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장
도르곤이 대군을 일으켜 산해관을 나오면서 시작된 전쟁은 북경성 함락과 후계자인 도르보의 항복으로 모두 종결됐다.
이번 전쟁으로 청나라는 무려 사십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그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포로가 됐다.
숫자로만 봐도 청군 전체 병력에서 삼분의 이가 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단순히 인원수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 박살 난 군대가 팔기군을 포함해 대부분 정예 병력들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입은 청군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실상 청나라의 군사력이 거의 무력화됐다고 해도 지나친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요서 회전에서 황제인 도르곤을 비롯해 군을 이끌어 가던 뛰어난 장수 대부분이 전사하면서 몰락의 화룡정점畵龍點睛을 찍었다.
물론 조선군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사상자 총합계가 십칠만 명에 달했다.
왜국 용병 칠천 명이 포함된 거였지만 그걸 빼더라도 상당한 피해였다.
그리고 부상자 가운데 상당수가 사망하고 말았는데 도현이 최선을 대해 치료하라고 황명까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충분하지 못한 의료 체계로 인해서 안타깝게도 열에 여섯 명 꼴로 숨을 거뒀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고 크게 충격을 받은 도현은 즉시 혜민서惠民署 아래 의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는 기관을 새로 만들고 의료 체계를 정비해 다시는 아까운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했다.
한편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은 북경을 포함해 산동과 화북, 산서까지 모두 세 개 성省을 할양받고 조선 금화로 일억 냥을 보상금으로 지금받기로 했다.
땅도 땅이었지만 일억 냥은 청나라로서도 부담되는 액수였으나 전쟁에서 패하고 황도까지 함락당한 패전국이었기에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나마 황실 보고와 북경성에 있는 국고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면 힘겨워도 어느 정도 액수를 채워 넣을 수 있었으나, 도현이 그건 전쟁을 통해 조선이 정당하게 획득한 노획물이라고 하며 다 가져가 버렸기에 더욱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청국 조정은 할양이 확정된 지역 외의 영토에서 정말 빡빡 긁다시피 재물을 모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랜 전쟁으로 청나라 경제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죽은 도르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재물을 징발한 뒤였기에 보상금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결국 청국 조정은 마련하지 못한 보상금을 삼 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는 대신 이자 명목으로 천만 냥을 더 지급하는 걸로 조선과 다시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마련한 오천만 냥과 할양하기로 한 영토를 모두 넘겨주고 나서야 도르보와 청국 대신들은 겨우 이제 조선 땅이 된 북경을 떠날 수 있었다.
북경을 잃은 청국 조정은 조선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안휘성安徽省에 위치한 회남淮南을 수도로 정하고 그리로 옮겨 갔다.
내쫓기다시피 회남으로 가게 된 도르보와 청국 조정은 제대로 된 궁宮도 없어 성청省廳을 급히 수리해 거처로 삼아야 할 정도로 초라한 처지가 됐다.
거기다 제국이 아닌 제후국으로 강등돼 황제라는 명칭조차 쓸 수가 없었다.
경제와 군사력이 무너지고 영토마저 쪼그라든 청나라는 이제 약해진 틈을 노리고 남명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되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닥까지 추락한 청나라와 달리 조선은 이번 전쟁으로 유일무이한 패권국으로 우뚝 서는 것과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확보해 발전의 초석을 확실히 닦았다.
조선 영토 서쪽에 위치한 큰 도시라는 뜻으로 북경을 서경이라고 이름을 고친 도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반년 가까이 머물면서 점령지를 확실하게 흡수할 수 있도록 안정화 작업을 펼쳤다.
한족들은 이민족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 오랜 전쟁과 수탈로 청나라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져 있었기에 조선으로 편입되는 데 큰 반발은 없었다.
거기다 만주와 요동 지역을 흡수하며 충분히 경험을 쌓고 더욱 체계화된 동화同化정책을 써서 빠르게 점령지에 거주하는 한족들을 조선인으로 바꿔 나갔다.
도현은 점령지를 완전히 조선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동화정책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고 무엇보다 우선해 실시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런 정책적인 노력과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통일한 수많은 이종족들이 거대한 인구수를 가진 한족에 휩쓸려 어느새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하고 달리 조선은 반대로 모든 걸 조선화시켜 버렸다.
물론 문화와 정신을 바꾸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우수한 문화를 가진 조선이었기에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뿐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점령지를 어느 정도 안정시킨 도현은 당분간 각 성省별로 모두 세 개 구역을 나눠 행정 체계가 완전히 갖춰질 때까지 군정軍政을 실시토록 하고는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개선했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청나라한테서 항복을 받아 내고 그 옛날 광개토 대왕보다 더 위대한 제국을 만들어 낸 도현의 개선에 배가 도착한 제물포 항구부터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환호성을 보냈다.
이미 한번 승전식을 치르고 논공행상까지 다 끝냈지만 도현은 이틀에 걸쳐 휴일을 선포하고는 내탕금을 풀어 전국의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나눠 주며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새로 확보한 영토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높이가 스물세 자(7미터)에 달하는 전승비戰勝碑를 세워 전쟁 승리와 도현의 업적을 상세하게 기록해서 후대에 남기도록 했다.
☆ ☆ ☆
이번 전쟁은 조선과 청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장 그동안 애써 무시해 왔던 조선의 무서운 성장세에 남명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국력이 위축된 청을 쳐서 지난날 복수를 하고 조금이나마 영토를 회복하자는 주장이 크게 대두됐다.
안 그래도 거침없는 도현의 행보에 자극을 받은 남명 황제 주율건은 무려 삼십만에 이르는 대군을 일으켜 양자강을 건넜다.
조선에 패해 회남으로 쫓겨 내려온 지 일 년 만에 청나라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국경은 넘자마자 남명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금방이라도 회남을 함락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선에 쥐어 터지고 영토까지 크게 줄어든 청나라였지만 얼마 전까지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예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힘들게 새로 재건한 팔기군과 친왕군이 회남 부근 평야에서 사흘에 걸친 대접전을 벌인 끝에 남명군을 대파했다.
그러고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남명군을 양자강 너머로 쫓아내 버렸다.
십 수 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쁜 남명군이었기에 그대로 양자강을 건너가 영토를 넓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록 승리를 거뒀어도 청나라의 사정 또한 그리 좋지 않았기에 아쉬워도 국경선을 다시 회복한 데 만족해야 했다.
남경으로 회군한 주율건은 청이 양자강에서 진격을 멈추자 겨우 한숨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청과의 전쟁은 거기서 일단락이 됐지만 그 후폭풍이 남명 전체에 너무나도 거세게 불어닥쳤다.
이번까지 합쳐 무려 두 차례나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가 한 치의 땅도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큰 피해만 입은 주율건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한 거였다.
특히 주율건이 황위에 오르면서 소외받고 있던 화북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고, 거기에 일부 토착 세력까지 합세하며 세력이 크게 불어났다.
급기야 전쟁이 끝난 지 일 년이 채 안 돼서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분노한 주율건이 당장 군대를 광동성广东省에 파견했지만 오히려 대패를 당해 버렸다.
한껏 기세를 올린 반란군은 해안을 따라 복건성福建省으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남명은 길고 긴 내전에 빠져들었다.
남경에서 급히 군대가 추가로 내려오면서 주춤해지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광동성을 휩쓸고 복건성까지 진출한 반란군의 기세에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런 반란군의 행보에는 뒤에 주작단의 공작이 숨어 있었다.
청나라가 위축된 틈을 타고 남명이 다시 힘을 키워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르는 걸 경계한 도현의 지시를 받은 주작단이 불만 세력을 은밀히 부추겨서 내전을 벌이도록 만든 것이다.
도현이 원하는 건 대륙이 조선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세 개로 작게 쪼개져 서로 아옹다옹하며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이걸 위해 이완 단장이 이끄는 주작단은 청과 남명 그리고 새롭게 한자리를 차지한 반란 세력에 대해 은밀히 공작을 계속 벌였다.
☆ ☆ ☆
왜국은 상황은 대륙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동안 주둔하던 조선군이 철수하면서 지방 번주들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수년 동안 전력을 회복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예전만큼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던 막부는 반란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왜국은 각 번주들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서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마치 히데요시 이전의 전국시대와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걸 통제해야 될 막부도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겨우 간토 평야 인근만 장악한 대영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왜국 정세를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빠뜨리는 일이 터졌다.
바로 천왕을 포함한 왕실 가족들의 몰살이었다.
반기를 든 번주들이 명분을 쌓기 위해 천왕을 끌어들이려고 하자 위기감을 느낀 이에미쓰가 교토에 있는 왕실을 막부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육로는 이동 중에 다른 번주들에게 습격을 받게 될 위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바다를 이용해 도쿄까지 가기로 했다.
이세만伊勢灣까지는 별다른 일없이 순탄하게 잘 왔는데 항해를 시작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재앙이 다가왔다.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더니 폭풍우가 치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쏟아지고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거리자 천왕과 왕실 가족들을 태운 배는 힘없이 출렁거렸다.
파도를 맞으며 선원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배는 거친 폭풍우를 이기지 못하고 전복되고 말았다.
다음 날 근처 해안가로 많은 부유물과 선박 잔해 그리고 사람들의 시신이 밀려 왔는데 거기에 왕실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왜국 천왕의 가계家系가 완전히 끊겨 버리고 말았고 막부는 전통성에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때부터 왜국은 세력 다툼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상 천왕 아래 하나의 국가라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큰 세력을 이룬 번주들 사이에서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했는데, 이건 지금까지 왜국 역사에서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이걸로 막부 체계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됐고 왜국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번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틈을 이용해 도현은 최근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왜구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구주九州를 공략해 점령했다.
그러자 이에미쓰가 사신을 보내 당장 항의를 해 왔지만 도현과 조선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왜구를 막지 못해 피해를 입었다면서 막부 측에 보상을 요구했다.
이에미쓰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으나 당장 싸울 힘이 없는 데다 다른 번주들이 반기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과 관계가 틀어진다면 큰일이었기에 구주 점령을 인정하는 걸로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도현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구형 화포 오십 문을 넘겨줘 막부를 달랬다.
그렇게 주변국들이 혼란에 휩싸여 있는 사이에 조선은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면서 빠르게 통합을 이루어 나갔다.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조선은 이제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서 아시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동안 예전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선을 인정하지 않던 남명도 결국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대륙을 평정한 도현은 바다로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해상 진출을 했다.
수군 함대와 상선단을 곳곳에 파견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첫 목표는 서태평양의 중요 거점인 과한(Guahan)이었다.
오늘날 괌이라 불리는 곳으로 1521년 마젤란이 발견한 이후 에스파냐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원주민인 차모로족을 몇백명 되지 않는 에스파냐 인들이 지배하며 온갖 착취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수군 육전대를 상륙시킨 조선은 에스파냐 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금방 섬을 장악해버렸다.
태평양 항로의 중요 기항지를 잃은 에스파냐는 당연히 격렬히 항의를 했지만 도현은 무시해버렸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을 뿐만 아니라 이대로 힘없이 식민지를 내줄 수 없었던 에스파냐는 왕실 함대를 남중국해로 보냈다.
이제 조선 영토로 확실히 편입된 대만을 공격하고 더 나아가 제주도를 거쳐 수도인 한양까지 치려는 거였다.
과한 섬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패자가 된 조선을 꺾어 태평양과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언 에스파냐의 계획은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아직 수에즈 운하가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였기에 왕실함대는 멀리 아프리카 대륙 끝까지 내려가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거치는 기나긴 항해를 해야만 남중국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장 육개월에 걸친 항해에 병사들은 지쳐 버렸고 중간에 전염병까지 돌아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항해나 다름없었는데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겨우 남중국해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던 조선 함대의 공격을 받았다.
가뜩이나 지치고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치우급 전함보다 더 커지고 개량을 한 태황급 전함 다섯척이 포함된 조섬 함대의 포위 공격에 에스파냐 함대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무려 오십여 척에 달하는 군함을 한번에 몽땅 다 잃어버린 에스파냐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에스파냐는 과한 섬뿐만 아니라 필리핀까지 조선에 넘겨주고 말았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영국과 스페인 네덜란드를 비롯한 많은 서양 국가들이 조선을 크게 경계하며 호시탐탐 꺼꾸러뜨릴 기회를 노렸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도현은 확장 정책을 펴는 것과 동시에 적절한 외교도 같이 사용해 적을 최대한 줄였다.
그와 동시에 서양 국가들과 달리 새로 편입된 지역의 원주민들을 차별하지 않고 넓게 포용하며 진정으로 조선의 백성이 되도록 만들었다.
한편 유럽에서 연거푸 영국에 패하면서 제해권을 상실한 네덜란드는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이런 상태에서 해군을 확충한 영국이 인도와 아시아 그리고 신대륙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넓혀 나가자 네덜란드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패전으로 인한 막대한 지출과 추락한 경제로 인해 또 다시 영국과 전쟁을 벌이거나 식민지 경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네덜란드는 차선책으로 조선과 협력하는 걸 선택했다.
네덜란드 령 인도차이나(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이권을 조선에 양보하는 대신 영국의 위협을 막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조선에 먼저 무릎을 꿇고 보호를 요청한 굴욕적인 일이라며 서양 각국들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당장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와 이권을 몽땅 잃을 처지에 놓인 네덜란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선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우선 봉황상단을 비롯한 여러 조선 상단들이 인도차이나에 진출해 목재와 고무, 마닐라 삼같은 상품들을 싼 가격에 들여올 수 있게 되어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다.
아울러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제국주의 침략에 나선 영국이 아시아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미리 차단해 버리는 것도 있었다.
당연히 영국은 조선과 네덜란드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앞서 에스파냐 함대가 대패를 당한 일도 있고 무엇보다 막강한 조선의 해군 전력을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굳이 아시아가 아니더라도 식민지로 만들 땅이 다른 곳에도 많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덕분에 원역사와 달리 영국은 인도를 경계선으로 더 이상 아시아로 진출하지 않았고 대신 아프리카와 신대륙에 집중했다.
물론 세월이 더 흘러 영국이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고 식민지로 만들 땅이 부족해진다면 상황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면서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던 조선에 새로운 적수가 나타났는데 바로 동진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이었다.
야금야금 시베리아를 집어 삼키면서 동진해 오던 러시아와 동양의 패자로 우뚝 선 조선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성 장군.”
“예, 전하.”
말없이 안장 위에 앉아 천리경으로 전방을 바라보던 이연 황태자의 부름에 경장 갑옷을 입은 장수가 옆에 있다가 얼른 대답했다.
“노서아露西亞(러시아) 기병대가 돌격을 해 오면 일제사격으로 모두 제압하도록.”
“알겠사옵니다.”
“그 뒤에는 아군 기병대가 바로 반격에 나설 것이네.”
“네.”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장군은 이연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그러는가?”
“꼭 돌격에 참가하셔야 되겠사옵니까?”
이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을 텐데.”
“솔선수범하시려는 것은 좋사오나 적진 한복판으로 직접 돌격해 가신다는 건 너무 위험하옵니다.”
“전장에 나온 이상 위험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나. 그리고 황태자인 내가 몸을 사리면서 어떻게 병사들보고 앞으로 나가 적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하오나…….”
“됐네. 내 결심은 변하지 않으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게.”
이연이 딱 잘라 말하자 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때 근처에 있던 군관이 한쪽 팔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적이 돌격해 옵니다!”
고개를 들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털모자를 머리에 쓴 노서아 기병대가 무리를 이뤄 밀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얼추 오백 명 정도 되겠군.”
위압감을 느낄만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차분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방포를 준비하게.”
“옛.”
장군이 대기하고 있는 신호수를 보며 손짓을 하자 붉은색 깃발이 올라갔다.
그걸 본 보병대 지휘관이 손에 든 검을 위로 치켜들며 소리쳤다.
“대대. 거총!”
“거총.”
처처척.
진형 앞에 서서 사격 대형을 갖추고 있던 보병들은 미리 장전해 둔 소총을 들어 달려오는 노서아 기병대를 조준했다.
지난 십 년간 조선군은 많은 변화를 거쳤는데 편제와 계급을 효율적으로 고치고 병사들의 복장도 크게 바뀌었다.
당장 보이는 보병만 해도 예전에 입던 쾌자快子 대신 바지와 상의가 분리된 진녹색의 신형 군복으로 교체됐다.
그리고 신발도 미투리라고 불리는 망혜芒姪 대신 가죽으로 만든 군화와 각반이 지급됐다.
모자도 전립 대신에 챙이 있는 걸로 바뀌었고 허리에는 작은 가방이 달린 탄띠를 차서 총알을 보관했다.
“일제사격 후 각자 자유 사격으로 적을 괴멸한다!”
지휘관이 명령을 재차 주지시키는 동안 노서아 기병대는 어느새 이백 보 거리까지 바짝 접근했다.
충분히 사거리 안에 들어왔지만 조금 더 기다린 지휘관은 이내 검을 아래로 힘차게 내리며 외쳤다.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면서 수백 발의 탄환이 발사됐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선군 보병들은 총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빨리 탄약을 재장전하고는 시커먼 인영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커억!”
“으윽.”
이히히힝.
자욱한 화약 연기 너머로 귀신처럼 흰 얼굴에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노서아 기병들이 무더기로 낙마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고 구슬픈 말울음 소리도 들렸다.
러시아 기병대 지휘관인 로스토프 대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호기롭게 돌격을 하다가 전방에서 들리는 격렬한 총성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악명 높은 조선군 보병의 일제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달리던 부하들 상당수가 황량한 벌판에 피를 뿌리며 낙마해 나뒹굴고 있었다.
“이, 이런!”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서도 총탄이 계속해서 날아왔고 로스토프도 총격을 피할 수 없었다.
“큭!”
뜨겁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왼쪽 어깨를 파고드는 고통에 로스토프는 자신도 모르게 답답한 신음을 내뱉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또 다른 총탄이 그의 가슴에 명중했고 타고 있던 말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주저앉았다.
조선군 기병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이연 황태자는 일제사격에 적군의 돌격이 막히자 지체 없이 허리에 찬 검을 빼 들며 명령을 내렸다.
스르르릉.
“노서아 놈들이 다시는 국경 근처에 알짱거리지 못하도록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
“우와!”
“대대, 돌격 앞으로!”
“돌격!”
뿌우우웅!
돌격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자 조선군 기병들이 거칠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장에 있는 노서아군의 당황하는 모습이 이연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달리던 이연은 안장 옆에 꽂아 둔 각궁을 꺼내 들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화약 무기가 더욱 개량되고 많이 보급돼 이제 총을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으나 여전히 활은 조선군 기병이 필수적으로 다뤄야 될 무기 중 하나였다.
뒤따르던 기병들도 이연을 따라 각궁을 집어 들었다.
이연은 각궁에 편전을 걸고 힘껏 시위를 당기고는 계속 말을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어 이백 보 안으로 들어가자 파란 눈에 허연 피부색을 가진 노서아군 병사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쏴라!”
목이 터져라 크게 외치며 활시위를 놓자 수백 개의 화살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슈슈슉! 슈슈!
섬뜩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오른 화살들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노서아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결과를 보지 않고 연속해서 편전을 두 차례 더 쏜 이연은 각궁을 집어넣은 채 도현이 직접 하사한 검을 뽑아 들었다.
“적에게 조선군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와아아!”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이연의 검 면에는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라는 문구가 음각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며 편전에 맞은 동료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걸 본 노서아 병사들은 경악했다.
“헉!”
“이게 뭐야!”
소리만 들릴 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와 몸을 꿰뚫어 버리는 편전에 순간 모두 공포감에 휩싸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수습할 여유도 없이 조선군 기병대가 혼란에 빠진 노서아 병사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마, 막아라!”
“어서 총을 쏴!”
타탕! 탕! 탕!
피슝. 슝.
상대가 쏜 탄환이 귓전을 스치고 바로 옆에서 총에 맞은 기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렇지만 이연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검을 앞으로 쭉 내밀며 돌격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바로 코앞까지 육박해 들어가자 허둥지둥 총알을 재던 노서아 병사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줘.”
“히익.”
이연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총을 들어 올리는 노서아 병사의 머리를 검을 힘껏 내려쳤다.
슈각.
“꾸엑.”
검에 맞은 적병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기병들도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고 노서아 군 진영은 비명과 피로 가득 찼다.
조선군 기병대의 돌격에 노서아 군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고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대형이 완전히 붕괴됐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던 적들은 기병의 검에 도륙을 당하거나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투항했다.
이번 전투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가 좌절됐고, 외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까지 조선의 영역이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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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도현은 경회루慶會樓 난간 앞에 서서 연못 안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잉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년간 계속된 대역사 끝에 드디어 경복궁이 완성되자 도현은 그동안 머물던 창덕궁을 떠나 새롭게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국정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상선인 칠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촐랑거리고 항상 사고만 칠 것 같더니, 자기도 이젠 나이를 먹었다고 발걸음이며 몸가짐에 제법 진중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래 봤자 가끔씩 둘만 있는 자리에선 여전히 방정맞게 굴긴 했지만.
그래서 밑에 있는 어린것들이 호랑이 상선이라 부르며 어려워한단 얘기를 듣고는 한껏 콧방귀를 뀌어 줬더랬다.
“폐하.”
“무슨 일인가?”
“북방에서 장계가 도착했다 하옵니다.”
북방이라는 말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노서아와의 분쟁에 관련된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흐음. 말해 보게.”
“외흥 산맥 일대에서 벌어진 다섯 번의 전투를 아군이 모두 승리했다고 하옵니다.”
“오, 그래.”
아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도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크게 기뻐했다.
“적을 무찌르는 데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고 하옵니다.”
“장군들의 발목을 잡지 않고 제 역할을 잘 수행했다니 다행이군.”
전장에 나간 자식이 무사할 뿐만 아니라 큰 공을 세웠다고 하니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없었다.
그러나 도현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심양 사절 시절부터 그를 최측근에서 모셔 온 칠현이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내심 도현이 얼마나 좋아하고 흡족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혼을 내줬으니 한동안 북방이 조용하겠군.”
“노서아군의 사상자가 칠백이 넘고 포로를 천 명이나 붙잡았다고 하니 감히 국경을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청나라를 무너뜨린 이후 가장 신경을 쓰며 견제하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동진이었기에 도현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총참모부에서 외흥 안령 너머에 요새를 만든다고 했지.”
“예. 이번에 잡힌 노서아 포로들을 동원해서 요새 다섯 곳을 건설한다고 하였사옵니다.”
“호시탐탐 북방 영토를 노리는 놈들이니 충분한 대비가 필요할 거야.”
도현은 뒷짐을 진 자세로 먼 북방에서 고생할 장병들을 떠올리며 측은하게 여겼다.
그렇게 잠시 서 있을 때, 상궁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오던 아이들이 도현을 발견하고 꺄 하고 환성을 질렀다.
“할바마마!”
“야, 최 상궁이 뛰지 말랬잖아!”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돼?”
자기네들끼리 재잘대면서 단숨에 달려오는 아이들을 도현이 웃는 얼굴로 맞아들였다.
“저런,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지만 할바마마, 누나가 자꾸 나한테만 뭐라고 해요.”
밤톨같이 둥그런 머리통에 장난기가 가득 담긴 눈동자를 지닌 사내아이가 제 누이를 손가락질하며 일렀다.
“네가 자꾸 체신 머리 없이 행동하니까 나까지 같이 혼나잖아.”
허리에 손을 턱 올리고 야무지게 대꾸하는 것은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먹어 보이는 어린 소녀다.
“누나, 혀엉, 싸우지 마.”
앞선 두 사람보다 훨씬 어려 토실토실한 젖살을 자랑하는 남자애가 둘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하. 어쩜 저리 제 아비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을꼬.”
제일 어린 막내 손자를 번쩍 들어 안으면서 도현이 중얼거리는 말에 사내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아바마마요?”
“그래. 연이도 어렸을 적엔 너처럼 누이들하고 많이 싸웠더랬지.”
“헤에, 그렇구나.”
“그래도 아바마마랑 너는 완전 달라. 아바마마께선 칠 세 때부터 사서삼경을 다 떼시고 학자들이랑 경연을 하셨다고 하던걸. 게다가 무술 실력도 뛰어나셔서 화살로 과녁 정중앙을 수도 없이 맞히셨대.”
“나, 나도 일곱 살이 되면 그 정도는 다 할 수 있어!”
“절대 못할걸.”
제 누이가 놀리는 말에 한껏 약이 오른 소년이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도현의 앞이라 차마 덤벼들진 못하고 고작해야 나중에 두고 보자며 한껏 째려보니, 소녀는 그래 봤자 네가 여자를 때릴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흥 맞받아쳤다.
한편 도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눌러 참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네 아비가 어렸을 적에 그랬다고 누가 그러든?”
“아바마마께서요.”
“흠.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공부하기 싫다고 도망 다니다가 만날 중전한테 잡혀서 울음을 터트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놈이 암만 그래도 제 자식들한테까지 거짓부렁을 쳐?’
“상선,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부전자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떠오릅니다만.”
“흐음?”
눈썹을 치켜뜨는 도현에게 칠현이 그동안 했던 발언을 떠올려 보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난 적어도 없는 사실을 꾸며 내진 않았다만.”
잘난 척을 좀 하긴 했어도.
“예에. 그렇다고 해 두죠.”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말하는 모습을 보고 도현은 오늘 밤 간만에 저 자식을 쥐 잡듯이 잡아 볼까, 하고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다.
“할바마마.”
“아, 그래. 내 잠시 너희들을 잊고 있었구나.”
도현은 양옆에 손자들을 끼고 정자 그늘 아래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할바마마, 옛날이야기 해 주세요.”
“아바마마랑 고모님들이 다 같이 궁에서 살 때는 어땠는데요?”
“난 전쟁 이야기가 더 재밌는데!”
고사리 같은 손바닥이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며 도현은 감회에 찬 눈빛으로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아니면 심양에서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아니, 진짜 이야기를 처음부터 하려면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고서를 펼쳤을 때부터 시작해야 되리라.
중전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제 부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무척이나 기뻤었지.
눈을 떴을 때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칠현이었던 것도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리고 든든한 한쪽 팔이 되어 준 사람들.
근위 군단장인 박영식과 상단 서기에서 총관까지 출세한 장태범, 전쟁터에서 뒤를 맡길 수 잇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장수인 흑치영, 임경업까지.
그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처음엔 그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강해지려 노력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며 상상만 하던 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도현은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어느새 잠드셨군요.”
“뛰어노느라 피곤했나 보지.”
도현은 제 품안에 안겨 쌕쌕 코골이를 하고 있는 세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폐하.”
“됐네. 잠시 내가 안고 있지.”
아이를 받아 들려는 상궁을 만류한 도현은 옷 너머로 전해져 오는 작은 온기에 미소를 지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보다 모처럼 이니 가서 황후를 불러 오게나. 아이들이 깨면 저녁이라도 함께 들자고 하게.”
“알겠사옵니다.”
상궁이 물러나고, 다시 처음처럼 둘만 남자 도현은 멀리 잔잔하게 흔들리는 연못 표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선.”
“예, 폐하.”
“나는 좋은 황제였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요.”
칠현은 괜한 것을 묻는 다는 듯 흔들림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제가 본 중에 가장 어질고 현명하시며, 그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설마 칠현이 이렇게 까지 대놓고 칭찬을 해 줄 줄 몰랐기에 오히려 잠시 할 말을 잃은 것은 도현 쪽이었다.
“……고맙다.”
다른 사람보다 칠현에게서 들은 말이 제일 기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스며드는 듯한 기분에 도현은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더없이 충만한 기분에 휩싸여 가만히 눈을 감으니, 머리 위에서 칠현이 조용히 물었다.
“주무시렵니까?”
“중전이 올 때까지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곱디고운 내 사람.
쏴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커다란 잉어가 퐁, 하고 펄떡 튀어나와 물보라를 튕기며 잔잔했던 연못 표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참으로 좋은 날이로다.”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진실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完>
§마치면서......
드디어 효종을 끝내게 됐습니다.
부족하고 서투른 것이 많은데 끝까지 사랑해 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효종이 나올 수 있도록 같이 머리를 맞대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성용이가 많이 그립군요.
녀석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번 글이 나오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편집을 도와주신 승미씨와 이지훈 실장님 마지막으로 기현이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많았습니다.
대체 역사 소설에 많은 애정과 관심이 있지만 글을 쓰는 내내 다시 한번 실력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발전하고 부끄럽지 않을 글로 다시 여러분들과 만났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지금까지 글을 잃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