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2권) (11/30)

1장

“7억 5천입니다.”

“7, 7억 5천…….”

7억에 달하자 억대로 뛰던 게 이제 금액은 천만 원 단위로 뛰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그 금액을 쉽게 올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는 이제 단 천만 원만 올려도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다.

강패의 뒤에 있던 김 씨는 늘어만 가는 단위에 이젠 거품을 물고 졸도할 기세였다.

“7억 5천이라. 꽤 많군.”

‘꽤 많다고? 그 장부 하나에 7억 5천이 ‘꽤’ 많은 거라고?!’

강패가 말하며 씨익 웃었다.

하는 도저히 마주 웃어 줄 수 없었다.

흑룡파와 기린파를 대치시켜 놓고 하는 짓이 고작 가격 흥정이라니.

‘끄응, 참자. 괜히 일만 크게 벌리게 될 거다. 안전하게 해결하는 게 최고다.’

하는 그렇다고 해서 강패의 비위를 거스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보아하니 흑룡파 놈들은 자신들을 보고서 덤비지 않는 듯했다.

강패를 보는 흑웅의 눈에 살기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흑룡파 놈들은 강패의 진짜 실력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것이겠지.

하는 카지노에서 자신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던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인간이 아니야.’

하는 싸움꾼이 아니었다.

조직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해태에게 조언을 해 주는 참모의 역할이었다.

주먹을 휘둘러 대는 조폭들 중에는 아주 드물게도 머리를 쓰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고 과신하는 여타의 조폭들과는 달랐다.

하는 강패의 싸움을 본 순간 단박에 그를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대로 해태에게 강패를 데리고 가 장부에 관한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7억 5천이라니. 미친놈들.”

하가 7억 5천까지 부르자 흑룡파에서도 쉽사리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장부가 중요하긴 했다.

하지만 그 장부 하나에 7억 5천이라니.

흑웅은 질린 기색으로 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겉으로 보기엔 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 7억 5천. 더 이상 올릴 사람?”

처음엔 기린파가 돈을 제시하고, 흑룡파가 콧방귀를 뀌는 형태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제시 금액이 5억에 달하자 흑룡파에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5억부터는 흑룡파에서도 금액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강패가 기대감을 가지고 흑룡파와 기린파를 쳐다봤다.

“…….”

“…….”

“에이, 시시하게 이게 뭐야. 이것밖에 안 됐던 거야?”

기린파에서 7억 5천을 외친 뒤 흑룡파의 대표 흑웅은 침묵했다.

강패가 재미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러자 양측의 조폭들이 정말 미친놈 쳐다보듯 강패를 쳐다보았다.

7억 5천도 까무러칠 금액인데 거기서 더 올라가길 바라다니.

하지만 강패의 꿈(?)은 상상초월이었다.

‘다다익선. 어차피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자금은 필요하겠지.’

정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필요한 곳이 대한민국이었다.

강패는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꽤 느꼈다.

게다가 기필코 하려고 했던,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혹시 모를, 대한독립군의 생존자를 수소문 하는 것.

이 넓은 세상에서 강패를 알아봐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라면 내가 잊어먹고 있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패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자신에게 무언가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현상들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65년 뒤에 깨어난 일을 비롯해서 말이다.

“더 올리지 않을 거면 아쉽지만 여기서 마무리 짓고 기린파에게 이걸 넘기겠다!”

기다려 봤자 더 이상은 금액이 올라갈 것 같지도 않았다.

7억 5천은 대단히 큰돈이었지만 얼마나 큰지 체감하지 못하는 강패로선 그냥 이 정도가 제값이겠거니 싶을 뿐이었다.

강패가 요상한 경매를 끝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흑룡파를 향해 소리쳤다.

“7, 7억 5천…….”

“…….”

조폭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흑룡파에서는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없는지 흑웅은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강패는 장부를 손에 쥔 채 기린파 쪽으로 향했다.

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준비한 돈을 가지고 와라!”

“호오, 돈도 가지고 왔어?”

당연히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미리 준비한 듯,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하를 보면서 강패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계좌고 뭐고 저희가 아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하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정중하게 말했다.

“아는 게 없어……? 뒷조사를 한 모양이군.”

움찔.

무심코 던진 말의 허점을 강패가 지적하자 하가 움찔했다.

강패는 피식 웃었다.

“그럴 만도 하지. 나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으면 그게 더 신기하겠지.”

“…….”

하가 강패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대체 정체가 뭐지?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모든 것이 깨끗해. 이름도, 생년월일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강패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돈을 쓰고, 휘하의 조폭들을 닦달해 흥신소를 뒤엎었다.

그렇게 별의별 짓을 다 해 봤는데도 강패의 그 어떤 기록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정말 산골오지에서 튀어 나온 것처럼 흔적 없이 살아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국가기밀에 속할 정도로 국가 차원에서 이자의 정보를 은폐하거나.

뭐,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우리야 나쁠 것 없겠지. 돈을 조금 썼어도 흑룡파를 조선 그룹에서 밀어낼 수만 있다면야…….’

어쨌건 하는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만 성황리에 마무리된다면, 조선 그룹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흑룡파는 곧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리를 다른 조직이 차지한다면 흑룡파는 급속도로 쇠락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노른자 땅인 종로를 먹는다.’

흑룡파의 몰락으로 그들의 구역은 곧 기린파의 좋은 먹잇감이 될 터였다.

다른 세력들 또한 당연히 흑룡파를 뜯어먹을 생각을 하겠지만, 감히 기린파를 상대론 쉽게 발을 뻗지 못할 것이다.

흑룡파의 힘을 온전히 흡수하기만 한다면 남도파와 자웅을 겨뤄도 결코 밀리지 않을, 서울을 양분하는 조직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흠, 옛다.”

부하 두 명이 힘겹게 커다란 박스를 들고 와서는 하의 옆에 내려놓았다.

강패는 보기만 해도 묵직해 보이는 박스를 힐끗 보고는 장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주었다.

“후우…….”

하는 장부를 팔락거리며 들춰 보더니 곧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강패는 그런 하를 지나쳐 허벅지까지 닿는 커다란 박스 앞에 다가섰다.

“모두 깨끗하게 세탁된 돈이니 별탈 없으실 겁니다. 보관해 놓을 곳만 있으시다면야…….”

하가 강패를 뒷조사하면서 알아낸 것은 딱 하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노숙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

하지만 강패가 보인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하는 그가 절대 노숙자일 리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노숙자는 여러 사정으로 길바닥에 나앉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돈에 민감했고, 극도로 무력감을 느끼거나 자신감이 없었다.

하지만 하가 본 강패는 항상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때문에 절대로 노숙자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패의 본질적인 모습의 얘기였지, 지금 살고 있는 형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흐음…….”

푸욱!

강패가 하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박스에 손을 쑤셔 넣자 너무나도 쉽게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곳을 통해 돈 다발을 꺼낸 강패가 하를 돌아보았다.

“이걸 어디에 보관하라고? 설마 돈을 산처럼 쌓아 놓고 살라는 건 아니겠지?”

하가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갈색으로 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안 그래도 이런 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 준비했는데…… 조금 비쌉니다.”

아랫부분이 뭉툭하게 튀어 나온 서류 봉투를 본 강패가 의아한 듯 물었다.

“뭘?”

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노숙자도 아닌 것 같으신 분이 노숙자 생활을 하시고, 어느 곳에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지 않으신 걸 보니 신분을 증명하실 만한 것도 없는 듯싶어서…….”

“호오. 그래?”

강패는 하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사실 강패가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신분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신분이 불명확하면 헌병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견디다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노숙자들 중엔 신분을 어떻게 마련해야 되는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책이나 영화를 통해 어디서 주워 들은 것들만 말해 줄 뿐이었다.

때문에 강패로선 막막할 따름이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준비해 오다니.

강패가 반색을 하자, 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제가 지금 드리려는 건 전문적인 과학 감정을 거치지 않은 이상 위조임을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든 위조 신분증과 인감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에게서 산 것이라 전산망에 조회를 해도 실제로 뜨는 신분증입니다…… 만…….”

“만?”

하가 말끝을 흐렸다가, 강패가 반응을 보이자 주저주저 하는 척하며 말을 이어 붙였다.

“가격이…… 조금 비싸서 저희가 그냥 드리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무리라……?”

하가 눈을 번쩍이며 강패의 표정 변화를 세밀하게 살폈다.

‘7억 5천을 다 줄 순 없지.’

물론 신분을 위조하는 것은 비쌌다.

거기다 그 완성도가 높을수록 그 가격이 높이 뛰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가 난색을 표할 정도로 비싼 가격은 아니었다.

하는 애초부터 강패에게 7억 5천이라는 돈을 전부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싸움꾼이 아닌 지략가였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만데?”

‘됐다!’

하는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거의 완벽에 가깝게 위조를 한 것이고, 저희도 잘못 걸리면 바로 경찰에 잡혀 들어가기 때문에 위험도만큼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말이 많군.”

강패가 스산하게 말하자 하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일말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 저희들의 노고를 조금이나 알아주셨으면 해서…….”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

강패는 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안 봐도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계산이 오고 가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들어 보기로 했다.

게다가 정말 저놈 말대로 완성도가 높은 것이라면, 정상적으로 이 나라의 시민권을 받을 방법이 없는 강패로선 돈이 얼마가 들든 충분히 허용할 뜻이 있었다.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당장 어디에 쓸지는 나도 모르겠으니까.’

7억 5천이라는 돈이 수중에 들어왔지만, 어디다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강패였다.

어쨌건 필요한 건 사야 했으므로 아깝다는 생각 없이 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5억입니다.”

“5억이라…… 5억…….”

당연히 5억이나 할 리 없었다.

“그래도 그, 그건 너무 비싼 것 아니오?”

듣고 있던 김 씨가 그래도 강패보다는 물가(?)에 밝았기에 따졌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게 겁을 잔뜩 집어먹은 듯했지만 용케 앞으로 나섰다.

“아까도 말씀드린 이유 때문에 이 정도는 주셔야 합니다. 그만한 가격에 맞게 준비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하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뒤로 감춘 손아귀는 땀으로 흥건했다.

‘원래 예상했던 장부의 가격은 2억 5천이었다. 그런데 흑룡파가 껴서 더 가격이 올라갔으니 네놈이 토해 내야겠다.’

기린파의 보스인 해태는 원만한 일처리를 위해 얼마든지 돈을 써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조직의 예산을 직접 관리해야만 하는 하의 입장에선 7억 5천이란 자금의 손실은 너무도 컸다.

해태도 돈을 마음대로 쓰라고 말하긴 했지만 분명 운영 자금에 구멍이 나면 그때 가서 그 책임을 하에게 물을 것이 분명했다.

‘그 돈이면 몇 달치 운영비인데…….’

장부 하나를 7억 5천이나 주고 사기에는 기린파로서도 손실이 너무 컸다.

그렇다고 강패 같은 실력자에게 장부를 힘으로 빼앗을 수도 없었다.

기린파가 전부 달려들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거기서 발생하는 손실은 또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역시 믿을 건 내 머리밖에 없지.’

과연 하의 예상대로 강패는 몸은 튼튼해도(?)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놈 같았다.

“좋아. 사지.”

김 씨도 이런 거래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태연자약한 하의 연기에 속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강패의 승낙에 하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물고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 안에 주민등록증과 여권, 인감과 인감증명서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신분증이면 은행에서 통장을 만들고 돈을 보관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것도 저희가 해 드릴까요?”

하는 조폭이라기보다 흡사 잘 훈련받은 영업사원 같았다.

“사진은 언제 찍은 거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는지, 사진을 찍은 적도 없는데 강패의 증명사진이 떡하니 주민등록증에 박혀 있었다.

강패가 재밌다는 듯 하를 쳐다보자 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가게 CCTV에 찍힌 영상을 보고 손을 조금 봤습니다. 미남이시더군요.”

강패는 허름한 몰골 그대로였는데 사진 속의 강패는 수염이 없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수염을 없앤 것만으로도 자신의 얼굴이 상당히 깔끔하게 나와 있었다.

강패는 자기 사진을 보면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한 기술이야. 대단해.”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제…….”

강패도 만족시키고 5억도 되찾았겠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가 강패를 향해 인사를 하고 흑룡파를 흘끔 바라보았다.

순간 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차분한데?’

놈들이 그토록 필요로 하는 장부를 눈앞에서 빼앗았는데, 그런 놈들치고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침착했다.

‘흑웅…….’

하는 조폭들 가운데서도 단연 독보적인 덩치를 자랑하는 흑웅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흠칫했다.

흑웅의 표정에서 조금도 다급한 기색이 찾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설마. 경찰을 무시하고 덮치려는 건가?’

하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다.

하지만 설마 흑룡파에서 그런 초강수를 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조폭 100여 명이 모였으니 분명 경찰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 터다.

때문에 만약 마찰이 일어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장부가 경찰들의 손에 넘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렴 그렇게까지야 하겠는가.

하는 애써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상황은 하가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자, 이제 이야기들 다 나누셨나?”

공터에 흑웅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노불이 살기를 띠며 앞으로 나섰다.

“이제 이 장부가 우리 손에 들어온 이상, 네놈들은 다 뒈졌어. 큭큭.”

노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지만 흑웅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노불 님, 어서 여길 떠납시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습니다.”

흑웅의 가라앉은 눈에서 그의 심중을 읽었음인지 하가 노불을 재촉했다.

노불이 안절부절못하는 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볼 때였다.

그 순간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흑룡파다! 흑룡파!”

“습격이다! 기습이다!”

“이런 씨발!”

후미에서 흑룡파 조직원들 수십 명이 모습을 드러내며 기린파의 뒤통수를 때렸다.

하와 노불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외칼이 뛰어들어 기린파 조직원들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쳐라!”

우와아아아!

외칼의 습격이 성공했음을 눈치챈 흑웅도 재빨리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제나저제나 흑웅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흑룡파 조직원들도 연장을 가지고 저돌적으로 기린파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아이구…… 아이구…….”

휙! 퍼벅!

콰당탕!

기린파와 흑룡파 사이에 있던 김 씨와 강패는 순식간에 혼전의 한가운데 있게 되었다.

김 씨는 조폭들이 서로 무기를 휘두르고 때려눕힐 때마다 죽는 소리를 냈다.

강패는 한 손에는 돈 박스를, 다른 한 손에는 서류 봉투를 든 채 조폭들의 공격을 설렁설렁 피했다.

“여기서 빨리 도망가야 하지 않겠나? 빨리 여기서 나가세! 아이구, 아이구!”

김 씨는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조폭들의 기세에 앓는 소리를 내면서 강패의 등을 떠밀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하고 불구경이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좀 구경하고 갑시다.”

사정사정을 하는 김 씨의 손길에 강패는 공터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이런 건 직접 봐야 되는 건데.”

“무, 무슨 말을! 난 아직도 간이 떨려 죽겠어.”

“응?”

김 씨가 계속 가자고 졸라 대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패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았다.

“응? 꽤 익숙한 소린데?”

1940년대에서도 들리던 소리였다.

김 씨가 그 소리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아이고! 경찰이네, 경찰이야!”

경찰이 몰려온다는 소리에 김 씨가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강패의 손에 든 박스를 발견하고서는 소리 질렀다.

“그 돈! 그 돈이 경찰한테 걸리면 자네가 감옥에 갈 수도 있네!”

조폭과의 부당한 거래를 통해 취한 이익이었다.

그렇게 얻은 이익금을 경찰이 그냥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틀림없이 강패를 체포해 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다 보면 위조 신분증까지 들통 날지도 몰랐다.

“피, 피해야 하네! 우리도 안심할 때가 아니야!”

“그런데 사이렌 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다 들리는데? 경찰이 한두 명이 오는 게 아닌 것 같수.”

김 씨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청력이 예민한 강패의 귀엔 멀리에 있는 사이렌 소리까지 모두 들려왔다.

김 씨가 더욱 다급해져서 강패를 떠밀었다.

“빨리 가야 해! 이놈들은 여기서 콩밥 좀 먹어 보라고 하고! 어서 피하세!”

김 씨는 더 이상 조폭과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본 조폭들만 해도 평생 살면서 만날 조폭들보다 더 많이 본 것 같았다.

강패는 투덜거리면서도 김 씨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태평한 강패가 답답한 듯 김 씨가 자기 가슴을 치며 재촉했다.

“가세! 어서 가세!”

“갑니다! 간다구요!”

*

*

*

“조폭은 경찰들이 처리할 테니까 너희들은 혹시 밀거래가 오가지 않았는지 파악하면 된다. 혹시라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외국 범죄자가 껴 있을 수도 있으니 단단히들 조심하고.”

“옙!”

남자들 틈에서 핀 한 송이 꽃같이 환한 미모를 자랑하는 소영은 팀장의 말에 다른 남자들과 같이 대답했다.

“강소영!”

“네!”

“너 이번에 또 사고치기만 해 봐! 삼 개월 감봉인 줄 알아!”

“아, 아니, 그건 너무하잖아요 팀장님! 제가 지난 이 주일 동안 몸에도 안 맞는 화장이랑 하이힐 신으면서 그 생고생을 하다가 이제야 스트레스 좀 풀 기회를 잡았는데…….”

“임무가 스트레스 푸는 건 줄 알아? 말 조심해, 임마!”

이번 협동 작전에서 국정원이 맡은 임무는 경찰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경찰들은 일대 난전을 벌이고 있는 백여 명가량의 조폭들을 진압하고 체포하는 일을 맡았다.

반면, 국정원은 그 비중이 달랐다.

모인 조직원들은 그냥저냥 모인 삼류 조직이 아니라 기린파와 흑룡파였다.

그들이 한 장소에 모일 정도라면 분명 쉽지 않은 사연이 있을 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했다.

경찰이 국정원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이와 같은 사유였고, 국정원에서는 현장에 나가 있는 팀들을 현장으로 파견했다.

“투입은 10시 07분. 철수 시간 미정. 10분마다 한 번씩 상황실과 교신한다. 질문?”

방탄복을 갖춰 입은 팀장이 헷멜에 달린 고글을 내려 쓰면서 말하자 소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뭔데?”

“이번에는 내기 안 합니까?”

소영의 질문에 다른 요원들이 키득거렸다.

팀장은 내려 쓰던 고글을 올리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야 임마! 임무가 무슨 장난이야! 조폭들이야 조폭들! 한두 명도 아니고 백여 명이다! 잘못하면 너네들 죽어 임마!”

“에이, 급파된 경찰 병력이 몇 명인데……. 그리고 여기서 죽을라고 저희 그렇게 힘들게 훈련 받은 거 아니에요, 팀장님!”

소영이 만사태평한 어조로 말하자 팀장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에이. 팀장님도 하실 거죠? 오늘은 만 원빵 갑니다! 가요! 오늘은 조폭 내기입니다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소영은 능숙하게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내기 분위기를 만들었다.

다른 요원들도 웃으면서 그 내기에 하나둘씩 붙었다.

“이야! 오늘의 1등은 무려 18만 원을 가져가게 되겠습니다!”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소영은 신경도 안 쓰는 듯했다.

그들이 탄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임에 따라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문을 열고 뛰쳐 내릴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끼익!

덜컥!

“무브! 무브! 무브!”

소영이 차 문을 열고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

*

*

경찰들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다.

조폭이 많기 때문에 폭력 없이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안 그래도 거친 조폭들은 싸움까지 하느라 더더욱 거칠었으니, 경찰들로서도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진정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퍽! 퍼벅!

곤봉을 든 전경들과 경찰들이 난입하자 뒤엉켜 있던 조폭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개중 몇몇은 경찰에게 연장을 휘두르며 반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싸움질을 멈추고 분분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기린파의 얘기였다.

“반드시 뺏어라! 반드시! 후리압!”

흑룡파의 조직원들은 함부로 도망가지도 못했다.

서슬 퍼런 흑웅의 목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고, 흑룡파 조직원들은 하를 붙들기 위해, 정확히는 그가 지닌 장부를 빼앗기 위해 마구잡이로 뛰어들었다.

경찰과 기린파, 그리고 흑룡파 조직원들이 뒤섞인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거참. 이 아저씨는 간이 콩알만해 가지고는…… 쯧…….”

“헤엑, 헤엑…… 일단…… 오래 살고 봐야지 않겠나……헤엑…….”

강패는 한 손에 2억 5천이 든 현금 박스를 들고서도 전속력으로 달리는 김 씨보다 훨씬 더 빨랐다.

김 씨는 벌써부터 숨이 턱 끝까지 치달아서 헉헉대는데, 강패는 달리면서도 태연하게 말을 붙였다.

그런 강패를 김 씨가 괴물 보듯 쳐다봤다.

김 씨는 그래도 일단 그 무서운 현장에서 빠져나왔다는데 안도감이 들었는지 얼굴색이 한결 나았다.

“음?”

고개를 흘끗 돌려 난장판이 벌어지는 곳을 본 강패가 자신의 기감에 사람의 기척이 걸려들자 몸을 틀었다.

“김 씨. 저쪽으로 도망가쇼. 이쪽은 내가 막을 테니까.”

“응? 막어? 헤엑……. 뭘 막는다고…… 헤엑…….”

강패의 갑작스런 말이 의아했던 김 씨가 헉헉거리면서도 물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앞쪽 골목 모퉁이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김 씨가 아연실색하는데 강패가 느긋하게 말했다.

“자, 거기 잠깐 숨어 있다가 나중에 봅시다.”

“어…… 어어?”

퍼억!

풀썩!

강패가 김 씨의 몸을 툭 밀었다.

달리던 와중에 강패에게 밀린 김 씨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쓰레기더미에 처박혔지만, 강패는 그런 김 씨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치지만 않으면 되지, 뭐.”

강패는 맞은편에서 달려드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조폭 놈들은 아니고…… 경찰이구나!”

살만 피둥피둥 찐 덩어리들과는 달리 헬멧을 비롯한 온갖 장비를 맞춘 것이 강패의 생각을 뒷받침했다.

과연 그 생각대로 강패 앞에 나타난 무리는 국정원 요원들이었다.

개중엔 소영도 있었다.

강패가 저돌적으로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재빨리 수신호를 주고받은 국정원 요원들이 두 패로 갈라졌다.

그러자 강패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뭐야. 지금 내 앞에서 재롱이라도 부리겠다는 건가? 날 무시하고 가겠다고?”

일반인이라면 국정원 요원들이 수신호를 당연히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들의 싸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재빨랐다.

하나 강패는 보통 범주에 속하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총탄이 튀고 폭탄이 터져 나가는 전장 속에서 동료들과 수신호를 주고받았던 강패의 단련된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몇 명만 자신에게 붙여 놓은 채 무시하고 가려고 했던 국정원 요원들의 행동에 울컥할 뻔한 강패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1940년의 경성이 아니었으며, 자신에게는 지켜야 할 동료들도 없었고 혼자만 빠져나가면 그만인 일이었다.

“김 씨도 알아서 잘 오겠지.”

김 씨는 전형적인 노숙자였다.

누가 그를 보고 조폭처럼 여기겠는가?

자기보다 더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고 강패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너희들이 내 몫이군.”

두 패로 갈린 국정원 요원들 중 셋이 강패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머지는 그의 뒤로 달려 나갔다.

강패가 달리던 자세 그대로 허리를 접었다.

팡! 파방!

머리 위에서 공기를 치고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장이 아닌 손발을 사용한단 뜻이었다.

강패는 허리를 숙인 반동을 이용해 공중제비를 돌며 앞으로 발을 내뻗었다.

덜컥!

우당탕!

공격을 피하던 자세에서 반격이 이어졌다.

팔다리가 긴 만큼 리치도 당연히 길었는데, 강패를 공격하고 몸을 빼려던 요원 하나가 강패의 발에 턱이 걸려 나동그라졌다.

팡!

퍼벅!

“커헉!”

“커흑!”

나머지 둘은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강패를 스쳐 지나갔다.

땅에 발이 닿은 강패는 발가락 끝으로 땅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아직도 무게 중심을 바꾸지 못하고 있던 국정원 요원둘이 이어지는 강패의 공격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덩어리들보다는 조금 낫네. 그래도 거기서 거기다.”

국정원 요원이 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피땀 흘려 가며 노력했는지도 모르고 말하는 강패였다.

실제 이 국정원 요원들은 한 명당 조폭들을 서너 명까지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어쨌거나 강패의 기준에는 조폭이나 국정원 요원이나 피차일반이었지만.

*

*

*

-상황실! 방금 저놈 추적해! 어디로 가는 놈인지 알아 둬!

조폭들의 패싸움 현장에 점점 가까워져 가던 소영은 인이어를 통해 들려오는 팀장의 격앙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저놈? 방금 우리가 지나친 그 남자를 말하는 건가? 그 남자라면 선배들이…….’

달리다가 무심코 뒤를 바라본 소영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앞에서 달려오는 강패를 보고 국정원 요원들끼리 수신호를 주고받은 지 몇 초가 지났을 뿐이었다.

팀장의 수신호에 셋이 따로 떨어져 저 남자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는데 이게 무슨 황당한 광경이란 말인가!

-저놈 신원조회랑 무슨 일 하는 놈인지, 어디 조직 소속인지 전부 알아봐! 저놈 손에 든 게 돈 상자인 것 같은데…… 어쨌든 모조리 조사해!

소영의 인이어를 통해 계속해서 상황실에 악다구니를 쓰는 팀장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소영은 유유히 사라지는 강패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

*

“에잇. 거참. 어떻게 씻어도 씻어도 쓰레기 냄새가 빠지질 않는구만.”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면서 투덜대는 김 씨를 바라본 강패가 피식 웃었다.

국정원 요원 세 명을 때려눕힌 후로 강패는 다행히도 더 이상 경찰을 만나지 않았다.

덕분에 휘파람을 불면서 2억 5천을 들고서는 편하게 지하보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때마침 그 때 김 씨도 지하보도로 돌아왔는데 온몸에서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이, 노숙자 냄새가 아니라 쓰레기더미 그 자체라 냄새를 씻어 내기 위해 목욕탕에 온 것이었다.

“어차피 더러운데 냄새 좀 나면 어때서. 어차피 거기서 거긴데.”

강패가 빈정대듯 말하자 김 씨가 두 눈을 부라리다가 은근한 표정을 짓고서는 팔꿈치로 강패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휴. 그나저나 자네 몸은 언제 봐도 기가 막히구만. 어떻게 사람 몸이 그렇게까지 될 수가 있나그래?”

팔꿈치가 튕겨 나올 정도로 탄탄한 근육질의 상체를 보면서 김 씨가 감탄성을 흘렸다.

강패는 옷을 입으면 호리호리해 보이기만 했다.

한데 허름한 옷 안엔 마치 조각가가 깎은 듯한 오밀조밀한 근육들이 숨어 있었다.

게다가…….

“커흐흠!”

슬쩍 강패의 아랫도리를 훔쳐본 김 씨가 헛기침을 했다.

마땅히 쓸 데도 없건만 살짝 부럽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돈은 다 어디에 쓸 건가? 벌써 통장도 만든 것 같던데?”

“글쎄올시다…… 아 참, 이건 김 씨 돈이요.”

2억 5천을 현금으로 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강패는 새로 만든 신분증도 시험해 볼 겸,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통장을 만들고 은행 직원의 안내에 따라 체크카드까지 일사천리로 만들어 버렸다.

확실히 기린파의 하가 자부했듯, 신분증은 일말의 의심도 받지 않았다.

강패는 별 탈 없이 새로운 계좌를 만들었다.

비록 강패란 이름은 아니었지만.

“나…… 나한테도?”

강패는 김 씨에게 비닐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김 씨는 얼떨결에 그 검은 봉지를 받고서는 안을 확인했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떨리는 눈으로 강패를 쳐다봤다.

“그간 신세를 많이 지지 않았소. 앞으로도 많이 좀 집시다.”

“시, 신세라고 할 것까지야 있나! 다 같은 처지인데 뭐……. 그냥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맙네, 정말 고맙네. 이 돈, 염치 불구하고 받겠네.”

2억 5천 중 5천을 떡하니 내놓는 강패의 배포에 김 씨는 새삼 놀랐다.

강패는 별것 아니라는 듯 김 씨를 등지고 돌아앉아 달짝지근한 식혜를 마시며 TV를 쳐다봤다.

-오늘 오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폭력 조직의 패싸움으로 인해 경찰당국에서는 급히 경찰들을 급파하였습니다…….

“아이고 저놈 자식들. 저런 놈들은 싸그리 콩밥을 먹여야 돼!”

“조폭들이 저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니 이거 무서워서 어디 살 수가 있나!”

조폭들이 단체로 경찰서로 끌려들어 가는 모습이 TV화면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나운서의 담담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자 TV를 보던 사람들이 각각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난을 했다.

“흐음…….”

사람들을 둘러보던 강패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 씨. 왜 저 사람들은 조폭들을 욕하는 겁니까?”

조폭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신체적 강함을 믿고 다른 사람을 핍박해서 돈을 뺏고 살아갔다.

그것은 물론 나쁜 일이긴 하지만, 이렇듯 사람들이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욕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허, 자네. 오늘 그렇게 조폭들이랑 얼굴을 맞대더니 정이라도 든 건가? 저 조폭들이 나쁜 놈들이지, 그럼 착한 놈들인가?”

김 씨는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하는 강패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강패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먹고살라고 하는 건데…… 적어도 저 사람들은 김 씨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살진 않잖소?”

“에엑? 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면서 사느니, 차라리 나처럼 사는 게 낫지!”

어찌 보면 심할 수 있는 강패의 말이었지만 김 씨는 강패를 며칠 동안 봐 왔고, 워낙 넉살 막은 성격이라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뭐, 다른 노숙자들 말 들어 보면 꼭 조폭들만 나쁜 것 같진 않아서 그러외다. 다른 노숙자들이나, 당장 김 씨만 해도 조폭들보다는 김 씨나 노숙자들을 길거리에 나앉게 한 놈들을 더 싫어하지 않았소? 그럼 주먹을 쓰는 조폭들보다 돈을 빼앗아간 놈들이 더 나쁜 놈들 아닌가?”

“……에이. 둘 다 나쁜 놈들일세. 둘 다.”

강패의 말에 김 씨는 말문이 막혔는지 얼버무렸다.

강패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참 재밌는 세상이야…… 돈 앞에서는 주먹도 저리 가라군.”

*

*

*

“죄송합니다, 회장님.”

“…….”

“다 제 불찰입니다…….”

흑룡파의 회장실은 톡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상석인 넓은 소파에 앉아 손에 이마를 괸 흑룡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앞에서 흑웅은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흑웅의 뒤로는 외칼과 모자도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들 옆으로는 흑룡파의 간부들이 두 줄로 기립해 있었다.

“죄송……”

후웅! 퍼석!

번쩍 눈을 뜬 흑룡이 재떨이로 흑웅의 머리를 내려쳤다.

“크흑…….”

뚝, 뚝.

흑웅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흑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혀, 형님!”

“후우, 후우…… 죄송합니다. 회장님.”

외칼이 상태를 살피려 했지만, 흑웅은 그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한 번 흑룡에게 사죄했다.

머리가 꽤 크게 찢어진 듯 흑웅의 얼굴이 금세 피범벅이 됐다.

흘러내린 피가 와이셔츠 깃을 빨갛게 물들였다.

흑룡은 그런 흑웅을 무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일어나라.”

“예. 회장님.”

흑룡의 한 마디에 흑웅이 주저 없이 벌떡 일어났다.

“너에게 기대가 참 컸는데, 일을 너무 크게 망쳐 놨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물러가라.”

“예.”

흑웅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흑룡의 말을 따랐다.

흑웅이 문 밖으로 향하자 그 뒤를 외칼과 모자와 따랐다.

흑룡이 눈을 들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

“아이들을 빼낼 수 있나?”

“……이번 사건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손 쓸 도리가 없습니다.”

퍼억!

“크…… 흑…….”

흑룡이 비서의 배를 걷어찼다.

비서는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나동그라져서는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그딴 소리나 할 거면 내 손으로 찢어 죽여 주마. 장부도 우리 손에 없고, 애들도 잡혀 들어가고. 조선 그룹에서는 뭐라던가?”

흑룡은 극도로 분노할 때면 오히려 지금처럼 극도로 차가워지곤 했다.

이럴 때면 적이건, 아군이건 반드시 피바람이 불었다.

그 사실을 익히 잘 아는 간부들은 긴장감에 말도 못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을 따름이었다.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입을 싹 닦았습니다. 아예 저희와 줄을 끊으려는 것 같습니다.”

“…….”

조선 그룹과 협상을 담당했던 흑룡파 간부가 보고했다.

흑룡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이번엔 조용히 지나갔다.

“조모강이가 우릴 버리겠다는 건가! 개 같은 새끼…….”

조모강을 향한 흑룡의 살기가 폭사되었다.

하지만 그 살기는 조선 그룹에 닿지 못했고 회장실만 싸늘하게 얼릴 뿐이었다.

*

*

*

“회……회장님. 정말 흑룡파를 이렇게…….”

“그만! 그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하지 말게.”

“계속해서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워낙에 거친 놈들이라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지금, 자네가 날 가르치려 드는 겐가?”

일흔이 넘어가는 나이임에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조모강이 눈을 부라리자 중압감이 엄청났다.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든 수석비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나와 흑룡은 갑과 을이다. 흑룡이 제대로 일을 못했으니 갑은 갑의 위치에서 을에게 계약 파기를 요구할 수 있는 게 당연한 일일세. 손해배상 청구를 하지 않은 것만도 놈들에겐 다행인 일일 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냉막한 인상의 조모강을 수석 비서가 쳐다봤다.

“그 장부건에 대한 건 어떻게 처리할 준비가 되어 가고 있나?”

조모강의 물음에 수석비서가 머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모든 물증을 확보했고, 이 일을 흑룡파의 책임으로 만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최고 변호인단으로 구성된 법무팀도 이미 꾸려 놨습니다.”

“그래…….”

조모강은 그제야 인상을 풀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파 말고 다른 쓸 만한 조직이 없나 한번 찾아보시게. 그리고 흑룡파 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경호원들도 증강시키고, 세인이 녀석에 대한 경호도 더 신경 써서 하도록.”

“알겠습니다, 회장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