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우지끈! 우지직! 우지끈!
“꺄아악!”
“나, 나뭇가지가 부러진다!”
“피해!”
갑자기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사람들을 덮치자 동대문 시장 쪽으로 가는 길의 인도는 금세 혼란스러워졌다.
나무 한 그루뿐이 아니라, 누군가가 위에서 밟아 누르는 것처럼 연쇄적으로 나뭇가지들이 부러졌다.
다행히 크지 않고 자잘한 조각들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지라 파편에 맞아 다치는 사람은 없었다.
말로 표현 못할 기현상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나무 위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쇄적으로 나뭇가지들만 부러져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기현상은 곧 멈추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그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 갈 길을 다시 갈 뿐이었다.
“찾았다!”
타닥!
마지막으로 나뭇가지가 부러졌던 가로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의 그림자에 착지한 강패는 저 멀리 보이는 소영의 하얀 하이힐에 눈을 반짝 빛냈다.
“후우, 또 사람 많은 데로 가네.”
툭툭.
강패의 머리에는 나뭇잎들이 삐죽삐죽 박혀 있었고, 와이셔츠에도 나뭇잎 색깔의 녹색 물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구두에는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림자 품 밟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런 강패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 젠장. 여간 조심스러워야 말이지.”
성격 같았으면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할 강패가 아니었다.
하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뭔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있었다.
강패가 자유롭게 살아감에도 노숙자라며 흘끔거리거나, 식당에서 밥을 많이 먹는다고 쳐다보거나.
때문에 그들 앞에서 힘을 온전히 드러내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대충이나마 예상은 되었다.
“씁. 누군가 예전에 말을 해 준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과거에 누군가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도 않았고,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강패는 기억을 훌훌 털어냈다.
“졸지에 뛰었네. 젠장.”
지하철을 탄 소연을 쫓아 동대문까지 온 강패였다.
지하철은 인간의 몸으로 당연히 쫓을 수 없는 속도였지만, 그 잣대를 강패에게도 적용시킬 수는 없었다.
강패는 사람들에게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풍성한 가로수를 선택했다.
아스팔트를 통해 들려오는 미약한 소리만을 가지고 지하철을 추적해야만 했기에 가능한 지면에 바짝 붙어야 했다.
때문에 고층 빌딩이 아닌, 가로수를 택한 것이었고 나뭇가지를 박찰 때마다 그 나뭇가지는 부러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일반인들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까지 고려하여 아예 나뭇가지를 산산조각 낸 강패였다.
“에이. 저놈 눈치챘잖아? 그렇게 대놓고 따라가니까 다 눈치채지!”
강패가 핀잔을 주었지만 그 소리가 소영에게 들릴 리 없었다.
“유인이라…….”
중년 남자가 소영의 미행을 감지한 이후, 중년 남자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변했다.
흡사 그녀를 어디론가 유인하는 듯했다.
강패의 눈에는 그것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잠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으음…….”
자기 입장에선 그냥 하이힐의 여자를 붙잡고 필요한 것만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저 덜 떨어지고 미행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는 중년 남자가 알아챘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채 쫄래쫄래 그 뒤를 좋다고 따라갔다.
어느덧 중년 남자로부터는 묘한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귀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팍팍 들었다.
“알아볼 게 있으니, 물어보는 값이라고 치지, 뭐.”
정보료 대신이라고 강패는 대충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좀 비싼 몸인데 말이야. 수지가 영 안 맞아. 쯧.”
실제로 1940년대 당시 강패의 몸값은 무지막지했다.
워낙에 대재앙이다 뭐다 소문이 파다해서 그가 활동하던 만주를 거점으로, 중국이나 상해에 머물고 있는 서양 열강에서도 가끔 러브콜이 오고는 했다.
평생 써도 쓰지 못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돈과 함께.
“근데 내가 왜 그때 그걸 거절했지?”
조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강패는 애국심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이익을 저버릴 정도의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다.
“에이. 쟤 너무 급하잖아?”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중년 남자의 살기가 한층 더 뚜렷해졌다.
그는 소영을 보란 듯이 유인했다.
소영은 멍청하게도 아직도 유인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강패는 일단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왜 저 여자만 보면 움츠러드는지도 겸사겸사 알아봐야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강패가 중년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훑어보더니, 바로 옆에 나 있는 골목으로 스며 들어갔다.
*
*
*
“수상해 보이는 건물이네.”
중년 남자는 동대문 시장에서도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서더니 아주 낡아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를 쫓아 이곳까지 닿은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해요, 팀장님. 들어갑니까?”
-들어가야지, 인마!
“알겠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물어본 거. 안 물어보고 들어가면 또 뭐라고 혼낼 거면서.”
금방이라도 시멘트가 삭아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이 낡은 건물이었다.
소영이 혀를 쯧쯧 찼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진짜 간첩 아니야? 여기서 접선이라도 하는 건가?”
-정 걱정 되면 현장팀이랑 같이 들어가던가.
프라이드가 꽤 강했던 소영은 그 말에 바로 발끈했다.
“팀장님이야말로 괜한 놈 잡아서 어디 하나 부러뜨렸다고 나중에 혼내지나 마세요! 현장팀 오기 전에 제가 먼저 정리합니다!”
-그러던지.
팀장이 퉁명스럽게 자기 할 말만 하고서는 통신을 끊어 버렸다.
“우우, 팀장이 아니라 쫌생이야 쫌생이.”
소영은 작게 이를 갈아붙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낡디낡은 건물을 쳐다봤다.
“탈출로가 마땅치가 않은데…….”
건물이 낡았기 때문인지, 겉에서 보는 것으로는 내부 구조가 정확하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상황해 대비한 탈출 동선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무슨 일 있겠어?”
소영은 국정원의 정보력을 믿었고,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제아무리 간첩이 무섭다, 무섭다 한다지만 소영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간첩 하나 정도는 별 무리 없이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넘쳤다.
소영은 스커트의 지퍼를 살며시 끌어 올렸다.
그러자 하얀 허벅지에 매어 두었던 검정색 권총이 드러났다.
철컥.
“자, 가 볼까?”
스커트를 좀 더 끌어올리고 지퍼를 끌러 다리를 자유롭게 만든 소영이 천천히 건물 입구로 다가갔다.
*
*
*
잘근잘근.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팀장을 보면서 옆에 있던 부하 요원이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지금이라도 소영이한테 제대로 말해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괜히 일이 잘못돼서 소영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건 안 돼, 이 자식아!”
“왜, 왜요?”
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팍을 때리고 소영의 옷에 부착된 소형카메라가 출력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녀석 성격 몰라? 저 녀석, 저 여리여리한 몸으로 무관이 놈을 꺾었어. 여자라고 무시받기 싫어서 그 정도로 무술을 연마할 정도로 독한 놈이야. 그런데 간첩이 위험하니 들어가지 마라,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 같냐?”
팀장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부하 요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 같으면 정말 안 들어가고 기다릴 것 같은데…….”
“그게 대부분의 요원들이 하는 행동이겠지. 근데 저 녀석은 더 발끈하지. 그래서 오기를 부려. 자신이 여자라서 말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에? 그건 요원으로서 실격 아닙니까?”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
팀장은 그것을 가장 걱정하는 것이었다.
부하 요원이 그제야 눈을 휘둥그레 뜨자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정원이라는게 무조건 팀플레이로 돌아가는 곳이란 걸 아직 가슴속으로 못 받아들이는 거야. 머리로는 그렇게 가르쳤으니 알고 있는데, 이 마음이란 놈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그래도 버리긴 너무 능력이 아까워.”
“그, 근데 저 중요한 곳에 저 녀석을 혼자 집어넣어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현장 요원들이 급파되었다. 저 녀석 정도면 현장 요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간첩 놈에게 그 정보를 빼돌릴 틈을 줘서는 안 되니 어차피 가장 근처에 있던 소영이가 가는 수밖에 없어. 젠장.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래도 너무 위험…….”
“그래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거다. 그러면 적어도 오기에 가득 차서 무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소영이는 간첩 놈만 적당히 방해하면 되는 거야.”
“끄응…….”
팀장은 소영의 옷에 부착된 소형 카메라로 출력되는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
*
저벅, 저벅.
스윽.
낡은 건물 안은 사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이미 건물 자체가 너무 낡았고, 위치도 큰 거리로부터 떨어진 후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인적도 드물었다.
몇 개 남아 있을 줄 알았던 가게에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때문에 조그만 소리도 멀리까지 퍼질 터였는데, 신기하게도 소영은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하이힐의 굽에 고무로 된 커버를 씌운 후였기 때문이다.
소영은 사위를 경계하며 신중하게 천천히 한걸음씩을 옮겼다.
‘계단은 막혀 있다. 그럼 이 일 층에 있다는 소리인데…….’
인적도 드문 곳에 위치한 폐건물.
만약 목표 대상이 누군가와 접선하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선택했다면 이만큼이나 좋은 곳도 없었다.
‘반대로 날 노리기에도 가장 좋은 공간이다.’
소영의 눈이 날카롭게 사방을 훑었다.
소영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아주 조심스럽게 내딛으면서 몸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오더라도 반응할 수 있어야만 했다.
‘사람!’
스슥!
순간,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소영의 눈에 건물 밖으로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소영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사람임을 깨닫고는 낡은 화장실 쪽으로 몸을 숨겼다.
뚜벅, 뚜벅.
방금 전에 소영이 들어온 입구를 통해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루한 차림의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그는 주위를 초조하게 둘러보았다.
소영은 본능적으로 그 남자가 자신이 쫓던 중년 남자와 접선하기 위해 온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놈은 어디 있지?’
여전히 중년 남자가 보이질 않았다.
그놈이 보이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소영이 숨을 죽이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움직이지 말라우.”
턱!
그 순간, 화장실 속에서 투박한 손이 튀어나왔다.
소영의 뒤에서 나타난 그가 날카로운 군용 단검을 그녀의 목덜미에 들이밀었다.
소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듯했다.
설마 놈이 화장실 안에 있을 줄이야.
소영은 크게 놀랐지만 냉정하려 노력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꼿꼿이 세웠다.
“이 에미나이, 아까부터 날 따라오더만. 누가 보냈나.”
“…….”
-제기랄! 소영아, 시간 벌어! 시간을 반드시 벌어! 현장 요원이 투입되고 있다!
인이어를 통해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소영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호래. 이건 뭐래?”
인이어에서 나오는 소리를 중년 남자, 아니 북한 간첩이 들었는지 그가 소영의 귀에 박혀 있던 인이어를 뽑아 버렸다.
와작!
그러고는 단번에 부숴 버렸다.
“이 요망한 년이 실력 한번 대단하구만. 바로 여기 앞까지 눈치도 못 챘더랬어.”
방금 들어선 간첩도 소영의 존재를 알지 못한 듯했다.
“이 간나 새끼. 내 조심하라지 않았나? 큰일 날 뻔했어.”
“소좌 동지. 죄송합네다. 이 에미나이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
“어서 그어 버리고 이곳을 떠나야 해! 이제 남조선 간나 새끼들이 몰려올 거라우!”
“그, 그냥 죽입네까?”
“그럼 너이, 남조선 간나 새끼들한테 잡혀서 반동분자라도 될 거라네?”
“아, 아닙니다 동지!”
비슷한 나이의 두 사람으로 보였지만, 이 건물에 늦게 들어온 남자의 계급이 훨씬 높은 것 같았다.
그냥 죽이라는 말에 반박하려던 중년 남자는 찔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에미나이, 보나마다 국정원 그 간나 새끼들일 거라네. 김 동지가 자료를 빼돌렸다는 것이 들켰소.”
“국정원 말입네까?”
국정원이라는 말에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던 중년 남자의 기세가 갑자기 변했다.
“그래! 그 국정원 간나 새끼들 말이네! 그 종간나 새끼들한테 뒈진 동지들이 몇 명인지 잘 알간? 빨리 빨리 해치우고 어서 가야!”
“알갔습네다. 소좌 동지.”
국정원이라는 말에 일말의 인정마저도 사라져 버린 듯 중년 남자의 대답이 단호했다.
“자, 잠깐!”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던 소영은 자신의 목을 죄고 있던 중년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다급히 소리쳤다.
“너희들 뭐야. 간첩이야?”
소영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고, 틈을 만들어야만 했다.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이 에미나이, 뭐라는 거네? 어디서 어쭙잖은 수로 시간을 벌라고 하구 있어야?”
하지만 아직 신입 요원에 불과한 소영이 애초에 그런 방법에 통달하고 있을 리 없었다.
간첩이 단박에 소영의 심중을 알아채고 보챘다.
“빨리 그으라우! 이러다 정말 큰일나겠어!”
단검을 쥔 간첩이 목을 긋기 위해 팔을 당겨 소영의 목을 들어 올렸다.
순간, 소영은 이 층 창문에서 희안한 것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머리였다.
워낙 당황한 터라, 어떻게 이 층 높이의 창문 밖에서 사람 머리가 보이는지는 의아하지도 않았다.
그저…….
‘저 사람이 소리라도 지르면 틈이 날 텐데!’
천운이라도 좋으니, 간곡한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도와줘! 도와줘!’
소영이 간절히 눈으로 말했지만 창 바깥의 남자는 야속하게도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이었다.
‘도와줘! 난 여기서 죽기 싫다고! 아직 죽기 싫어!’
속으로 애타게 불렀지만 그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사악!
주르륵.
결국 대검이 소영의 목덜미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소영은 1초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순간, 창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얼굴이 악귀처럼 흉물스럽게 일그러졌다.
“후읍…… 후으읍!”
콰아앙!
우지직!
“크아악!”
소영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천장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중년 남자 간첩은 자신의 얼굴을 해머로 사정없이 두드려 맞는 느낌과 함께 안면이 함몰되어서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털썩!
채앵!
“아…… 아아…….”
소영은 자신의 목에 닿아 있던 단검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왈칵 치솟았고 입에선 신음 소리 비슷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정신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와락!
“허억…… 허억…….”
그때 그녀의 멱살을 쥐는 손길이 있었다.
강패였다.
“너…… 너…… 대체 뭐야?”
항상 심드렁하거나, 여유로웠던 강패의 얼굴은 무슨 영문인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중년 남자를 쓰러트린 건 바로 강패였다.
한데 구해 준 건 둘째치고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또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아…… 아아…….”
하지만 소영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장 죽음의 위기를 겪었던 그녀가 아닌가.
“으…… 크으윽…….”
털썩.
강패는 갑자기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통증에 소영의 멱살을 쥔 손을 자신도 모르게 놓고 말았다.
“이 간내 새끼래!”
퍼억!
“죽으라우! 죽으라우!”
퍼억! 퍼벅!
순간, 고통스러워하는 강패의 뒤통수로 쇠파이프가 떨어졌다.
추레한 몰골의 간첩이 건물 잔해 중에 있던 쇠파이프로 강패를 후려친 것이었다.
퍽! 퍼억!
그는 사정없이 연방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마치 때려죽일 듯한 기세였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왜, 왜 안 쓰러지는 거야! 이 간나 새끼래!”
벌써 스무 대 가까이 내려치고 있었는데 강패는 쓰러지기는커녕 몸도 흔들리지 않았다.
“우…… 우아아아악!”
퍼벅! 파악!
간첩이 괴성을 지르면서 더욱 거칠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거친 소리가 실내에 메아리쳤지만, 강패는 동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간첩은 강패가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우아악!”
지금껏 간첩을 등지고 있던 강패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흰자위가 다 드러날 정도로 부릅뜬 강패의 눈을 본 간첩이 기겁하면서 그대로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깡!
직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쇠파이프가 강패의 이마에 정확히 적중했다.
한데…… 강패의 머리가 깨지기는커녕 쇠파이프가 기역자로 휘어 버렸던 것이다.
강패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
“…….”
“덕분에 머리 아픈 게 조금 나아졌다. 이 새끼야!”
퍼어억!
“꾸웨에엑!”
강패의 돌주먹이 경악으로 물든 간첩의 배에 틀어박혔다.
털썩!
단 한 방에, 간첩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는 기절해 버렸다.
“허억……. 허억……. 허억…….”
간첩 둘을 모두 처리한 강패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지하철을 따라 가로수를 박찰 때도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건만, 지금의 상황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대체 너…… 넌 뭐지?”
콰장창!
그때, 건물의 창문들이 깨어지며 실내로 길쭉한 폭탄들이 떨어졌다.
폭탄들은 바로 터지지 않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최루탄이었던 것이다.
“콜록, 콜록…… 콜록, 콜록…….”
“케헥…… 콜록 콜록…… 케헥…….”
소영은 물론 강패도 심하게 기침을 토해 냈다.
강패는 일그러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 무슨 이딴 걸 터뜨려?”
강패가 기침을 하며 소영에게 으르렁거렸다.
“너한테 물어볼 게 많으니까 정신 빨리 차려야 할 거야. 알았어?”
“콜록…… 콜록 콜록…….”
강패가 콧물, 눈물을 흘리며 기침까지 해 대는 소영을 어깨에 들쳐 업었다.
가슴을 통해 그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이것들은 아주 그냥 맨날 일이 끝난 다음에 와요! 아우!”
쾅!
강패가 벽을 걷어찼다. 그러자 건물 벽이 마치 수수깡처럼 발길질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처적! 처저적!
“꼼짝 마!”
“2조, 3조 진입! 잔당을 체포한다!”
벽을 부수고 나온 강패는 부채꼴로 펼쳐진 총구들을 보고서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강패가 나온 구멍을 통해 경찰 특공대가 안으로 진입했다.
“인질을 풀어 주고 투항하라!”
강패는 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찍어 누르며 말했다.
“의무병, 어디 있어.”
“인질을 풀어 주고 투항하라!”
어깨에 들쳐 메고 있는 소영이 인질로 보였든, 자신이 간첩으로 보였든 상관없었다.
경찰이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자 끝내 강패의 뚜껑이 열렸다.
“의원이고 의무병이고 이딴 새끼들 불러오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후웅!
순간, 강패 뒤편의 건물에서 자욱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쩌적, 쩌저저적.
그리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건물의 금이 더욱 크게 갈라졌다.
분노에 휩싸인 강패는 그에 그치지 않고 땅을 찍었다.
쿠궁!
“병원을 통째로 뜯어 오기라도 하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강패 주변의 땅거죽이 뒤집히며 시멘트들이 흉한 속살을 드러냈다.
*
*
*
-금일 오후 13시경 동대문 시장에서 벌어진 폭파 사건의 주범인 신원 미상의 남자가 체포되었습니다. 경찰 측에서는……
TV에서는 동대문 사건의 전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갑을 찬 허름한 몰골의 남자와 그를 보호 호송하는 강력반 형사들.
한데 묘하게도, 폭파 사건의 범인은 당당했다.
허리는 꼿꼿하고 턱은 오만하게 치켜든 것이, 도무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느긋한 모습이었다.
“찾았다.”
반짝이는 눈으로 동대문 폭파 사건의 범인, 강패를 보던 정체불명의 남자는 아나운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TV를 꺼 버렸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방 안을 맴돌았다.
방은 호화롭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곳곳에는 진귀해 보이는 그림들과 골동품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고, 가구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방 한 쪽은 완전히 통유리였는데 굉장히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인 듯, 그 밖으로 주위의 뾰족하게 솟은 건물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창가로 다가간 남자는 커튼을 열었다.
“웰컴 투 코리아. 친구. 큭큭.”
하얗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밝은 백금발을 늘어뜨린 남자는 발아래 펼쳐진 수많은 고층 빌딩들을 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저 멀리 보이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지그시 쳐다보던 남자는 품에서 떨리는 진동을 느끼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저희 측에서도 사람을 보낼 겁니다. 그러니 그 때까지만 수고하시지요.”
수화기를 통해 상대방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전까지는 계속해서 녀석에 대한 특징을 캐내셔야 합니다. 같이 붙어 다니세요, 무조건.”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말에 그는 비릿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건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럼.”
쩔쩔 매는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를 냉정하게 무시하고 끊어 버린 남자는 꽤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머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다시 한 번 바라본 남자는 몸을 돌려 거대한 테이블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놈을 찾았습니다. 한국에 있더군요. 빨리 요원들을 보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아닙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언제든지 다시 연락 주십시오. 그럼…….”
방금 전에 핸드폰을 받은 것과는 달리 상당히 정중한 자세였다.
그의 눈에 방의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장식품이 들어왔다.
손안에 지구가 담긴, 남자가 속한 단체의 문양이 커다랗게 박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짤막하게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W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