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어떻습니까. 이제 이 나라도 이 정도면 살 만하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감정을 수습한 노인은 눈물을 닦고서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둘은 찻잔을 앞에 놓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이 새파란 젊은이한테 존칭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민준은 전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이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했다.
“그러게 말이다. 대체 그 누가 이 나라를 보고 쪽바리 놈들이 설쳤던 나라라고 생각하겠어?”
다시 평소의 경박스럽고 경망스러운 말투로 돌아온 강패였지만 준족은 오히려 그것이 더 반가운 모양이었다.
“형님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저도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허허허. 형님 덕분에 무서운 것도 참 많이 참을 수 있었는데.”
잠시 옛날을 추억하던 준족은 다시 시선을 돌려 강패를 쳐다보았다.
“형님이 왜 미국에 있었던 것인지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부탁한다.”
강패가 눈을 뜬 직후부터 이곳 서울까지 오게 된 경위를 모두 준족에게 설명한 강패였다.
자신이 왜 히로시마에 갔었던 것인지, 강패 스스로가 기억해 낼 수 없었던 부분을 물었지만 준족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때 바깥에 나가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족은 복귀하고 나서 강패가 부대를 떠났다는 사실에 더 슬퍼했던 기억만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핵폭탄을 맞으시고도 살아남으시다니. 정말…….”
하필이면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질 때 강패는 그곳에 있었다.
준족이 감탄을 했고 뒤에 있던 민준도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강패를 바라봤다.
“근데. 이렇게 저놈 있는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거냐? 내가 65년 전의 사람이란걸?”
강패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민준을 쳐다보고서는 준족에게 물었다.
준족은 그런 민준을 올려다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이놈은 제 손주 녀석입니다.”
“쿨럭…….”
강패가 차를 들이키다 사례가 들려 컥컥거렸다.
“너! 어떻게 결혼한 거야! 그 다리로 결혼이 돼?”
오해할 만한 말이었지만 준족은 원래 강패가 그런 성격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태연했다.
오히려 능글맞게 강패를 보면서 말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원래 능력 있는 남자는 겉모습이 어떻든 여자들이 달라붙기 마련입니다. 허허허.”
껄껄대면서 웃는 준족을 지그시 쳐다보던 민준이 말했다.
“어? 할아버님. 제가 할머님한테서 들은 이야기하고는 많이 다른…… 악!”
“손주야. 요즘 3처가 별로 바쁘지 않은 모양이구나?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리는 것을 보니까?”
“아, 아닙니다, 차장님! 그럼 전 이만 일하러…….”
후다닥!
넌지시 웃으며 말하는 준족의 말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민준은 재빨리 인사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사이좋은 손주와 할아버지를 강패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거참. 너를 하나도 안 닮았군, 손자가. 그리고 네 다리도 닮지 않은 것 같아.”
“후후후…… 저놈, 저래 봬도 머리 하나는 기똥차게 좋습니다. 형님이 깜짝 놀라실 정도로요.”
나지막하게 웃은 준족이 찻잔을 들어서는 한 모금 마실 때까지 둘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형님. 그럼 이제 뭘 하고 사실 생각이십니까?”
찻잔을 다시 내려놓은 준족은 진지한 눈빛으로 표정을 바꾸더니 강패에게 물었다.
강패는 무슨 소리냐는 듯, 준족을 쳐다봤다.
“그 옛날에는 나라를 독립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온 게 저희들입니다. 광복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고난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하고 살아가실 건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목소리는 청년의 그것처럼 크고 우렁차진 않았지만, 진지한 표정의 준족은 80년이란 연륜이 묻어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패는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푹신한 소파의 쿠션에 등을 깊숙이 묻으면서 말했다.
“글쎄다…….”
아무런 목적이 없었다.
그가 이루려던 독립은 이미 이루어진 지 오래였고, 지금도 대단히 잘 살고 있을뿐더러 굶어 죽는 사람도 없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강패가 살던 그 시기의 조선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고 활발해 보였다.
참으로 강패와 대한독립군들이 꿈꾸던, 그런 조선의 모습이 아니던가.
비록 이름은 바뀌었고 대한독립군이란 이름은 더 이상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이 바로 대한독립군이 바라던 조선의 모습이었다.
“무엇을 하면서 살까.”
무엇을 하면서 산다?
강패는 아직까지도 뚜렷한 목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길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나 하는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작게 보면 매일을 살아가는데 있어 목적은 언제나 있어왔다.
오늘은 이것을 먹겠다, 아니면 오늘은 건설현장에 나가 일을 하겠다, 아니면 오늘은 그 장부를 가지고 건달패들과 거래를 해서 돈을 얻겠다 등등.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있어 동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동기들을 가지고, 강패는 눈을 뜬 이후부터 지금껏 살아오고 있었다.
‘내 삶의 목적이라…….’
소망하던 독립이 실현됐으니, 그럼 그다음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지도 아주 오래된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강패가 인상을 썼고, 그 모습을 준족은 진지한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았다.
“조선을 강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강해졌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굶어 죽는 사람도 없어. 부모를 잃고 울다가 죽는 아이들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제 그런 아이들도 없어.”
나지막하게 자신이 바라던 것들을 중얼거리던 강패는 순간 머릿속을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럼, 나는?’
강패가 바라던 것은 언제나 강패가 보아 왔던, 그의 눈에 보아왔던 ‘다른 이’의 삶이었다.
그렇다면, 강패 본인의 삶은?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강패 본인의 삶은?
강패 스스로가 살아가면서 그 스스로를 위해 바랐던 일은 무엇이 있던가?
“나에게 없었던 가족이란 걸 이루고…… 사랑하는 여…….”
욱씬!
“크윽…….”
“혀……형님?”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야 아주 작은 끄트머리가 잡힌 기억을 끄집어내던 강패는 ‘사랑하는 여자’라는 것을 떠올리려고 하자 가슴을 단검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과 함께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사랑하는 여…….’
찌잉!
“크헉…….”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여자’란 것을 떠올려 보려 하자 이번에는 심장뿐만 아니라 관자놀이가 터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준족…… 준족!”
“네…… 네, 형님! 저 여기 있습니다!”
강패는 힘겹게 준족을 보면서 말했다.
“내가…… 내가 사랑한 여자가 있었던가?”
“……형님?”
“내가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어?”
갑자기 웬 여자 타령이란 말인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린 준족은 강패가 재차 다그치듯이 묻자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금세 생각난 듯, 강패를 쳐다봤다.
“네, 형님.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던 여성 분이 계셨는데…… 그것도 잊으신 겁니까?”
“크윽…….”
통증이 수십 초 동안 이어지더니 점점 고통이 잦아들었다.
“그래. 난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던 거야. 근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지?”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적어도 지금은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모르던 사실을 누가 머리를 열고 강제로 새겨 넣기라도 한 듯했다.
강패는 몇 분이 지나자 언제 그런 통증이 있었냐는 듯, 깨끗이 사라진 통증에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서는 소파에 제대로 앉았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준족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강패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스윽 들어 주고서는 준족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가족을 갖는 거였어. 맞아. 이제 기억난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자와 내 땅에서 가족을 갖기 위해 대한독립군에 지원한 거였어.”
부르르!
강패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하는 듯한 짜릿한 전율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그 말을 들은 준족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금세 그 표정을 지운 준족은 강패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국정원을 한번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
*
*
어느새 민준이 따라와서는 준족의 휠체어를 밀며 같이 걷기 시작했고, 강패는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온 민준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저 녀석. 지금 보니 네놈과 꽤 많이 닮았구나.”
“그렇죠, 형님? 하하하.”
기형적인 관계를 보이는 준족과 강패였지만, 그저 묵묵히 미소만을 띤 채 준족의 휠체어를 밀었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근데. 이 건물이 국정원 아니었나?”
국정원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나섰는데, 국정원의 문 밖으로 나가는 준족과 민준을 보면서 강패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그래도 명색이 한 나라의 정보기관입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조선이 아닙니다.”
준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패는 피식 웃어 보이고서는 민준과 준족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뭐야. 또 차를 타?”
“일단 타십시오, 형님.”
준족과 민준이 국정원 한 켠에 세워 둔 차로 가자 강패는 더욱더 의구심이 일었다.
준족은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 주려고 차까지 타고 간다는 거야?”
달칵.
차문의 손잡이를 당긴 순간 문이 열리는 느낌이 지금까지 강패가 타고 왔던 자동차란 것의 문과는 조금 달랐다.
“호오……!”
차문을 연 강패는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놀라워했다.
자동차 안엔 시트도, 운전대도,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바닥도 없었다.
대신 그 밑으로 계단이 나 있었다.
“바깥에서 보는 거랑 다른데?”
차 유리를 통했을 때는 분명 차 속의 광경이 보였다.
준족이 말했다.
“특수한 출력 필름입니다. 바깥에서 보면 그냥 보통 차같이 보이긴 합니다만…… 일단 국정원 안에 세워져 있는 차고, 게다가 제 차이니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허허.”
확실히 허를 찌르는 방법이었다.
차 안을 다 들어내서 지하로 가는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다니.
그것도 국정원 내부에 있는 건물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 주차장에 덩그러니 주차된 차를 통해 간다는 것 자체가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강패는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이렇게 감춰 놓아야 할 이유가 있나? 누구 눈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강패가 살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한 대한민국 세상이다.
강패가 보기에도 요원들의 질은 조선 때가 월등하긴 했지만, 수나, 장비의 질에 비교해서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국정원의 시설이 좋았다.
한데 이렇게 비밀스럽게 통로를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을까?
“이야기가 길지만…… 간단히 말하면 북한, 일본, 미국, 중국 모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라에 힘이 없으니까요.”
“힘이 없다고? 이 정도가 힘이 없단 말이야?”
강패는 화들짝 놀라면서 준족을 바라봤지만, 준족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아래로 내려가시지요, 형님. 형님이 모르시는 부분이 많겠군요. 제가 궁금한 부분도 많구요. 민준아.”
“예. 할아버님.”
준족의 눈짓을 받은 민준이 버튼을 누르자 계단이 스르르 움직이더니 워킹 벨트같이 평평하게 변했다.
준족은 두 팔로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워킹 벨트의 홈에 단단히 끼워 놓았다.
그 뒤를 강패가 따라 탔고, 마지막으로 민준이 탔다.
민준이 다른 버튼을 누르자 구멍이 뻥 뚫린 채 그 검은 속을 훤히 드러내며 검은 공동 주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아스팔트와 똑같은 색과 재질의 벽이 나타나 그들이 사라진 구멍을 막아 버렸다.
*
*
*
위이이잉…….
비행기의 모터에서 나오는 진동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비행기 주위로 비행기 정비공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었다.
그 어떠한 항공사임을 나타내는 표식도 써 있지 않은, 말 그대로 민짜 항공기였는데, 꼬리에 비행기 전체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크기로 WIM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이잉.
이동식 계단이 비행기의 문에 붙자 육중한 문이 스르륵 열렸다.
“…….”
안에서 내린 남자는 이제 30대 초반에서 중반이나 되었을 법한 남자였다.
상당히 긴 길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서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물의 갈기처럼 빳빳하게 곧추서 있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는 대단히 준수한 외모였지만 얼굴에는 일체의 표정도 드러나 있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말조차도 잘 붙이지 못할 듯했다.
게다가 한눈에 딱 봐도 입고 있는 옷이 터질 것처럼 탄탄한 근육까지 자리하고 있어 위압감이 더욱 심했다.
커다란 항공기를 혼자 타고 왔는지,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 중앙정보국 동북아시아 한국 지부 요원 크리스라고 합니다.”
아래쪽에서 기다리던 금발의 백인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계단에서 내려온 남자는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웬만한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큰 손으로 덥썩 붙잡았다.
“탐 러셀이오.”
“그, 그러십니까.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WIM에서도 특급이시라고…… 하하.”
크리스도 결코 작지 않은 체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의 앞에 서자 마치 어른 앞의 아이 같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움츠러들게 할 만큼 위압적인 덩치였다.
말을 더듬거린 크리스는 러셀의 손에 거의 덮이다시피 한 자신의 손을 빼내면서 애써 웃는 얼굴로 러셀을 차로 안내했다.
러셀과 크리스를 태운 차는 공항의 세관을 거치지도 않고 곧바로 빠져나갔다.
“이번에 임무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스터 러셀. 귀하의 위명을 익히 들어 왔습니다.”
러셀과 나란히 앉은 크리스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아부성이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러셀의 얼굴에선 부끄러운 기색이나, 좋아하는 기색도 전혀 없이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샤크투스 국방장관님께서 이번 일에 대단히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직접 WIM에 의뢰를 하실 정도라니. 세계 최고의 민간군사기업이 WIM이 아닙니까. 하하.”
전혀 대꾸조차도 하지 않은 러셀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과찬입니다.”
“과찬이라니요. 당연히 그럴 만도 하지요! 게다가 미스터 러셀하면 중동과 동유럽에서 익히 알아주는 ‘웨어울프’ 러셀 님이 아니십니까.”
크리스는 혼자 마구 떠들어 댔다.
“목표 대상은 찾으셨습니까?”
“예. 겨우 흔적을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땅덩어리는 텍사스보다도 작은데 워낙 치안과 타국에 대한 경계가 삼엄해서…… 겨우 찾아냈습니다.”
크리스의 감언이설을 더 이상 듣기 싫었던지 러셀이 불쑥 말했다.
크리스는 웃던 얼굴 표정을 약간 경직시킨 채 러셀에게 말했다.
“미국에서 한번 부딪치셨다고 하던데. 용케도 웨어울프에게서 살아남은 운 좋은 놈이겠군요. 하지만 그 운도 이제 끝이겠습니다. 이렇게 직접 오셨으니.”
“…….”
크리스가 옆에서 연신 떠드는 것이 들려왔지만 러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러셀, 아니 본래는 지카인이란 이름을 지닌 남자는 주위 풍경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려라. 이번에는 기필코 죽여 주마.’
*
*
*
위이이이잉!
“이야. 이거 무지막지하게 긴데?”
강패는 끝도 없이 내려가는 워킹 벨트 위에 서서는 신기한 듯 이제는 까마득한 점으로 보이는 입구를 쳐다보면서 준족에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국정원에서도 최고 등급의 기밀에 해당하는 곳이기 때문에 건설 당시부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사시에는 대통령 및 국가 원수들의 방호 시설로 써도 될 만큼 땅속 깊은데 건설하여 핵폭발에도 무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준족 대신 재빨리 민준이 대답하자 강패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이 정도 깊이면 그런 폭발은 터졌는지도 모르겠군.”
순간, 워킹 벨트가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철컥!
지하로 쭉 뻗어 있는 워킹 벨트는 그 속도가 그다지 느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십 분이 넘게 걸려서야 끝이 났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민준은 다시 준족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면서 강패에게 말했다.
강패는 민준의 뒤를 따라 좁은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참. 그리고 물어볼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네 형님.”
문득 소영이 생각난 강패가 준족과 민준에게 소영에 대해서 물었다.
준족과 민준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민준이 준족 대신 말했다.
“그 소영이란 요원도 이곳에 있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출범한 국정원 부서는 아닌데 지금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곳을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
“나한테?”
강패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님의 뜻이셨습니다.”
“형님. 일단 같이 가셔서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시면 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왜 그곳으로 데려가는지 도통 설명을 안 해 주니 답답한 강패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여든이 되어서는 다 죽어 가는 준족에게 화를 낼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은 강패였다.
“흠?”
준족이 탄 휠체어 하나가 지나가면 꽉 찰 정도로 좁던 통로는 계속해서 걸어가자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네 명이 나란히 지나가도 좋을 정도로 길이 넓어지자 처음으로 회반죽이 아닌 제대로 된 벽이 나왔다.
“잠깐.”
순간, 강패가 민준을 막아서는 듯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곧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허공에서 강패의 손에 멱살이 잡힌 사내가 끌려 나왔다.
“혀, 형님! 아닙니다! 우리 편입니다!”
“어? 이거. 귀신 새끼들 기술 아니야? 이렇게 숨어 다니는 거?”
육안으로 식별하기에는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은신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강패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귀신 새끼들, 일본 닌자들의 은신술뿐이었다.
그런데 같은 편이라니.
“커…… 커컥…….”
“일단 놔 주시지요, 형님. 그러다 애 하나 죽겠습니다.”
“아, 미안.”
“커흑…… 허윽…… 헉…….”
강패의 악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단순히 멱살을 잡았을 뿐이지만, 남자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는 컥컥거렸다.
강패가 숨통을 트여주자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일단 준족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타닥!
파바바바박!
준족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말 한마디 내뱉지 않고 다시 어둠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남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강패가 복도 여기저기를 누볐다.
강패가 다니는 곳마다 은신술을 쓰고 잠복한 자들이 있었다.
“이놈들이 다 우리 편이라고?”
“네 형님. 저희가 양성하는 인재들입니다.”
“뭐…… 뭐? 인재 양성? 저걸 왜 우리 나라 애들한테 가르쳐!”
“……일본 닌자들의 고유 기술이 아닙니다. 그림자 품 밟기도 응용시켰고, 여러 가지 기술들을 응용시켜 진일보한 것들입니다. 형님. 너무 그렇게 노여워 하지만 마시고, 일단 들어가서 마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나긴 통로가 끝나는 문이 저 앞에서 보이고 있었다.
그곳을 가리키며 말하는 준족의 진지한 표정에 강패는 화를 속으로 눌러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준족아.”
“예. 형님.”
“대한독립군의 긍지를 버리지 마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형님.”
강패의 시선을 회피한 준족은 민준을 툭툭 쳐서는 휠체어를 탄 채 강패를 지나쳐 먼저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강패도 준족의 뒤를 따라 복잡한 과정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흐음?”
안으로 들어선 순간, 강패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기가 좋군.”
바깥과도 다르고, 지상과도 달랐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지하로부터 족히 몇 십 미터는 내려온 것 같은 이곳에서 코끝을 간질이는 청량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울창한 숲 속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깨끗한 공기.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
문을 열자 펼쳐진 것은 마치 개미굴처럼 중앙에 나 있는 기다란 복도 주위로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방들이었다.
그 뒤로 또다시 거미줄처럼 이어진 통로들과 방들이 많았는데, 강패는 그보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우웅…….
“100명? 200명?”
기운을 끌어올려 감각 범위를 확장시켜 대충 가늠해 본 결과, 최소 200명이 이 깊은 지하 속에 있었다.
“호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각 방마다 테마가 다른 듯 모두 구슬땀을 흘리면서 몸을 놀리고 있었다.
그 몸놀림들은 강패에게는 상당히 익숙하면서도 다른 듯한 느낌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준족아. 저건……?”
“투로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음, 기억이 나다마다. 네놈이 저거 못 배워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크, 크흠…….”
손과 발을 허공에 대고 열심히 놀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강패가 피식 웃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준족은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 헛기침을 터뜨렸다.
“오! 저건…….”
“저것도!”
“이 안에서 별의별 것을 다 하는구나…….”
그 이후로도 강패의 감탄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대체 이 깊숙한 지하에 이 많은 인원이 들어갈 공간을 만든 것만 해도 놀랄 노자인데, 그 많은 인원들이 수련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만들다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 보였다.
단순히 몸을 이용해 연마하는 곳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는 암벽 등반을 하고 있기도 했고, 레펠 강하나 사격까지 이 모든 것을 지하에서 할 수 있게끔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들어간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어떻게 이런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강패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준족아. 대체 여긴…….”
강패가 놀란 눈으로 준족을 쳐다보며 말했고, 휠체어에 앉아 있던 준족은 고개를 들어 강패를 쳐다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대한독립군입니다. 형님.”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강패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