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코를 골 기세로 눕자마자 잠들었던 강패가 번쩍 눈을 떴다.
잠이 든 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듯 지하보도는 아직도 어두웠다.
“뭐야, 이 녀석. 엄청 예민하게 굴 것 같더니…….”
강패는 자기 옆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세상모르고 자는 재미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지하보도에 군식구가 한 명 더 늘었지만 노숙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니, 개의치 않았다기보다는 워낙 늦은 시간이라 이미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한 명쯤 더 낀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참. 아침 댓바람부터 시끄러우면 하루 일진이 안 좋은데.”
강패가 지하보도 계단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을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너냐?”
“…….”
방금까지 잠들어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또렷한 목소리.
강패는 어둠 속에 동상처럼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 남자는 가만히 서서 강패를 쳐다봤다.
“다시 올 놈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빠드득.
“이런 개새…….”
목소리는 낯익었다.
그리고 손전등 빛이 비치는 순간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중절모의 주인, 모자가 이를 바득 갈았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아? 그러다 영영 뼈 안 붙으면 그게 무슨 고생이냐.”
건설현장에서 강패에게 깨졌던 흑룡파의 모자가 지하보도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쓸 만한 놈들을 골라서 몰려왔네. 추운데 밖에서 떨지 말고 다 들어오라 그래.”
으득.
거의 인기척도 내지 않았는데, 강패는 자신이 들어온 사실을 알았던 것처럼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하긴 그도 못 알아챌 정도로 어중간한 실력이었다면 자신과 부하들이 그토록 맥없이 나가떨어질 리가 없었을 터였다.
한데 바깥에 있는 애들까지 미리 눈치챌 줄이야.
태평한 강패의 모습에 이를 바득 간 모자였지만 섣불리 덤빌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 장부만 주면 조용히 물러가마.”
건설현장에서의 실패로 인해 흑룡파의 계획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덕분에 조선 그룹에서 흑룡파는 더없는 수치를 당하고 있었다.
툭하면 계약을 끊겠다고 협박 전화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요즘엔 거의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상황 보고를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가 내려왔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모자는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장부를 빼앗긴 게 본인이 아니던가 말이다.
모자도 자신의 조폭 인생을 걸고 기필코 장부를 되찾아야 했다.
“다들 내려와!”
모자가 강패를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하자 거대한 덩치 열댓 명이 우르르 내려왔다.
“쯧쯧, 이미 들킨 이상 틀렸다는 걸 알았어야지.”
강패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모자는 어느 정도 자신만만했다.
이번에 데려온 애들은 조폭이라기보다는 잘 훈련된 군인처럼 절도 있게 모자의 뒤에 기립했다.
강패의 이죽거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폭들과는 다르게 침착했다.
겉으로 힐끗 보기에도 탄탄한 육체는 놈들이 정말 싸움에만 특화된 놈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네놈이라도 우리 흑룡파의 정예들을 상대론 절대 무사하지 못한다!”
모자는 강패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정예들이 열 명이 넘게 왔으니 절대 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간부급인 모자만 해도 이들 한 명과 일대일로 붙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실력자들이 열 명이 모인데다가 이 정예들은 다대다, 일대다 등의 각종 싸움에 전문화돼 있는 이들이었다.
이번 일은 흑룡파의 중차대한 명운이 달려 있었고, 아마 보스인 흑룡의 지시가 정예 조직원들에게 전달됐을 터이니 자연스레 그들의 태도는 신중해졌다.
“마침 잘됐다. 안 그래도 날 밝으면 너네들 윗대가리나 보러 가려고 했는데. 너희가 우릴 모시고 가면 되겠군.”
강패가 비웃음을 머금고 모자와 조폭들에게 말했다.
“흥! 필요 없다. 여기서 네놈을 박살 내 버리고 장부를 가져가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감히 네놈 같이 저급한 놈이 보스를 뵐 수 있을 것 같나?”
“공복에 싸우는 것만큼 짜증나는 게 없는데. 저번에 다쳤던 것보다 더 심하게 다칠 수도 있다?”
빙글거리는 강패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모자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질 리가 없어!’
하지만 이내, 혼자인 강패에게 절대로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대도 완벽했다.
근처에 경찰 기관들이 있었지만 이런 지하보도까지 새벽 순찰을 돌기에는 경찰 인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상황은 강패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를 도와줄 사람도, 자신들을 말릴 사람도 없었다.
한데 뭘 믿고 저렇게 건방지단 말인가?
“쳐라!”
모자가 소리치자 각각 손에 쇠파이프를 쥔 조폭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강패를 향해 다가갔다.
다른 조폭들처럼 막무가내가 아닌, 차분히 지하보도를 걸어오는 모습은 사뭇 위압감이 흘러넘쳤지만, 강패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나 참. 누가 보면 내가 난 악당인 줄 알겠네.”
조폭치고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비장함마저 넘치는 모습에 강패가 피식 웃으면서 비꼬았다.
하지만 조폭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 몸을 모시고 윗대가리를 보러 가야 하니 너무 다치면 그것 또 곤란하지. 딱 적당할 정도로만 패 주마.”
강패가 와이셔츠의 주섬주섬 말아 올린 소매가 단단하게 접혔는지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덤벼!”
“으아압!”
타닥!
조폭 하나가 쇠파이프를 들고 높이 날아올랐다.
*
*
*
“으아…… 으아아!”
“도망가!”
“우웅…….”
퍼억! 퍽!
파각!
한창 잠들어 있던 재미는 주위가 소란스러워지자 눈을 떴다.
“도망가!”
재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자던 노숙자들이 허겁지겁 일어나 지하보도 바깥으로 달려 나가자 고개를 갸웃했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 조폭!”
검은 정장을 아래위로 맞춰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조폭 열댓 명이 한쪽에 우르르 몰려와 있던 것이다.
그들은 제각기 손에 쇠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영화에서 빼고 조폭을 실제로 처음 본 재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조폭이 왜 여기 있지? 잠깐…… 형?’
이름도 제대로 몰랐지만 자신의 옆에서 자던 강패가 없자 재미가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 버리고 먼저 도망간 건가? 아니야. 그랬으면 도와주지도 않았을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강패는 보이지 않았다.
조폭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지며 비명 소리에 두려움에 빠진 재미는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
부웅!
“응?”
순간 조폭들 사이를 쳐다보던 재미는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조폭 한 명이 허공으로 붕 뜬다 싶었는데, 그 사이로 강패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퍼억!
“쿠에엑!”
붕 뜬 조폭은 이어지는 강패의 주먹에 배를 얻어맞자 실 끊어진 연처럼 공중을 날아 한쪽 벽에 처박혔다.
“뭐야. 저번보다 나은 놈들인가 싶었는데, 거기서 거기잖아?”
강패가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주위를 둘러싼 조폭들이 움찔거렸다.
“우, 우와…….”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재미는 감탄을 흘렸다.
그리고 그제야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보도 여기저기에 게거품을 문 조폭들 대여섯 명이 쓰러져 있었다.
“짜, 짱이다.”
재미의 눈에 강패가 조폭을 날려 버리는 모습이 또렷하게 박혀 버렸다.
“더 할까? 아니면 네놈 윗대가리한테 데려갈래? 거기서 머릿수 좀 더 늘려서 덤벼지?”
강패의 비아냥에 모자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푹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정예라고 자부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왔다.
그것도 보스인 흑룡이 직접 보내 준 이들인데도 강패를 당해 내지 못했다.
‘주먹으로 쇠파이프를 구겨 버리다니.’
게다가 열댓 명의 전문 싸움꾼 조폭들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쇠파이프를 주먹으로 모조리 부숴 버리는 것을 본 모자는 더 이상 덤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강패 말대로 아지트로 데려가 더 머릿수를 채워서 박살 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따라 와라.”
이를 악문 모자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강패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괜히 엄한데 힘쓰지 말라니까.”
주먹을 쥔 모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내 힘을 잃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죽일 테다.’
부릅뜬 모자의 두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어 분노를 털고 강패를 데리고 지하보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패는 조폭들을 마치 부하 다루듯 했다.
조폭들의 본거지로 뛰어드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태평했다.
“머, 멋있다……!”
강패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조폭들을 데리고 지하보도를 빠져나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미가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재미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습을 강패에게서 본 것이다.
강함과 당당함. 그리고 어제 같이 다니면서 뼈저리게 느꼈던 고집과 자유분방함까지.
꼭두각시처럼 소속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인형처럼 팬들 앞에서 365일 24시간 내내 웃어야만 했던 재미가 보기에는 강패가 그토록 멋있을 수 없었다.
노숙자라고는 하지만 절대로 비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유로워 보일 수 있다니.
눈을 빛낸 재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제는 자신을 빼고 텅 비어 버린 지하보도를 바쁜 발걸음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매니저 형한테 연락해야겠어.”
멀찍이 누워만 있던 재미는 미처 몰랐지만, 강패와 모자 그리고 그 뒤의 흑룡파 조직원 사이의 분위기는 입도 뻥긋 못할 정도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강패는 그 삼엄한 살기 속에서도 태평하게 어슬렁어슬렁 모자의 뒤를 따랐다.
“하암…….”
찌릿!
그 와중에도 태연하게 하품을 쩍쩍 해 대는 강패에게 일제히 조폭들의 찢어죽일 듯한 시선이 꽂혔다.
한데 강패가 왜 쳐다보냐는 듯한 태평스런 시선으로 돌아보는 게 아닌가?
오히려 조폭들의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저기 타라.”
“자동차?”
강패가 지하보도 바로 밖에 세워져 있는 번쩍번쩍한 고급 세단을 보고서는 눈을 빛냈다.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강패가 뭐라건, 그와 상종도 하기 싫었던 모자는 먼저 차에 탑승했다.
강패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지리도 약한 놈이 자존심만 저렇게 강해서는…… 쯧, 너도 오래는 못 살겠다.”
“이, 이놈이…….”
강패의 말을 들은 조폭 하나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지만, 강패는 귀를 후비적거렸다.
덜컥.
강패가 손잡이를 당기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강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 고물 봉고차와는 차원이 다르군.”
건설현장으로 갈 때 인력 사무소 소유의 차를 타고 이동했었다.
그 차는 얼마나 낡았는지, 커브를 돌 때마다 차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 차에 비교하면, 고급 세단은 척 보기에도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털썩.
“캬아! 이 부드러운 것 좀 봐라.”
모자 옆자리에 엉덩이를 밀어 넣은 강패가 시트의 쿠션에 만족한 듯 감탄사를 뱉었다.
옆으로 비켜나야만 했던 모자는 속으로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감히 그곳이 어디라고 제 발로 기어 들어갈 생각을 하다니. 반드시 네놈의 명줄은 내 손으로 끊어 주마.’
속으로 칼을 벅벅 가는 모자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뻗쳐 나왔다.
강패는 그 살기를 느끼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자!”
모자가 운전석에 앉은 부하에게 말하자 세단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늦은 시각이었지만 조선 그룹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어떻게 무마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흑룡은 아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뭐? 여기로 누가 와?”
자신의 회장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흑룡은 비서가 전하는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금 내역 장부를 빼돌려 간 놈이 제 발로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예, 그놈을 잡는다고 모자와 조직원들이 몰려갔더니, 그놈이 회장님께 찾아오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당했나 보군.”
비서는 부하들이 깨졌다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룡은 단박에 결과를 알아챘다.
이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일이다.
만약 일이 성공했다면 놈이 찾아오는 게 아닌, 장부만 돌아올 터였다.
날카로운 판단력에 비서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흑룡은 뿌리가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제 발로 여기를 찾아온다니……. 어떡하면 좋겠나.”
“저…… 그것이…….”
흑룡이 넌지시 물었지만 비서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 우물쭈물할 뿐 대답이 나오지 못했다.
흑룡이 쯧쯧 혀를 찼다.
“보통 배포를 가진 놈이 아니야. 그리고 그 정도로 뛰어난 실력이면 놈은 기린파가 아니야.”
“예?”
“젠장, 일이 단단히 꼬여 버렸어. 어떡한다…….”
알아듣지 못할 말에 비서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톡, 톡, 톡.
비서가 그러거나 말거나 생각에 잠긴 흑룡이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두들겼다.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일단 애들 전부 모아. 근방에 있는 애들까지 싹 다! 여차하면 놈을 깨끗하게 지워 버린다.”
“회, 회장님!”
“나가 봐!”
비서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흑룡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흑룡은 올해로 예순이 다 되어 가는 나이였지만, 그의 몸은 옷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탄탄하고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다.
손에 박힌 단단한 굳은살과 형형한 눈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가 환갑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도약이 될지, 아니면 올가미가 될지. 놈을 보고 나면 알 수 있겠지.”
웬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가 싶었다.
한데 생각해 보니 그 미꾸라지가 단순히 바닥에 깔린 흙을 끌어 올려 흐리게 한 것이 아니라 꼬리로 돌맹이까지 쳐 낸 모양이었다.
흑룡파라는 거대한 댐은 그 미꾸라지 한 마리가 쳐 낸 돌맹이로 인해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흑룡은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린 끝이다.”
다른 조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지만 흑룡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선 그룹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자금만 투입된다면, 흑룡파의 자리를 대신할 만한 조직들은 대한민국에 차고 넘쳤다.
조선 그룹이 떨어져 나간다면 흑룡파는 단박에 서울 3대 조직의 서열에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흑룡파에게 기가 눌려 숙이고 지내야 했던 수많은 조직들 중에 하나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한번 몰락하기 시작한 조직은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은원도 많고.’
7, 80년대 암흑가에 발을 처음 들여놓은 이래 2강 체제이던 서울 암흑가를 3강 체제로 구축한 전무후무한 인물인 만큼, 흑룡에겐 수많은 정적들이 있었고 다양한 은원에 얽혀 있었다.
그런 흑룡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누구보다도 그들이 제일 먼저 쌍수를 들고 찾아올 것이다.
죽음이라는 선물을 안고.
달칵.
흑룡이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자 그 안에서 묵직해 보이는 권총 한 정이 나왔다.
이제 동이 트려는지, 검기만 하던 하늘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짙은 남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흑룡은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이제 늙은 건가.’
자조적으로 웃어 보인 흑룡은 손님맞이를 위해 옷을 차려입었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서랍 속의 권총을 꺼내 품에 넣은 그는 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
*
*
끼익.
고급 세단이 멈췄지만 차 안은 숨이 막힐 듯한 침묵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폭들과 모자는 차 안에서 강패를 덮칠까 했다.
한데도 강패는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바깥 풍경을 감상할 따름이었다.
그 배짱 때문인지 차 안에선 그저 살벌한 분위기만 맴돌 뿐 딱히 사고가 터지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세단은 흑룡파의 본거지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회장님이 계신 곳이다.”
“호오, 꽤 으리으리한데서 사네?”
모자가 가리킨 바깥의 건물을 쳐다본 강패가 감탄사를 흘렸다.
지하보도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는데, 강패가 보기에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이었다.
‘잘난 척도 여기까지다. 네놈은 저곳에 들어서는 순간 반드시 죽는다.’
모자는 강패의 최후를 예상했다.
흑룡파의 일을 훼방 놓은 것만 해도 서해 앞바다에 던져지기 충분했다.
한데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흑룡파의 본거지에 자신들의 보스인 흑룡을 직접 만나겠다고 찾아오다니…….
“이제 내리…….”
빡! 빠박!
쿵! 털썩!
모자는 강패에게 내리라고 말하려는 순간, 배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끼고 정신이 아득하니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채 정신을 잃기도 전에 연이은 찰진 소리가 들리더니 앞좌석에 앉은 똘마니들도 입에 거품을 문 채 축 늘어졌다.
“네놈들의 속셈을 모를 줄 알아?”
강패가 말했지만, 이미 기절해 버린 모자와 조폭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경련만 일으킬 뿐이었다.
“여기서 잠들 좀 자고 있으라고. 괜한 푸닥거리 할 것 없이 흑룡이라는 놈만 만나면 되니까.”
달칵.
차문을 열고 내린 강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있는 고층 빌딩을 보면서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