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격을 당하다 (99/104)

일격을 당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던 별동대는 척후를 통해 고부리성의 상황을 바로바로 파악하고 있었다.

“외성이 무너졌다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흑치영의 물음에 보고를 하러 온 군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행히 내성을 끝까지 지켜 완전히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이런.”

어떤 상황일지 대략 알 수 있었던 흑치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짧은 탄식과 함께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좌우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우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거 큰일입니다.”

“아직 두 겹의 성벽이 남아 있다지만 청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것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휘하 장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하던 흑치영은 이내 정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관.”

“예.”

“본대에서 가져온 신기전이 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부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 대가 있습니다.”

“그걸 써야 될 것 같으니 준비해 놓게.”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거란 출신으로 이제 당당한 조선군 장수가 된 홍종수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흑치영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굳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청군을 공격해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의 숨통을 잠시나마 틔워 줄 생각이네.”

“장군, 적은 수십만이 넘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장군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자칫 우리까지 당할 수가 있습니다.”

“성급하게 움직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수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흑치영은 뜻을 꺾지 않았다.

“무리한 일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네. 하나 적이 강하다고 우리가 몸을 사린다면, 고군분투하고 있는 고부리성의 아군은 더욱 곤경에 처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 것이야.”

“…….”

“난 위기에 처한 아군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네. 그리고 여기에 우린 유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싸우러 나선 게 아닌가!”

흑치영의 말이 가슴을 파고든 장수들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홍종수가 움켜쥔 주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하자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습격에 동의했다.

“까짓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지난번처럼 아주 혼쭐을 내 주는 겁니다.”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휘하 장수들이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자 흑치영은 고무된 얼굴로 힘차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 결행할 테니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병사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결정이 내려지자 장수들은 신속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이미 한차례 야습을 해서 청군에 큰 피해를 안겨 준 경험이 있었기에 준비를 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고, 별동대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았다.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말한테 재갈을 물리고 어둠 속에 녹아들어 가기 위해 숯으로 전신을 검게 칠했다.

당연히 달빛을 받아 번쩍일 수 있는 병장기에도 숯을 발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야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신기전을 꼼꼼히 점검한 뒤 불만 붙이면 바로 쏠 수 있도록 장전까지 다 해 놨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자 밤새 치르게 될 전투에 대비해서 흑치영은 저녁을 일찍 지어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드디어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별동대는 조용히 숙영지를 떠나 청군 본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려 삼만에 달하는 기병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었지만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조용히 이동했다.

낮에 격렬하게 치른 전투 때문에 지친 청군은 별동대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며 다가간 별동대는 청군이 진채에 환하게 밝혀 놓은 불빛이 보이는 곳에 일단 멈춰 섰다.

“이 정도면 되겠나?”

흑치영의 물음에 빠르게 청군 진지와의 거리를 가늠해 본 포술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어서 방열을 하도록 해.”

“옛.”

포술장의 지휘 아래 포수들이 세 대의 신기전 수레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우고는 재빨리 사격 각도와 방향을 맞췄다.

그사이 별동대 병사들은 길게 늘어서며 공격대형을 갖췄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군마에 올라 가만히 적진을 노려보고 있던 흑치영은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지만 힘이 가득 들어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작해.”

“예.”

흑치영의 명령이 내려지고 얼마 있지 않아 적진을 겨냥하고 있던 신기전이 시뻘건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쉬쉬쉭!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른 신기전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삼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청군 진영 상공에서 터졌다.

퍼펑! 펑! 펑!

신기전에 매달린 나무통이 터지면서 수백 개의 철환이 마치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며 천막과 청군 병사들을 강타했다.

후두두둑.

“뭐, 뭐야?”

“어서 피해!”

“살려 줘.”

아무것도 모른 채 천막 안에서 자던 적병들은 쏟아진 철환에 그대로 피떡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요행히 살아난 이들은 처참한 몰골로 죽은 동료들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허둥지둥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깥은 더 난리였는데, 여기저기 사상자가 속출하고 신기전이 터지면서 떨어진 불씨가 천막에 옮겨 붙어 시뻘건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신기전들이 날아와 터졌는데 이번에는 철환 대신 더 무서운 백린白燐을 뿌렸다.

“으아아악!”

불벼락을 뒤집어쓴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몸에 붙은 백린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맹렬하게 타오르며 피부를 태웠다.

치치치칙.

다급한 마음에 동료들이 물을 가져와 끼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이 안 꺼져!”

“이게 뭐야?”

“차라리 죽여 줘!”

엄청난 괴로움에 백린을 뒤집어쓴 적병들은 온몸을 뒤틀었고, 몇몇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는 스스로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이렇게 한 대당 삼십 발씩 무려 구십 발이나 쏘아진 신기전은 거대한 청군 진영 한쪽 귀퉁이를 순식간에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적진에서 시뻘건 불길이 넘실거리고 청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흑치영은 이빨을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군.”

매섭게 눈을 번뜩인 흑치영은 애병인 언월도를 치켜들며 크게 소리쳤다.

“돌격!”

“와아아아~~!”

선두에 서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흑치영을 따라 별동대 기병들이 함성을 내뱉으며 일제히 앞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두두두두.

신기전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청군은 어둠 속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머리털이 바짝 곤두섰다.

“저, 적이다!”

“조선군 기병이 몰려온다.”

기겁을 한 청군 병사들은 다급히 무기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미처 방어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육박해 온 기병들은 심지에 불을 붙인 둥근 철환 모양의 폭탄을 목책에다가 던졌다.

“받아라!”

꽈아앙!

우지끈.

화약을 잔뜩 집어넣은 폭탄이 터지자 주위의 적들과 함께 진채를 둘러싸고 있던 높은 목책이 힘없이 부서졌다.

그 사이로 흑치영과 기병들이 벌 떼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다 쓸어버려라!”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내지른 흑치영은 언월도를 내리그어 엉거주춤 앞에 서 있던 적병의 몸을 양단해 버렸다.

뒤를 따르던 기병들도 물 만난 고기 떼처럼 병장기를 휘둘러 댔다.

“꾸엑.”

“컥.”

사방에서 검 빛이 난무하고 고통에 찬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제대로 일격을 당한 청군은 거칠게 몰아붙이는 별동대를 막아 내지 못하고 힘없이 휩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신나게 별동대가 적진을 마구 유린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급히 달려온 청군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군, 적 지원군이 나타났습니다.”

도망치는 적병의 등을 송곳이 박혀 있는 철 신발로 찍어 버린 흑치영은 부관의 말에 시선을 들었다.

만만한 향용병이 아닌 정예인 팔기군의 등장에 흑치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쳇,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

“퇴로가 막히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시지요.”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말 머리를 돌리자 부관의 눈짓을 받은 신호수가 가지고 있던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러자 성난 맹수처럼 날뛰던 기병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채를 벗어났다.

“이랴!”

“하!”

썰물 빠지듯이 신속하게 퇴각을 하면서도 별동대 기병들은 왔다 간다는 흔적을 남겨 두는 것처럼 무거운 뭔가를 떨어뜨리고 갔다.

상당히 수상한 행동이었지만 밤이라 어두운 데다가 달아나는 별동대를 쫓아가는 데 정신이 팔린 청군은 그걸 놓치고 말았다.

“놈들이 도망친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고부리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입지가 많이 줄어든 야골타는 그 분풀이라도 하듯 부하들을 재촉하며 타고 있는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유목민족 출신들답게 금방 가속도를 붙이면서 팔기군이 별동대를 따라붙으려는 순간,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꽈꽝! 꽝! 꽝!

시뻘건 불기둥이 곳곳에서 치솟아 오르며 주위에 있던 팔기군을 휩쓸어 버렸다.

굉음에 말들이 놀라 마구 날뛰었고 팔기군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청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조선군이 놔두고 간 비격진천뢰가 폭발한 것이었다.

“크윽…….”

“장군, 괜찮으십니까?”

폭발 충격에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가 부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킨 야골타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주변 모습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자랑스러운 팔기군은 어디로 다 사라져 버리고 사방을 가득 메운 비명 소리와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진 병사들과 군마만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조선군한테 농락을 당한 야골타는 발로 땅을 마구 걷어차면서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아아악! 이 죽일 놈들.”

분을 참지 못한 야골타가 발광을 하든 말든 적진을 빠져나온 별동대는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부리성 함락을 목전에 두고 실패한 데 이어서 야습까지 당한 청군은 아침부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몇 명이나 죽었다고?”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도르곤의 물음에 총병관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사온데 이 중 육백이 죽고 이백은 다시 전투에 복귀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상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르곤은 앉아 있던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탕!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서는 거야! 이래 가지고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겠나!”

“면목이 없사옵니다.”

“어젯밤 진채 경비 책임을 맡은 장수가 누구야!”

그러자 왼쪽 끝에 서 있던 장수 한 명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앞으로 나왔다.

“죽여 주시옵소서.”

“그래, 네놈 소원대로 해 주지. 여봐라!”

“옛.”

호위병들의 우렁찬 대답에 도르곤은 더욱 분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놈을 끌고 가 당장 목을 베어 버려라!”

벌을 받을 거라 각오는 이미 했던 터지만, 설마 목을 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장수는 호위병들이 좌우에서 팔을 잡아끌려고 하자 바로 털썩 바닥에 엎드려 애원했다.

“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듣기 싫다! 어서 저놈을 치우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도르곤의 명령에 호위병들은 몸부림을 치는 장수를 억지로 붙들고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짐짝같이 질질 땅에 끌려 나가는 그 모습에 안에 남은 나머지 장수들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살얼음 같은 침묵이 좌중을 감쌌다.

장수 한 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도르곤이 한쪽에 서 있는 야골타를 봤다.

“야골타.”

“네.”

다행히 낙마를 하며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비격진천뢰의 파편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야골타의 뺨에는 길게 피딱지가 앉은 상처가 나 있었다.

“어제 야습을 해 온 적이 지난번에 포대를 박살 낸 것들하고 같은 놈들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두 차례나 별동대에 물을 먹은 야골타는 쌓인 것이 많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도르곤이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군. 팔기군 삼만과 향용 기병 일만을 맡길 테니 이것들을 찾아내 쓸어버리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흑치영이 이끄는 별동대에 이를 갈고 있던 야골타는 도르곤의 명령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저 작은 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해 여기에 주저앉아 있을 텐가! 병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성을 함락시키도록 해! 알겠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전투가 지지부진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 있던 청군 장수들은 도르곤의 노성에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옛.”

그날 오후부터 청군은 다시 공성전을 재개했고 야골타가 지휘하는 기병 사만은 별동대를 잡기 위해 본진을 나섰다.

지금까지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광활한 평원 어딘가에 숨어 있는 별동대를 단시간 안에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척후병을 통해 야골타가 자신들을 잡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별동대가 더욱 행동에 조심을 하면서 청군은 흔적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흑치영을 고민스럽게 하는 정보 하나가 별동대에 날아들었다.

“청군이 새로 제작한 홍이포 오십 문을 가져오고 있다고?”

흑치영의 물음에 보고를 하러 온 군관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홍이포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포탄과 화약을 이번 보급대가 수송해 온다고 합니다.”

“으음.”

이야기를 들은 흑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홍이포 오십 문이라면 지난번 자신들이 청군 포대를 습격해서 어렵사리 파괴한 것과 비슷한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가뜩이나 외성이 무너져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이만큼의 홍이포가 더 보충된다면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일이었다.

다들 그걸 아는지 지휘 천막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봐.”

“옛.”

군례를 취한 군관이 천막을 나가자 홍종수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청군이 우리를 잡기 위해 병력을 내보낸 이때에 홍이포를 수송하는 보급대가 움직인다니, 어딘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함정이라는 건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자 같은 거란 부족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여러 전공을 세워 군호 벼슬을 하사받은 야수난이 반대 의견을 냈다.

“너무 과민한 반응 아닐까요. 단순히 그동안 고부리성을 공략한다고 탄약을 많이 소모했으니 그걸 보충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 쉽게 생각했다가 진짜로 적이 파 놓은 함정이라면 어찌할 텐가!”

아직 젊어서 그런지 의욕이 앞서는 야수난의 말에 홍종수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럼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을 힘들게 만들 것을 뻔히 알고도 홍이포와 탄약을 옮겨 가도록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보자는 겁니까?”

“그건…….”

곤혹스러운 문제였기에 홍종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꺼림칙했지만 이대로 보급대가 청군 본진에 도착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눈에 선했다.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흑치영은 상체를 바로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걸로 결정이 됐군.”

“장군!”

“나도 썩 내키는 건 아니야.”

“그런데 왜……?”

정색을 한 흑치영은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함정일지 모르더라도 청군 본진을 괴롭히고 보급을 힘들게 만들어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을 돕는 것이 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이지 않나.”

“…….”

단호한 흑치영의 말에 좌중에 모인 장수들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

흑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수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이동할 테니 다들 준비하도록.”

장수들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스치고, 짧고 굵은 대답이 터져 나왔다.

“옛!”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도 아직 까맣게 들러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흑치영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흔들어 한 가닥 남은 찝찝함을 떨쳐 버렸다.

물자를 지킬 약간의 인원만 남겨 둔 채 얼마 뒤 별동대 병사들은 말에 올라 숙영지를 떠났다.

척후를 통해 보급대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던 흑치영은 공격하기 좋게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지역에 부하들을 매복시켰다.

병력 배치를 모두 끝마친 별동대는 청군 보급대를 기다리며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치영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쉬지 못하고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가운데 펼쳐 두고 작전을 상의하고 있었다.

“주변은 확인했나?”

“예, 척후병들을 보내 근방 이십여 리를 샅샅이 뒤졌습니다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은 시선을 돌려 왼편에 있는 홍종수를 보며 말했다.

“야골타의 위치는?”

“그게…… 어제까지만 해도 고부리성 남동쪽에 있었습니다만 그 이후로 행적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골타의 위치를 놓쳤다는 이야기에 흑치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거늘 놓치면 어쩌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불안감이 더 커졌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공격을 취소할 수는 없었기에 흑치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보급대를 공격하고 여길 빠져나가는 수밖에. 다들 실수가 없게 다시 한 번 준비 상태를 점검하도록 해.”

“옛.”

지시를 내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흑치영은 직접 매복지를 돌아봤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해가 중턱에 걸렸을 때쯤 멀리 북쪽에서 희뿌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옵니다.”

“규모는 확인됐나?”

“가죽 천으로 덮인 짐수레 백여 개에 홍이포 오십여 문을 말들이 끌고 오고 있습니다. 호위 병력은 삼천 명가량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던 정보와 거의 다르지 않은 보고에 흑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인다. 매복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흑치영은 긴장된 얼굴로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다가오는 청군 보급대를 바라봤다.

그렇게 별동대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청군 보급대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매복지로 다가왔다.

기병 이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전초를 앞세우고 있었지만 꼼꼼하게 주위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이었기에 매복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바위 위로 눈만 살짝 내밀어서 청군 보급대를 확인한 흑치영은 행렬 중간, 포가에 올린 홍이포 오십여 문을 짐말들이 끌고 가는 것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청군 보급대가 매복지 한가운데에 들어서자 흑치영은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쏴라!”

그러자 양쪽 측면에 숨어 있던 별동대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히 편전을 발사했다.

슈슈슉! 슈슉! 슉!

“헉! 매복이다.”

“방패로 화살을 막아!”

적장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청군 병사들은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나름 빠른 대응이었지만 신기전과 함께 조선이 자랑하는 비밀 병기인 각궁과 거기에서 쏘는 편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나기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편전은 나무로 만들어진 방패를 종잇장처럼 가볍게 뚫어 버리고는 그대로 적군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후두두둑.

“꾸엑.”

“컥!”

방패가 소용이 없자 적병들은 당황한 얼굴로 짐마차 밑으로 들어가거나 황급히 엄폐물 뒤로 몸을 피했다.

상당수의 적들이 편전에 맞아 나뒹굴며 비명을 내질렀고 행군 대열이 크게 흐트러졌다.

그러자 어느새 말 위에 올라타 있던 흑치영이 언월도를 치켜들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공격!”

“우와아아!”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차며 구릉을 내려가는 흑치영을 뒤따르면서 검을 빼 든 기병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소나기처럼 쏟아진 편전 세례에 기가 꺾인 적군은 구릉지 양쪽 사면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별동대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충 봐도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에 전의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벌써 앞뒤로 퇴로를 다 막아 버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이를 꽉 깨문 적장이 품속에서 폭죽을 꺼내 밑에 달린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펑.

슈우우우웅! 꽈아앙!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로 솟구친 폭죽은 푸른 하늘에 붉은 색 꽃을 피우며 터졌다.

“……!”

상대가 갑자기 터트린 폭죽이 신경 쓰였지만 이미 전투가 시작된 상태였기에 흑치영은 불안감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눈앞에 보이는 적에게 집중했다.

“흐이이익.”

잔뜩 겁에 질린 채 창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적병의 목을 언월도로 가볍게 날려 버린 흑치영은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적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순한 양 떼 속에 들어간 굶주린 늑대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마구 휘둘러 댔다.

츄악.

시뻘건 피가 시야를 가리면서 어지럽게 튀었고, 뒤이어 돌입한 별동대 기병들도 적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내려쳤다.

제대로 방어대형조차 갖추지 못한 적들은 별동대의 말발굽 아래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나뒹굴었다.

거의 일방적인 학살에 적들은 무기를 버리고 양팔을 들며 항복했다.

적장도 별동대 기병들이 둘러싼 채 살기를 뿌리자 저항을 포기했다.

이미 대부분의 부하들이 죽거나 항복한 상태에서 더 이상 저항을 해 봤자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든 것이었다.

“투항하겠소.”

적장이 항복하자 남은 적들도 싸움을 포기했다.

그러자 흑치영은 쓸데없는 살생을 자제시키고 포로들을 한곳에 모은 뒤 적들이 수송하려던 홍이포와 탄약을 없애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천을 벗기고 짐마차 안을 살펴본 별동대 병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화약이 들어 있어야 할 통에는 모래만 가득했고 포탄은 철이 아닌 나무로 만든 가짜였다.

그뿐만 아니라 포가에 올린 홍이포 또한 굵은 통나무를 잘라 그럴듯하게 검은색으로 칠을 해 놓은 것이었다.

보고를 받고 황급히 말에서 내려 직접 짐마차 안을 살핀 흑치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럴 수가…….”

“아무래도 함정에 걸린 것 같습니다.”

옆으로 다가온 홍종수의 말에 고개를 든 흑치영은 다급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여길 빠져나간다. 다들 어서 말에 오르라고 해!”

“옛.”

지시를 내린 흑치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병사 한 명이 한쪽 팔을 들어서 앞을 가리키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적이다!”

고개를 돌리자 정말 청군 보급대가 왔던 방향에서 일단의 기마가 쏜살같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포위됐습니다. 사방이 다 적입니다!”

이어진 외침에 주위를 둘러본 흑치영은 이를 꽉 깨물면서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전투 준비! 어서 전투대형을 갖춰라.”

여기저기 흩어진 채 긴장을 풀고 있던 별동대 기병들은 황급히 호각과 고함을 지르며 전투대형을 만들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홍종수의 물음에 흑치영은 언월도를 고쳐 잡고는 사방을 포위한 채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왼쪽 측면을 뚫어 포위망을 돌파한다! 서둘러라.”

“옛.”

함정을 파고 기다린 적과 맞붙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일단 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최정예인 팔기군이 삼만이나 포함된 청군을 뿌리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동대의 움직임에 당장 포위망을 급격히 좁히고는, 퇴로를 막고 앞뒤에서 강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이내 양군은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충돌했다.

콰콰쾅!

서로 부딪치는 순간 별동대와 청군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휘두르거나 찔러 넣었다.

“이얍!”

“합!”

시뻘건 피가 뿌려지고 충격을 받은 이들이 중심을 잃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히히힝.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도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며 목뼈가 부러지거나 뒤따르던 기마에 밟혀 숨이 끊어졌다.

그들의 애달픈 비명은 주인을 잃은 말의 투레질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뒤섞여 전장 가득 울려 퍼졌다.

별동대를 찾기가 쉽지 않자 가짜 보급대를 만들어 미끼를 던지고 몰래 뒤따라와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성공한 야골타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포위망을 더 단단히 조여라!”

신호 깃발이 흔들리고 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청군은 넓게 퍼져 있던 간격을 빠르게 좁히며 포위망을 두껍게 만들었다.

단번에 치고 나가는 데 실패한 별동대는 청군과 난전에 휩싸였다.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흑치영은 몸을 사리지 않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적과 싸웠다.

그의 두 손에 들린 언월도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상대의 갑옷이 찢겨 나가고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동료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당황하던 적병은 언월도 창대에 옆구리를 얻어맞고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낙마한 적병은 흑치영이 신고 있던 송곳이 박힌 철 신발에 안면을 가격 당해 그대로 허물어지듯 엎어졌다.

흑치영뿐만 아니라 별동대 기병 모두가 고군분투를 하며 용감히 싸웠지만 수적 우위를 앞세운 청군의 공격에 하나둘 쓰러져 갔다.

군호 직위에 있는 장수인 야수난마저 앞장서서 퇴로를 뚫다가 십여 명이 넘는 적병에 둘러싸인 채 온몸을 난도질당하고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흑치영은 신음을 삼켰지만 당장 자신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느라 여유가 없었기에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월도를 크게 휘둘러 적과의 거리를 벌린 흑치영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날 죽이려면 네놈들도 최소 백은 목숨을 내놔야 될 것이다!”

살기를 가득 피워 올린 흑치영은 말을 몰아 앞으로 움직이며 적들을 향해 언월도를 마구 휘둘러 댔다.

그의 뒤로 피와 살이 뒤범벅이 된 혈로가 새로 만들어졌다.

벌써 그의 손에 숨이 끊어진 적병이 수십에 달했으나 흑치영은 정말 백을 채우려는 듯이 앞을 가로막는 적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적병의 몸을 언월도로 양단해 버리는 순간, 옆구리에서 뜨거운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큭.”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어느새 옆으로 접근한 적장 한 명이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고통을 안겨 준 적장은 자신이 흑치영한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희열에 찼다.

그것도 잠시, 몸을 돌린 흑치영은 분노에 찬 얼굴로 언월도를 내리그었다.

“이놈!”

“헉.”

촤아악.

당황한 적장이 검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흑치영의 언월도는 그것마저 함께 잘라 버리며 상대를 양단해 버렸다.

뿜어 나온 피에 흑치영이 입고 있던 갑옷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흑치영의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검에 찔린 옆구리를 한쪽 손으로 움켜잡으며 휘청거렸다.

그가 검에 찔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온 홍종수는 흑치영을 부축하고는 빠르게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가 깊어 찢어진 갑옷 사이로 피가 많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본 홍종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다들 장군님을 모셔라. 여길 빠져나간다!”

홍종수의 외침에 근처에서 적과 싸우던 기병들이 황급히 흑치영 옆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흑치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만 도망칠 수 없다. 끝까지 남아 부하들과 싸울 것이야.”

“이 몸으로는 무립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함께 전장을 탈출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빠르게 말을 한 홍종수는 흑치영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 전에 그의 몸을 타고 있는 군마에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주위를 둘러싼 기병들과 함께 왼쪽으로 달렸다.

적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홍종수와 기병들은 사력을 다해 탈출로를 뚫었다.

다른 별동대 기병들도 탈출을 시도했지만 적군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면서 상당수가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여야 했다.

그렇게 유격 전술로 청군을 괴롭히던 별동대는 야골타가 판 함정에 빠져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겨우 천여 명만이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현은 두꺼운 이불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불을 끄고 누운 게 벌써 한 식경 전인데, 아무리 눈을 감고 잠을 청해도 점점 더 정신만 말짱해질 뿐 도통 졸리질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낮은 풀벌레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칠현을 불렀다.

“상선.”

“예, 폐하.”

얇은 문을 사이에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칠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잠이 안 온다.”

“…….”

불쑥 내뱉은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분명 저 너머에서 ‘어쩌라고요, 자장가라도 불러 드려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올릴까요?”

“됐다. 넌 무슨 일만 있으면 내 입에 먹을 것을 물리려고 하더라?”

물론 배가 부르면 성질이 너그러워지는 도현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짓이다.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이제 그걸 눈치챘냐고 타박을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칠현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또 야밤에 트집이십니까. 전 그저 배 속이 따뜻하게 데워지면 온몸에 혈기가 돌고 자연스레 잠도 잘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 건데요.”

“진짜야?”

“아무렴요.”

그동안 는 건 말재주밖에 없는지 아주 그냥 줄줄 늘어놓는 게 시장 바닥의 약장수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차는 필요 없어. 괜히 밤에 먹으면 더부룩하기만 하고.”

그러면서 도현은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칠현이 방으로 들어와 촛불을 붙이자 어슴푸레한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겉모습이나 구조는 명나라, 내부는 조선식으로 꾸며져 있어 어딘지 친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공존하는 방이었다.

얇은 침의를 입고 있던 도현이 위에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나갈 채비를 하자 칠현이 물었다.

“갑자기 어딜 나가시려고 하십니까?”

“잠이 도통 안 오니 바깥바람이라도 쐬어야지 안 되겠다.”

“그래도 이런 야밤에요?”

“그냥 조금 걷는 것뿐인데 뭘. 어차피 계속 누워 있어 봤자 머리만 아플 게 뻔해.”

“예에, 정 그러시다면야.”

원체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칠현은 왜 굳이 따끈한 방을 나가서 찬 바람을 맞고 오겠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칠현을 뒤꽁무니에 달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주위를 지키고 있던 위사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미 안쪽에서 불이 켜졌을 때부터 도현이 잠을 자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기에 크게 떠들진 않았지만, 어딜 가느냐며 뒤에 바짝 달라붙을 기색이기에 칠현이 잽싸게 중간에 끼어들어 손가락으로 도현을 가리키곤 다시 눈을 찡긋거렸다.

대충 몸짓 발짓으로 ‘따라오는 건 좋지만 너무 가까이 가서 귀찮게 굴진 말라’는 뜻을 전한 칠현은 어느새 저만치 멀리 가 있는 도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자연스레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찾아 아무렇게나 발길을 옮기던 도현은 작은 관목들과 흰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후원 끝자락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치형으로 휘어진 돌계단 아래 제법 폭이 넓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다, 문득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도현은 둥그렇게 떠 있는 커다란 달을 보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붉은 달이라니…….”

시리도록 맑은 빛을 내는 은색 달빛 대신,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붉은색 달이었다.

물론 붉은 달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저쪽에 있던 시절엔 대기오염이니 뭐니 해서 종종 달빛이 붉게 변했기 때문에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에서 멀미가 나듯 이상스레 요동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게 짜증스러웠다.

갑작스레 인상을 찡그리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뎁쇼.’ 하는 칠현의 눈빛에 도현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전장에 있는 병사들을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십니까?”

“다들 밥은 먹고 있는지, 잘 싸우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달을 보기 전까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 대꾸하는 도현의 표정은 자연스럽기만 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용맹스러운 조선의 병사들이 아닙니까.”

칠현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도현을 위로했다.

“폐하.”

“왜 그러나?”

줄곧 뒤에서 잠자코 있던 위사들 중 한 명이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밤바람이 찹니다. 옥체가 상하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그러고 보니 살짝 찬기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해 도현이 잠자코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가 일행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칠현이 본능적으로 도현을 막아서고 위사들이 바짝 긴장하여 경계를 취하는 순간, 도현의 눈앞으로 온통 땀범벅이 된 장수가 뛰어 들어왔다.

“폐, 폐하!”

장수는 도현을 보자마자 쓰러질 것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칠현과 위사들을 옆으로 물린 도현이 나서서 물으니 장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별동대가 청군의 함정에 빠져 괴멸당했다고 하옵니다.”

“뭐야!”

말을 듣자마자 도현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2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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