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12/30)

2장

“으하아아아암…….”

쩌억!

강패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펴자 밤새 굳었던 몸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후, 어제 너무 격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몸이 땅기네.”

말아 쥔 주먹으로 어깨와 무릎을 몇 번 두드린 강패가 자신의 옆에 누워 늘어지게 자고 있는 김 씨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아저씨도 게을러서는…….”

해가 중천에 뜬 지금까지 잔 강패도 게으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강패대자로 누워 자는 김 씨를 발로 툭툭 찼다.

“으…… 으음…….”

평소에 언제나 근면성실했던 김 씨였지만, 어제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내고, 돈까지 두둑하게 생겨서 긴장감이 풀어진 모양인지 도통 일어나질 못했다.

“에휴. 더 자쇼. 난 나가서 밥이나 먹어야겠네.”

2억원이란 거금을 챙긴 강패였지만, 여전히 그의 차림새는 구멍이 숭숭 뚫린 와이셔츠와 다 헤진 양복바지였고, 자는 곳 역시 지하보도 그대로였다.

“여기가 편하긴 편해. 쩝.”

모든 것이 낯선 서울에서 처음으로 등을 붙이고 잤던 곳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여기서 묵던 며칠 사이에 익숙해진 것인지 강패는 지하보도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 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이곳에서 살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자아, 오늘은…… 김밥? 떡볶이? 라면? 뭘 먹을까나.”

서울에 온 뒤 강패가 엄청난 속도로 습득한 지식과 정보는 단연 음식 이름이었다.

강패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먹거리 중 무엇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지하보도를 벗어났다.

번쩍.

“가, 갔나?”

강패가 사라지자 가만히 누워 자던 김 씨가 번쩍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눈만 굴려 혹시라도 강패가 다시 내려올까 주위를 살펴보던 김 씨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벌떡 일어났다.

“또 어디를 싸돌아 댕기는 거냐…… 후우…….”

김 씨가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강패가 사라진 방향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저, 저 사람 좀 봐…….”

“한 열흘은 굶었나? 엄청 잘 먹네. 근데 돈은 있어서 저렇게 먹는 거겠지?”

고민고민하다 오늘 메뉴는 분식으로 정한 강패는 분식집에 들어섰다.

그리고 음식이 나온 지 불과 오 분도 안 되어 분식집 안의 모든 시선을 끌어 모았다.

분식집은 점심을 간단하게 분식으로 먹으려던 회사원들로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그들은 식사를 하러 왔다가 강패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참치 김밥 한 줄 더!”

강패가 불과 30여 초 만에 김밥 한 줄을 비우고 손을 번쩍 들었다.

“오오! 또 먹는다!”

“대박!”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강패는 여전히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손가락으로 단무지를 집어먹으며 김밥을 바쁘게 마는 아줌마의 손길을 쳐다봤다.

“어휴 총각.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야? 벌써 열 줄이 넘었어!”

들어온 지 채 십여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김밥을 열 줄이나 먹어 치운 것이다.

어마어마한 식성에 분식집 아줌마는 강패가 거지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상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도, 돈은 있는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밥을 가져다준 아줌마가 강패에게 물었다.

강패는 아줌마가 김밥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김밥을 먹어 치우다 말고 아줌마를 빤히 쳐다봤다.

“아, 아니. 요즘 먹고 돈 안 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 총각이 돈이 없다는 게 아니라…….”

봉두난발에 파르스름하게 수염까지 난데다가 한겨울에 구멍이 뚫린 옷을 입고 다니는 강패였다.

그러니 분식집 아줌마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턱.

“됐수?”

허겁지겁 변명을 하는 아줌마를 쳐다보던 강패가 주머니를 뒤져 오만 원 권을 내밀었다.

“어머, 어머. 알았어, 총각. 많이 먹어. 더 시킬 것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혹시 무전취식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아줌마가 돈을 받자 강패를 손님 대우해 주었다.

돈을 보자 표정이 확 바뀌는 아줌마를 보며 강패가 김밥을 하나 더 우물거렸다.

“돈을 주니깐 태도가 확 바뀌네.”

이제 이 돈이란 녀석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익히 알게 된 강패였다.

예전엔 억울하기라도 했는데,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김밥을 더 집어넣으면서 통유리로 된 바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하아, 바쁘구나 바뻐. 바쁜 동네야 정말.”

점심시간이 되자 고층 빌딩에서 새까맣게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비교적 한산했던 인도는 인파들로 인해 금세 북적였다.

“아우, 그나저나 정말 무슨 걸신이라도 들렸나? 내가 원래 이렇게 많이 먹었나?”

강패는 다시 김밥을 입에 넣으면서 이상하다는 듯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사실 자기 몸 상태는 강패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먹는 양이 늘어났을 뿐, 이상한 곳은 전혀 없었다.

이전에도 엄청난 운동량으로 인해 식성이 대단하긴 했다.

한데 65년 동안 대체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식성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지 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합리화한 강패가 행복한 표정으로 남은 김밥을 입에 쓸어 넣었다.

“아줌마 여기 더…… 엇?”

손을 번쩍 들고 김밥을 더 주문하려던 강패는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밥풀을 혀로 낼름 주워 담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또 그 여자네?”

지난 며칠 동안 강패가 이렇게 바깥에 나와서 밥을 먹을 때쯤이면, 매일 한 번도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던 익숙한 여자였다.

강패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해 빠졌다.

“죽여주는 각선미의 하얀 하이힐이라……. 틀림없는데.”

맨 처음 서울을 쏘다니고 있을 때 강패에게 500원을 적선했던 그 여자.

게다가 열이 받아서 뒤쫓으려 했는데, 보기 좋게 사라져 버려서 강패를 물 먹인 그 여자.

그녀가 저 멀리 서 있자 강패는 흥미가 일었다.

“대체 왜 매일 저기서 서성거리는 거지?”

강패가 밥 먹는 시간, 그러니까 그것이 아침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간에 상관없이 그녀는 이 근처에서 맴돌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도 했지만, 항상 같은 주변을 맴도는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도 싶었다.

주위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반면 저 여자는 그냥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강패가 한번 신경을 쓰고 쳐다보기 시작하니, 그렇게 이상해 보이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감시? 뭐, 그런 건가?”

이 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저런 식으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라면 강패가 생각하기에는 감시나 미행, 둘 중에 하나였다.

“감시, 미행이라…… 그것도 여자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던 강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그녀를 쫓아갈 듯 했던 강패는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계산대 앞에서 말했다.

“여기, 김밥 다섯 줄만 포장해 주세요.”

“흐음…….”

강패는 한 손에 김밥 봉지를 들고 인파 속에 자연스레 섞여서는 하얀 하이힐을 신은 소영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대체 누굴 저렇게 보는 거야?”

가까이 다가갈수록 눈에 띄게 보이는 소영의 이상 행동에 강패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강패는 서울에 도착한 후, 지금까지 항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데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걸어가는데도 강패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좋아. 아직 죽지 않았어.”

소영의 행동에 흥미가 인 강패가 대한독립군일 때 임무 수행을 위해 자주 썼던 잔재주를 부린 것이었다.

“군인들도 속였는데 이쯤이야…….”

강패는 이것을 잔재주라고 생각했지만 대한독립군 내부에서도 정보와 잠입을 위주로 하는 대원들에게는 필수로 익히는 기술이 바로 이것이었다.

전심전력으로 연마를 하지 않고 수박 겉핥듯 배워서 그 완성도를 모를 뿐이었다.

“그림자 품 밟기라고 했지 아마?”

택견에서 기술이 들어가기 전에 기본자세를 취하는 것이 품 밟기라고 알려져 있었다.

강패가 지금 쓰고 있는 이것은 그 기술을 약간 변형하여, 기척을 죽이고 사람을 미행하거나 잠입할 때 쓰는 용도로 개발된 기술이었다.

사람과 사람, 혹은 사물들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사람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사각을 이용해 움직였다.

숙달되면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 바로 앞을 지나가도 그것이 사람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되네.”

강패는 누군가를 몰래 따라가서 무언가를 알아낸다기보다는 상대방이 ‘아차’하는 사이 낚아채서 고문을 통해 정보를 모으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이 기술도 그냥 설렁설렁 배웠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휙!

“응?”

순간, 소영이 정확히 강패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누군가를 찾는 시늉을 했다.

강패는 당황했다.

“뭐, 뭐야. 알아챈 건가?”

지금껏 쭉 보던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그 말인즉 이렇게 몰래 접근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알아챈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강패가 당황한 이유였다.

찰나 소영의 눈과 강패의 눈이 마주쳤다.

“당신!”

“이런 젠장!”

강패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방향을 틀어 인파들 속으로 사라졌다.

강패의 그림자 품 밟기가 들킨 이유는 간단했다.

“뭐야 저거?”

“어…… 어? 티…… 팀장님!”

원래의 임무로 복귀한 소영의 팀원은 주변에 설치된 무인카메라와 CCTV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영을 향해 은밀히 다가가던 강패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 이놈. 그때 현장에서 봤던 그놈 아닙니까?”

“뭐? 어디 봐 봐.”

팀장은 그 날 이후 ‘그놈’이란 말만 들어도 머릿속에 떠오르던 인물이 있었다.

혼자서 요원 셋을 순식간에 쓰러트리고 빠져나간 노숙자 놈.

강패가 나타났다는 소리에 팀장이 재빨리 모니터 앞으로 다가왔다.

“대체 저놈 정체가 뭐야?”

명령에 따라 국정원의 정보망을 가동해 강패의 뒷조사를 모조리 한 팀장이었지만, 그가 받은 보고서엔 어느 경로로 보더라도 강패를 조폭의 일원으로 절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제아무리 신분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랄지라도 대한민국의 행정망은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아주 작은 과거 기록이라도 남게 마련인데, 강패의 기록은 깨끗하다기보다는 너무나도 평범했다.

그렇다고 평범한 놈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순식간에 요원 셋을 쓰러트린 실력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얼레? 쟨 또 저걸 왜 못 봐?”

소영이 처음부터 강패를 알아보지 못한 건, 사람의 눈과 인지 감각을 속일 수 있는 그림자 품 밟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패는 몰랐다.

바로 카메라라는 과학 기술의 존재였다.

그림자 품 밟기는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기술이지, 카메라를 현혹(?)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강패의 그림자 품 밟기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 자식 뭐하는 거야? 야, 마이크 내놔!”

모니터에서 뻔히 보이는 강패가 소영에게로 가고 있었는데도 소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답답해진 팀장이 마이크를 빼앗아 들었다.

“강소영! 이 멍청한 놈아! 뭐하고 있는 거야! 주위 똑바로 살피지 못해?”

-네…… 넷?

“정신을 어디에 팔아먹고 있는 거야! 키 큰 놈이 껑충거리는 거 안 보여?”

-키 큰 사람이 껑충거려요? 잘……. 아, 당신!

“아이고 두야……. 얜 싸움만 잘하지 대체 잘하는 게 뭐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영이 뒤늦게 강패를 발견하자 마이크를 꺼 버린 팀장이 골이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저놈, 노숙자라고 했지?”

“예, 팀장님. 우체국 앞 지하보도에서 다른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파업 중인 건설현장에 나가서 일을 했는데 기가 막히게 일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인부들에 비해서 돈도 더 많이 받고, 그래서 그런지 돈을 쓰는 것이 일반 노숙자들 하고는 조금 달랐습니다.”

“나도 보고서 봐서 다 안다. 왜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쓴 거야, 대체?”

팀장은 강패의 최근 일주일간의 행적을 시간 별로 나누어 보고서로 만들어 보내 준 본부의 세세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거 말고, 더 옛날 건 없어? 무술을 어디서 배웠다든가, 아니면 예전에 한 주먹 날리는 놈이었는데 은퇴를 했다든가.”

당연히 그런 정보가 있을 리 없다.

고도로 훈련받은 국정원 요원 세 명을 인사불성으로 만든 그 실력을 가지게 된 계기가 보고서에는 누락돼 있던 것이다.

“국정원에서도 그 이전의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가져다 드린 기록이 전부라고…….”

“이런 씨…… 쓸데없는 정보만 가져다주고, 뭐 그게 다야? 이놈의 펜대 굴리는 놈들은 그냥……! 야, 저 남자에 대한 감시 늦추지 말고 지속적으로 해.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바로 보고하고.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아, 쟨 뭐하냐. 그걸 또 놓쳐? 제자리 복귀하라고 그래!”

모니터를 통해 사람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강패를 찾는 소영의 모습에 팀장이 짜증을 내면서 버럭 소리쳤다.

*

*

*

“들키다니……. 내가 들키다니…….”

강패의 충격은 컸다.

그 충격이 얼마나 큰지 먹으려고 포장한 김밥을 여전히 들고 다닐 정도였다.

“여자한테…… 그것도 실력도 하잘것없는 애한테 들켰어…….”

사실 소영에게 들킨 게 아니라 카메라에 의해서 발견되었지만, 강패는 그 사실을 몰랐다.

때문에 강패로선 그림자 품 밟기 소영에게 들켰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강패는 고민을 했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심지어 정예군보다도 약한 여자였는데. 어떻게 알아챈 거지?”

소연의 기준을 일제강점기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는 강패였다.

사실 강패가 쓰는 그림자 품 밟기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군인 정도면 눈치챘었다.

때문에 강패는 누군가를 은밀하게 미행하거나 하는 등의 임무에선 항상 제외되었다.

강패가 판단하기에 소영은 아무리 높게 실력을 쳐주어도 절대 그 수준까지는 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였는지, 죽이지 않았는지.

자신이 죽을 뻔한 적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배운 게 비슷하고, 수련 시간이 비슷하고, 재능이 비슷하다 할지라도 정신력의 차이에 따라 의외의 결과가 생겨났다.

정신력이라는 것은 항상 절정의 상황에서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한데 소영에게선 그런 정신력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근처에 내 기척을 읽은 자가 있었나?”

강패의 기척을 읽을 정도의 사람이 자신의 접근을 소영에게 알려 줬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가 있었다면 강패가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뛰어난 기감으로 일본 닌자들의 기척도 귀신처럼 알아챘던 강패였다.

실력을 숨기고 일반인처럼 위장하고 있다 해도 고도로 훈련받은 사람은 그 특성이 무의식적으로 배어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렇듯 수많은 일반인들 사이에선 그런 점이 유독 더 튀기 마련이었다.

사선을 겪어 본 이들만이 가지는 위화감.

강패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말도 안 돼.”

강패가 그런 실력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라면, 그가 완벽하리만치 기운을 숨길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 강패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강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이 평화로운 시대에 자신보다 강한 사람은 없다고 강패는 생각했다.

“아냐 아냐. 혹시 모르지. 65년이란 세월 동안 안 죽고 살아남은 놈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생각을 이을수록 강패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나만 65년 동안 살아 있으리란 법 없지. 특능 부대 애들 중에도 살아남은 애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 사람들 중에선 살아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거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강패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그건 그렇고 진짜 그 여자애가 어떻게 날 알아챘을까. 오랜만에 그림자 품 밟기를 해서 어딘가 틀렸나? 아마 그렇겠지?”

원래 깊이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강패다.

그래서 그냥 대충 합리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래. 뭐가 잘못된 걸 거야. 그 여자애가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어. 내일 다시 한다.”

강패의 눈이 의지로 불타올랐다.

“근데 내가 도망은 왜 쳤지?”

의지로 불타오른 것도 잠시, 강패는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그림자 품 밟기가 들켰다고 도망쳐 버린 것의 이유 때문에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처음 보는 앤데…… 내가 왜 도망갔지?”

*

*

*

강패를 따라 지하보도를 나섰던 김 씨는 다시 지하보도로 들어와 있었다.

김 씨는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는 게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없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흡.”

주변에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김 씨가 손이 더러워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지하보도 구석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리고 보도블록 사이에 나 있는 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힘을 주자 돌이 천천히 들렸다.

“끄랏차!”

들썩이던 돌이 부드럽게 빠지면서 그 사이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엔 불빛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김 씨는 촉감에 의지해 그 구멍에 손을 넣고서는 더듬거렸다.

“흐음…… 흐음…….”

잠시 후, 김 씨는 낡은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거의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종이 쪼가리를 펼쳐서 뭔가를 열심히 읽더니 자신의 품에서 그것과 비슷하게 생긴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는 그 종이를 구멍에 집어넣고는 보도블록을 다시 덮었다.

보도블록은 빼낼 때와는 달리 상당히 쉽게 제자리로 들어갔다.

우걱우걱, 꿀꺽.

김 씨는 자신의 손에 들린 낡은 종이 쪼가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구겨서는 입으로 우겨 넣었다.

질긴 듯 인상을 찌푸린 채 계속해서 씹던 김 씨가 간신히 목 뒤로 삼키고서는 두 눈을 감고 지하보도 벽에 걸터앉았다.

우우웅…….

순간, 김 씨의 몸 주위로 무언가가 공명하는 듯한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지만 워낙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바깥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음에 묻혀 버렸다.

잠시 후, 김 씨는 눈을 떴다.

“후아. 역시 이 때가 제일 개운하군. 그런데 어떻게 이런 놈 옆에서 계속 붙어 있으라는 거야. 거참. 저번에도 아슬아슬했구만.”

김 씨가 방금 전까지 열심히 보도블록을 빼고 끼던 그곳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작고 검은 물체가 휙 튀어 나갔다.

그것을 힐끔 쳐다본 김 씨는 기현상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

*

*

-야! 옆에!

“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돼요? 뭐 특별히 하지도 않고 제가 쳐다보기만 하면 바로 도망가는데요!”

-야 임마! 너 임무 중이야! 임무 중에 변수가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휴, 이상한 미친놈 때문에 지금 이게 뭐야…….”

소영도 강패의 실력을 봤기 때문에 맨 처음에는 바짝 긴장을 했었다.

하지만 벌써 이번이 몇 번째인지.

이제는 더 이상 긴장감조차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귓가에서 선배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꽥꽥거렸으니, 울상을 지으며 선배가 말한 쪽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 또 안 보여. 대체 무슨 수로 그 키 큰 양반이 안 보이는 거야?”

지금 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본부에서는 보인다는데.

소영은 짜증만 치솟았다.

-어? 그냥 간다!

“네에, 알겠어요. 이제 할 거 할게요.”

이번에는 무슨 심보인지, 소영의 눈에 들어오기도 전에 강패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인이어를 통해 날아왔다.

소영은 축 처진 표정으로 느릿느릿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 휘휘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근데 이놈의 자식은 대체 언제 틈을 드러내는 거야?”

괜히, 지금까지도 전혀 틈을 드러내지 않은 철두철미한 그녀와 그녀 팀원들의 목표에 대해서도 불평하며.

*

*

*

“이크.”

후다닥!

강패는 소영이 자신 쪽을 쳐다보자 또다시 자신도 모르게 냉큼 달아나 버렸다.

뚝.

“뭐야. 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지, 대체?”

사람들 사이를 그림자 품 밟기로 나아가던 강패의 움직임은 한창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소영에게 그림자 품 밟기로 다가가려고 한 횟수가 거의 스무 번에 달했다.

그러다 보니 강패의 그림자 품 밟기는 어느덧 한층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소영에게 들켰다.

그 결과 강패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일정 범위가 있어. 저 여자애 능력이 아니야.”

스무 번이나 그림자 품 밟기를 이용해 다양한 루트로 소영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일정 각도와 구역에선 소영이 강패를 찾아내는 시간도 길어지고, 눈치도 늦게 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근데 왜 자꾸 도망가려는 거지?”

소영의 실력으로 자신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논리적으로 생각이 미친 강패였지만, 그러고 나니 다른 문제가 강패를 찾아왔다.

소영이 자신을 찾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슨 연유인지 강패의 몸은 자꾸 무의식적으로 소영의 시선 밖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강패가 이성으로, 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제어하려고 해 봐도 마치 불편한 옷을 입은 양, 자꾸만 몸이 저절로 소영으로부터 멀어지라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내 왔다.

“일단 내가 모습이 보이는 범위가 있어. 그리고 귀에 낀 이상한 걸로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 같은데…… 뭐가 있는 건가?”

소영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바깥에서 강패가 곰곰이 생각을 하며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게 들어오는 무언가는 없었다.

“내가 어느 범위까지 들어가면, 내 모습이 보이고, 그걸 저 여자애한테 알려 주는 거야. 그럼 저 여자애는 그 때부터 날 찾기 시작하는 거고.”

강패는 논리적으로 점차 모든 것이 해결되기 시작하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었어. 치사하게 이상한 뭔가를 쓰다니…….”

강패는 투덜거리며, 입을 삐죽였다.

“그럼 이 범위 밖에서만 있으면 되는 건가?”

애초에 소영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 하던 것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강패는 이제 적정선을 유지하고 소영을 지켜보기로 하며 소영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어…… 어?”

그렇게 그녀를 지켜보자, 지금껏 며칠 동안 계속 그 자리에서만 서성거리던 소영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하마터면 인파 속에서 사라지는 소영을 다시 놓칠 뻔한 강패는 그림자 품 밟기로 사람들 소영의 뒤를 은밀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지하철?”

지하철 입구라고 적힌 땅속으로 사라진 소영을 쳐다보던 강패는 처음 접하는 장소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그 속으로 소영을 따라 사라졌다.

“지하로 다니는 기차라…… 별의별 것들이 다 있네.”

강패는 하얀 하이힐을 따라 들어온 지하철역이 신기한 듯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온몸에 ‘나 노숙자요’라고 광고하듯 써 붙이고 다니는 강패를 피해 다니느라 안 그래도 좁은 지하철역이 사람들로 인해 미어터졌다.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상태에서 뒤를 쫓는 중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이 복잡한 인파 속에서 하얀 하이힐, 그러니까 소영을 놓칠 확률이 다분했다.

“저게…… 미행이야, 아니면 그냥 쫓아가는 거야. 잘못 짚은 거 아냐?”

강패가 보기엔 소영의 미행이 어설프게만 보였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강패가 보기에만 어설펐다.

소영은 주위 사람들 중 단 한 명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티 안 나게 적절한 거리를 두고 목표를 따라가고 있었다.

얼핏 보면 전혀 미행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행이란, 쫓는 대상만이 아닌 그 주변마저 속여야 했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순발력이나 판단력이 뛰어나야만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소영의 국정원 요원으로서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미행은 귀신 새끼들이 최고였는데.”

그리고 소영의 실력 역시 어디까지나 소영이 사는 현대의 이야기다.

강패가 그녀를 어설프게 본 데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팍! 저기서 팍!”

그야말로 귀신이 따로 없다고 하여 자신이 ‘귀신 새끼’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던 놈들을 떠올리며 강패가 입맛을 다셨다.

“미행이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저게 뭐야…… 참.”

자신과 동료들을 그토록 속 썩였던, 아니 속 썩인다고 하기보다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던 귀신 새끼들을 기억하며 강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이. 재미 없…… 응?”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강패는 금방 흥미가 식고 말았다.

자신의 그림자 품 밟기를 알아챈 무언가가 있어서 실력이 대단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대단한 실력으로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실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알자 흥미가 확 줄어들었던 것이다.

“저건…….”

몸을 돌리려던 순간 강패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다급히 뛰어 내려갔는데, 그것이 흡사…….

“그림자 품 밟기?”

자연스럽지도 않았고, 강패처럼 인기척을 가리지도 못했지만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번쩍!

그것을 본 강패는 자신이 찾아낸 ‘흔적’에 머릿속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아직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림자 품 밟기는 대한독립군에서 배우는 기초 기술 중 하나였다.

강패는 그 기술에서 1940년도의 흔적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었다.

“거, 거기……!”

강패가 부르려던 순간 소영의 모습이 계단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삐빅!

-환승입니다.

삐빅!

“이……이건 대체 뭐지?”

그녀의 뒤를 쫓으려던 강패는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당황했다.

지하철 개찰구 앞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서 있었던 것이다.

“제길. 뭐가 있어야 되나 본데…….”

모든 사람들이 당연스럽게 뭔가를 체크하고 개찰구 너머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강패는 그 뭔가가 필요했음을 알았다.

문제는 대체 그게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어떻게’하느냐는 것이었다.

“아아. 카드라!”

강패가 기지를 발휘하여 은행에서 발급받은 체크카드를 기억해 냈다.

강패가 다른 사람들처럼 리더기 앞에 카드를 가져다 대 보았다.

한데 나오는 반응이 달랐다.

삑!

-카드를 한 장만 대주십시오.

“어라?”

입출금용으로 만든 체크카드라서 교통카드 기능이 빠져 있던 것이다.

“이, 이게 왜 안 돼?”

삑!

-카드를 한 장만 대 주십시오.

몇 번이고 별수를 다 써 봤지만 기능이 없는 카드가 애쓴다고 강패의 사정을 들어줄 리 없었다.

어느새 강패의 뒤로 줄을 선 사람들이 투덜거렸다.

“아 뭐야?”

“뭐하는 거야 앞에서?”

샐러리맨들에겐 1분 1초가 아까웠다.

강패도 이번만큼은 철면피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창피냐.’

강패는 계속해서 체크카드를 비벼 보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크게 당황한 강패는 결국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다.

‘내 잘못이 아니야.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너희들이 잘못이지.’

강패가 다짜고짜 개찰구를 지나쳤다.

당연히 차단봉이 덜컥 움직이지 않았다.

우지직!

하나 차단봉 따위가 강패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강패가 밀어붙이자 회전식 차단봉이 부서져 버렸다.

“젠장.”

타닥!

강패는 개찰구를 지나자마자 그림자 품 밟기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타닥! 탁!

그림자 품 밟기를 쓴 강패가 불과 대여섯 번의 점프만으로 긴 계단을 내려왔다.

치이이익! 탁!

“…….”

하지만 승강장에 도착한 강패가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이미 도착해 있던 지하철 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혀 버렸다.

그 문 너머에 소영이 있음을 확인한 강패는 망연자실했다.

“아니야. 쫓아갈 수 있어.”

강패는 이렇게 소영을 놓칠 수는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었는데 이렇게 움직였다는 것은, 소영이 목표로 했던 대상이 나타나거나 또는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대게, 이런 임무는 수행자가 움직인 날 끝나게 되어 있다.

들키던, 아니면 성공적으로 미행을 해서 목표를 완수하든 간에.

서성이던 그 길가에 또다시 나타날 거란 보장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타다닷!

“꺄악!”

“뭐, 뭐야!”

“미친놈아! 제대로 안 보고 다녀?”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패는 눈을 번쩍이더니 땅을 박차고 다시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

다급한 탓에 그림자 품 밟기고 뭐고 없었다.

그저 있는 힘껏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으니 계단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강패를 비난하는 것도 당연했다.

“흡!”

타닥! 처억!

아까 그토록 속을 썩인 개찰구가 눈에 들어왔지만,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강패가 한 손으로 개찰구 기기를 짚고 뛰어넘었다.

“영화 찍나?”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그런 강패를 보며 수군거렸다.

삑! 삐익!

“거……거기!”

역에서 근무하던 지하철 직원들이 강패를 발견하고서는 맞은편에서 뛰어왔다.

“비, 켜!”

화아악!

“으악!”

우당탕탕!

강패가 흡사 한 줄기 바람처럼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지하철 역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강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빈 공간을 점하고, 쭉쭉 나아갔다.

부딪치는 사람 따윈 없었다.

발을 디디는 찰나에서도 강패의 신형은 1초 이하의 시간도 머물지 않았다.

“반드시 찾고 만다. 반드시!”

모처럼 발견한 흔적을 놓칠 순 없었다.

온몸의 신경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잠들어 있던 기운이 똬리를 풀며 강패의 몸속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저기!”

순간적으로 사방의 모든 정보들, 후각을 비롯한 청각, 시각, 촉각의 모든 정보들이 밀물처럼 쇄도해 들었다.

강패는 그 정보 중에서 자신이 원하던 소리를 잡아내고 눈을 번쩍 떴다.

강패의 신형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

*

-소영아, 놓치지 말고 잘 따라가라. 알았지?

“알겠어요. 이번엔 절대 놓칠 순 없죠!”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소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국정원 요원,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직종에 속한다는 현장 요원을 하면서, 게다가 여자인 소영이 가장 힘들고 귀찮고 짜증나는 것은 바로 이 잠복 임무였다.

-북한 간첩일 확률이 높으니 조심하도록 해. 간첩으로 파견될 정도면 보통 놈이 아닐 거야.

“그놈의 잔소리! 저, 이래 봬도 작년 종합 평가 5위의 몸이에요, 팀장님.”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어.

핸드폰으로 통화하는 척을 했지만 소영의 눈은 단 한시도 중년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3월달 해군 배치도가 없어졌다고 했지?’

이번 임무는 무려 대한민국 국방부와 관련된 기밀 문건에 관련된 일이었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기밀인 병력 배치도를 빼돌리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어서 수사에 착수하고 있었다.

소영이 쫓고 있는 중년 남자는 최종 용의자로 지목된 자였다.

어디까지나 용의자였고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기 때문에 증거를 잡아내려고 했지만, 얼마나 주도면밀한 놈인지 이 주일 만에 소영이 미행을 따라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북한 간첩이면 두 발로 못 걷게 해 주겠어.”

북한 간첩이라며 팀장이 주의까지 주었건만, 소영은 오히려 더욱더 열의와 애국심에 불타올랐다.

아니, 애국심에 불타오른다고 하기보다는 제발 저놈이 범인이었으면 했다.

북한 간첩이면 북한군에서도 최정예 특수요원들이며 그에 준하는 훈련을 받았을 테지만 소영에게선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볼 수 없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현장 요원 종합 평가에서 소영은 여자로서는 최초로 10위권 내에 안착하고, 5위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되는 인재라며 국정원장으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던 것이다.

국정원 월말 종합 평가는 여러 분야에서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강인한 체력과 전투기술, 그리고 사격.

가상 임무 상황을 주고서는 즉흥적인 판단력과 임기응변력 등을 보았다.

현장 요원이라면 필수로 가져야만 하는 많은 덕목들이 평가요소였고 인사고과에도 반영되었다.

그 평가에서 소영은 남자 요원들과 겨루어도 전혀 뒤지지 않은 성과를 보여 주었다.

특히 사격과 관절기를 위주로 한 격투술에 있어서는 힘을 위주로 하는 수많은 다른 남자들을 모조리 꺾어 버렸을 정도였다.

그러니 소영이 이토록 자신 있어 하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 실력을 보인 덕분에, 국정원 팀 안에서만큼은 여자가 아니라 한 명의 팀원으로서 임무에 투입될 수 있는 거였고 말이다.

-본부의 정보에 따르면 이제 다음 정거장에서 놈이 내릴 거야. 그곳에서 접촉하는 놈이 있을 테니 두 눈 똑똑히 뜨고 잘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는 척하며 목표물 쪽을 쳐다본 소영은 혀를 내둘렀다.

목표 대상은 영락없이 평범한 중년 아저씨 인상이었다.

누가 저렇듯 삶이 찌들어 고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중년 남자들과 똑같아 보이는 자를 북한 간첩일 수도 있겠다고 의심을 하겠는가?

아마 소영도 임무가 아니었다면, 결코 의심조차도 해 보지 않았을지 몰랐다.

하나 국정원의 정보력은 적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가공할 만했다.

-이번 역은 동대문, 동대문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끄응…….”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지려는 인상을 간신히 잡아 피면서 자신의 기척을 최소한으로 숨겼다.

‘아니. 말이 돼? 동대문이라니. 설마 동대문 시장 쪽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미행할 때 사람이 많으면 자기 기척을 숨기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목표물을 놓치기에도 딱 좋았다.

그런데 하필 서울에서도 유동인구 수가 손꼽히는 동대문에서 내리다니.

그런 곳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미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했다.

소영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리눌렀다.

‘하긴, 이상하기도 하겠네. 이 시간에 회사에 있어야 할 직장인 남자가 시장에 와 있다는 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으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분명히 이상했다.

국정원의 정보에 의하면 용의자로 지목된 저 남자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그것도 전형적인 사무직.

바깥 업무를 보는 영업직이나, 기획직 종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일하고 있어야만 하는 시간에 근무지도 종로인 남자가 뜬금없이 동대문에 찾아오다니?

힐끔힐끔.

중년 남자가 뒤를 흘끔거렸다.

소영은 국정원에 들어와 현장 요원 교육을 받으면서 배웠던 것을 써 먹으며 몸을 숨겼다.

중년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이상해. 아무래도 수상쩍어.”

혹시 미행이 들킨 건 아닌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임무 수행을 위해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영은 알지 못했다.

흘끔거리던 그의 시선에 자신에게 닿아 있음을.

언제 뒤를 쳐다봤냐는 듯 금세 시치미를 뗀 중년 남자의 움직임이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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