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퍼억!
강패는 피하지 않았다.
때문에 태운과 성수의 주먹은 강패의 얼굴과 몸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강패가 자신의 주먹에 얻어맞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운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벅.
“어어……?”
“뭐야, 이래서 파리 한 마리라도 잡겠어?”
강패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다가갔다.
웃으면서 말하는 강패의 모습에 오히려 태운과 성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으아악!”
“우아악!”
퍽! 퍼버버벅! 퍼벅!
저벅, 저벅.
태운과 성수는 이제 거의 발악하듯 주먹과 발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 공격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강패의 몸을 직격했다.
한동안 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강패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미풍 속을 거닐 듯 태운과 성수를 향해 다가갔다.
털썩!
“윽!”
오히려 공격을 해 대는 태운과 성수가 연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스스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둘 모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넘어졌다.
“너…… 너 뭐야!”
“으악!”
태운과 성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강패를 올려다보았다.
강패는 그 큰 키로 태운과 성수를 내려다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개자식들은 몽둥이가 약이라지?”
텁, 텁!
“웁!”
“우웁!”
스윽!
강패가 양손을 뻗어 태운과 성수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이에 깜짝 놀란 태운과 성수가 강패의 팔을 주먹으로 마주 쳐 댔다. 하지만 강패는 태운과 성수의 얼굴을 그대로 잡아 들어 올렸다.
버둥버둥!
발이 땅에 닿지 않자 태운과 성수는 공중에서 애처롭게 버둥거렸다.
학생이라고는 해도 성인 남성의 몸무게를 가진 두 명이다. 그런 둘을 양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린 강패가 그대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쿵! 쿵!
“끄으…….”
“으으…….”
아까 태운과 성수가 노숙자를 때리다가 침을 뱉은 자리이자, 태운의 발길질로 인해 노숙자의 피 섞인 침이 흘러내린 자리이기도 한 곳이었다.
버둥거리는 태운과 성수가 귀찮았던 것일까?
강패는 파리채를 휘두르듯 차례대로 손을 휘둘러 태운과 성수를 벽에 밀쳤다.
고통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둘의 귀로 강패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희 찌꺼기는 네놈들이 치워야겠지. 안 그래?”
목소리가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평상시처럼 심드렁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스산함은 보통이 아니었다.
깜박, 깜박, 깜박.
태운과 성수가 움직일 수 없는 머리 대신 눈꺼풀로 미친 듯이 수긍했다.
그 모습에 강패가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태운과 성수의 얼굴을 땅바닥에 찍고 마구 비벼 대기 시작했다.
부비적, 부비적!
부비부비!
“끄윽!”
“으아아…….”
자신의 가래침에 얼굴을 파묻고, 남의 피가 섞인 침에 얼굴을 박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고 더러웠다.
하지만 태운과 성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쾌함과 더러움보다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더 큰 탓이었다.
더불어 강패에 대한 두려움도…….
“음, 아직도 더럽네.”
어느 정도 문질렀지만 강패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휙! 휙!
쿠웅!
“으아아…….”
“으으으…….”
마치 짐짝처럼 나가떨어진 태운과 성수는 얼굴을 부여잡았다.
일진이라는 자존심은 이미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침과 피로 범벅된 얼굴로, 둘은 털퍼덕 주저앉아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야!”
우뚝!
“네!”
“네, 넷!”
하지만 강패가 한번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운과 성수는 칼같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우렁차게 외쳤다.
“옷 벗어.”
“네…… 네?”
강패가 옷을 벗으라고 하자 순간 멈칫한 태운과 성수였다.
하지만 강패가 눈을 부라리자 곧 쭈뼛쭈뼛하면서 학생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자, 한 벌에 삼십만이나 하는 북면 패딩을 어기적거리며 벗었다.
“이런 면으로 제대로 닦이겠어? 쳇.”
부욱!
그들에게서 패딩을 받아 든 강패는 미끈미끈한 겉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망설임 없이 비싼 북면 패딩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어…… 어어!”
“으어어!”
태운과 성수가 울상이 돼서 말을 더듬었다.
강패가 그런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입 닫아. 네놈들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을 것 아니면.”
“네……. 넵!”
“알겠습니다!”
강패가 스산하게 말하자 태운과 성수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강패는 인상을 찌푸리며 흩날리는 오리털을 이용해 바닥을 닦았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닦아 낼 때마다 오리털이 풀풀 날렸다.
“빌어먹을! 무슨 옷 안에 깃털을 집어넣고 지랄이야!”
휙!
바닥을 대충이나마 훔친 강패가 피와 침으로 범벅이 된 북면 패딩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태운과 성수가 그 모습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이, 너네.”
“옙!”
하지만 강패가 다시 부르자 군기 바짝 든 군인처럼, 태운과 성수가 크게 답했다.
“깡패냐?”
“…….”
“깡패냐고.”
“으으…….”
그즈음 맞아서 쓰러졌던 노숙자가 나직한 침음과 함께 뭉그적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강패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태운과 성수를 노려보면서 재차 물었다.
“어쭈, 말 안 하지?”
“아……. 아닙니다!”
어떻게 대답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태운과 성수는, 강패의 눈길이 사나워지자 일단 얼른 대답부터 했다.
태운과 성수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강패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치? 너희 같은 조무래기들이 깡패라고 했으면 난 참 실망했을 거야.”
“그,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냥 양아치입니다!”
태운과 성수는 강패가 소위 말하는 깡패, 혹은 건달, 혹은 조폭이라는 생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 투가 딱 봐도 깡패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자, 사람 때리고 사는 깡패들도 아니니 지금부터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네?”
강패는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얼빠진 두 양아치를 쳐다보았다.
그런 강패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의 살벌함은 두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태운과 성수는 오히려 그 모습에 더욱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저기 뒤에 저 아저씨 보이지?”
“보, 보입니다!”
노숙자는 자신을 때린 태운과 성수가 쳐다보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많이 아파 보여, 안 아파 보여?”
“아, 아파 보입니다!”
벽에 부딪친 등판이 욱신거리고, 걸레 대용으로 사용된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더 아파 보이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이다. 둘에게도 그 정도 눈치쯤은 있었다.
“누가 아프게 했을까? 이 아저씨가 죄를 지어서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진 건가?”
능글맞게 웃은 강패가 지하보도의 천장을 바라보며 빙글거렸다.
태운과 성수는 강패의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노숙자를 치료하라는 것.
“야, 약을 사 오겠습니다!”
“저희가 아프시지 않게 약을 사 와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태운과 성수가 빠릿하게 답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미친놈! 그냥 도망가 버려야겠다.’
‘이런 끔찍한 놈을 다시 보러 올 수는 없어!’
태운과 성수는 짧은 순간에 강패의 의도를 놀라운 눈치로 알아챘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 강패에게서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하지만 강패는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둘을 비웃으며 말했다.
스윽.
한 발자국 움직이는가 싶더니, 강패의 신형이 태운과 성수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러고는 두 손을 뻗어 아까처럼 태운과 성수의 머리를 턱턱 붙잡았다.
터덥!
“흐읍!”
“흡!”
“만약 그냥 가 버리면……. 글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지 않아?”
부르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자신들 앞에 있던 강패다.
그런 그가 어느새 자신들의 뒤에 나타나 머리를 붙잡았다.
태운과 성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 전의 기억이 살아남과 동시에 자신들이 진짜 괴물과 마주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그들은 강패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바, 반드시!”
“반드시 돌아올게요!”
“…….”
휙!
쥐어짠 듯한 대답에 강패는 대답 대신 양손에 잡힌 태운과 성수의 머리를 놓아주었다.
휘청!
순간적으로 비틀거린 태운과 성수가 금방 자세를 바로 잡았다.
“빠,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야! 가, 같이 가!”
깍듯이 인사를 한 두 양아치가 날아가다시피 뛰어서 지하보도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좇던 강패가 떨어뜨렸던 책 봉투를 주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귀로 노숙자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네…….”
“뭐, 딱히 그쪽을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니까 안 고마워해도 상관없수.”
퉁명스럽게 말한 강패는 책 봉투에서 책을 한 권, 두 권 꺼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퉁명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은 노숙자는 깊은 눈으로 강패를 쳐다보았다.
“내 이 은혜는 꼭 보답하겠네.”
노숙자가 뭐라고 하건, 강패는 다시 책이 가득 든 봉투를 집어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직도 날리고 있는 깃털들을 신경질적으로 발로 밀어낸 강패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윽.
“……김 씨. 대체 정체가 뭐지?”
여느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지하보도였지만, 강패에게는 오늘따라 아주 다르게 보였다.
김 씨.
강패가 지하보도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강패를 여러모로 도와줬던 김 씨가 없었다.
“붉은 연기라, 붉은 연기…….”
“쿨룩! 쿨룩!”
옆에서 들려오는 노숙자의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강패는 이내 김 씨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전혀 느끼지 못했다.”
멀쩡하던 인간이 붉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그것만으로, 김 씨는 절대 멀쩡한 인간에 속할 수가 없었다.
“흐음…….”
사실 강패 스스로도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서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대한독립군의 특능 부대의 존재 자체가 일본이나 중국의 같은 특능 부대를 상대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인데, 강패는 지금껏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선 능력을 가진 존재들을 많이 봐 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틀을 유지한 채 발휘되던 능력들이었다.
김 씨처럼 인간의 틀을 포기한 채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능력은 강패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했단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패는 김 씨에게서 단 한 번도 위험이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강패가 느끼기에 김 씨는 주변 노숙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운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터무니없는 능력이라니.
“뭐, 볼일이 있으면 다시 올 터.”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던 강패는 이런 고민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붉은 연기로 변해 사라진 김 씨다.
그를 대체 어디서 찾을 것인가?
강패에게 달라붙은 의도는 분명 있을 테지만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패를 도와준 측면이 더 많았다.
아마 김 씨가 없었으면 강패가 이렇게 익숙해지는 데까지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터였다.
“됐다, 됐어. 언젠가 오겠지 뭐.”
촤라락!
볼일이 있어서 붙었으니, 더 볼일이 있다면 다른 형태로 자신에게 접근할 것이다.
강패는 태평스럽게 생각하며 종이봉투에서 책을 꺼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
*
*
한 건물의 옥상.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러셀 님.”
붉은 연기로 화해 도망갔던 김 씨는 러셀과 대면하고 있었다.
“…….”
러셀은 발아래 개미처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알아챌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 씨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변해 러셀의 뒤에서 허리를 연신 숙여 댔다.
“……어차피 더 이상 네가 직접 알아낼 것도 없으니 되었다.”
“죄송합니다.”
러셀의 말에도 불구하고 김 씨는 영 불안한 것인지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런 김 씨를 러셀이 잠시 불편한 눈길로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까마득한 발아래의 공원을 쳐다봤다.
“대체 무슨 능력이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힘? 아니면 속도? 감을 잡을 수가 없군.”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강패에 대한 정보는 예전에 러셀의 손으로 파괴시킨 환생의 연구소와 함께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그로 인해 강패의 정보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심지어는 그의 잘난 동업자조차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러셀은 김 씨를 이용해 정보를 캐내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주 간단한 정보조차도, 심지어는 어떤 계열의 능력인지도 알아낼 수가 없었으니, 러셀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흐음…….”
어디론가 가 버린 강패가 없어진, 더 이상 별 쓸모가 없는 장소가 된 공원이다.
그러나 러셀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작정 달려들었다가는 저번 연구소 때처럼 처참하게 당할지도 몰랐다.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동시에 자신 같은 존재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빌어먹을! 초인까지 만들어 내는 과학 기술이라니…….”
미국에서도 베일에 싸여 있는 네바다 주 그룸 호수 공군기지, 소위 말하는 51구역의 연구소에서 발견된 것이 강패였다.
그리고 연구소에서 발견됐다는 말은, 러셀에게 있어 인간이 결코 손대서는 안 될 분야까지 손을 댄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러셀은 강패를 말살해야 될 필요성에 더해, 그런 초인을 만들어 내는 기술에 대해서도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차례대로, 이 일에 관련된 모두를 쓸어버리면 되겠지.”
담담히 중얼거린 러셀은 시선을 돌려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김 씨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됐다. 대신 너는 이제 다른 일을 해 줬으면 한다.”
“다, 다른 일이라고 하시면……?”
영락없이 죽은 목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김 씨다.
김 씨는 활로가 열릴 듯하자 조심스레, 하지만 꼭 해내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러셀을 쳐다봤다.
러셀은 자신의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김 씨에게 던져 주었다.
“디아즈 놈이 연락할 것이다.”
“헉……! 네, 네!”
김 씨는 화들짝 놀라며 허겁지겁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혹시라도 떨어뜨릴까, 핸드폰이 엄청나게 비싼 도자기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두 손으로 잡아 가슴팍에 붙였다.
“3, 2, 1…….”
잠시 시계를 들여다본 러셀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부르르!
“헉…….”
그것이 끝나는 시점에, 정확히 김 씨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부르르 떨며 진동을 해 댔다.
꿀꺽!
침을 크게 삼킨 김 씨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은 러셀의 표정을 한번 힐끗 살폈다. 그리고 허겁지겁 핸드폰을 받아 조심스레 말했다.
“예. 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다시 한 번만 더 일을 맡겨 주신다면 반드시……. 예? 예. 예……. 네!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
산만한 덩치.
까무잡잡한 피부.
그중에서도 동공의 색깔이 유독 짙은 검은색이어서 흑웅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자신보다 상석에 앉은 사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님! 오늘 어디 편찮으십니까? 안색이 영 좋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암흑가에 그 어떤 뒷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을 주름잡는 대한민국 3대 조폭 중 하나, 흑룡파의 간부가 된 흑웅은 난데없는 보스의 호출에 허겁지겁 달려와야만 했다.
“괜찮다. 그나저나 다른 간부들도 다 모였나?”
검경에서 벌어지는 대대적인 수사, 혹은 조직의 존폐에 어떠한 이상이 있지 않은 이상 전 간부를 소집하는 일은 드물었다.
얼마 전에 된통 잘못 걸린 일로 인해 조직이 소란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시기에 더욱 각 지역을 굳게 지켜야 할 간부급들을 갑작스레 소집했다는 것은, 무언가 그에 필적할 만한 큰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흑룡파의 전 간부들은 지금 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을 터였다.
‘형님이 조금 이상하신데…….’
흑웅은 흑룡파의 보스인 흑룡을 힐끔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건 또 뭐야, 대체?’
동시에 불편한 눈길로 흑룡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이었는데, 저렇게 대놓고 흑룡의 뒤에 서 있을 수 있다니…….
언제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암흑가에서 흑룡이 뒤를 맡길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흑웅으로서도 생경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모를 새파란 놈이 흑룡의 뒤에 흑룡을 보호하듯 서 있었으니, 흑웅으로서는 위기감과 더불어 불편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흑룡이 등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믿는 사람이라면 거대 조직 흑룡파에 새로운 실권자가 등장했다는 것과도 다름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새로이 등장한 실권자는 기존의 실권자들과 필시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누구는 미친 듯이 노력해서 올라왔는데 누구는…….’
흑웅은 흑룡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면서 배알이 뒤틀렸다.
올해 예순 살이 다 된 흑룡이다.
그는 1970년 후반에 대한민국의 암흑가에 뛰어들어 불과 10년 만에 기존 2강 체제였던 암흑가를 3강 체제로 만들어 버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흑웅의 롤모델이나 다름없었다.
인위적인 염색이 아닌, 피부가 시꺼멓게 죽어 등판의 용문신이 검게 물들었기에 흑룡이라고 불린다는 흑룡파의 머리.
예순이 다 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끝이 조금 희끗한 것 빼고는 아직도 전신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었으며, 양복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은 그의 혈기왕성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다 왔으면 앉아라.”
어느새 하나둘씩 흑룡파의 간부들이 모여들었다.
널찍한 회장실은 전국에서 몰려든 간부들로 인해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흑룡이 입을 열자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것 같은 적막으로 물들었다.
“오늘 갑자기 너희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다.”
조용…….
개중에는 흑룡과 함께 2, 30년 전부터 현장에서 뛰었고, 지금은 원로이자 정신적 지주로 자리를 공고히 한 명망 있는 조폭들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그들도 가만히 귀를 기울일 정도로, 흑룡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부로 우리 흑룡파는.”
흠칫
잠시 말을 멈춘 흑룡이 간부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그가 다른 곳을 보는 동안 잠시 눈을 들어 흑룡의 얼굴을 쳐다본 흑웅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뭐, 뭐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흑룡의 두 눈은 지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상하다…….’
흑웅이 시선을 가늘게 했다가 재차 껌뻑거렸다.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흑룡은 계속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흑웅은 여전히 붉은 기가 도는 흑룡의 두 눈을 보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분명히 이상했는데…….’
방금 전에 본 흑룡의 두 눈은 분명 붉은 광선이라도 내뿜을 것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인간의 눈 같아 보이지 않았건만, 지금 다시 쳐다본 흑룡의 눈은 그냥 충혈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에 한 줄기 의구심을 품던 흑웅이었지만, 곧 흑룡의 입에서 흘러나온 폭탄 발언에 그 의문은 씻은 듯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흑룡파는 조선 그룹을, 조모강이를 친다.”
술렁!
순간, 흑룡파의 회장실 안은 그전보다도 훨씬 더 큰 적막감에 휩싸였다.
흑룡과 흑룡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남자를 제외한 전 간부들은 입을 떡 벌리고 두 눈을 치켜뜬 채 입만 벙긋거렸다.
흑룡은 그런 간부들을 핏발 선 눈으로 쳐다봤다.
“그놈들의 시다바리 역할만 하다가 이렇게 팽(烹)당할 수는 없지. 적어도 이 흑룡파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전설의 용이란 것을 알려 주긴 해야 하지 않겠느냐? 동등한 관계로 올라서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영원히 놈들의 더러운 뒤처리이나 해 주고 살아가야 하니까.”
“혀…… 형님!”
“회장님!”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흑룡이 부연 설명을 하고 나자 그제야 놀람을 가라앉힌 간부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흑룡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간부들을 노려보았다.
“내가 하면 말이 되는 일이다!”
번뜩!
“회…… 회장님!”
“혀, 형님!”
오싹!
흑룡의 단호한 말과 핏발 선 두 눈에, 간부들은 온몸으로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고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몸을 옭아매는 것만 같은 느낌.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당장 흑룡의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은 느낌에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줄였다.
험악한 세계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이들을 단박에 침묵시킨 흑룡은, 그래도 마냥 찍어 누르려는 것이 아닌지 재차 부연 설명을 붙였다.
“완전히 대적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봐라. 우리 흑룡파가 조선 그룹에 붙어서 그동안 말도 못할 꼴을 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이더냐? 노조 투쟁에 우리를 동원해서 욕을 얻어먹게 하는 것부터, 비리만 터지면 무조건 우리들에게 일을 떠넘기기 바빴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도 놈들 때문에 우리 식구들이 큰집에 갔는데 조선 그룹에서는 어떻게 나왔더냐. 모르쇠로 일관하지 않았느냐? 언제까지 이렇게 개처럼 살 수는 없다.”
“그건 그렇지만…….”
“회장님. 그래도 이건 너무…….”
대한민국의 암흑가를 삼분하고 있는 흑룡파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안정적인 자금줄 없이는 그 큰 덩치를 유지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또 경찰과 검찰의 감시망도 더욱 심해져서 조폭들도 전국구보다는 지역구로 돌아서고 있는 추세였다. 그 상황에 자금줄을 확보하기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는 비단 흑룡파뿐만이 아니라 다른 두 개의 거대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각 그룹과 연계를 맺어 자금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흑룡파 같은 경우는 그것이 조선 그룹이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이번 경우와 같이, 조선 그룹에서는 흑룡파를 파트너라기보다는 자신 대신 손을 더럽혀 주는 노예 정도로 취급했었다.
기실 흑룡이 가진 불만은 전 조직원들이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는 대기업에 대한 불만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애초에 오만한 대기업과 거친 조폭들이라는 명제부터가 잘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엘리트 집단이고, 대한민국을 사실상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대기업은 수시로 조폭들을 무시했다.
반면 험하게 사는 자신들에 비해 별로 하는 것도 없이 펜대나 굴릴 줄 알고, 비열하게 남을 등쳐 먹는 주제에 떵떵거리고 사는 대기업을, 조폭들은 늘 아니꼽게 바라봤다.
그렇기에 대다수 간부들이 수긍의 빛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인 조선 그룹과 척을 진다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완전히 척을 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간부들의 심정을 알아챈 흑룡이 타이르듯 말했다.
“적어도 조모강이가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무시하면 자기들도 무사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거다. 최소한 동등한 동업자로 생각할 수 있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자는 말이다.”
조선 그룹의 주력 사업은 바로 건설 분야였다.
그것이 점차 커지게 되면서 여러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대한민국 전반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주력 사업은 건설이다.
건설 분야 하나로 조선 그룹을 일궈 낸 신화적 인물이자 조선 그룹의 총수인 조모강의 이름을 거론하는 흑룡의 두 눈이 붉게 번쩍였다.
잠시 말을 멈춘 흑룡은 간부들이 자신을 일제히 쳐다보고 있자 씩 웃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아주 정중히. 조모강이의 손녀를 데리고 며칠 동안만 있자는 거다. 그 늙은이, 손녀는 그토록 끔찍하게 생각한다더구나.”
*
*
*
갑작스런 소집이 해제되고, 다른 간부들 틈에 섞여서 흑룡의 저택을 빠져나오던 흑웅은 아무래도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조선 그룹을 치자니…….
물론 조선 그룹과 연계를 맺은 후부터 흑룡파가 가지게 된 불만은 어느새 상당히 커져 있었다.
분명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그래도 당장 지금은 아니었다.
조선 그룹은 확실히 흑룡파에 약속된 보수를 지불하고 있었다. 흑룡파가 그 거대한 덩치를 그 덕분에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는데, 갑자기 이제 와서 조선 그룹과 척을 지겠다니.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란 이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물론 흑룡파도 대한민국 암흑가에서는 결코 무시 못할 집단이었다.
하지만 상대인 조선 그룹은 그런 흑룡파도 우습게 여길 수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노는 기업이었다.
그런 만큼 정계에 닿아 있는 연줄도 거미줄처럼 얽혀 있을 터. 이 시점에 이토록 갑작스럽고 무모한 결정은 납득되지 않았다.
‘허점이 많다.’
조모강의 손녀를 납치해 조모강과 협상한다는 것은 상당히 쉽게 들렸다.
하지만 흑웅은 애초에 작은 건설 회사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인 기업인 조선 그룹으로 일군 조모강이 과연 손녀의 일이라고 해서 눈 하나 깜짝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흑룡파가 정말 조모강의 손녀에게 상해라도 입혔다간 오히려 더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조모강이 앙심을 품고 제대로 나선다면 흑룡파는 일단 당장 들어오는 자금부터 끊기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 그룹의 재력과 연줄에 이어져 있는 정치권과 경찰권의 인사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 흑룡파를 잡아먹으려고 할 터였다.
‘이건 아니다.’
스윽.
결국 흑룡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른 간부들을 보내고 저택 안으로 들어온 흑웅이었다.
흑웅이 흑룡의 친위대를 지나 예의 회장실 앞에 섰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흑웅이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놈이다.’
흑웅은 귀를 기울였다.
두런두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두 개였다.
하나는 흑룡의 것, 하나는 처음 듣는 목소리.
흑웅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흑룡의 뒤에 병풍처럼 서 있던 그 남자의 것임을 눈치채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분부하신 대로 처리하였습니다. 주군.”
“성과를 기대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조, 존댓말?’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훔쳐 듣던 흑웅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흑룡의 목소리는 흑웅이 듣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정중하고 공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받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오만했고 하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상하다! 이상해!’
흑룡의 위에 누군가가 있다?
흑룡을 한 번이라도 마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적으로든, 아군으로든 간에 흑룡의 머리 위에 누군가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흑룡은 그런 존재였다.
하늘 아래 단 하나밖에 없는 독보적인 존재이자, 휘하에 수천의 조폭들을 거느린 대한민국 암흑가의 절대자.
그런데 그 절대자가 누군가를 주군으로 모신다니.
흑웅은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안으로 뛰어드는 무모한 일은 하지 않았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흑웅의 영악함이 빛을 발한 것이다. 흑웅은 지금 이 안으로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물러났다가 나중…….’
흑웅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텁!
“흐윽?”
어디선가 튀어나온 손이 흑웅의 커다란 머리를 움켜쥐었다.
“죽을 자리를 찾아오다니……. 자네도 참 운이 없군.”
“크윽!”
흑웅이 솥뚜껑만 한 손이 마구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움켜쥔 손은 접착제라도 바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착잡한 듯한 남자의 음성이 흑웅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아쉽지만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어 버렸으니…….”
“너…… 너는!”
흑웅은 자신의 머리를 움켜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두 눈이 찢어져라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김 씨.
강패와 함께 협상 자리에 등장했던 김 씨의 얼굴을 흑웅이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냥 평범한 노숙자라는 것에 금세 흥미를 잃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았던 만큼 그런 김 씨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자가 왜 이곳에!’
그것도 흑룡에게 존댓말을 받으며, 벽을 뚫고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보이는 이 괴물이 그때 그 노숙자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네도 나와 함께 이 일을 하는 수밖에.”
“으, 으으!”
버둥버둥!
귓가에서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김 씨의 음성이, 흑웅은 갑자기 미치도록 무서워졌다.
흑웅의 발버둥이 더욱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흑웅이라는 별명을 받게 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
그에 걸맞게 힘도 장사였지만, 흑웅의 머리를 움켜쥔 김 씨의 손가락은 단 1미리조차도 꿈적하지 않았다.
스으으읍!
흑웅의 귓가에 대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던 남자의 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힘껏 발버둥 치던 흑웅의 사지가 마치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저벅.
“이, 이게…… 하아…….”
그늘진 곳에서 솟아나듯 걸어 나온 김 씨는 자신이 한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에 놀람과 두려움이 한껏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 김 씨의 모습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이전에는 까무잡잡하게 탔던 피부였다면 지금은 잡티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실핏줄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창백하기 그지없는 피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난…… 이제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흑웅의 머리를 잡고 있었던, 흑웅의 그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거뜬히 버텨 냈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김 씨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스윽.
“흡!”
하지만 이내 잡생각을 털어 내듯 고개를 털어 낸 김 씨는 주먹을 말아 쥐고 짧게 호흡을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숨을 불어넣은 손을 실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에 주저앉은 흑웅의 코로 가져다 댔다.
후욱!
김 씨의 손아귀에 불어넣어졌던 호흡이 검은색 연기로 변해 흑웅의 코와 입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김 씨의 손에서 검은 연기를 빨아들인 흑웅이 눈을 번쩍 떴다.
“지하보도의 감시를 제대로 하도록. 잔뜩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하니 그에 대비하여 조직원들을 잘 관리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흑웅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정중히 답했다.
번쩍 뜨인 그의 눈은 흑룡의 그것처럼 충혈된 듯, 혹은 시뻘건 핏물이 베인 듯 적광으로 흉흉하게 빛났다.
“대체 어떻게 되려는지…… 쯧!”
누군가한테 하는지 알지 못할 소리를 나지막하게 읊조린 김 씨가 혀를 차며 다시 그늘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의 몸이 ‘녹아들 듯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타다다닥!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다.”
김 씨가 사라지자 금세 피라도 쏟을 것처럼 빛나던 흑웅의 눈에서 붉은 기가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