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25/30)

5장

“뭐라?”

“저 새끼, 미친 거 아니야?”

강패의 갑작스런 욕설에 당황한 것은 경호팀은 물론 흑룡파도 마찬가지였다.

수군거리던 경호팀과 조직원들은 강패를 황당한 눈으로 보던 것을 넘어 이제 미친놈 취급을 했다.

하지만 외칼만은 미소조차도 보이지 않은 채 진지한 표정으로 강패를 노려보았고, 강패는 그들을 보면서 재차 피식 웃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것처럼 보였으나, 기실 강패의 참전 선언에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외칼이었다.

방금 전 직접 강패와 손속을 섞어 본 외칼이다.

강패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느꼈기 때문에, 외칼은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강패의 주먹은 그다지 세지는 않아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정통으로 타격을 입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강패의 주먹이 한 번쯤 닿았거나 스쳐 지나간 자리는 심하게 욱신거렸다. 외칼은 그 욱신거림을 애써 참아 내며 태연한 표정을 가장해 강패를 쳐다보았다.

또, 외칼 외에도 강패의 참전 선언에 바짝 긴장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슈각!

덩치가 큰 경호팀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하고 날씬한 만여의 몸은 거의 가려지다시피해서 보이지 않았다.

만여는 그 틈을 노리고 강패가 참전 선언을 하자마자 경호팀 사이에서 뛰어나와 기습적으로 발을 내질렀다.

하지만 강패는 마치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가볍게 고개를 뒤로 젖혀 만여의 발차기를 피해 냈다.

툭.

“기습은 발차기 실력에 비해 형편없군.”

휘청!

“크윽…….”

강패가 미끈한 다리를 가볍게 밀자 만여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땅에 착지하면서 침음을 흘렸다.

“근데 언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폭력이 난무하는 나라가 된 거지? 내가 읽은 책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말이야.”

강패는 지하보도를 가득 메운 흑룡파와 조선 그룹 경호팀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간 읽은 책들은 강패에게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21세기의 삶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 대략적으로 제시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강패는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폭력은 강하게 처벌받는다는 것만이 공통적으로 쓰여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이렇게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니.

강패는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만여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어이, 거기 까무잡잡한 아줌마. 당신 그건 어디서 배운 거야?”

“아…… 아줌마?”

만여는 강패의 입에서 나온 전혀 뜻밖의 단어에 재빨리 받아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넋이 나가 버렸다.

“크하하하! 아줌마! 아줌마지! 맞는 말이구만!”

“푸하하하!”

그것을 듣고 있던 흑룡파에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그제야 만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강패는 단순히 조선 그룹 측의 신경만 긁는 것이 아니었다.

“시끄러, 덩어리들아. 고작 열 명한테 서른 명이 밀리고서는 웃음이 나와 지금?”

그러자 이번에는 흑룡파 조직원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너……. 너 이 개새끼…….”

조폭들이 연장을 쥐고 금세라도 강패를 향해 달려올 것처럼 움찔댔다.

“저 새끼, 내 손으로 아작 내 버릴 거야! 이거 놔요!”

“차, 참으세요! 전무님!”

강패에게서 인신공격을 당한 만여 역시 이성이 반쯤 날아가서 날뛰는 것을 경호원들이 제지하고 있었다.

“아아.”

강패가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언제까지 말로 떠들 거야? 입으로 싸울 거면…….”

탁!

퍽! 퍽!

“끄윽…….”

“커헉!”

강패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어 태운과 세인이 있는 곳을 막고 있던 경호원들 중 두 명이 어깨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거대한 압력기에 눌린 것처럼 그들의 어깨에는 발자국이 뚜렷하게 나 있었고, 그것을 인식하기도 전에 강패의 신형은 이미 그들의 뒤로 넘어가 있었다.

“이 꼬맹이는 내가 데려간다. 그래도 나름 나를 찾아온 손님이니 끝까지 책임져야겠지.”

태운의 팔에 잡혀 있으면서도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세인을 보며 강패가 말하자, 세인이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 나이대의 여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인은 배짱이 두둑했다.

조금 정신을 차리니 세인에게 있어서는 그냥 재미있는 싸움 구경일 뿐이었다. 흑룡파 조직원들이 우르르 등장했을 때는 조금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마녀 전무와 경호팀이 등장하자 아예 영화를 관람하는 모드로 돌아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태운을 자극할까 봐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어딜!”

“이런 씨발! 뭐해, 이 새끼들아! 어서 쳐! 이 새끼들 밀어 버리고 계집애 확보해!”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는 강패의 몸놀림에 경호원들과 조폭들이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터져 나온 외칼의 고함에 현실로 돌아왔다.

퍽! 퍼억! 콱!

경호팀과 조폭들이 본격적으로 맞붙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경찰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들이 조선 그룹 본사에서 출발할 때 연락한 경찰들은 올 시간이 얼추 다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사실 열 명으로 용감하게 덤볐던 것은 금방 경찰이 도착해 상황을 정리해 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출동이 늦어지자 경호팀장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그러면서도 앞에서 달려드는 조폭에게 라이트 훅을 먹이며 경호원들과 만든 라인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주먹과 발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강패는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파공성이 들리자 피식 웃으면서 몸을 틀었다.

동시에 강패가 서 있던 자리를 만여의 매끈한 다리가 매섭게 훑고 지나갔다.

“제대로 배운 발차기군. 어디서 배웠는지 말해 줄 생각 없어?”

“네놈이 보면 뭘 알아?”

만여는 강패가 두 번이나 자신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자 바짝 긴장했다.

그냥 막거나 피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렇게 피해 냈다는 것은, 강패가 자신의 공격의 간극을 완벽하게 파악했다는 뜻.

지금껏 이토록 완벽하게, 자신의 공격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해 낸 사람은 단 한 명 빼고는 보지 못했다.

만여는 긴장의 고삐를 단단히 조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무슨 수를 써도 세인을 지켜야만 했다. 그것이 만여가 젊은 나이에 조선 그룹의 전무라는 어마어마한 직함으로 들어온 첫 번째 이유였다.

‘칫, 공격할 틈을 찾을 수가 없어.’

강패는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었다.

짝다리를 짚고 있는 데다가 팔마저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도저히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해 보였지만, 도저히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 같아.’

만여는 자신이 사용하는 독특한 이 무예를 사사한 사부를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에 초조함으로 입술을 적셨다.

“정말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 정말?”

강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에게 무술을 사사한 사람을 알고 싶어 했다.

아니, 무슨 이유에서라고 하기보다는 만여가 사용하는 기술의 형(形)이 유달리 강패의 눈에 익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강패가 한 번 배워 본 적이 있었던 무예. 그와 비슷한 기술을 구사하는 만여를 보고 호기심이 도진 것이다.

65년이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강패에게 그것을 가르쳤던 그 인물이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적었다.

그래도 그 아들이나 자식, 아니면 전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강패는 그 사람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헛소리 말고 어서 물러서! 아가씨는 우리가 보호한다!”

만여는 강패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면서 낮게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여성 특유의 음이 높은 목소리.

하지만 만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와 기세는 웬만큼 숙달된 특수부대원의 그것보다도 날카로웠다.

강패는 자신의 감각을 살살 건드리는 만여의 폭발적인 기세에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강패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놈과 비슷해. 나보다는 조금……. 뭐, 어쨌건.’

일단 몸으로 부딪치고 보는 그 단순 무식함.

동시에 그런 단순 무식함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어야 된다. 때문에 강패는 순간적으로 만여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좋아. 내가 이기면 넌 무조건 나에게 그걸 말해 주는 거다. 안 말해 주면 데려가서 말할 때까지 묶어 놓겠어.”

강패가 선전포고하듯 빙글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미 전투 모드로 들어간 만여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몸을 잔뜩 굽혀 강패와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음,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떻게 했더라?”

강패는 그런 만여를 앞에 두고 너무나도 태평한 자세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더니 주먹을 몇 번 허공에 내뻗어 보였고, 다리도 몇 차례나 들썩거렸다.

65년 전, 대한독립군이던 강패가 유흥거리로나마 잠깐 배웠던 그것.

하지만 동시에 열악한 자금 상황으로 인해 별 무기가 없었던 대한독립군에게, 그것은 최적화된 형태로 보급되어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대한독립군은 일본군과 중국군에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악명을 떨쳤다.

물론 강패가 속해 있던 부대의 부대원들은 각자 고유의 기술이 있었기에 깊이 배우지는 않았다. 그래도 형 정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패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숫자로만 따지면 65년이 지난 기억.

하지만 강패가 체감하기에는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기억이었다.

“나름 재밌었어. 다리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니.”

전신을 다 사용하기는 하지만 강패는 어디까지나 우직하게 상대방의 공격을 받아 내면서 마주 공격하는, 전형적인 인파이터 형식의 전투 스타일을 고집한다.

반면 강패가 기억하는 이 무술은 길이나 근력이 팔보다 월등히 뛰어난 다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무술이었다.

“태권도와는 달랐는데…….”

강패가 지난 2주일 동안 본 책 중에는 당연히 스포츠 관련 분야도 있었다.

그중 어느 책 한 권에 태권도가 무술에서 스포츠로 변형된 것이라는 것을 읽고서는 궁금증이 생겨 책을 찾아봤었다.

하지만 태권도는 강패가 기억하던 그것처럼 다리를 많이,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그 효율성 면에서는 현저히 떨어졌다.

“참, 걔도 끈질겼는데.”

강패는 과거, 자신의 신체를 보고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유지를 이을 것을 간절하게 청하던 젊은 청년을 생각하고서는 피식 웃었다.

그때, 강패의 자세가 흐트러지며 순간적인 빈틈이 생겨났다.

만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차앗!”

마치 벌처럼 쏘아진 그녀의 다리가 아래에서 위로 발을 쭉 뻗어졌다.

타닥!

후웅!

만여의 발이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없다!’

발끝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자 만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흐음…….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반격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재빨리 뒤로 빠져 자세를 잡은 만여였다.

하지만 자신의 공격을 분석이라도 하듯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강패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만여는 약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나를 놀리는 거냐! 너도 남자라면 와서 붙으란 말이야!”

주위에서는 밀어 버리려는 조폭들과 막으려는 경호팀들로 인해 아수라장이었지만, 만여의 뾰족한 목소리는 그 소음을 뚫고 강패의 귀에 정확히 꽂혔다.

개개인의 실력이 우세하고 좁은 공간이라는 지형적 이점으로 인해 경호팀이 분전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뒤쪽에서 가히 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나서자 급속도로 무너지는 것을 보았기에 만여는 마음이 급했다.

경호팀장 혼자는 외칼을 막는 것도 벅찼다. 그런데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간부가 두 팔 걷고 나섰으니 일반 경호원들이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 저 녀석들이 설마 저 꼬맹이한테 피해를 입힐 것 같아서면 걱정하지 마.”

강패는 만여의 걱정이 어디를 향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능글맞게 말했다.

“너희가 싹 다 쓸려도 꼬맹이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거니까. 말했잖아. 너희는 지금 특수 주거 침입죄에 해당하는 중범죄를 저질렀고, 여긴 내 집이라고.”

강패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 것인지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만여는 그런 강패가 놀랍도록 얄미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끼며 이중적인 자신의 모습에 속으로 자신을 질책했다.

‘안도하는 거냐! 설마! 저놈의 어디가 믿을 만해서!’

경찰이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는 것을 보니 흑룡파에서 무슨 술수를 써 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나도 고작 열 명의 경호원과 만여 한 명으로 흑룡파를 저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된다면 조모강과 조선 그룹에는 극히 불리한 상황이 될 터. 또, 만여는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앞의 남자, 강패를 보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만여는 그런 생각을 순간적이나마 품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면서 강패를 노려보았다.

“개소리하지 마! 아가씨는 내가 지킨다. 그게 내 일이야!”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만여를 보며 강패는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 정도 실력에 그런 기개가 빠지면 되겠어? 그냥 난 안심하라고 한 말이야. 제대로 붙자고, 이제. 나도 궁금한 게 많으니까 말이야.”

만여가 바짝 긴장한 자세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톡, 톡.

강패는 씨익 웃으면서 다리를 어깨 넓이보다 조금 더 넓게 벌렸다. 그리고 가볍게 발끝으로 땅을 박차며 통통 뛰기 시작했다.

만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권도?’

태권도의 기본자세를 취한 강패를 보며 만여는 순간적으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던 강패의 전투 스타일과, 지금 강패가 취하고 있는 태권도의 전투 스타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다리란 사람의 팔보다 근력이나 모든 면에서 길고 강하지만 그만큼 동작이 컸다.

따라서 상대방과의 거리를 끊임없이 재야만 했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무술이었다.

찌릿!

아까 전, 강패에게 밀쳐진 부위가 전기 치료라도 받는 듯 짜르르하게 울렸다.

‘뭐지, 대체?’

만여는 대체 강패의 정체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리에서 전해지는 찌릿함에 강패가 자신의 다리를 밀어냈던 수법은 태극권이나 팔괘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패의 손이 닿았던 곳의 근육이 순간 경직되면서 땅에 불안정하게 착지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취한 것이 태권도의 기본자세라니.

만여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강패의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막아!”

“뚫리면 안 돼!”

그녀의 귓가로 경호원들이 흑룡파 조직원들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찻!”

타닥!

만여는 일단 생각은 접어 두고 강패에게 달려들었다.

하이힐을 신은 만여의 발이 강패의 허리를 후려칠 것처럼 휘둘러졌다.

동시에 강패도 움직였다.

휙!

퍼벅!

강패와 만여는 허공에서 한 차례 발을 섞는가 싶더니 다시 떨어져 나왔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오랜만에 하는 거라 잘 안 될 줄 알았는데.”

강패는 여전히 능글맞은 얼굴로 웃음을 띤 채 만여를 쳐다봤다.

“뭐……. 뭐야! 당신 대체 뭐야!”

만여가 경악한 얼굴로 외쳤다.

“네가 어떻게 태극도(太極道)를 아는 거지?”

어찌 보면 그냥 단순한 태권도의 뒤돌려차기 같았지만, 만여는 강패가 사용한 기술이 자신과 똑같은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태극도를 지독하게 수련해야만 했던 만여였다. 눈을 감고도 그려 낼 수 있는 그것을 착각할 리 없었다.

“음. 이거 이름이 태극도였나? 나도 깜빡 까먹고 있었네.”

강패는 그제야 자신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고유 무술이자 조선의 전통 무예라면서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떠들어 대던 봉하의 허연 얼굴이 떠올랐다.

“대답해! 어떻게 너 같은 노숙자가 태극도를 아냐고 물었어!”

만여는 딴청을 부리고 있는 강패를 바라보며 다시 소리를 쳤다.

그러나 강패는 만여의 말은 이미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대답해 줄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여는 천불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쓰러뜨리면 된다. 쓰러뜨리고 반드시 알아내야겠어.’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태극도는 그 수련법이 다른 무술보다 훨씬 험하고, 파괴력 또한 일절이라 현대에 들어와서는 일인 전승으로 체제가 바뀐 무술이라고 전해 들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대한독립군이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전면 보급되어 익힌 적이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그게 세월이 지나며 다른 무술과 섞이거나 독자적인 무술로 성장하여 태극도와 비슷하지만 성향이 비슷한 것들로 나뉘어졌다는 역사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배운 태극도와 유사한 무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올 수는 있어도, 방금 만여의 공격을 파훼한 강패처럼 완전히 똑같은 태극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이미 만여의 스승의 스승 때부터 이 일인 전승의 원칙은 이어져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아아압!”

만여가 다시 달려들자 딴청을 피우던 강패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태극도를 어디선가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

강패는 과거와의 고리를 찾은 느낌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앞에서는 이를 악문 만여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악귀의 형상을 하고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강패는 과거와의 고리가 아직까지 존재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만여를 얼마든지 살살 다뤄 줄 용의가 있었다.

“특별히 살살해 주마.”

강패는 달려오던 만여가 순간적으로 발을 뻗어 비스듬하게 치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미 만여의 공격을 간파한 듯 씨익 웃었다.

그리고 만여에게 얼마든지 해보라는 듯,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다리와 다리 사이의 공간을 벌려 보였다.

‘빈틈!’

만여는 그런 의도를 짐작하지도 못한 채 강패의 빈틈을 노리고 택견의 낚시걸이처럼 발을 크게 뻗었다. 강패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는 생각이었다.

턱!

“읏!”

하지만 만여는 자신의 다리가 강패의 발목을 걸기 바로 직전, 목표로 했던 강패의 다리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침음을 삼켰다.

휘익!

후웅!

만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함정에 걸렸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강패의 몸이 공중제비를 돌 듯, 두 다리를 허공에 띄운 채 흉흉한 파공성을 내고 있을 때였다.

만여가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 강패의 발은 이미 만여의 지척까지 날아와 있었다.

‘날치기…….’

물구나무를 짚은 채 다리를 휘두르는 강패의 모습을 보며, 만여는 그것이 태극도의 기술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퍼억!

그리고,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만여의 몸은 썩은 짚단처럼 땅에 무너져 내렸다.

*

*

*

“흐읍!”

후웅!

퍼억!

그 시각 조폭과 경호팀과의 싸움은 흑룡파의 압도적인 우세로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아직 쓰러진 경호원은 한 명도 없었지만, 연장을 들고 계속해서 짓쳐들어오는 조폭들을 상대했기 때문인지 극도로 지쳐 있었다.

가장 큰 전력인 만여는 강패에 의해 기절했으며, 그다음 실력자인 경호팀장도 외칼을 맞아 다른 곳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흑웅이 합류했으니, 경호팀은 속절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흑웅이 숨을 들이마시며 웬만한 여자 다리 굵기만 한 팔을 휘둘렀다.

앞에 있던 경호원 하나가 허겁지겁 팔을 교차시켜 막아 냈다. 하지만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에 비틀비틀 뒤로 물러난 경호원은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역시 조선 그룹의 경호원들이군.”

다른 조폭들도 열심히 경호원들을 향해 연장을 휘둘러 대고 있었지만, 애초에 경호원들과 흑룡파 조직원들 사이의 실력 차이가 꽤 있었다. 그래서 조폭들도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뒷골목에서 몸은 그대로 자신의 재산과도 다름없는 것이었다. 조폭들이 대개 한쪽의 세력이 완벽하게 우세하지 않은 이상 함부로 싸우는 일이 거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미 세상과 척을 진 부분이 많은 조폭들이다. 유일한 재산이나 다름없는 몸을 함부로 썼다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기에, 조폭들은 가능한 자신의 몸을 아꼈다.

반면 경호원들은 그런 조폭들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특히 조선 그룹의 경호원들 같은 경우, 조모강이 경호원들에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월급도 꽤나 후해서 다른 곳보다 근무 여건도 좋았다. 거기다 모집 요건 자체가 대개 특수부대 전역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졌기에 개개인의 실력도 조폭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편이었다.

그들은 몸이 다치더라도 조모강이 충분히 보상해 주었고, 평상시의 대우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경호원들은 그들의 명예와 조모강이 베푸는 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 차이가 열 명과 서른 명이라는 대단히 불리한 조건의 싸움을 성립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흑웅이 싸움터에 끼기 전까지 말이다.

“저 계집을 넘기면 너희들은 몸 성히 돌아가게 해 주마!”

흑웅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가용 시간의 대부분을 소진한 상태였지만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헉헉대면서 궁지에 몰린 쥐를 함부로 건드렸다간 호되게 물리는 고양이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흑웅은 경호원들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이다.

하지만 경호원들이 순순히 항복할 리가 없었다.

“너희 같은 조폭들에게 항복하고 아가씨를 넘기느니 한 놈이라도 더 데리고 같이 뒈진다.”

“덤벼, 이 새끼들아!”

서 있는 것이 용할 정도로 만신창이임에도 경호원들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다 쓰러져 가는 경호원들의 투지에 기세가 꺾일 정도로 흑룡파가 녹록한 조직은 아니었다.

“죽이지만 마라. 모조리 쓸어버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흑웅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달려들자 조폭들이 성난 파도처럼 경호원들을 향해 쇄도했다.

퍼억! 퍼벅!

“크억!”

“컥!”

흑웅이 거대한 덩치로 밀어붙이자 그를 막아야 하는 경호원은 거대한 곰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반면 같은 편인 조폭들은 든든함에 더욱 기운을 내며 힘차게 연장을 휘둘렀다.

그렇게 경호원들이 하나둘 쓰러지면서 구축되어 있던 라인에 구멍이 뚫렸다.

점점 전황은 경호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흑웅은 그쯤에서 빠져나와 세인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어이, 눈 뻘건 덩어리. 너희 덩어리들끼리 치고 박아. 이쪽으로 오지 말고.”

하지만 흑웅이 움직였을 때 이미 세인은 강패의 뒤에 숨어 있었다. 지금껏 세인을 구속하고 있던 태운은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는 뒤로 기어가고 있었다.

만여를 기절시키고 바로 세인에게 다가간 강패다.

앞에서 무술 영화를 찍듯 허공을 날아다녔던 강패에게 태운은 손가락 하나라도 치켜들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세인을 확보한 강패는 귀찮은 일을 만든 태운에게 기세를 살짝 실어 경고를 주었다. 그러자 태운은 오줌보를 터뜨리며 질질 짜더니, 지금에 와서는 저만치 엉덩이로 계단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 태운을 스윽 내려다본 흑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강패를 쳐다보았다.

“계집을 내놔라.”

무미건조한 목소리.

살아 있는 사람에게 이런 고저 없는 소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지금 흑웅의 목소리는 본래 그의 목소리와는 대단히 달라져 있었다.

“됐고, 네놈은 눈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이렇게 눈이 시뻘개?”

경호팀들과 조폭들의 격렬한 싸움으로 인해 흑웅의 주변에는 조폭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흑웅도 아는 것인지, 강패를 쳐다보는 흑웅의 눈이 점점 새빨개졌다.

꽈악.

“무, 무서워요, 오빠.”

흑웅의 모습이 외형적인 흉악함과 어우러져 더욱더 기괴스럽게 변했다. 그 모습에 총도 무서워하지 않던 세인이 강패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세인이 괜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흑웅의 모습은 지금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점점 시뻘게지던 흑웅의 눈이 아예 적광을 줄기줄기 뿜어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핏빛으로 변해 버렸다.

검은 곰이라고 불릴 정도로 까무잡잡하던 피부는 피가 몰려서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흉물스런 핏줄이 목에 울룩불룩 솟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웅의 표정이나 목소리, 행동거지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부조화의 극치였다.

“꼬맹아. 가서 저 언니나 돌봐 주고 있어라. 괜히 저 덩어리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밟아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냐.”

강패가 저 뒤에 벽이 기대 놓은 만여를 가리키며 말하자 세인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흑웅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서는 곧 자신이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옷자락을 푼 세인이 만여의 옆으로 물러나자 강패는 실실 웃는 얼굴로 다시 흑웅을 올려다보았다.

족히 10센티미터는 더 큰 흑웅이 기괴스럽게 강패를 내려다보았지만, 강패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닌자의 인술도 아니고, 중국 뙤놈들의 잠력 격발도 아니야. 그렇다고 말코 도사놈들의 부적술도 아니고. 이런 게 있던가?”

확실히 ‘인간 같지 않아 보인다.’는 흑웅의 모습에는 강패도 동의했다.

지금 격하게 싸우고 있어서들 그렇지, 그 누가 눈에서 시뻘건 적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흑웅을 보고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물론 강패가 살던 난세의 시대만 해도 ‘인간을 어떻게 하면 병기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나라에서의 실험으로 기형적인 인간들이 많이 튀어나오곤 했었다.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그러니까 조선, 일본, 중국에서는 각기 나라마다 하나씩 인간의 잠재력을 격발시키거나 이지를 잃게 하여 순간적으로 막대한 힘을 부여하는 기술이 있었다.

그런데 강패가 보기에 흑웅의 저 모습은 그 세 기술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그런 기술들의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인지는 미지수다. 단지 태극도가 있으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 와중에 개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계집. 내가 데려간다.”

흡사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문장 구사력도 상실한 것인지 흑웅의 말은 딱딱 단어처럼 끊어졌다. 그와 비례해, 눈에서 폭사되는 적광은 더욱더 짙어졌다.

콰아아!

흑웅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살기가 폭사되기 시작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놈인데?”

강패는 자신의 살갗을 칼날처럼 훑고 지나가는 예리한 살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기가 두려워서 몸을 떠는 것이 아니었다. 강패의 눈동자는 어느새 흥분으로 가득 차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흑웅의 몸은 이 시대 사람치고는 제법 잘 발달되어 있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일면을 몸소 겪었던 강패의 기준에서는, 그냥 평범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보통 수준의 몸을 가지고 이 정도의 살기를 뿜어낼 정도의 사술(邪術)이라니.

“너무 위험해. 이 시대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강패는 이내 그것이 너무나도 위험한 기술이란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도 좋지만 이런 무지막지한 기술이, 폭력이 억압된 이 세상에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이 벌어진 곳이 대한민국, 대한제국의 미래라는 것에 강패는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파박!

흑웅이 통나무 같은 두터운 다리로 땅을 박차며 비호처럼 날아올랐다.

거의 강패의 어깨 높이까지 뛴 흑웅이 두 팔을 곰처럼 휘둘렀다.

“우……. 우와…….”

흑웅의 모습에 지금껏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세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핏!

강패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목덜미 위로 거대한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솜털이 쭈뼛 서는 은근한 긴장감에 강패가 씨익 웃으면서 몸속에 내재되어 있던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근 2주일 만에 처음으로 운용하는 기운이었다.

우우웅…….

은은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강패의 두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두 팔과 주먹을 타고 흐르는 미증유의 기운!

강패는 진하게 미소 지으며 텅 빈 흑웅의 옆구리를 쳐다봤다.

“일격.”

강패가 움켜쥔 주먹에 은은한 순백색의 휘광이 아주 옅게 피어올랐다.

퍼엉!

“쿱……!”

동시에 달려들던 흑웅의 몸이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실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아 조폭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우당탕탕!

“이, 이게!”

“이게 뭐야!”

조폭들 몇 명이 흑웅과 한 덩어리가 되어서는 우르르 넘어졌다.

“혀……. 형님!?”

“흑웅 형님!”

100킬로그램이 가볍게 넘는 육중한 흑웅은 멋들어지게 경호팀을 포위하고 있던 흑룡파의 한 축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깜짝 놀라 흩어진 조폭들 너머로 잔뜩 지친 기색의 경호팀이 드러났다.

조폭들은 흑웅이 피를 토한 채 날아오자 경악한 눈으로 그가 날아온 곳을 쳐다봤다.

조폭들을 보며 강패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정도로 뻗을 건 아니지?”

입에서 피까지 토해 내면서 날아간 흑웅이었다.

하지만 강패는 흑웅이 이 정도로 쓰러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꿈틀!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부하들을 깔고 그 위에 널브러진 흑웅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형님!”

흑웅이 힘겹게 일어서자 조직원들이 그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갔다.

“뭐해, 이 새끼들아! 빨리 이 새끼들부터 조져!”

하지만 외칼의 고함에 찔끔하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외칼이 내심 걱정스러운 눈으로 흑웅을 쳐다봤다.

하지만 지금은 흑웅이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이 도와주러 가 봤자 흑웅의 자존심에 그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다시 일어났다고는 하나 부하들 앞에서 쓰러진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닌가.

그런 흑웅의 권위를 지켜 주기 위해서라도 외칼은 일부러 부하들을 닦달해 댔다.

조폭들과 경호팀들은 곧 살벌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면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그사이 일어난 흑웅이 강패에게 걸어갔다.

쿵, 쿵쿵! 쿵쿵쿵!

한 발자국씩 걷던 걸음이 어느새 뛰는 것으로 바뀌었다.

“크와아아아!”

흑웅은 마치 포효하는 거대한 곰처럼 포효에 가까운 기합을 내지르며 저돌적으로 강패에게 달려들었다.

지하보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에 대치하고 있던 경호원들과 조폭들의 시선도 일제히 흑웅에게로 꽂혔다.

“쯧. 역시 고통도 느끼지 못 하는 건가.”

닌자의 인술이건, 중국인들의 잠력 격발이건, 아니면 말코 도사들의 부적술이건, 이렇게 사람의 숨겨진 힘을 끌어내 쓰는 기술에는 동일한 부작용이 있었다.

첫째, 이성을 잃고 이지를 잃어 파괴의 본능만이 남은 짐승처럼 변한다는 것.

둘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광전사가 된다는 것.

이미 인간의 존엄과 윤리보다는 인간을 하나의 병기로 사용할 궁리밖에 없었던 그 난세의 국가들은 이런 부작용을 오히려 더 반겼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같은 인간을 살상하기에 최적화된 병기들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강패의 주먹에 얻어맞은 흑웅의 옆구리는 비정상적으로 움푹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불난 황소처럼 돌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고……. 거참, 복잡하군.”

1940년대에는 그냥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법률이란 것은 전쟁터에서는 있으나마나 한 것.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에서 다른 이의 목숨을 취한다는 죄책감 따위, 가질 겨를이 없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폭력조차 억압받는 시대.

그 폭력의 최고봉인 살인을 그냥 간과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때 강패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피식.

강패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얼굴에 잔뜩 긴장한 기색을 띄우고서도, 입을 틀어막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세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자신을 원하는 이들을 최대한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노력.

그런 면에서 확실히 세인은 똑똑했고, 현명했으며, 기가 막히게 영악했다.

이는 그녀가 나설 자리와 그러지 않은 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크아아아!”

덥석!

그사이 근처까지 달려온 흑웅이 강패의 몸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팔을 조이면서 자신의 큰 덩치와 키를 이용해 강패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와아아!”

“형님! 형님!”

강패가 흑웅의 품 안에 잡히자 조직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흑웅이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면서 달려간 순간부터 장내의 싸움은 이미 소강상태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르르……. 그르르…….”

흑웅의 두터운 팔이 연신 꿈틀대면서 힘껏 강패를 조였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흑웅의 두 팔은 연신 우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여 들었다.

“…….”

강패는 무심한 눈으로 흑웅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미 흑웅의 얼굴은 인간이라기보다 한 마리 짐승의 얼굴 같아 보였다.

강패에게 아까 당한 일격이 매서웠는지 입에서는 연신 피를 게워 내고 있었다. 거기에 검붉어진 얼굴과 핏빛 적광이 흘러넘치는 눈, 그리고 목에 치솟은 굵은 핏줄기들은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날 탓하지는 마라. 깔끔하게 죽는 게 나을 텐데, 그렇다고 범죄자가 될 수도 없는 일이니.”

흑웅의 두터운 팔이 온몸을 조여 오고 있음에도 강패는 태연했다.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이미 승리자인 것마냥 말하는 강패였다. 하지만 이어진 강패의 신위에 모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격이다.”

우드드!

턱!

강패가 돌연 무거워지기라도 한 것인지, 강패의 눈이 번쩍인 다음부터 흑웅은 허무하게 그를 땅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내려놓았다기보다 강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허리가 꺾였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끄으응!”

연신 용을 쓰며 다시 강패를 들어 올리려고 애를 쓰는 흑웅이었지만, 강패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기라도 한 듯 꿈적도 하지 않았다.

순간 강패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조금의 주저도 없이, 강패의 이마가 흑웅의 안면을 그대로 받아 버렸다.

콰직!

“끄으…….”

푸화악!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흑웅은 코와 입에서 피를 왕창 흘려내면서 뒤로 비틀거렸다.

그 흉성과 상관없이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몸이 한계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에 강패의 몸이 자유로워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형님!”

“형님을 구해! 어서!”

이빨도 부러지고 코뼈도 완전히 함몰된 듯, 피로 흥건해져 비틀대는 흑웅의 모습에 외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쳐!”

그 모습에 조폭들이 다급히 강패를 향해 달려왔다.

그 틈이 경호원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뚫어라! 우리도 뚫는다!”

경호팀장이 경호원들을 향해 소리치면서 외칼을 향해 거세게 공격했다.

외칼은 뒤로 허둥지둥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경호원들도 있는 힘껏 남은 조폭들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포위망을 뚫었다.

포위망이 뚫리자 두 집단이 섞였다.

“아가씨와 전무님을 확보해! 두 명만 가고 나머지는 여기서 놈들을 막아!”

그 틈을 비집고 튀어나온 경호팀장이 거칠게 외치자, 경호원들 중 두 명이 재빨리 뒤로 빠져서 세인과 만여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막아! 저 새끼들 잡아!”

외칼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경호팀장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경호팀장도 여기서 밀렸다가는 그냥 끝장이라는 생각에 각오가 남달랐다.

경호원들도 작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성치 않은 몸을 하고서도 눈에 독기를 품고 조폭들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 와중에도 강패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은 채, 뒤로 비척비척 물러나는 흑웅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삼격.”

강패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리고 흑웅의 바로 지척까지 조폭들이 달려온 그 틈을 바람처럼 부드럽게 비집고 들어가서 주먹을 위로 올려쳤다.

제 발로 흑웅의 품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인 강패였지만, 앞서 박치기에 안면이 함몰된 다음부터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흑웅은 자신의 품으로 강패가 뛰어드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턱에 꽂히는 강패의 주먹.

덜컥!

푸화아악!

뼈가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흑웅의 입에서 허연 이빨들과 함께 피분수가 치솟았다.

위로 고개가 완전히 꺾인 흑웅의 거체가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아주 천천히, 슬로우 모션처럼 뒤로 넘어갔다.

“형님!”

“이런 씨발!”

흑웅이 넘어지자 극도로 흥분한 조폭들이 강패를 향해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둘렀다.

깡!

“잘 걸렸…….”

쇠파이프를 휘두른 조폭은 강패가 팔로 자신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쇠파이프를 막아내자 환호성을 내지르려고 했다.

퍼억!

퍼걱!

하지만 미처 그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전에 자신의 면상에 정확히 꽂힌 강패의 주먹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것은 각목을 휘두르던 조폭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놀아 줄 시간이 없어.”

웬만하면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추면서 놀아 주려고 했던 강패였지만 흑웅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후부터, 정확히는 이지를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보일 때부터 장난기를 버리기로 한 강패였다.

어차피 만여도, 세인도 확보한 상태다. 강패가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는 전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씨발!”

“조져!”

조폭 두 명이 구겨진 휴지처럼 강패의 주먹에 맞아 말 그대로 ‘날아서’ 나가떨어지자, 조폭들이 이를 악물고 모두 달려들었다.

퍼걱!

퍽, 퍽, 퍽, 퍽!

“뭐……. 뭐야!”

“이런 젠장!”

하지만 조폭들은 강패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도 못한 채, 정확하게 주먹 한 방씩을 사이좋게 나눠 맞고서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면서 기절해 버렸다.

“씨, 씨발! 너 뭐야! 뭐냐고!”

흑웅을 부축하려던 조폭은 말을 더듬으면서 이편으로 걸어오는 강패에게 쇠파이프를 겨누었다.

순간, 강패의 신형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꺼지더니 이내 조폭 옆에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휙!

“으아아아!”

조폭이 채 놀라기도 전, 강패가 두 손으로 조폭의 뒷덜미와 바지를 붙잡아서 휙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뒤로 넘어가 버린 채 꿈틀대는 흑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르르…… 그르…….”

“위험해. 너무 위험해.”

고통을 느끼지 못 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가 한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지를 상실하고 적의만을 내보이는 흑웅을 보며 강패가 침중하게 말했다.

“이해해 달라고는 안 하겠다.”

무감정한 눈으로 흑웅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강패가, 발을 들어 흑웅의 목을 천천히 눌렀다.

뿌드득!

척추 어긋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기이한 각도로 흑웅의 목이 꺾였다.

흑웅의 사지가 부르르 떨리며 경련을 일으켰다. 이어 눈을 까뒤집으며 게거품을 문 채 그대로 시체처럼 늘어졌다.

광기에 휘말린 사람을 가장 쉽게 처리하는 것은 깔끔하게 죽여 버리는 것.

광전사로 변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잠력을 끌어내 쓰는 것인 만큼 그 후폭풍이 엄청났다.

그렇기 때문에 유지 시간이 끝나면 살아남더라도 폐인이 되거나 불구가 되고, 살아 있는 동안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 시달리게 된다. 때문에 상대하는 사람이나 당사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죽음을 선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패는 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이곳은 1940년의 대한제국이 아닌, 2010년의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

흑웅의 목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지하보도는 순식간에 정적으로 물들었다.

박 터질 듯 싸우던 경호원들과 조폭들도, 힘껏 싸워 대고 있던 외칼과 경호팀장도, 흑웅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던 조폭들까지도.

마치 그 공간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조폭들과 경호원들은 강패와 그 발밑에 깔려 목이 꺾인 흑웅을 멍청히 바라볼 뿐이었다.

“흐음…….”

주변이 자신 때문에 조용해졌지만 강패는 궁금하지도 않은지, 그저 발걸음을 옮겨 만여와 세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사람 한 명의 목을 부러뜨린 사람치고 너무나도 태연한 신색.

아니, 태연하다기보다 지금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무감정하고 무심한 표정이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오싹!

흑웅의 목을 밟고 서 있던 강패의 모습이 마치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리에 박혔다. 그들은 모두 원인 모를 오싹함을 느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유달리 특별한 광경을 본 것은 아니었다.

경호팀들도 특수부대원 출신들이니 독한 훈련을 겪으면서 험한 모습을 많이 봤었다.

조폭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의 몸과 주먹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험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니만큼, 사람 하나 병신되는 꼴은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이나, 죽을 뻔한 경험이 있는 이들도 드물게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 모두 다 흑웅의 목을 밟고 있던 강패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밟아 죽인 듯한 그 표정.

자신이 개미를 죽였다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강패는 흑웅의 목을 부러뜨려 놓고도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 발밑에 깔린 흑웅이 자신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아니, 자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지하보도에 있는 조폭들과 경호원들은 목적도 잊고 공황에 빠졌다.

“뭐야. 꼬맹이는 또 왜 기절했어?”

세인은 기절해 있었다.

강패가 보여 준 충격적인 장면에 기절한 것이었지만 당사자는 그녀가 왜 기절한지 모르겠다는 듯, 경박스럽게 중얼거리더니 만여와 세인의 목덜미를 한 손에 하나씩 잡았다.

“비켜.”

경호팀장의 지시를 받고 세인과 만여를 확보하기 위해 뛰어왔던 경호원이 주춤거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길을 터 주었다.

강패의 몸에서는 그 어떠한 기세도 풍겨져 나오지 않았다.

경박스러움, 혹은 불량스러움 뒤에 그 모든 감정을 숨긴 것처럼,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강패가 세인과 만여를 붙잡고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패와 한 번 부딪친 적이 있었던 외칼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었다.

조폭들은 강패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은 채 길을 터 주었다. 강패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으로 지하보도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르, 그르르…….”

침묵만이 맴도는 지하보도로, 피거품을 뿜어내는 흑웅의 가래 섞인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선배! 상부에 지원 요청했어요?”

“시끄러 인마! 지금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고등학생 일진들이 우르르 몰려서 지하보도로 가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소영이었다.

단지, 그래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 앞에서 불의가 일어나는 일을 참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지하보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뛰쳐나온 것이었는데, 사태가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고등학생 일진들을 강패가 신나게 두들겨 패는 것까지는 좋았다.

국정원 현장 요원 다섯을 상처 하나 없이 무력화시킬 정도의 실력이다. 고등학생들이 아무리 모여 봤자 큰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이었다.

딱 봐도 조폭으로 보이는 덩치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 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지하보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본 강패가 신이 나서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 가는 것도 보였다.

직후, 어디선가 엄청난 속도의 차량이 튀어나오더니 지하보도 근처에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다시 양복을 입은 덩치들이 우르르 나와 지하보도로 쏙 들어가 버렸다.

“선배! 여기에 계속 있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린 공무원이에요 공무원! 나라를 지키는 공무원!”

소영의 원래 성격이라면 진즉 저 안에 뛰어들고 봤을 터다. 그런 그녀가 지하보도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이유는 바로 선배 요원 때문이었다.

“시끄러! 너 공무원이 이런 데 혼자 뛰어들었다가 다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어떻게 되는데요.”

“공무 중 상해? 그런 거 없다. 아니 있어도 없다고 하는 게 좋아. 너 나간 사이에 언제 네 책상이 길거리에 나앉을지 모르니까. 알아?”

“에이…….”

“휴우……. 너도 몇 년 더 다녀 봐라. 내 말을 이해할 테니까…….”

나라의 안보를 담당하고 있는 국정원이고, 그에 속한 국정원 요원이라고 해서 다른 기업들이나 공기업들에 비해 대우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절대 금물이었다.

나라의 이름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은 다반사,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윤리적인 입장에서 보고 넘어갈 수 없는 일들도 눈감고 넘어가야 할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공무원이라고는 해도 다른 이들에게 오픈되어서는 안 되는 직업군 중 하나다 보니,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지옥 같은 직장이 바로 국정원이었다.

“아 선배! 그래서 그냥 이곳에 있겠다구요?”

“야! 조폭이 서른 명이 넘어! 너 혼자 할 수 있는 게 뭔데? 지원이 올 때까진 절대로 움직이지 마! 알았어!?”

“그래도 만약 감시 대상을 놓치거나 하면요!”

소영의 앙칼진 반문에 선배 요원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고는 하나, 그들이 받은 임무는 위에서 특별한 지시 사항이 없는 이상 반드시 이행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의 커리어뿐만이 아니라 국정원의 프라이드까지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선배 요원은 그저 간절함만을 담아 소영을 바라볼 뿐이었고, 소영은 그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선배. 그럼 선배는 이곳에서 제 백업을 해 주세요. 저 혼자 들어가 볼게요.”

“야. 너 미쳤어?”

“그럼 어쩌자고요!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고! 선배 결혼하더니 너무 몸 사리시는 거 아니에요?”

소영은 빽 하고 소리 지르자 선배 요원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현장 요원이란 것이 어떻게 보자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혜택과 이득만큼 위험한 직군임에도 틀림없었다.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 때론 그 일이 다른 기관이나 언론에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극비 임무도 자주 맡다 보니, 그만큼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는 직종이 국정원 요원이었다.

소영은 선배 요원이 가정이 생긴 이후부터 가정 때문인지 몸을 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자신을 동료로 생각하는 마음에 이리 막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뒤로 빠져 있는 것은 도저히 그녀의 성미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막히면 뚫어라.

그리고 안 되면 되게 하라.

여자의 몸으로 이 국정원 현장 요원이 되기까지 소영이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 좌우명은 꽤나 많은 도움이 됐었다. 실제로 전혀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막상 부딪치면 어려울지 몰라도 넘을 수 없는 것들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소영은 임무 실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자신이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사시에는 이것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선배.”

그래도 선배인데 너무 몰아붙였다고 생각한 것인지, 소영이 안심하라는 듯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보였다.

선배 요원은 소영을 절대로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하다 소영아.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지하보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요란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것을 보니 싸움이 나도 제대로 난 듯싶었다.

게다가 그들의 감시 대상은 지하보도에 들어간 후로 다시 나오고 있지 않았으니, 그 안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들어가야 할 필요는 있었다. 때문에 선배 요원도 더 이상 소영을 말릴 구실이 없었다.

“몸조심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뒤로 빠져. 어차피 우리 임무는 감시니까. 굳이 감시 대상과 네가 접촉할 필요도 없고, 그 감시 대상을 살릴 필요도 없어. 나머지 일은 경찰들이 다 알아서 처리할 거야. 이 정도 소란인데 경찰이 모를 리 없지. 알았어?”

선배는 그러고 나서도 소영이 걱정되는 것인지 연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주의 사항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소영이 탄창을 확인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유도 유단자라고는 하지만 아까 지하보도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던 덩치들을 생각하면 절로 두려움이 일었다.

외국에서 첩보 임무를 수행하거나,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타 국가 단체들과 맞서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요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경우, 죽음은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영은 두렵다고 해서 물러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만 보고 나올 거야. 절대로 위험하지 않아.’

주문을 외듯 자신에게 다짐한 소영이 권총을 잡고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아까 들어간 조폭들이 다인 것인지, 지하보도 주변에는 강패에게 얻어맞은 일진들만이 뒹굴고 있었다.

소영은 주위를 경계하며 지하보도 쪽으로 뛰어갔다.

‘이런, 안이 하나도 안 보이잖아?’

흑룡파 조직원들이 지하보도 입구를 봉쇄하여 포위망을 만들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소영은 근처 벤치 뒤로 몸을 숨기면서 안이 보이지 않자 발을 동동 굴렀다.

‘치고 들어가? 아니, 그렇다고 총을 겨누고 들어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총을 겨누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그녀가 국정원 요원이란 것을 조폭들에게 알릴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한국에서 총기를 이용해 폭동을 제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함부로 총을 일반인들에게 보여 주는 것도 문제의 소지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조폭들을 일반인으로 볼 수 있다면 말이다.

크악!

악!

으억!

그때 지하보도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지하보도의 입구를 꽉 틀어막고 있던 조폭들이 물결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영은 더욱더 긴장하며 그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자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감시’라는 것의 최우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방을 지켜봐야 하는 것. 그러나 저 안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소리에, 소영은 움직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무원인데. 국가 안보를 지키는 국정원 요원은 어찌 보면 이 대한민국의 국권과 국민들을 지키기 위함인데, 자신이 경찰이 아니라고 해서 저 안에서 고통받고 있을 누군가를 외면해야 하는 걸까?

“아이 씨! 에라, 모르겠다!”

한참을 고민하며 엉덩이를 들썩이던 소영은 비명 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자 결국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공권력이 버젓이 존재하는 치안 국가인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저런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조폭이든 뭐든, 그 자체가 소영에게는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 망했다…….”

선배 요원의 목소리가 소영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지만, 소영은 애써 무시하고 지하보도로 뛰어가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영은 이내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퍼억!

“끄아악!”

지하보도를 틀어막고 있던 조폭들이 검은 물결을 만들며 요동치는가 싶더니, 요란스런 비명과 함께 조폭 하나가 날아와 소영의 전방에 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막지 말고 빨리 비켰어야지.”

지하보도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조폭들이 멈칫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어 방금 조폭이 날아가며 생긴 구멍으로 수염이 덥수룩한 강패가 양손에 축 늘어진 여자를 한 명씩 들고서 계단을 올라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얼빠진 표정을 지은 소영과 계단을 올라오던 강패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어……!”

“어!”

쿠웅!

들썩!

소영을 본 강패가 뒤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조폭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발을 들어서는 크게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아스팔트가 먼지를 일으키면서 강패의 족적을 새긴 채 부서져 내렸다.

조폭들은 뭐에라도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똑같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경악, 혹은 공포.

“내가 저 여자한테 갔다 올 때까지 한 놈이라도 이 발자국 너머로 걸어오면,”

강패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래 있는 놈들이랑 똑같이 만들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십여 명의 조폭을 앞에 두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만방자한 말투였다.

하지만 조폭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몇몇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기까지 했다.

저벅, 저벅.

만족스러운 듯 웃은 강패가 소영을 향해 걸어갔다.

소영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강패를 쳐다보다가 그의 양손에 축 늘어진 채 들린 두 명의 여자를 보고서 화들짝 놀랬다.

“하얀 하이힐. 당신, 나랏일 하는 사람이지?”

“에…….에?”

소영은 얼떨떨함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강패가 그것을 아는지 화들짝 놀란 소영에게, 강패는 씨익 웃으면서 기절한 두 명의 여자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럼 믿고 맡기지. 이 두 여자. 잠까 내가 정리하고 오는 동안 어디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

“에……?”

강패는 일방적으로 말하고서는 답도 듣지 않은 채 두 여자, 만여와 세인을 내려놓고서는 몸을 돌려 다시 지하보도 쪽으로 걸어갔다.

강패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조폭들은 그가 몸을 돌리자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각기 다른 곳을 쳐다봤다.

“들어가.”

조용…….

“안 들어가?”

알아듣지 못한 표정을 짓던 조폭들은 강패가 두 번째 말하고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주춤거리던 조폭들이 강패의 말에 순한 양처럼 모두 지하보도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소영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조폭들이 그 근처에 있었냐는 것처럼, 조폭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지하보도 주변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소영은 멍한 표정으로 강패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옆에 놓인 세인과 만여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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