에 몸을 멈춰 세웠다.

손녀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빠진 상태였지만, 아직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누구신지?”

고개를 돌린 조모강이 휠체어에 탄 노인을 보며 성급하게 되물었다. 당장 손녀를 보러 가고 싶은 것을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국정원 차장 이윤이라고 합니다.”

별칭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밝힌 준족이 빙긋 웃자 조모강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손녀의 안위가 걱정된다고는 해도 상대는 대한민국 국가 권력 기구 중에서도 최상위에 자리하고 있는 국정원이었다. 그 안에서도 국정원의 실세 중에 실세인 준족은 조모강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조모강이 서둘러 예의를 차렸다.

“안녕하십니까.”

“네. 손녀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준족은 조모강의 급한 마음을 안다는 듯 그가 제일 궁금해 하고 있는 사실을 슬쩍 흘렸고, 조모강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손녀는 무사합니까?”

“네. 다행히 그 근처에 제 은인께서 계셔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순전히 한 명의 할아버지로서 기뻐하는 조모강을 보면서 준족이 빙긋 웃었다.

“저도 손주 녀석이 있다 보니 조회장님의 기분을 백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 은인이라는 분이 저 안에 계십니까? 들어가서 인사라도 드려야겠습니다.”

손녀가 무사하단 것을 준족의 입을 통해 들은 조모강이 반쯤 나갔던 이성을 되찾았다. 본래의 기질이 순식간에 돌아온 조모강의 눈이 번득이며 빛났다.

국정원 차장의 은인.

그 은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손녀를 구해 줬다는 소리다.

이런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는 처신만 잘하면 재계에서 그 누구도 쌓지 못했던 국정원 차장과의 인연이 생긴다는 소리였다.

“예. 그분이라면 저 안에 계십니다. 강패라는 분이시니 들어가시면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 성함이 강패시군요. 감사합니다. 차장님 덕분에 제 손녀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조모강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제 손녀를 구해 주셨다면 이 조모강이한테도 은인이 되십니다.”

“예. 좋은 분이십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지요. 허허, 그럼 이만 들어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도 손녀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셔야죠.”

은근히 ‘은인’이라는 공통 분모로 엮이려는 조모강에게 준족이 넌지시 말했다.

“아, 어허허허허!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준족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조모강은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준족은 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조모강과 그 비서실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형님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뭐, 강패 형님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하겠지만, 그건 저 사람 그릇에 따라 달라지겠지.”

*

*

*

“그, 그대가 강패란 사람이오?”

조모강의 입은 크게 벌어져 있었다.

세인의 어깨에 올라간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그대로 느낀 세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강패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경악하는 표정의 조모강에게 소파에 걸터앉은 강패가 삐딱하게 말했다.

“조선 그룹의 조모강?”

“이봐요. 말조심을…….”

그런 강패의 모습에 비서실장이 나섰지만, 조모강의 제지에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장의 얼굴과 조모강의 얼굴을 차례대로 쳐다본 강패가 피식 웃었다.

“꼬마랑 하나도 안 닮았군. 다행인데 꼬마?”

조선 그룹의 회장을 눈앞에 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강패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만여와 소영은 미친놈 보듯 강패를 쳐다봤고 비서실장도 도끼눈을 뜨고 있었지만, 적어도 직접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대체 간이 얼마나 큰 건지…….”

“아예 회장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소영은 국정원 원장에게 극존칭을 받는 강패이니만큼, 조모강 앞이라고 해서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두 여자가 떠드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지만 조모강이나 강패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조모강은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강패가 반말을 찍찍 뱉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고, 이는 조모강을 쳐다보는 강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얼마간을 마주 보았을까.

어느 정도 진정된 것인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조모강이 크게 허리를 숙였다. 직각보다 더 깊이 숙인 조모강의 머리는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회…… 회장님!”

“할아버지!”

“……!”

그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놀랐지만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뜻밖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패 역시 조모강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강패와 그 앞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인 조모강.

누가 보더라도 기이한 상황이고 경악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이 상황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듯했다.

“왜 이러쇼.”

강패가 일어나라고 하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기세의 조모강이었다. 때문에 강패가 퉁명스레 말을 했지만, 그래도 조모강은 굽힌 허리를 다시 세우지 않았다.

“아, 왜 이러냐니까!”

정중한 것을 넘어 과할 정도로 ‘숙이는’ 조모강보다도 그 옆에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는 비서실장의 눈초리가 더 짜증났다.

강패가 버럭 윽박지르자 그제야 조모강이 입을 열었다.

“자식 놈을 잃고 유일하게 남은 이 조모강의 혈육입니다. 그런 손녀를 구해 주신 분한테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한참 젊어 보이는 강패에게 말하는 것치고 지나치게 공손했다.

강패가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오다가 휠체어 탄 노인네라도 만난 거요?”

“국정원 차장님이라면, 만났습니다.”

“제기랄.”

대한민국의 생리를 아직 완벽하게 깨닫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미친 듯이 파고든 책들에서 얻은 지식과,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들에 비춰 볼 때, 이런 종류의 인간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 없이 고개를 숙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패였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지하보도에서 먹고 자고, 노가다를 하는 하위 소득 계층에 속해 있었으니까.

“바깥에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구만 그놈이.”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강패가 준족의 능청맞은 미소를 떠올렸다.

“늙더니 음흉해져 가지고는……. 끄응…….”

상대방이 저자세로 나오니 강패라도 막무가내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준족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것이란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까 전, 대기업 회장과 마찰을 일으켜서 좋을 것이 없다는 충고가 강패의 뇌를 스쳤다.

그때 마찰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말하기야 했지만, 강패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준족이 그 말을 완전히 신뢰할 리가 없는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군.”

이 세상에 무조건적인 호의는 없다.

처절한 어린 시절을 살아왔던 강패는 이 진리를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득한 사람이었다.

조모강이 괜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얻을 것이 있다고 판단되니 저렇게 허리를 숙이는 것이리라. 준족의 호의와는 궤가 다른 목적이 있는 호의와 정중함이었다.

“됐수다. 난 내가 내키는 일을 한 거니, 저 꼬마를 구해 준 건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쇼.”

내뱉듯 말한 강패가 고개를 팩 돌려 버리자 조모강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다시 세웠다.

강패의 무례함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건만, 약이라도 먹은 것인지 조모강의 얼굴에는 인자해 보이는 미소가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다고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손녀를 구해 주신 분이니, 제 은인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대통령과 독대해도 이렇게는 안 할 터였다.

조모강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고, 강패는 결국 인상을 팍 쓰면서 소리쳤다.

“아 거참! 그러다 허리 부러지겠소. 나이도 많은 노인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합시다!”

강패의 퉁명스런 말투에 비서실장이 다시 한 번 발끈했지만, 조모강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웃는 낯으로 허리를 세운 조모강이 세인의 어깨를 감싸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조모강이, 은인을 꼭 대접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한번 본사로 찾아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소영이나 만여의 눈에 보이는 조모강의 모습은, 정말 순수하게 세인을 구해 줘서 고마워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새삼 다른 눈으로 조모강을 바라보는 둘을 힐끗 쳐다본 강패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 실장.”

조모강의 눈짓을 받은 노 실장이 품에 손을 넣었다.

“그래요 아저씨! 진짜 끝내주게 맛있는 것들도 많이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한번 오세요 아저씨!”

거기에 세인까지 눈을 반짝거리면서 말하자 강패의 한숨은 더욱 깊어졌다.

“최고급 요리란 요리는 전부 준비해 놓을게요! 정말 무서웠는데 아저씨가 계셔서…… 진짜 다행이었어요. 저도 꼭 뭔가 보답해 드리고 싶어요.”

볼이 발갛게 물든 채 열심히 말하는 세인은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게다가 세인은 강패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음식.

강패의 식탐은 세인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2주에 불과하지만 그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것이 음식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저의는 따로 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강패와 연을 맺으려던 조모강은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회장님.”

노 실장에게서 명함을 건네받은 조모강이 다시 강패에게 명함을 건넸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명함이 아닌 까만 플라스틱 바탕에 자개를 수놓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함이었다.

“명함? 이게?”

하지만 아무런 이름이나, 연락처 따위가 적혀 있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패를 보며 조모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예. 은인께만 드리는 특별한 명함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절 찾으실 때는 언제든지 저희 본사에 오셔서 이 명함을 보이시면 됩니다. 그러면 직원들이 성심성의껏 모셔 올 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회, 회장님. 그건…….”

강패가 받은 명함을 뒤에서 슬쩍 본 만여가 기겁했지만, 조모강의 눈빛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를 끌어들이시려는 건가?’

전무이니만큼 만여는 저 명함이 가지는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 조모강이 저 명함을 준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저것은 이익 여부를 떠나 언제든지 조모강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특수 명함이었다. 즉, 저 명함을 소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조모강에게 빚을 지게 했다는 뜻과 같았다.

강패의 눈이 살짝 꿈틀거릴 때였다.

“아저씨. 그러니까 꼭 오셔야 돼요? 그거 가지고 꼭이요!”

세인이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강패에게 말했다.

그나마 강패가 호의적으로 대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 세인이었기에, 강패는 일단 겉으로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처럼 찾아와 쫑알대고, 먹을 것도 챙겨와 준 세인이다. 이런 명함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세인의 부탁은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언제 한번 시간 나면 가기로 하지.”

“야호! 진짜죠? 진짜? 약속한 거예요?”

강패의 승낙에 세인이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조모강은 더 있는 것보다는 이쯤 물러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조모강이 세인의 어깨를 감싸면서 강패에게 말했다.

“그럼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이 조모강이 은인에게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약속했으니 뭐.”

조모강의 무조건적인 호의가 꺼림칙했지만 이미 세인과 약속을 했으니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패를 인자한 미소로 쳐다본 조모강이 세인과 함께 몸을 돌렸다.

“아저씨! 금방 오셔야 돼요! 아니면 저 또 여기로 찾아올 거예요! 알았죠? 꼭! 명진 아저씨도 함께 데려오셔야 돼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 세인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참 나, 뭐가 저리 거창해?”

투덜댄 강패가 자개가 박힌 검은 명함을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남아 있던 만여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야! 너 저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고 그러는 거야?”

자신에게 찍찍 반말을 내뱉는 만여를 불쾌하다는 듯 올려다본 강패가 툭 내뱉었다.

“이깟 종이 쪼가리가 중요하긴 개뿔. 근데 넌 진 년이 뭐 그리 빳빳해? 안 나가? 그쪽 패거리는 다들 나갔잖아.”

“너…….”

조모강이 갑자기 들어옴으로써 잠시 잊고 있던 수치심이 다시 떠오른 만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콧바람을 씩씩 뿜는 만여를 무시한 채, 강패가 소영을 쳐다봤다.

“넌 뭐해?”

“예?”

“안 가? 여기 내 집이야.”

소영과 함께 있으면 또 언제 의도치 않은 통증이 찾아올지 몰랐다. 그 생소한 통증이 무엇인지 연유를 모르기에, 강패는 소영을 빨리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정말 보내고 싶은 건가?’

정말 그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서 보내려고 하는 것인지, 그냥 껄끄러워서 그런 건지는 강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소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마 처음에 느껴졌던 이해하지 못할 통증 때문일 것이라고 정의한 강패가 퉁명스레 말했다.

“설마 내가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거야? 같이 살래?”

퉁명스러움을 넘어 쌀쌀맞기까지 한 강패의 말에 소영은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준족의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 나는 뭐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요? 차장님이 파견이라고 해서 남은 거지.”

소영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하여간 개념이 없어. 도와달래서 도와줬더니 그냥 내쫓으려고나 하고. 사람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니까. 하필 차장님은 왜 저런 놈한테…….”

“또 준족이냐…….”

이를 악문 강패가 준족의 능글맞은 얼굴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때 강패의 반대편 소파에 만여가 털썩 앉았다.

“……너 아직 안 갔어?”

강패가 실눈을 뜨고 말하자 만여가 뻔뻔한 얼굴로 다리를 척 꼬았다.

“안 갔지. 나도 여기서 좀 있어야겠어.”

“뭐?”

“너 엿 좀 먹이려고.”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도발하는 만여의 모습에 강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만여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농담이야. 엿 먹인다고 먹을 위인도 아닌 것 같으니. 아무튼 난 네가 어떻게 태극도를 알고 있는지 꼭 들어야겠어. 대신 나도 네가 지하보도에서 물어본 것을 말해 주도록 할게. 아, 여기 있겠다는 말은 농담 아니야. 회장님께서 부르시면 어차피 안내해 줄 사람도 필요할 테니까.”

조선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의 전무가 말하는 것치고 상당히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만여는 지금 조선 그룹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인 전승의 태극도.

그것을 눈앞의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 태극도가 왜 자신의 것과 미묘하게 다른 것인지 밝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물론 방금 전의 수치심도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었기에, 어떻게든 강패를 골탕 먹이려는 속셈도 있었다.

“후우…….”

대책 없는 두 여자를 보던 강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둘 다 내가 덮쳐도 별말 없기다?”

아니, 한숨을 내쉬는가 싶던 강패가 어느새 음흉한 미소를 물었다.

만여와 소영의 얼굴이 순간 퍼렇게 질렸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저 말이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난 말했다.”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패가 패닉 상태에 빠진 두 여자를 일별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하얀 하이힐.”

“……딸꾹.”

강패가 자신을 가리키자 소영이 흠칫 놀라며 딸꾹질을 했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본 강패가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 내 집이라고 했지? 그러면 먹을 거나 좀 해 놔라. 난 씻고 나온다. 가능하면 너희들도 어디 가서 씻고 오고. 냄새가…….”

말꼬리를 흐린 강패가 콧잔등을 살짝 찡그린 채 몸을 돌렸다.

낮 동안 한바탕 격한 일을 겪었던 두 여자는 그제야 자신들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여와 소영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강패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만여와 소영은 어색하게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

“…….”

숨이 막힐 듯한 어색함이 만여와 소영 사이에 생겨났다.

생각해 보면 둘 다 일면식도 없었다. 소영은 기절한 만여를 강패에서 건네받았을 뿐이고, 만여는 일어나자마자 소영에게 덤벼들었으니 이 어색함은 당연한 결과였다.

소영과 만여는 서로 힐끔힐끔 눈치를 봤다. 그때 그녀들 사이의 침묵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듯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두 여자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 치한 같은 놈을 진짜…….”

“차장님 명령만 아니면 확…….”

강패를 향해 이를 가는 두 명의 여인의 시선이 순간 허공에서 마주쳤다.

강패라는 공공의 적을 설정한 두 여자가 서로에게 웃어 보였다.

“우리, 먹을 거나 만들러 갈까요?”

소영이 만여에게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을 수 있는 걸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거죠? 제가 요리를 잘 못해서……. 호호호.”

“괜찮아요. 독극물도 먹으라고 있는 거니까……. 호호호. 저도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는데, 만들라고 했으니 얹혀사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겠죠? 호호호호.”

순식간에 손을 잡은 두 여인이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부르르!

“뭐야 이건?”

샤워기 소리에 묻혀 전장에서나 들릴 법한 소음이 부엌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듣지 못한 강패는 원인 모를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또 뭐지? 혹시…… 또 몸에 이상한 문제가……?”

다가올 위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몸을 부르르 떨어 보인 강패는, 닭살이 잔뜩 돋은 팔을 벅벅 긁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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