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뭐야. 너 어제 잠 못 잤어?”
“으음. 아무래도…….”
강패는 눈이 붉게 충혈 된 조루를 보고는 어깨를 툭 치면서 물었다.
조루는 어깨를 자꾸 부르르 떠는 것이 몸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김 씨. 김 씨는 어떠쇼. 걸을 수 있겠소?”
“뭐 이쯤이야! 이쯤은 아무것도 아닐세! 내가 한 터프하지 않은가!”
“터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참.”
강패의 옆에는 조루 말고도 어깨와 다리에 붕대를 맨 김 씨가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난감한 몰골을 하고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김 씨를 보고 강패가 피식 웃었다.
“늙으면 붙던 뼈도 안 붙는다니, 조심 좀 하시오.”
“아니, 이 사람이! 자네랑 나랑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그러나!”
일행은 건설현장의 총책임자의 직함을 내세워 조선 그룹과 노조 협상이 이뤄지기 전에 사전 조율을 위해 찾아간다는 명분을 세웠다.
하지만 명분은 명분일 따름이고, 사실은 강패가 가진 장부를 가지고 거래를 할 생각이었다.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강패는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일제강점기의 힘든 시기를 보낸 그로선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이 대한민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정착 자금 또한 뜯어낼 건 당연하다.
‘그 노인네가 그냥 순순히 물러나진 않겠지.’
강패는 김 씨과 조루에게 어제 흑룡을 보고 온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흑룡은 보통 노회한 인물이 아니었다.
협박으로 쉽게 물러날 만큼 간이 작은 사람이었다면 절대 그렇게 큰 조직을 이끌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빠득빠득 이를 갈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겠지.
‘아주 자근자근 밟아 주지.’
강패는 이번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흑룡이 아무리 조직원들을 다 끌어 모아도, 두려울 것 없는 강패였다.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진다면 흑룡파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들의 의견을 수렴함과 동시에 강패에게도 쏠쏠한 수익이 떨어질 것이다.
‘어차피 더러운 손으로 벌어들인 돈, 내가 써 주지.’
끼이익! 덜컥!
“타라, 형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현장에서 기다리던 일행 앞으로 고급 세단이 멈춰 섰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더니 모자가 나타났다.
강패가 빙글빙글 웃었다.
“또 너로군. 이젠 내 전용 기사가 되기로 한 건가?”
모자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평소처럼 발끈하진 않았다.
“저 친구, 기가 확 죽었군.”
김 씨가 속삭이듯 말하자 강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단에 탔다.
부르릉!
김 씨와 조루, 그리고 강패를 태운 고급 세단이 파업 농성을 하는 인부들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받으며 건설현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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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아무리 놈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기는 해도…….”
“회장님의 특별 명령이다. 무슨 수를 쓰든 녀석을 산 채로 잡아서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하셨지.”
이번 일에 전권을 위임받은 흑웅은 행동대장인 외칼을 옆에 둔 채 강패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서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찾았을지 궁금할 정도로 인적이 뜸한 빈 공터에는 흑룡파 조직원들 수십 명이 모여 연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전 도통 모르겠습니다. 형님.”
무슨 다른 조직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고작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니는 놈 하나를 잡기 위해 이렇게 많은 조직원들이 동원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냥 잡아서 담가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그리고 그 자금 내역서를 가지고 협상을 하자고 달려드는 놈도 이상하고, 그것을 받아들인 회장님도 이상합니다. 다들 이상해요, 형님.”
외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흑웅은 팔짱을 낀 채 저 너머만을 응시했다.
“보통 놈이 아닌 게다. 회장님께서 그걸 알아차리신 거야. 기린파일지도 모르는 놈이니, 만약 기린파 조직원들을 끌고 온다면 우리도 그에 맞설 만한 인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거다. 만약 그놈이 기린파가 아니라면, 이 인원을 가지고 쓸어버리면 될 뿐이다.”
흑룡의 의도를 완전 잘못 파악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 안에서는 상당히 신빙성 있고 논리적인 판단이었다.
외칼은 그런 흑웅을 대단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역시 형님! 대단하십니다!”
“후우, 이번 일을 잘 처리해야 할 텐데.”
거대한 덩치와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흑웅은 상당히 명석했다.
그는 정통 흑룡파 조직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백 없이 능력만으로 간부급에까지 오른 유능한 인물이었다.
부우웅.
“저기 옵니다, 형님!”
저 멀리서, 강패와 김 씨, 조루가 탄 고급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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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칵!
“어이구! 많이도 몰려왔군!”
차에서 내린 강패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잔뜩 긴장한 채 벼르고 있던 조폭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수가 대기할 정도로, 도대체 어떤 놈이 나타날지 궁금했는데 차에서 내린 인물은 정말 의외의 반전이었다.
때가 타서 원래의 빛을 잃어버린 와이셔츠와 구멍이 뚫린 허름한 양복바지.
세단에서 내린 인물은 그냥 멀대처럼 키만 큰 거렁뱅이가 아닌가?!
쭈뼛쭈뼛.
조폭들의 삼엄한 기세에 눌린 것인지 김 씨와 조루는 눈치를 잔뜩 보았다.
흑웅과 외칼은 강패 일행이 이번 일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흑웅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외칼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근처에 기린파도 없군. 그냥 담가 버리고 뒤져서 장부 찾아내라.”
“허헛, 참. 알겠습니다, 형님.”
외칼은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그가 신호를 보내자 역시 멍한 표정이던 조직원들이 연장을 고쳐 쥐면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 이보게, 어서 피하세나!”
김 씨가 화들짝 놀라 강패에게 소리쳤다.
“호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이건가?”
하나 강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놈! 저놈이 장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뒤져 보시면 됩니다!”
파다닥!
순간, 조루가 강패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조폭들에게 달려가며 손가락질을 해 댔다.
갑작스런 상황에 김 씨가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강패는 태연한 표정으로 조루를 쳐다봤다.
“저놈이 장부를 기린파에 넘긴다고 했습니다! 아마 복사본도 만들어 놨을지 모릅니다! 저놈에게서 반드시 뺏으셔야 합니다!”
조루는 재빨리 흑웅과 외칼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흑웅과 외칼의 시선이 강패에게로 향했다.
“저놈이 그놈인 것 같습니다. 혼자서 모자와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다는.”
“흠…….”
흑웅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강패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지만, 별달리 특별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팔다리가 길고 몸이 호리호리해서 유연함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모자와 다른 조폭들이 나가떨어질 정도의 힘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남루한 차림도 그 평가에 한몫을 보탰다.
“뭐,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달려드는 건가?”
“이, 이제 어떡한단 말인가!”
조루가 저런 행동을 보일 줄은 몰랐는지 김 씨가 크게 당황했다.
몸이 성해도 이렇게 많은 조폭들 틈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강패가 한 수가 있다 해도 다친 자신까지 챙기면서 싸우기란 거의 불가능할 터였다.
“협상하러 온 사람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건가?”
한데도 강패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이었다.
“아. 이런 식으로는 협상이 될 수 없겠지. 잠깐만 기다리는 게 좋을걸? 곧 있으면 다른 협상자가 올 테니까.”
“……잠깐!”
강패의 태연자약한 말에 흑웅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손을 들고 외쳤다.
그러자 우르르 몰려가던 조폭들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방금, 뭐라고 했지?”
“설마 내가 너희한테만 협상을 제의했다고 생각한 거야? 그러면 이걸 원하는 다른 곳들은 섭섭해서 안 되지. 그쪽에서는 접대도 끝내줬는데. 그런데 너희는 환영식이라는 게 고작 연장 들고 서 있는 것뿐인가?”
“끄응…….”
흑웅이 강패의 말뜻을 알아채고 신음을 흘렸다.
강패가 말한 다른 곳이란 딱히 어디를 가리키겠는가 말이다.
‘기린파…….’
흑웅의 머리가 재빠르게 굴러갔다.
놈의 말로 보아 기린파 소속도 아닌 듯한데, 어떻게 기린파와 협상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일반인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기린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흑룡파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흑웅은 강패가 기린파와 협상 얘기를 끌어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형님! 기린파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해치우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외칼이 재촉했다.
흑웅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린파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놈부터 처리한다! 그리고 기린파가 오면 놈들을 상대한다!”
흑룡파와 기린파의 힘은 백중지세였다.
게다가 지금 약속 장소로 잡은 곳은 흑룡파의 구역이었다.
마찰이 일어난다고 해도 백이면 백 기린파를 쓸어 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 정도로 인원들이 움직인 이상, 경찰 기관에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
마찰이 크게 일어나면 그들로서도 피곤한 일이 생길 테니, 일이 커질 경우 그들이 중재를 볼 수도 있다.
즉, 수습도 못할 정도로 일이 커질 염려 자체가 없는 셈이다.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저놈의 신변만 흑룡파에서 확보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쳐라!”
외칼이 크게 소리치자 연장을 움켜쥔 조폭들이 다시 강패에게 달려들었다.
김 씨가 기겁하면서 목발을 짚은 채 쩔뚝쩔뚝 뒤로 물러났다.
“거기까지!”
그 순간 공터를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거대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커다란 소리에 달려들던 조폭들이 움찔하고 멈추자 강패가 씨익 웃었다.
“자자, 이제 다른 협상자도 이곳에 나왔군. 어쩔 거야 너네는?”
“이익…….”
외칼은 한쪽에서 몰려오는 수십 명의 조폭들을 확인하고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차마 달려들진 못했다.
흑웅도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물러나라!”
흑웅의 손짓에 달려들던 조폭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기린파가 가까이 다가오자 가장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확인한 흑웅과 외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저 남자는…….”
“기린파의 하입니다.”
“젠장…….”
외칼의 보고에 흑웅이 하를 확인하고는 침음성을 삼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인자를 이런 위험한 곳에 보낼 정도로 기린파에서 공을 기울이고 있었다니.
“자, 이제 협상이란 말에 어울릴 법한 상황이 되었군. 그 전에…….”
흑룡파와 기린파가 대치한 사이에 선 강패가 흡족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슬금슬금.
조루가 살그머니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본 강패가 번개같이 그에게 다가갔다.
콰악!
“너…… 이 새끼…….”
강패의 손아귀에 잡힌 조루가 바동거렸다.
그 모습을 본 기린파의 하와 흑룡파의 흑웅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인간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강패가 바닥을 톡 하고 차는 순간 쏘아지더니, 꽤 머릴 떨어진 조루를 붙들었다.
흡사 새가 먹이를 낚아채는 듯했다.
게다가 한 손으로 조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조루가 아무리 작다고는 하나, 작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무게가 적지 않을 텐데 말이다.
‘겉모습과는 딴판이군.’
키만 멀대처럼 크고 힘은 없어 보였는데, 생각외의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흑웅은 의외인 강패의 위력에 내심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의 말을 또다시 믿은 게 내 잘못이구나. 쓰레기만도 못한 놈.”
“컥, 커컥…….”
강패의 악력이 얼마나 강한지 조루의 목덜미를 번쩍 들어 올리자, 조루가 옷깃에 목이 졸려 밭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만하게! 그러다 죽겠네!”
버둥거리는 조루가 안쓰러웠던지 어느새 돌아온 김 씨가 강패를 뜯어말렸다.
강패는 김 씨를 힐끗 쳐다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네놈은 죽는다.”
휙!
강패는 쓰레기를 버리듯 조루를 집어 던졌다.
“으, 으아아!”
쿵!
허공을 날아간 조루가 땅바닥에 그대로 처박혔다.
‘……무력시위인가.’
‘과연…….’
흑웅과 하는 그런 강패의 행동을 보면서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흑룡파와 기린파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사이에서 무력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결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것으로 불합리한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다.
강패가 후련한 표정으로 흑룡파와 기린파를 휘휘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제 협상을 시작해 볼까? 부하들 뒤로 물려.”
“뭐, 뭐……? 이 새끼가 어디서 감히…….”
“외칼! 어디서 네놈 따위가 감히 조직 간의 행사에 끼어드는 거냐!”
외칼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기린파에서 괄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외칼이 쌍심지를 돋우며 기린파를 노려보았다.
“노불…….”
하나 소리친 자를 발견한 외칼은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기린파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인 노불이었던 것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인지 머리를 박박 밀고 등에는 관세음보살의 문신을 새긴 노불이 외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가장 즐겨 듣는 음악과 책이 불경이라 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는데, 원래 표정 자체가 항상 화를 내고 있는 듯한 인상이라 노불이라 불렸다.
기린파에서 노불의 위치는 흑룡파로 친다면 흑웅과 비슷했다.
아무리 다른 파라 해도 서열이 존재하는 조폭 세계에선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게 관례였다.
외칼은 흑웅의 부하였기 때문에 노불의 말에 뭐라 반박할 수는 없었다.
“이야, 저 대머리 목소리 한번 크다!”
명명백백 라이벌 조직에서 면박을 준 꼴이기 때문에, 흑룡파와 기린파 사이의 긴장감이 거칠게 고조돼 가던 때였다.
강패가 노불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긴장감의 축이 허물어지며 고조되던 분위기가 깨어졌다.
“대, 대머리!?”
노불은 대머리란 별명을 제일 싫어했다.
사실 그는 불심 때문에 머리를 민 것이 아닌, 대머리였다.
그가 당장이라도 강패에게 달려들 듯 어깨를 들썩였지만, 하가 고개를 저었다.
노불은 화가 끓었지만 이내 분노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강패를 향한 강한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자, 저희는 저번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조건을 수락할 용의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넘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가 예의 그 날카로운 눈매를 반짝이면서 차분한 어조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 정중함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강패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건 협상 자리야. 그러니 저쪽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그러려면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을 말해 줘야 하지 않겠어?”
하는 내심 이를 갈아붙였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흡사 경매를 붙이는 것과 같지 않은가.
강패를 덮치고 장부를 빼앗는 수도 있었지만, 이미 강패의 실력을 잘 알았고, 혹 장부를 손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그땐 흑룡파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자신들이 제시한 조건을 흑룡파에게 말하라는 강패의 말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땅히 다른 수가 없었다.
강패의 속셈은 뻔했다.
기린파와 흑룡파 사이에서 최대한의 이득을 벌어먹겠다는 뜻.
“협상이라…… 알겠습니다.”
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절대로 흑룡파와 조선 그룹의 치부를 놓칠 수 없었다.
광명 그룹에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장부를 입수하라는 지시사항이 내려왔다.
때문에 기린파는 더욱더 거리낌 없이 큰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저희 보스께서는 1억을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1, 1억?”
고작 손바닥만 한 장부 한 권에 1억이라니.
김 씨가 헉 소리를 내뱉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김 씨는 크게 놀랐지만 흑룡파에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저 장부가 고작 1억밖에 안 된다고?”
혹시라도 저 돈에 혹해 강패가 책을 넘기겠다고 하면 큰일이었다.
때문에 흑웅은 강패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하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긴 했지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최하로 제시한 것인가.’
그런 하의 모습을 보고 흑웅은 머리를 굴렸다.
기린파나 광명 그룹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1억으로 저 장부를 살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부는 그만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자, 저쪽에서는 너희들이 제시한 가격이 너무 적다고 하는군.”
강패가 기린파의 하를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하는 흑룡파가 있는 이상 결코 적당한 가격 선에서 타협이 안 되리란 생각을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2억…….”
“겨우 그것이 다냐!”
강패는 당연히 1억이란 금액이 얼마나 큰돈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김 씨의 반응으로 보아 그것이 매우 큰 액수라는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흑룡파의 반응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장부의 가치가 1억을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 또한 유추해 냈다.
강패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더럽게 착복한 돈. 내가 모두 가져가 주마.’
강패가 나설 필요도 없이, 기린파에서 제시를 하면 흑룡파에서 열심히 퇴짜를 놓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