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이거 뭐. 제대로 일 좀 하려고 하면 하루가 다 지나가는구만.”
아침에 지하보도를 나섰던 강패는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무엇을 잔뜩 먹었는지 배가 볼록 나와 있었고, 얼굴은 제법 흡족해 하는 표정이었다.
‘그 조그마한 책 한 권의 위력이 대단하군.’
강패가 보기에는 그저 숫자만 잔뜩 적혀 있는 작은 책에 불과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보게, 자네 무사한가?”
“……?”
지난 며칠 동안 강패와 함께 생활했던 낯익은 노숙자 하나가 말했다.
“글쎄, 오늘 김 씨가 파업 농성인가 뭔가에 휘말렸다가 크게 다쳤다는구만. 쯧쯧.”
“뭐요? 농성?”
강패는 노숙자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파업 농성이라니.
강패에게 오늘 공사장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한 게 누구였는데.
그래서 강패는 자신이 잠에서 깼을 때 김 씨가 없는 걸보고 밥을 먹으러 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파업 농성 현장에 간 모양이었고, 그렇다는 말은 굳이 돈도 주지 않는 건설현장에 나갔다는 소리였다.
“왜 나갔지? 돈도 안 주고 일도 못하는데.”
강패의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노숙자가 아는 체를 하면서 끼어들었다.
“쯧. 김 씨가 지금은 그래도, 노숙자가 되기 전에는 건설 회사 사장이었다고 하더만. 근데 대기업이 횡포를 부려서 망한 모양이야. 그런데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니까 참지 못하고 나간 모양일세.”
“건설 회사 사장?”
강패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러고 보니 그 조장이란 놈과도 아는 사이 같았지? 그래서였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난히 그런 건설현장 쪽에 익숙해 보였다.
게다가 인력 사무소에도 필요 인원보다 찾아온 사람이 많아서 그 사람들을 돌려보낼 지경임에도, 김 씨에게 조장이란 놈이 깍듯하게 굴며 일자리를 내주지 않았던가.
김 씨가 강패에게 알려준 수많은 조언들은 그냥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자기 몸도 건사 못하면서 멍청하게 다치기나 하다니.”
강패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자기 자신도 노숙자고, 강패에게는 그렇게 몸 다친다고 피하라고 하더니, 정작 본인이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다가 다친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디 있답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여러 조언을 준 정이 있었기에 강패는 그냥 무시하지 못하고 물었다.
“아마 그 근처 병원으로 갔을 거야. 파업 농성이면 웬만큼 다쳐서는 병원도 가지 않는데, 병원을 보낸 걸 보니 다치게 한 놈들이나, 다치는 걸 보고 있던 놈들이나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다친 모양일세. 쯧쯧. 돈도 없을 텐데…….”
노숙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돈 이야기를 꺼내자 강패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놈의 돈, 돈. 이건 뭐 사람이 다쳐도 돈이고, 죽어도 돈이고. 돈을 주면 살고 안 주면 죽고. 젠장할.”
유독 노숙자들과 있어서인지 돈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패 자신만 해도 돈에 엮여서 사람에게 속았고, 그래서 팼고, 지금은 책 쪼가리로 돈을 벌어 보겠다고 움직였던 것이 아닌가.
“이놈의 세상을 확 뒤집어엎든가 해야지, 원.”
투덜거린 강패가 김 씨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을 다시 물어보고서는 어두컴컴한 밤길을 나섰다.
“이런 제기랄. 병원도 안 들여보내 줘? 옷을 이따구로 입었다고?”
강패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폴폴 풍겨 나오는 병원 앞에서 인상을 와락 찌푸린 채 땅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뭐? 병균이 옮아? 호박 같이 생긴 게! 니가 더 병 옮기게 생겼다!”
김 씨를 찾아간 강패는 병원 입구에서부터 간호사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병문안을 왔다지만 이렇게 더럽게 하고 다니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병균을 옮길 수도 있다며 꾀죄죄한 강패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강패는 울화통이 터졌지만 병균이 옮을 수도 있다는 말에 일단 밖으로 나왔다.
“내 드러워서. 거참. 옷만 더럽지 다른 곳은 깨끗하구만.”
사실 강패가 드러운 것은 옷뿐만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빨래를 안 했기 때문에 하얗던 와이셔츠는 회색빛을 띠었다.
바지 역시 공사현장에서 묻은 모래 먼지들로 인해 꾀죄죄했다.
몸은 꼬박꼬박 목욕을 해서 제법 깨끗한 편이었지만, 간호사들은 강패가 걸친 옷을 보고 무작정 쫓아냈다.
“이제 와서 옷을 찾을 수도 없고. 거참…….”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김 씨를 안 보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내일 조루와 함께 흑룡파로 가기로 한 걸 김 씨도 껴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오늘 보는 것이 좋았다.
옷을 사면 간단한 문제지만, 밤이 깊어 옷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다.
“어쩐…… 응?”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저건?”
한쪽에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한군데 몰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강패는 알지 못했지만, 교복을 입은 여중고생들이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쩍어 보이는 모습을 한 사람 두 명이 병원 벽을 따라 살금살금 걷고 있었다.
옷깃을 세우고 주변을 연방 흘끔거리는 게, 자기들이 들킬까 무척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잠깐?”
한 겨울이긴 하지만 바람도 안 부는데 검은 마스크를 쓰고, 눈이 가려질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서는 주위를 둘러보는 폼이 영 수상쩍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강패는 그들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눈을 번쩍였다.
남자의 키를 대충 가늠해 보고, 어깨 넓이도 훑어본 강패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나랑 체형이 비슷하잖아?”
한국인치고는 큰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의 강패였다.
그리고 저 둘 중 하나는 강패와 체형이 비슷했다.
스슥!
강패가 은밀하게 그들 뒤로 다가갔다.
“잠깐 옷 좀 빌립시다.”
“헉……!”
“누구……?”
퍽! 퍼억!
가벼운 일격에 두 사람이 풀썩 쓰러졌다.
“잠깐. 아주 잠깐만 빌립시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정이 있는데 얼굴만 보고 금방 나와야 하지 않겠어.”
사정을 설명하고 빌릴 수도 있었지만, 사정이 다급했던지라 그들을 기절시켜 버렸다.
면회 시간이 지나면 김 씨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패는 남자의 코트를 벗기고, 모자도 벗겼다.
“흐음……. 고놈 참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네.”
모자를 벗기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같은 남자인 강패가 보기에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잘생겼었다.
남자답게 잘생긴 것이 아니라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것이 기생오라비라는 말이 딱이었다.
어쨌거나 이내 관심을 끊은 강패는 남자의 코트를 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캬. 뭘 뿌리고 다니길래 이렇게 냄새가 독한 거야?”
코트에서 진동하는 향수 냄새에 강패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엄동설한에 무고한 일반 사람을 기절시킨 것도 모자라옷까지 가져다 입었으니 강패는 볼일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강패가 기절시킨 두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번쩍.
너무나도 가볍게 양손에 한 명씩을 든 강패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디다 놔야 탈 없이 잘 지나갈까. 흐음…….”
고민에 잠겼던 강패가 병원 주차장 입구에 서 있는 구급차를 보고서는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추운 데보다는 저기가 훨씬 낫겠지?”
당연히 구급차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모르는 강패였다.
덜컥.
강패가 구급차의 뒷문을 열고 두 남자를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깊게 눌러쓴 모자와 긴 롱코트로 몸을 가린 채 유유히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김 씨는 독실을 쓰고 있었다.
강패는 1인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어이. 노가다 양반. 우리 이걸로 합의 봅시다. 에?”
“아, 아니…… 이봐…….”
“그냥 깔끔하게 우리랑 합의 보고, 돈 좀 받고 말 몇 마디 하면 되는 건데 뭐가 그리 어렵나?”
“그래도 말일세…….”
“무려 1억이요, 1억. 당신이 어디 가서 이런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1, 1억?”
“그래. 1억. 1억 받고, 이번 건 합의하고 대신 몇 마디만 우리가 말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 거요.”
병실 침대에 누운 김 씨는 팔과 다리에 붕대를 한 것을 빼고는 정신도 멀쩡한 것이 팔팔해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딱 봐도 험상궂어 보이는 덩치들 세 명이 김 씨의 침대를 에워싸고 있던 것이다.
하나 같이 험상궂은 얼굴이 ‘나 조폭이요’라고 광고를 하는 듯했다.
그들은 김 씨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었다.
“하, 이 양반. 답답하네. 그냥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언제 만져 볼지 모르는 큰돈에, 우리 흑룡파와도 좋은 관계도 유지하는 것 아니요? 혹시 알아? 이번 일이 잘돼서 인생 펼지!”
조폭들 중 하나가 김 씨의 무릎 위에 놓인 종이를 보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 그래도 같이 파업을 하던 사람들을 어떻게 배신을 하고…….”
“이봐, 늙은 양반.”
그래도 김 씨가 주저하자,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던 조폭이 스산하게 말했다.
“그렇게 볼 수만도 없지. 배신? 그래, 그깟 배신 몇 번이고 하는 게 이 바닥 생리인 건 잘 아실 테고. 조루 새끼도 배신을 했으니까 아저씨도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잖아. 안 그래? 상대는 조선 그룹이야, 조선 그룹. 경찰도 주무르고 검찰도 주무르는 대한민국 재벌 기업. 그런데 기껏해야 하청 업체 사람들이랑 노숙자 노가다꾼들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애? 어? 그래서 파업해 가지고 돈 몇 푼 돌려받으면 만족하겠다 이건가? 엉?”
꾸깃.
김 씨는 단 한 번에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저들에게 협박을 받는 현실이 억울한 건지 그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바람에 그가 쥐고 있던 종이가 구겨졌다.
“편하게 편하게 갑시다. 어차피 인생 한 번 사는 거 아니요? 나 같으면 이 꼴로 사느니 돈 받고 떵떵거리며 살겠수다. 아저씨는 자식들도 없소? 노숙자면 자식들이랑도 떨어져 살 텐데 아비 노릇도 하고 그래야지. 어?”
툭툭.
솥뚜껑만 한 조폭의 손이 김 씨의 어깨를 툭툭 밀자 김 씨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순순히 말 듣는 게 좋을 거요. 아니면 우리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깐. 큭큭큭.”
조폭이 능글맞게 말하며 웃었다.
김 씨는 창백해진 얼굴로 주먹만 부들부들 떨었다.
드르륵! 쾅!
순간, 거친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조폭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색 코트를 걸친 강패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떤 새끼야!”
“입 다물어!”
깜짝 놀란 조폭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마주 소리치는 강패의 기세에 오히려 주춤하고 말았다.
문밖에서 모든 일을 다 들었던 강패는 지금의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패는 김 씨에게 다가갔다.
“누……누구……?”
척.
김 씨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강패는 가타부타 대답 없이 김 씨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러게 낄 데 안 낄 데 가리라지 않았소.”
“자, 자넨……!”
목소리의 주인이 강패란 것을 알아챈 김 씨가 반갑게 소리쳤다.
강패는 뒤로 돌아 조폭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
“무, 무슨 소리야!”
김 씨의 팔다리에 감은 붕대를 보고 강패는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만약 사고라면 이런 식으로 다치지 않는다.
어딘가 피부가 찢어지거나, 긁히는 등의 자잘한 상처들도 남는다.
한데 김 씨는 팔다리에만 붕대를 감고 있었다.
“눈알을 후벼 파기 전에 눈 돌려라.”
난투극에 휘말려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노숙자의 말과는 달리, 난투극에 휘말린 사람치고 김 씨의 몸에는 별다른 생채기조차 없었다.
다른 데는 말짱했던 것이다.
그 뜻은 누군가 고의적으로 김씨를 봉쇄하려 했다는 말이다.
“이런 씨발. 너 뭐야 이 새끼야! 어디서 감…….”
뻑! 콰지직!
“끄악!”
한 조폭이 앞으로 나섰다가 강패에게 얻어맞고 코뼈가 함몰된 채 주저앉았다.
강패가 그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컥! 커헉!”
조폭이 허공에 뜬 채 바동거리다 게거품을 물었다.
강패는 서늘했다.
지금까지는 차라리 시원하게 패 버리고 말았지, 이렇게 조폭들을 매몰차게 대하진 않았다.
휙! 퍼억!
강패가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조폭을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지금까지의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본 남은 두 조폭이 찔끔했다.
그들은 재빨리 눈을 깔았다.
강패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흑룡파 놈들이냐?”
“예…… 예…….”
“흑룡파란 말이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다시 한 번 내 눈에 띄면 네놈들은 평생 팔 병신으로 살게 해 주마. 어서 저놈 데리고 꺼져.”
“예, 옛!”
“감사합니다!”
남은 조폭 둘이 기절한 조폭의 팔을 한쪽씩 붙들고 줄행랑을 쳤다.
김 씨가 강패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어떻게 여길…….”
“아니, 나이를 그 지경으로 먹도록 낄 곳, 안 낄 곳도 구별 못하는 거요? 나 참.”
강패가 핀잔을 주자 김 씨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고맙네.”
“근데 무슨 이야기요. 듣자하니 돈을 주고 뭘 하라고 하던데. 김 씨 얼굴이 워낙 안 좋아서 내가 중간에 끼긴 했다마는…….”
“그게 말일세…….”
김 씨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강패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돈이다.
‘그놈의 돈, 돈.’
용역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파업 농성을 하는 사람들과 용역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김 씨도 말려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 용역들이 사람들을 무조건 패는 것이 아니라 몇 명만 골라서 때리더라는 것이다.
김 씨는 팔과 다리에 타박상을 입은 채 용역들에 의해 이 병원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갑작스런 용역들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김 씨는 1인실을 받자 더욱 놀랐다.
그렇게 치료를 받고 있는데 방금 전에 왔던 놈들이 들어와 1억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러며 하는 말이 이번 일에 대한 합의를 원하고, 더불어 1억을 받고 싶다면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말만 몇 마디 하면 된단다.
“그렇게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만들어 놓으려는 셈일세. 참 무서운 세상이야. 돈으로 진실을 날조하고 위조하려 하다니. 안 그런가?”
“…….”
김 씨의 말을 들은 강패는 인상을 와락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돈의 힘이 이리도 강한 세상이라니.
강패가 살던 세상도 돈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강패가 보건대, 이 세상은 사람 생명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돈 이야기를 들은 것 같군.’
돌이켜 보니 강패는 대한민국에 온 이후로 돈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돈은 사람의 삶만큼이나 중요했고,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마음에 들지 않아.’
인간미가 없었고, 정이 없었다.
많은 돈도 아니었고 고작 몇 십만 원이었지만 그 돈 때문에 자신을 속인 사람도 있었고, 대가로 줘야 할 돈을 주지 않고 버텨서 분쟁을 만드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돈을 내밀면서 진실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다.
“흑룡파란 곳,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패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것도 저놈들이 괜히 과장스레 감아 놓은 거야. 타박상 정도라고 하던데, 내일이면 아마 퇴원할 수 있을걸세. 흑룡파 간부 놈 찾아가는데 나도 꼭 같이 가야 하네. 놈들의 잘난 면상을 내 눈으로 봐야겠어.”
김 씨가 왜 굳이 그곳에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강패로서는 나쁠 것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패를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아직 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데 조루와 단 둘이 갔다가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했다.
“내일까지 쉬쇼, 그럼.”
“그래야지! 이렇게 좋은 방을 공짜로 얻었는데. 지하보도보다 만 배는 더 낫지 않은가? 하하하.”
김 씨가 벌렁 드러눕자 강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기는 무슨. 썩은 돈 냄새만 풀풀 나우. 그럼 난 갑니다.”
“여기서 자네도 자라고 하고 싶지만 자네 꼬락서니를 보면 간호사들이 가만두지 않겠지. 그럼 내일 보세.”
강패는 김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걸어 나왔다.
드르륵, 탁.
미닫이문이 소리를 내면서 닫혔고, 병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걸어가던 강패는 순간적으로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하고 쳤다.
“맞다! 이 옷이랑 모자 주인! 주인한테 돌려줘야지.”
*
*
*
“아우 형! 이거 어떡해요!”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으그극…….”
“대체 옷이랑 모자은 왜 가지고 간 거야!”
구급차 안에서 자신이 기절시킨 듯한 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강패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힘을 잘못 조절했나? 벌써 깨어날 리가 없는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최대한 깔끔하게 기절시켰는데 벌써 깨어나다니?
“너무 오래 쉬었나? 감각이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예전 같았으면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실수였다.
강패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같이 행동하는 동료들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일에 실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강패가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우각!”
“헉! 누, 누구세요?”
그 바람에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바깥으로 땅겨 나왔다.
그 뒤에는 예의 그 기생오라비처럼 잘생긴 남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패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수다. 이 옷만 잠깐 빌려 입으려고 했는데. 그럼 이만…….”
그들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강패가 얼른 입었던 옷과 모자를 돌려주었다.
“고마웠습니다. 그럼…….”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강패가 몸을 뺐다.
그때였다.
“꺄악! 재미 오빠! 재미 오빠아!”
“제, 제길……!!”
구급차 옆을 지나던 여고생이 기생오라비를 보더니 목청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쪽에 몰려 있던 여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구급차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빨리! 내가 막을 테니까 도망가! 나중에 연락할게!”
문을 열려던 남자가 여고생들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로선 역부족이었다.
여학생들은 모퉁이, 화단 등 보이지 않던 곳으로부터도 쏟아져 나왔다.
소녀들은 마치 우리를 탈출한 소처럼 미친 듯이 질주하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기생오라비가 화들짝 놀라 강패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이봐요! 저 좀 도와주세요!”
재미란 이름으로 불린 기생오라비는 필사적으로 강패에게 매달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절박했는지 강패가 순간적으로 움찔할 정도였다.
“저 재미입니다! 재미예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귀찮은 상황에 강패가 눈썹을 찌푸렸지만 재미는 굴하지 않고 그 희멀건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잡히면 저 정말 죽어요. 빨리 도망쳐야 돼요!”
“아아, 도망칠 거면 혼자 도망쳐요. 귀찮게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강패가 손을 휘휘 내저으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소녀 팬들의 모습을 힐끔 쳐다본 재미가 더욱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 안 도와주면, 당신이 날 습격해서 옷과 모자를 강탈해 갔다고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
“뭐……?”
뜻밖의 소리에 강패에게서 하대가 튀어나왔지만 재미는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무사히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 당신이 모자랑 옷을 벗겨 가는 바람에 들킨 거니깐 경찰에 신고해 버릴 거야! 폭행죄로!”
“뭐 그래 봤자 증거도…….”
“병원 근처 CCTV에 당신 모습도 다 찍혀 있을 거니까 각오해!”
강패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CCTV는 또 뭐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증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재미의 얼굴을 보니 정말 자신을 신고할 듯했다.
‘아, 더럽게 꼬이네.’
신고가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귀찮은 건 사양이었다.
강패는 엄밀히 말해 무국적자이자 불법체류자였다.
강패는 당연히 그런 복잡한 구조는 잘 알지 못했지만, 미국에 있을 당시 미영에게서 대체적인 건 전해 들어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귀찮은 건 싫었다.
‘이놈이…….’
강패는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 애들이 쫓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피합시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돼요. 지금!”
재미가 보기엔 소녀들이 좀비 떼처럼 보였다.
심지어 뒤에 남겨진 매니저 형이 영화 속에서 좀비를 온몸으로 막아 내며 희생하는 조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재미의 독촉에 강패는 어쩔 수 없이 걷기 시작했다.
“뛰어야 해요! 쟤네들이 얼마나 지독한 애들인데! 빨리요!”
“자꾸 그렇게 명령조로 할 거면 네놈 혼자 도망가라. 신고하든지 말든지.”
“아니, 그건 아니고…….”
“빌어먹을…….”
거칠게 쏘아붙이자 재미가 팍 쪼그라든 풍선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강패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설설 뛰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하지만 그건 강패 입장에서나 설설이지, 재미에겐 달랐다.
강패가 갑자기 엄청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자 재미가 그 뒤를 허겁지겁 뒤쫓았다.
“어디로 가야 안전할까요? 제가 서울 지리를 잘 몰라서…….”
재미는 정상급 아이돌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지방에서 스카우트가 되어, 서울로 올라와서는 숙소와 연습실만을 오가며 연습만 해 왔다.
그리고 데뷔를 하자마자 대박이 터지는 바람에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만 했는데, 덕분에 서울에 산 지 어언 삼 년이 다 되어 감에도 아직도 서울 버스 노선 한 개도 알지 못했다.
언제나 매니저, 멤버들과 같이 다녔고 개인 시간도 사생팬들 때문에 바깥출입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미는 강패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냐? 젠장!”
65년 만에 경성이 아닌 서울로 온 강패라고 서울을 잘 알 리 없었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 기린파를 찾느라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 적이 있어서 그나마 재미보다는 나았다.
언제나 지리를 외우고 출구와 입구를 찾아야만 했던 대한독립군 시절의 습관이 남아서인지, 강패는 한번 간 길은 웬만해서는 잃어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강패는 능숙하게 골목길 여기저기를 누볐다.
“우와,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네요? 히야!”
“하아, 이건 바보인 건지, 아니면 태평한 건지…….”
뒤에 남아서 팬들을 온몸으로 막던 매니저가 잘 대처했는지 강패와 재미를 쫓는 팬은 더 이상 없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골목길을 강패가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재미는 주변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근데 아까 저랑 매니저 형을 어떻게 기절시킨 거예요? 무술 같은 건가? 그냥 번쩍하더니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아참, 그런데 옷은 왜 빌려 간 거예요?”
“…….”
게다가 말까지 많았다.
재미는 어느 순간부터 입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나불거렸다.
뭐 그리도 할 말이 많은지 온갖 시시콜콜한 잡것들을 강패에게 떠들어 댔다.
“너! 이제 그 애들 없으니까 이제 가!”
“그리고……. 네?”
“하란 대로 했으니깐 신고하기도 없고. 알았지? 그럼 잘 가라.”
휘적휘적.
신나게 나불대던 재미가 강패의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팬들이 본다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 표정이었지만 강패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우와, 이건 엄청 신기하네. 무슨 건물이지? 이런 건물에는 사람이 몇 명이나 들어가 있으려나? 우와! 대기업이잖아! 나 예전에 여기서 광고도 찍었는데. 불이 온통 꺼져 있네. 시간이 너무 늦었나. 어이쿠! 벌써 한 시가 다 되어 가잖아!”
“…….”
“역시 서울은 신기한 게 많아! 병원도 다르고. 조금만 쉴 시간이 있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닐 텐데 말이야.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하구. 너무하단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돌아다니니 좋긴 좋네! 그런데 매니저 형한테는 언제 연락해야 되나? 무사하긴 하려나?”
“……너.”
강패가 폭발 직전의 얼굴로 뒤로 휙 돌아서자 졸졸졸 쫓아오던 재미가 그 자리에 서서는 배시시 웃었다.
“남색이냐?”
“에에에에?”
재미가 펄쩍 뛰었다.
“전 아직까지 연애 한 번도 못 해 본 혈기왕성한 대한 건아입니다. 그런 소문이 있긴 하지만 절대 아니라구요. 진짜 여자 친구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요…….”
“입 다물어.”
“흡!”
대체 얼마나 말이 많은지,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끊임없이 주절대는 재미였다.
“너, 나 아냐?”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큰 눈을 생글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재미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던 강패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재미를 번갈아 가리키면서 물었다.
재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왜 따라와?”
“음…….”
강패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재미가 다시 베실베실 웃으며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협박을 들어줘서요.”
“……뭐?”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강패가 반문했다.
“사실 아까 다 거짓말이었어요. CCTV가 있다는 것도, 그리고 신고하겠다는 것도. 저 같은 사람이 사건 사고에 연결되면 언론에서 보통 시끄럽게 떠드는 게 아니거든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뭐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옷도 다시 돌려받았고.”
강패가 인상을 쓰자 재미가 서둘러 덧붙였다.
“속인 건 아니에요. 정말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만 했는데, 전 정말 서울 지리를 하나도 모르거든요. 근처에는 형밖에 없었고…….”
“혀엉?”
사교성이 좋아도 보통 좋은 놈이 아니었다.
대체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서슴없이 형이라 부를 수 있으며, 쉴 새 없이 나불거릴 수 있단 말인가?
한데 강패는 자신도 모르게 놈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허물어져 있었다.
‘뭐지, 이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스며드는 독특한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그럼 굳이 같이 다녀야 할 필요는 없지.”
“근데 전 형이랑 같이 다녀야 돼요. 이 나이 먹고 길을 잃으면 그게 무슨 창피예요.”
“아까 그놈한테는 어떻게 연락하게? 나중에 연락한다며? 핸드폰인가 뭔가 있을 거 아니야.”
길에서 사람들이 전화를 하는 걸 보고 김 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강패도 핸드폰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에? 저…… 그런 거 없는데.”
재미가 정말로 가진 게 없다는 듯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며 먼지를 털어 냈다.
“아까 그놈, 네 똘마니 아니었어? 똘마니 같은 놈까지 데리고 다니는 놈이 핸드폰 같은 것도 없어?”
“잠깐만요. 형. 나 몰라요?”
재미가 이상하는 듯 말했다.
강패가 툭 내뱉듯 답했다.
“내가 널 왜 알아야 되지?”
“지, 진짜요? 저 정말 몰라요? 재미라니깐요. 재미?”
“재미없어, 이 새끼야. 네가 누군지도 내가 알 바 없고.”
재미는 자신에게 욕까지 섞으면서 말하는 강패를 보면서 놀랍다는 감정을 만면에 드러냈다.
‘거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쉬운 놈이군.’
얼굴에 그대로 표정이 드러나는 재미를 보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재미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패의 모습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 정상을 달리고 있는 자신의 그룹까지도 모른다는 표정이라 더욱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뇨. 저희를 꼭 모두 다 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럼 됐어.”
자기가 할 말만 하고 휙 고개를 돌려 버리는 강패를 보면서 재미는 놀라움과 동시에 신기하고 재미있는 느낌이 들었다.
“형. 정말 우리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보던데. 광고에도 많이 나왔고, 영화도 찍었고, 드라마도 찍었는데. 그 드라마 시청률도 잘 나왔고. 저 정말 몰라요?”
강패는 자기 앞에서 자꾸 깐죽거리는 재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저리 치워. 길 안 보여.”
“우아으아으.”
재미를 옆으로 치워 버린 강패가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재미가 길 잃은 개처럼 졸졸 그 뒤를 따라왔다.
“형! 설마 형도 핸드폰 없는 건 아니죠? 그럼 큰일인데. 형! 그럼 저 오늘 하루만 형 집에서 재워 주세요. 네?”
재미가 다시 떠들어 대자 강패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휙 뒤를 돌아보았다.
“너 이거 보면 뭐 느끼는 거 없냐?”
지금까지 강패가 만난 다른 사람들은 복장만 보고서도 인상을 찌푸리며 알아서 갈 길을 가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이런 꾀죄죄한 몰골을 보고서도 끝까지 따라오다니. 재미가 미친놈이거나 생각이 없는 놈 둘 중에 하나라고 단정 지은 강패였다.
“뭐 옷이 좀 허름하네요.”
“그런데 나한테 핸드폰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집은 있을 것 같고?”
“엇! 그러고 보니…… 형 안 추워요?”
“아후…….”
재미가 생각하던 질문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자 강패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휙 몸을 돌렸다.
“마음대로 해라. 니 살길은 니가 찾아야지. 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 살 길까지 책임져 줬다고. 거참.”
아예 신경을 끄기로 한 강패가 휘적휘적 다시 걸어갔다.
재미는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강패의 뒤를 졸졸 쫓으며 또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
*
*
으득.
찌릿!
슬금슬금.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한 인내심은 한없이 내려갔다.
그나마 이곳에서 정착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패 스스로가 인정했기 때문에 참는 거지, 원래 성격대로라면 폭발해도 몇 번은 폭발했을 것이다.
강패가 인상을 쓰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강패는 인상을 구긴 채 온몸으로 껄렁껄렁함과 불량스러움을 드러내 보이며 열린 길을 따라 걸어갔다.
“우, 우와. 형, 진짜 대단해요!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하고 눈빛으로만 딱! 이렇게 했나? 이렇게?”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재미가 앞에서 얼쩡거렸다.
강패가 손바닥으로 재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따악!
“아쿠…… 아구…….”
“너 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렇게 유명한 놈이야 너?”
제 입으로 자신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코웃음을 쳤던 강패였다.
그런데 지하보도로 가기 위해 큰 길거리로 나온 순간 강패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뜸하게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재미를 알아보고 하나둘씩 모여드는 것이었다.
“에이, 형.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절 못 알아보는 사람이 더 신기하다고 했잖아요.”
강패의 손바닥에 머리통을 얻어맞은 재미가 머리를 문지르다가 그것 보라는 듯, 득의양양하게 가슴을 쭉 내밀면서 으스댔다.
“그런 놈이 핸드폰 하나 없어? 그래서 똘마니한테 연락도 못하고 따라다녀?”
“에이, 똘마니가 아니라 매니저예요, 매니저. 저 같은 사람들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라니까요?”
매니저나 똘마니나 강패 입장에선 시키는 일 한다는 데서 똑같은 사람이었다.
“똘마니도 똑같이 관리해 주는 사람이야.”
“후, 형도 대단해요.”
재미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데뷔한 이후에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 보기는 처음에요 형. 다 형 덕분이에요.”
재미는 데뷔한 이후, 아니 서울로 상경한 이후 처음으로 서울을 제대로 구경하고 여유롭게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저렇게 사람들이 항상 쫓아다니냐?”
강패가 뒤에서 계속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뭐. 그래요. 아무래도 이런 직업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깐요.”
“이런 새벽까지 저럴 정도면 보통이 아닌데.”
“그렇다고 함부로 대하면 더 큰 일이 나거든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재미의 얼굴에 지금껏 밝던 미소가 아닌 씁쓸함이 떠올랐다.
“크흠, 이제 다 왔다. 그냥 땅바닥에 자는 걸 텐데. 할 수 있겠어?”
“이제 조금 있으면 아침이니깐요. 그 때까지만 버티고, 그 후에는 알아서 할게요.”
재미는 강패와 함께 지하보도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