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뭐야 이거……. 미친놈…… 아니, 괴물이지. 그래도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한국 국정원 소속 요원들에게서 간신히 몸을 빼내 모처에 마련된 CIA 안가로 돌아온 지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그 후 강패와 만나고 있었던 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패의 능력에 주안점을 둬서 작성한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그 뒤로 별도의 지시는 물론 답신조차 오지 않았다. 로날드는 크리스에게서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외에 다른 지시나 행동 지침을 전혀 전해 듣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놈 하나 붙잡지 못했다고 엄청나게 깨지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수고했다.’라는 말을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받은 터라 기분은 더욱더 최악이었다.
일을 잘 처리했다고 하면서 한 계급 특진까지 시켜 주었지만 로날드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워낙에 공권력과 치안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돌아가는 나라인지라, 타국 정보 기관에 속하는 CIA는 언제나 국정원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그것을 미국이라는 최강대국의 힘으로 어떻게든 누르고는 있지만, CIA 한국 지부의 활동 범위는 너무나도 좁기에 인원도 거기서 거기였다. 따라서 특진했다고는 하지만 누릴 수 있는 혜택도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후, 좋게 생각하자. 좋게.”
그래도 특진이라도 한 게 어디냐고 애써 위안을 삼는 로날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니터에 출력되는 강패의 행동반경을 보며 로날드는 짜증이 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무슨 놈이 대체 매일 책만 사 대는 거야? 대체 뭐하는 놈이야?”
로날드는 위치 추적을 하기 위해서 강패에게 건네주었던 CIA 전용 신용카드 사용 내역과 발신지가 출력되는 스크린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일주일 내내 사용 내역을 조회하며 강패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려 했지만, 사실 그 일에는 일주일이나 필요하지 않았다.
카드 사용 내력을 보면 거의 구 할 이상이 종로에 위치한 한 책방에서 책을 사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나머지는 그 주변의 식당에서 밥을 먹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지출밖에 없었다.
“어떻게 단 일주일 만에 책값으로 사백만 원을 넘게 쓸 수 있지? 그리고 밥값으로 이건 또 뭐야? 그러면서 자는 데는 뭐? 지하보도? 노숙자? 거참…….”
책으로 무슨 장사라도 하려는 것인지, 그냥 평범한 크기의 책방에서 구입한 책의 가격만 해도 사백만원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식사는 대부분 분식이었는데, 고작 몇 천 원짜리 분식을 한 번 들를 때마다 몇 만 원씩 먹고 나왔다. 로날드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비싼 곳에 가서 저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 정도?
“그 괴물 주위로 애들을 붙일 수도 없고…… 젠장!”
이십 명 남짓한 CIA 요원들 중 그래도 몇 명을 차출해 정확히 강패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미행을 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강패는 파견된 요원들이 위치를 파악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찾아와서는 묵사발을 만들어 놓았다. 그 때문에 사흘째부터는 인원 손실을 막기 위해 그 일마저도 그만둔 상태였다.
“역사, 정치, 과학, 문학, 행정……. 종류는 또 이렇게 중구난방이고.”
구입한 책의 목록들을 보니 모두 상당한 지식 수준을 요구하는 것들뿐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권을 가지고 한 달 동안 본다고 해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전문적인 지식과, 더불어 끈기를 요하는 전문 서적들.
그런 책만 골라 사백만 원어치를 구입한 강패를 보며 로날드는 골치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공부하게 생긴 놈은 전혀 아니었는데……. 아니, 그 정도 실력이면 공부를 안 해도 될 텐데 왜 공부를 하는 거지? 이놈 뭐야, 대체?”
본국에 보고서를 올렸지만 정작 본국에서는 답신도 없었기에 로날드는 강패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그가 51구역에서 테러를 일으켰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테러를 어떻게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젠장. 공조수사를 요청해야 하나? 제길.”
로날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욕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지켜보자…….”
*
*
*
로날드가 강패를 감시하기 시작한 지 일주일을 넘겨 2주차가 됐을 때, 국정원에서도 강패를 놓고 소영과 팀원들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알려진 기록 전무. 그런데 CIA와 접촉. 우리 국정원에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미국 기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인데……. 국제 테러 단체 소속인가?”
총기를 소지한 혐의로 붙잡아 왔지만, 그들이 CIA 소속이란 것이 밝혀지는 순간 국정원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 그러면 설마 처장님께서 이렇게 미행, 아니, 감시, 아니 도움을 주기 위한 대기조? 아무튼 그것만 하라고 하셨겠어요? 진즉에 잡아들였지.”
강패의 정체에 대해서 처장이 알려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영과 팀원들은 궁금증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조사해 봤으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대체 정체가 뭐야? 라스베가스에서 입국할 때 썼던 여권은 위조. 현재는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고. CIA의 접촉이 있었는데 그 접촉이 호의적인 것도 아니고……. 총기까지 빼어 든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관계. 그런데 처장님께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이라…….”
소영이 속한 팀의 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강패의 행적과 관련된 보고서를 쳐다봤다.
“근데 정말 그것이 전부입니다, 팀장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자신도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동조하듯 소영과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같이 끄덕였다.
“정말 뭐하는 놈인지, 직접 가서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게요. 이제 그놈이 산 책이 거의 천만 원대에 육박하고 있어요. 그 책을 고스란히 지하보도에 쌓아 놓으니까 사람들도 점점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구요.”
“…….”
강패의 지난 2주일간의 행적은 국정원에서 판단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뿐이었다.
노숙한다는 것 자체가 돈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사람이 책방에 가서는 전문 서적들을, 하나에 몇 만 원이나 하는 서적들을 열 권 스무 권씩 사 와서는 그 책들을 지하보도에 쌓아 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뭔가가 있어. 뭔가가 있는데…….”
“결국 우리가 알아낸 건 강패라는 이름뿐이죠.”
처음에는 위조 여권으로 입국했고, 이어 위조 신분증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정원에서 움직여 강패의 신분증과 주민등록을 깔끔하게 합법적으로 처리한 상태였다.
처장이 나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 정체도 불분명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자신들을 도우미 형태로 옆에 머물라고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미친놈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이미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았다.
분명히 무언가 있는 놈이라는 확신은 있다.
하지만 물증이 없기에 답답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사고를 치거나 음모를 꾸미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기를 쓰고 파악해 낼 터였다.
하지만 지금껏 강패가 보인 행적은 기괴하기는 해도 의심할 만한 여지는 거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팀원들이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요즘 들어서는 통 얼굴도 보이지 않고…….”
소영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나마 국정원 요원들 중 강패와 자주 조우했던 소영조차 최근 강패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혼자서 중얼거린 소리는 너무 작아 아무도 듣지 못했다.
“이건 국과수에서 뭐라고 하디?”
팀장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울퉁불퉁한 쇳덩어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게…… 총이랍니다.”
빡!
“그건 나도 알아, 자식아! 대체 총이 왜 이 모양 이 꼴로 변한 거냐고!”
책상 위의 물건은 바로 강패가 한 손으로 구겨 버린 로날드의 권총이었다.
그것을 현장에서 습득한 국정원은 국과수에 보내 감식을 의뢰했지만 그다지 득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설마 사람의 힘으로 이런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하겠는가.
“대체 총이 이렇게 변하려면 얼마나 강한 힘이 가해져야 하는 거야?”
작약이 폭발하고 탄환이 쏘아져 나가는 충격을 견뎌 내도록 만들어진 것이 권총의 총신이었다.
그런데 국정원 요원들이 현장에서 발견한 이 ‘구겨진’ 권총은, 차라리 처음 만들 때 제작자의 실수로 이런 불량품이 나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냥 쇳덩어리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런데, 그냥 지하보도에 그 비싼 책들을 쌓아 놓는단 말이야? 다른 노숙자들이 그걸 가만 놔둬? 가져다 팔지 않고?”
집도 없는 노숙자가 분에 넘치는 물건을 쌓아 놓는데 그것이 멀쩡할 리 없다. 그런 생각에 팀장이 물었지만 팀원들은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노숙자 중 한 명이 그 남자가 없는 동안 죽어라 지키고 있더라구요.”
*
*
*
와그작!
“이, 이런…….”
“회,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손에 들린 서류를 사정없이 구기던 조모강이 뒷목을 잡고 비틀거리자 옆에 서 있던 비서가 황급히 달려와 부축했다.
“후우……. 후우…….”
“뭐하나! 어서 물 가져와!”
“네, 넵!”
조모강이 심호흡을 하며 소파에 기대 앉자 조모강의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비서에게 소리쳤다.
“뒷골목에서 언제 칼침 맞고 죽을지 모르는 놈들을 구해 줬더니……. 감히…….”
으득!
조모강은 머리가 온통 하얗게 샌 칠십 후반의 노인이었지만, 조선 그룹의 총수라는 직함답게 아직 허리는 꼿꼿했으며 눈에서는 젊은이 못지않은 정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보잘것없던 건설사를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전무후무한 기업가, 조모강은 건설업계에서 구르다 온 사람답게 부드럽고 온화하다기보다는 거칠고 강인한 기세를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류 전무! 지금 나한테 한 말이 확실히 흑룡파에서 전한 말인 건가!”
조모강은 바로 몇 분 전, 급한 일이라면서 자신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온 류만여 전무의 보고 때문에 열이 머리끝까지 뻗어 있었다.
류 전무라 불린 젊은 여자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방금 사람을 통해 그렇게 전해 왔습니다.”
“세인이는, 세인이는 어떻게 하고 있나?”
“그것이…… 봉사 활동을 하신다고 요즘 바깥을 출입하시는 시간이시라…….”
까무잡잡한 피부, 눈에 확 뜨이는 미모를 지닌 만여가 송구스럽다는 듯 말하자 조모강이 눈을 부릅떴다.
“지금 밖에 나가 있다는 소리야? 이 소란에?”
“예. 아가씨께서 대학 졸업 과정의 일환으로 봉사 활동을 하셔야 된다고 하셔서…….”
“그럼 경호원은!”
“봉사 활동을 하러 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괜히 다른 소문이 나면 좋을 것이 없다 판단하여…….”
“후우……. 경호원도 없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조모강이 이마를 부여잡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자 만여가 죄송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니. 류 전무 잘못은 아니지. 자네 판단이 맞았어. 단지…….”
빠드득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조폭 놈들이 감히 나, 이 조모강이를 협박해? 세인이를 걸고?”
조모강이 이를 악물자 빠드득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여는 직원들이 공공연히 부르는 ‘마녀’란 별명과 다르게 조모강의 살벌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띠리링!
그 순간 조모강의 품속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조모강은 핸드폰을 꺼내 보고는 액정에 떠오른 이름에 이를 빠드득 갈았다.
[흑룡]
하지만 조모강은 조선 그룹의 총수답게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휴대폰 액정을 눌렀다.
“여보세요.”
-조 회장님. 저희가 보낸 메시지는 잘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받았네. 원하는 게 뭔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열화를 토해 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흑룡과 통화하는 조모강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표정 또한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어 얼핏 침착한 것 같았으나, 휴대폰을 쥔 그의 손등에는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저희는 그리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조선 그룹의 계열사 하나…… 정도면 되겠군요.
“계열사 하나?”
조모강의 회색빛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흑룡의 목소리는 유들거렸다.
-손녀분의 안위와 계열사 하나라. 이 정도면 수지맞는 계산이 아닙니까? 아니, 손녀분의 가치로는 많이 모자라지만 저희가 원하는 건 조선 그룹과의 대결이 아닙니다.
“그래?”
조모강은 흑룡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눈을 번쩍 뜨고서는 만여를 눈짓으로 불렀다.
동시에 손짓으로 종이와 펜을 가져올 것을 종용했고, 만여는 그런 조모강의 행동에 궁금해 하면서도 얼른 종이와 펜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무식한 조폭 따위가 경영을 잘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냥 지금처럼 우리 밑에서 돈이나 받아 먹는 게 훨씬 이익일 텐데?”
-하하핫! 요즘은 조폭도 머리가 좋아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조 회장님. 그리고 승산이 있나 없나를 따져 보는 건 조 회장님 같은 분들보다 저희 같은 사람들이 훨씬 더 민감할 것 아닙니까? 하하하!
맺고 끊음이 확실한 조모강의 평소 성격과는 달리 도발하는 듯한 멘트에, 흑룡은 오히려 그것이 유쾌하다는 듯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모강이 눈썹을 찡그렸다.
스슥.
“그래. 승산이 있나 없나를 따져 본다라……. 그럼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건 나를 상대로 승산이 충분히 보여서란 말이겠군.”
조모강은 흑룡의 말꼬리를 잡기로 작정한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감과 동시에 손으로는 종이 위에 펜을 놀려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직 놈들은 세인이를 확보하지 못했다. 맞나?]
조모강이 쓴 글을 본 만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서 펜을 꺼내 조모강과 필담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선전포고만 내렸을 뿐이지만, 아마 회장님과 통화가 끝나면 바로 움직일 듯합니다.]
[그럼 세인이가 어디 있는지 녀석들은 알고 있다는 것이겠군.]
만여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적어도 서울 바닥의 정보는 저희에게 오는 것보다 흑룡파에서 입수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니까요. 아마 지금쯤 아가씨께서 있으신 곳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인력 동원에 있어서는 아무리 우리 그룹이라고 해도 놈들을 이길 수는 없겠군.]
끄덕.
만여가 조모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조모강은 눈썹을 찡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하하핫! 역시 조 회장님이십니다! 그 혜안에는 저희가 당하지 못하겠군요!
“이렇게 나에게 알려 주는 이유는 무언가?”
조모강이 흑룡에게 정말로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아예 먼저 세인을 납치한 후에 이렇게 전화를 걸어서 협상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흑룡이란 녀석은 아직 세인을 확보도 안 한 상태에서 마치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연락하고 있었다.
-글쎄요. 뭐, 그래도 지금껏 동업자 간의 의리를 생각해 미리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조선 그룹의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흑룡의 힘을 무시했다가는 큰코다치실 겁니다.
흑룡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낮아져 종내에는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로 변했다.
조모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당장, 경호팀 전체를 대동하고 세인이의 신변을 확보하게. 아직 놈들이 움직이지 않았으니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을 터.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자네도 도와줘야겠네. 저들이 원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세인에게 해코지를 할 수 없을 테니 마음껏 움직여 주시게. 협상은 세인이가 완전히 저들의 수중에 떨어진 후에 해도 늦지 않음이야.]
“회, 회장님…….”
만여가 떨리는 눈빛으로 조모강을 쳐다보았다.
세인이 조폭의 손에 당장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흑룡파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해할 수 없다는, 그 짐작 하나만을 믿고 자신까지 보내려는 것이다.
[내 손녀일세. 이 조모강이의 손녀라면 이 정도 일은 견뎌 내야겠지.]
만여의 눈빛을 마주하는 조모강의 눈빛에는 한 점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가 종이 위에 쓴 글에서는 손녀에 대한 믿음이 듬뿍 묻어 나오는 것 같았다.
만여가 재빨리 회장실을 나서자 조모강이 다시 심드렁한 음성으로 흑룡에게 말했다.
“일단 세인의 안위를 먼저 확인한 후에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겁니까?
흑룡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하지만 이내 반전해 이전의 번들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늙은이군. 모르겠어? 자칫하면 네놈의 손녀가 죽을 수도 있어.
손녀의 목숨이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조모강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내 손녀의 손끝 하나, 아니면 손톱의 끝이 살짝이라도 부러져도…….”
조모강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목소리 역시 무뚝뚝하고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점점 목소리에 고저가 사라지고 있었다.
“네놈의 모가지를 뽑아 개밥으로 던져 줄 것이다.”
뚝!
*
*
*
깨끗하게 지어지긴 했다.
하지만 도로에서 흘러들어 오는 매캐한 매연과 그 안을 차지하고 누운 노숙자들로 인해 꾀죄죄해 보이던 지하보도였다.
그러나 2주 전부터, 그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다.
“햐. 이런 걸 진짜 다 본다는 말이야?”
지나가던 회사원들이 한쪽에 잔뜩 쌓여 있는 책들을 보면서 두런거렸다.
“저번에 봤는데 수준이 장난이 아니야. 저걸 진짜 다 읽었으면 희대의 석학이야, 희대의 석학.”
“에이, 설마 저걸 다 읽었겠어?”
“생각해 봐. 2주일 만에 저만큼의 책이 쌓였어. 그런데 노숙자야. 대체 정체가 뭘까? 어쩌면 연구에 미친 학자가 책 사느라고 돈을 다 써서 길거리에 나앉은 걸지도 몰라!”
이렇듯, 단 2주 만에 이 지하보도는 벌써 명소 중에 한 곳으로 자리 잡았다.
자연스럽게 거의 벽을 쌓을 수 있을 정도로 쌓인 책의 주인에게도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으나, 정작 그 주인을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그 책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릅!
아직 낮이었고, 다른 노숙자들은 살길을 찾기 위해 서울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시간.
책 더미 앞에 꾀죄죄한 몰골의 노숙자가 주저앉아서는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행색만 노숙자였다. 그 노숙자의 주변으로는 배달 음식으로 보이는 듯한 빈 그릇들이 놓여 있었기에, 행색만 아니었으면 딱 저 책들을 지키는 경비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공통적인 궁금증이었다. 그러나 그중 단 한 명도 직접 나서서 꾀죄죄한 행색의 노숙자에게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했다.
*
*
*
“아저씨!”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지하보도가 단숨에 상쾌해질 정도의 발랄한 목소리.
“어. 세인 학생 왔구나. 어서 와.”
두 눈 부릅뜨고 주위를 경계하던 노숙자, 명진은 환하게 웃으며 세인을 반겼다.
“후아, 후아……. 오빠는요?”
달려온 것인지 턱 끝까지 숨이 찬 세인은 무릎까지 짚고 숨을 고르며 물었다.
명진은 얼굴에 자글자글한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에에, 또 저러고 있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다. 무슨 읽을 책이 저렇게 많은 건지…….”
세인과 명진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궁금증에 불을 지폈지만, 정작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았다.
책으로 벽을 쌓아서 지하보도에 따로 만들어진 독립된 공간, 그 너머를 노숙자를 제치고 확인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또, 그렇게 절실할 만큼의 궁금증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때 세인이 외쳤다.
“오빠! 저 왔어요!”
휙!
까닥까닥.
사람의 가슴 높이 정도로 쌓여 있는 책 너머로 손이 불쑥 솟아올랐다.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손이 까닥거리며 아는 체를 하자 세인이 환하게 웃었다.
“아저씨. 여기 선물이요. 자!”
세인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쑥 하고 명진에게 내밀었다.
검은 비닐 봉지였다.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닌 듯, 명진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냉큼 받아 들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반색하며 봉지 안에 든 것들을 부스럭거리던 명진은 순간 난감한 표정으로 세인을 보며 물었다.
“그…… 그런데 부모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시겠…….”
“쉿!”
세인은 명진의 말을 끊으면서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아저씨만 조용히 하시면 돼요! 그리고 여기만큼 좋은 장소가 어디 있다구요!”
깜찍하게 웃는 세인의 얼굴은 발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명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네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강패 동생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명진이 걱정스럽게 뭐라고 중얼거리건 말건, 세인은 자신의 공간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강패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오빠. 하루 종일 책만 읽죠?”
“넌 학생이라는 게 공부도 안 하러 다니냐.”
강패는 그런 세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의 손에 들린 책으로 시선을 내리면서 핀잔을 주었다.
“에이~ 방학이라구요, 방학! 방학에는 학생이라도 쉬어야 하는 법!”
“흐음. 그래? 그래서, 여기로 찾아오는 게 쉬는 거야?”
강패는 인생의 처세술을 알려 주겠다는 광오한 광고문구가 적힌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럼요! 그리고 여기는 책들이 아주~ 많으니까요!”
“네 책도 아니잖아.”
“책 가지고 남자가 쪼잔하게…….”
지난 2주일 동안 강패의 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주일 전부터 이 시대에서 살기 위해서는 이곳에 맞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강패가 온갖 종류의 책을 사기 시작한 순간부터, 세인은 매일 아침마다 그를 찾아와 밥을 먹자며 끌고 다녔다.
봉사 활동 기간이 끝난 다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줄기차게 찾아오면서 자연스레 강패와 친해지게 된 것이었다.
또 하나, 명진은 언젠가 고등학생들에게 얻어맞고 있던 바로 그 노숙자였다.
그 치욕스럽던 날 그를 구해 주었고 복수까지 대신 해 준 것이 강패다.
명진은 그날 지하보도에서 인외(人外)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던 강패의 능력을 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후, 그는 강패를 거의 은인 모시듯 지하보도에 방치된 책을 스스로 자처해서 지켜 주는 역할을 맡았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 단순하고 무사태평한 성격의 강패였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명진을 막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고마운 것은 아는 강패여서, 2주일이 지난 지금은 은근슬쩍 명진의 끼니까지 챙겨 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주변의 노숙자들은 가만히 지하보도에서 책만 지키고 있음에도 밥까지 챙겨 먹는 명진을 부러워했다. 그래서인지 명진은 더욱더 열성적으로 강패의 경비원 역할을 자처했다.
‘후, 이렇게 많이 읽으려던 건 아닌데…….’
투덜대던 세인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책을 빼서 읽기 시작하자 강패는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면서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강패는 본래 이렇게 책 읽으며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만 골라 읽으려고 했는데 말이지…….’
대여점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던 강패는 일단 책방에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한 줄이라도 들어 있다면 무조건 사고 봤다.
‘세상 참 복잡해졌구나. 몇 개 읽어서 끝나는 게 아니었어.’
이 시대의 사람들, 그러니까 세인이나 명진같이 태어나고 자라 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부분들을 강패는 글로써 익혀야만 했다.
그 양이란 게 절대로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몇 개의 책을 읽고, 그것도 강패가 궁금해 하는 부분들만을 골라서 읽는다고 해서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 21세기란 현실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유기체처럼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어. 거대한 생명체같이.’
아마 1940년대의 조선도 그랬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든 것을 책으로 보며 공부해야만 했던 강패의 시선이었다.
이 세상 속의 일원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제삼자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봤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시선 말이다.
단순히 정치나 문화 한 분야만 공부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정치에서 문화로 이어졌고, 문화에서 역사로 이어졌다. 그 역사에서 다시 정치로 이어지고, 혹은 그것이 과학으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과학에서 철학으로도 이어지는 등, 모든 것이 잘 짜인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때문에 강패의 ‘지식 습득 과정’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뭐, 재밌는 물건들도 꽤 많았지.’
만약 단순한 지식 습득 과정이었다면 강패 스스로가 그것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진작에 배울 것만 배우고 때려치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를 무려 2주일 동안이나 이렇게 탑을 쌓을 정도로 책에 푹 빠지게 한 것은 역시 호기심이었다. 21세기에는 강패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들이 일상에서 다루는 것들, 그리고 수많은 직업들과 과학 기술들까지.
‘역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한민국의 역사에까지 생각이 닿자 강패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이라는 인류 최악의 무기를 맞고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눈을 뜬 미국의 비밀 연구소에서 내준 자료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제가 패망했다는 사실은 강패에게 있어 희소식이기까지 했다. 껄껄 웃었을 정도로.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대한민국의 역사는 가히 아수라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가 나갔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소련과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그로 인해 한반도는 결국 두 동강이 났고, 그것만 해도 울분이 터지는데 민족상잔의 비극까지 벌어졌다.
바로 지금, 현대까지도 말이다.
국제 정세에 관한 책을 읽음으로써 강패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뭐 같은 상황에 자주 처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김구 선생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한국전쟁 발발 전, 광복 직후 김구 선생께서 암살당했다는 역사서의 대목에서 강패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결국 대한독립군은 어떻게 된 것이지? 준족 녀석도 광복 후 6.25 전쟁을 하다 다리를 잃고 나온 후에는 모른다고 했는데……. 그 후에 해체된 건가.’
본래 한반도, 조선의 자주 통일을 위해 만들어진 대한독립군이었다.
허나 이를 경계한 소련과 일제, 그리고 중공의 음모에 빠져 급속도로 그 세가 줄어든 대한독립군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것이 바로 강패와 그의 특능 부대였다.
‘분명 특능 부대원이면 충분히 한반도를 통일시키고도 남았을 텐데…….’
그 스스로가 특능 부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특능 부대원의 능력이 일반 군인들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대한독립군의 이야기는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 진전을 이은 사람들이라던가?’
혹시 대한독립군이 패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사서의 그 어떤 부분에도 대한독립군에 관한 이후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몰살당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지금까지 살아 있는 대원이 있을 수도 있다. 준족한테 물어봐야 하나? 아니지, 녀석이 알았으면 당연히 말해 줬을 텐데…….’
무슨 책인지 모르겠지만 금세 빠져들어 머리를 파묻고 있는 세인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강패가 미간을 찌푸렸다.
“음?”
어떻게 하면 생존자들을 찾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던 강패가 문득 의문성을 토했다. 주변의 분위기가 일순 변질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세인이 고개를 휙 돌려서는 강패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오빠?”
“……난 잠깐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에? 어디요? 나도 같이 가요! 나도!”
강패가 일어나자 세인이 따라가겠다며 보던 책을 꽂아 놓고서는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게 아무 데나 쫓아다니려고 하냐? 저리 가.”
강패가 세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면서 만류했다.
세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부루퉁하게 말했다.
“아니, 난 오빠가 그렇게 꾀죄죄한 몰골로 다니다가 노숙자 취급당하면 어떻게 할까 싶어서…….”
“나 노숙자 맞는데?”
강패가 피식 웃었다.
세인의 말마따나 강패의 모습은 2주일 동안 훨씬 더 남루해져 있었다.
물론 항상 강패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미증유의 기운들이 먼지가 들러붙거나 때가 타는 것을 막아 주고 있었다.
가끔 목욕탕도 갔기 때문에 늘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한국에 도착한 후 단 한 번도 안 한 면도로 인해 덥수룩해진 수염과, 마찬가지로 한 차례도 빨지 않아 때가 잔뜩 탄 옷이었다.
깨끗한 얼굴도 덥수룩해진 수염이 가려 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겉모습만 봐서는 명진이나 강패나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명진 형님. 여기 얘 좀 붙잡아 앉혀 주세요. 못 쫓아오게. 넌 여기서 있다가 책 오는 거나 정리해 놔. 그거 보고 놀다가 적당히 가고.”
툭!
“이씨!”
강패가 마치 초등학생 다루듯 이마를 툭 하고 밀치자 세인이 이마에 손바닥을 댄 채 입술을 비죽 내밀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분한 표정마저도 이제 대학교 2학년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워 보였다. 때문에 강패의 입에서는 실없는 웃음만 흘렀다.
“말 들어라. 어?”
“알았어요…….”
제대로 안 지 2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강패가 한 번 안 된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따라서 포기도 빨랐다. 그래도 자신이 삐쳤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팔짱을 척 끼고서는 자리에 주저앉아서 고개를 휙 돌렸다.
“아우,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찾아오던 놈들도 이제는 오지 않으니, 운동 부족이야, 운동 부족.”
톡톡.
세인이 그러건 말건 강패는 자신의 감각에 걸려든 새 먹잇감들에게 궁금증을 품은 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아프지도 않은 어깨와 무릎을 두드리며 어슬렁어슬렁 지하보도의 계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