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권
거점 확보
뜨겁게 내리쬐는 남국의 태양 아래 돛대에 봉황 깃발을 내건 열두 척의 커다란 선박이 함대를 이룬 채 파도를 헤치며 항진하고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순풍에 돛이 한껏 부풀어 있어 배들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제일 앞에 위치한 기함 선수에는 가벼운 경장 차림의 서지호가 서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육전대 지휘를 맡은 김진석이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부사 어른, 여기에 나와 계셨군요.”
“김 군호, 어서 오게.”
사직이었던 김진석은 왜국과 요서 점령전에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정사품에 해당하는 군호로 승차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도가 높아 고생했었는데 오늘은 아주 잔잔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서지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김진석은 아무 염려 말라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지만 다들 바다에는 이골이 난 이들이라 그 정도 파도에는 끄떡없습니다.”
“다행일세.”
“그나저나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할 때가 됐지 않습니까?”
“오늘 안에 육지가 보일 걸세.”
“장수로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능하면 화란과 충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나도 마찬가지일세.”
화란과 싸워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럭저럭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오던 상대와 부딪쳐야 된다는 것이 조금 껄끄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가로 지원을 계속해 준다고 도현이 직접 약속하기는 했어도 본국과 수만 리나 떨어진 섬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 서지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화란이 아국의 행보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군.”
“그나마 저들이 세운 요새와 많이 떨어진 섬 북동쪽에 상륙할 예정이니 초반부터 부딪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곱지 않을 테니 절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걸세.”
“물론입니다.”
두 사람이 향후 해야 될 일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높다란 돛대 위에 올라가 주위를 살피던 견시수가 한쪽 팔을 들어 전방을 가리키며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육지다!”
“……!”
대화를 멈추고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정말 수평선 너머에 희미하게 시커먼 육지가 보였다.
오랜 항해 끝에 도착한 육지를 보고 수병들 대부분이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하는 가운데, 서지호만은 이제부터 화란의 텃세를 이겨 내고 임금인 도현이 내린 임무를 완수해야 된다는 생각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선군이 도착한 곳은 대만 북동쪽에 위치한 합자난蛤仔難과 인접한 해안이었다.
대만 원주민인 카바란噶瑪蘭족의 집단 거주지이자 바다와 함께 상당히 넓은 평야가 인접해 있어 풍요로운 곳이었다.
원래는 스페인이 소수의 한족을 앞세워 교회를 세우고 포교 활동을 하며 이곳을 지배했지만 십 년 전 네덜란드와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났다.
지금은 네덜란드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최근 영국과의 전쟁이 터지면서 많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뜻이었다.
먼저 선발대를 보내서 해안 근처에 교두보를 확보한 서지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본대를 상륙시켜 요새 건설에 착수했다.
서양 세력을 등에 업고 상전 노릇을 하던 일부 한족들이 조선군의 출현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조선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이 넘는 조선군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한족들은 일단 물러선 채 잔뜩 경계를 하며, 급히 네덜란드가 대만을 통치하는 식민 수도인 젤란디아Zeelandia 요새로 전령을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는 대만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총독을 임명하고 각종 세금을 거둬들였다.
삼 대 총독인 루벨라 자작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한족들의 대규모 이주에 측근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또 상당한 규모의 한족들이 섬에 유입됐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왼편에 앉아 있던 관리 한 명이 루벨라 총독의 물음에 살짝 굳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오백여 명 정도가 배를 타고 중동부 해안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한족이 모두 얼마나 된다고 했지?”
“몰래 들어와 사는 자들도 있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족히 사오만은 넘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루벨라 총독은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나 많단 말인가?”
“아무래도 중국 대륙의 정세가 불안하다 보니 푸젠성福建省 남부와 광둥성廣東省 동부의 한족들이 대거 이리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라는 거군.”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필요에 의해서 한족의 이주를 용인해 왔지만 이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간부로 대만 지역 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포름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 문제를 총독께 말씀드리고 대책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족들이 섬에 들어오는 걸 그냥 내버려 둔 건 농지를 개간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는 데 필요한 일손을 충당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반항적인 까오산高山족을 견제하고 힘을 빼기 위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네덜란드는 교묘하게 이주해 온 한족과 원주민인 까오산족의 갈등을 조장해서 식민 지배에 대한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대로 한족들의 숫자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늘어난다면 자칫 저들에게 우리가 잡아먹힐지도 모릅니다.”
“껄끄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닙니까?”
젤란디아 요새 주둔군 지휘관인 바벨 대령의 반박에 루벨라 총독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세. 포름 총관의 말이 맞아. 지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 골칫거리가 될 거야.”
“저도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긴 해안을 다 막아 버릴 수도 없고 배를 타고 건너오는 한족들은 제지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바벨 대령이 난색을 표하자 한쪽 손을 들어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쓸어 넘기며 잠시 고심하던 루벨라 총독은 이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떻소?”
“무슨 묘안이 있으신 겁니까?”
다들 기대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루벨라 총독이 생각해 낸 것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한족을 우대하던 걸 없애는 것과 동시에 농지 소유를 불허하고 중과세를 물리는 거요. 그럼 자연스럽게 이주민 숫자가 줄어들지 않겠소.”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탄성을 내뱉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입니다.”
“한족은 땅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니 농지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겁니다.”
“바로 그걸세.”
이것 말고도 루벨라 총독은 한족들한테 추가로 세금을 거둬 최근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데 부족한 전비를 일부 충당할 요량이었다.
“다들 동의를 하는 것 같으니 최대한 빨리 세부 조항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하겠소.”
“예.”
그 뒤로도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젊은 장교 한 명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회의를 방해받은 루벨라 총독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쳐다보자 장교는 약간 주눅이 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합자난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루벨라 총독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급보라니?”
“전령이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합자난 해안에 조선군이 대거 상륙했다고 합니다.”
“조선군이라고!”
“옛.”
날벼락 같은 말에 루벨라 총독뿐만 아니라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술렁였다.
“명나라 해적이나 왜구가 습격해 온 걸 잘못 안 것이 아니냐?”
값비싼 교역품을 가득 실은 배들을 노린 명나라 해적과 왜구 들이 득실거리며 가끔씩 육지에 상륙해 노략질도 했기에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만했다.
“분명 조선군이라고 합니다.”
“조선군이 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루벨라 총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포름 총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혹시 다른 곳으로 가던 중에 선박이 파손됐거나 필요한 물자를 구하려고 상륙한 것이 아닐까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도 있지만 동양 국가들을 몇 수 아래로 여기는 우월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 루벨라 총독과 사람들은 설마하니 조선이 대만에 세력을 뻗치려고 한다는 걸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소식을 전한 장교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수천의 병력이 상륙해 해안 근처에다가 요새를 짓고 있답니다.”
“요새라고 했나!”
당황한 루벨라 총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이런!”
명백한 도발 행위에 루벨라 총독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분노했다.
“감히 우리 네덜란드의 영토를 넘보다니.”
“이건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모여 있던 간부들도 조선을 성토하며 크게 화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 식민지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부를 쌓고 있었기에 조선의 행동을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걸로 받아들였다.
그런 가운데 총독 다음으로 발언권이 강한 포름 총관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전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선 행동에 나서기 전에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걸 고려해서 조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흐음.”
화를 내기는 했지만 사실 영국과의 전쟁 때문에 여유 전력 대부분을 바타비아에 보낸 상태라 당장 조선하고 전쟁을 벌일 입장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명나라를 제치고 최근 조선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무턱대고 조선과 싸울 수 없었던 루벨라 총독은 팔짱을 낀 채 고심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하면 사신으로 누가 가겠소?”
그러자 포름 총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포름 총관이 직접 말이오?”
“예. 제가 의견을 내기도 했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조선말을 조금 할 줄 아니 다른 사람보다는 의사소통을 하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통역을 거치는 것보다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가 된다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쉬웠기에 루벨라 총독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소. 바벨 대령.”
“말씀하십시오, 총독 각하.”
“저들이 수천의 병력을 끌고 왔다고 하니 눈치 빠르고 똑똑한 장교를 한 명 총관 일행에 동행시켜 은밀히 전력을 살펴보고 오도록 하게.”
만약을 대비해 상대를 미리 정탐해 놓으려는 루벨라 총독의 의도를 파악한 바벨 대령은 얼른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루벨라 총독은 가뜩이나 이것저것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은 상태에서 들려온 급보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음 날 아침 포름 총관은 루벨라 총독이 붙여 준 호위 스무 명과 함께 말을 타고 급히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합자난으로 달려갔다.
한편 조선군은 서지호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육지에 상륙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임시 선착장과 주변을 둘러싼 목책을 완성했다.
목책 안에는 백여 개가 넘는 천막을 세워 임시로 병사들과 일꾼으로 데려온 포로를 수용했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방어는 될 테니 한시름 놨군.”
서지호가 길게 늘어서 있는 목책을 보며 하는 이야기에 김진석이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벽돌 가마도 다 완성돼서 이제 곧 성벽을 쌓아 올리게 되면 아무도 쉽게 공격해 오지 못할 겁니다.”
“그때까지 충돌이 안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소.”
조선군은 기존에 바윗돌이나 흙을 이용한 방법 대신 벽돌을 구워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 계획이었다.
석성에 비해 공사 기간과 일손이 크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벽돌 사이에 흙을 채워 넣고 단단히 다져 성벽을 두껍게 만들면 포격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고 보수도 쉬웠다.
“그건 그렇고 요즘도 한족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나?”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서지호가 묻자 부관이 약간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군의 군세가 많아 대놓고 저항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반응을 보이며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해서 정찰을 제외하고 가급적 병사들이 교두보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시키고 피치 못할 경우에는 항상 열 명 이상 무리를 지어 움직이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서지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흥. 원래 저들 땅도 아니고 제 놈들도 이곳에 이주를 해 온 주제에 가당치도 않게 텃세를 부리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옆에 있던 김진석도 볼을 씰룩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괜히 문젯거리를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참으시게.”
살짝 흥분한 김진석을 다독인 서지호는 부관을 보며 다시 이야기를 했다.
“고산족(카바란족)들은 어떤가?”
“여전히 우릴 경계하지만 얼마 전 도호부사께서 직접 대족장을 방문하고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교환하면서 조금은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이 지역 거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산족과 관계가 틀어지면 향후 계획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테니 관계 개선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옛.”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주둔지를 둘러보고 있을 때 하급 장수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장군.”
“무슨 일인가?”
“방금 순찰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덜란드 총독이 보낸 사신이 이리로 오고 있다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네덜란드 측에서 반응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른 행동에 서지호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벌써?”
“아무래도 부근에 있는 한족들이 젤란디아에 소식을 알린 모양입니다.”
김진석의 짐작에 서지호는 인상을 쓰며 짧게 혀를 찼다.
“쯧.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한 서지호는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중에 싸우더라도 일단은 서로 대화를 해 봐야겠지. 여봐라.”
“예.”
“화란 사신이 도착하면 내게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군례를 취한 하급 장수가 물러나자 서지호는 수하 무장들과 함께 주둔지 중앙에 위치한 지휘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포름 총관 일행이 십여 기의 조선군 기병들한테 둘러싸여 주둔지에 도착했다.
“저긴가 보군.”
그러자 총독이 호위로 붙여 준 빌헤름 중위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다가 정면을 유심히 살펴보며 이야기를 받았다.
“주둔지 규모로 볼 때 적어도 오륙천 명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으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에 포름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타비아 요새에 있는 네덜란드군을 다 합쳐 봐야 천 명이 겨우 넘는데, 다섯 배나 많은 병력이 상륙해 있다니 절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더군다나 칼과 활 같은 냉병기를 쓰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병력이었기에 더욱 위축이 됐다.
목책 입구를 통과해 주둔지를 가로지르면서 근심은 더 깊어졌는데,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도 완전히 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군기를 유지하는 모습에, 군의 운용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봐도 정예들임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가능하면 대화로 원만히 일을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에 서지호는 휘하 무장들과 함께 지휘 천막 밖에서 포름 총관 일행을 맞이했다.
그러자 말에서 내린 포름 총관은 조금 어색한 조선말로 인사를 받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만 총독 각하를 대신해서 온 미하엘 포름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조선말을 할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서지호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반색을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아시는군요. 이거, 놀랐습니다.”
“여길 찾는 조선 상인들과 거래를 하다 보니 조금씩 배웠는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거래라고 하시면……?”
“아, 이곳 동인도회사 책임자로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자, 여기서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예.”
넓은 지휘 천막 안은 회담을 위해 나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자리에 앉자 당번병이 따뜻한 인삼차를 내왔다.
진한 인삼 향기가 천막 안을 가득 채우자 포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향이 아주 좋군요.”
“귀한 분들이 오신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를 한 겁니다. 어떻게, 입맛에 맞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상거래를 하면서 인삼차를 제법 많이 접해 봤지만 이건 그중에서 상上품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가벼운 대화로 분위기를 푼 서지호는 용건이 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앞에 앉아 있는 포름 총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요?”
그러자 포름 총관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국 영토인 대만에 사전에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조선군이 상륙한 것에 대해 총독께서 심히 우려를 하고 있으십니다. 양국의 우호 관계를 감안해서 이번 한 번만은 그냥 넘어갈 테니 조속히 철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천막 안은 한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서지호가 정색을 하며 포름 총관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상체를 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오해라고요?”
“그렇습니다. 귀국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최근 이 주변 해역에서 극성을 부리는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온 겁니다.”
“…….”
서지호의 말에 포름 총관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문제라면 이렇게 몰래 상륙할 것이 아니라 젤란디아 요새로 와서 정식으로 협조를 구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지적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해적들이 설치는 장소가 북쪽 바다인데 섬 남쪽에 있는 젤란디아 요새는 너무 멀 뿐만 아니라 최근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우리 조선군 단독으로 토벌을 하려고 했소이다. 그리고 자꾸 몰래 상륙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상황이 좀 정리되면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빨리 찾아온 것일 뿐이오.”
“그쪽 주장이 맞다고 쳐도 이렇게 보란 듯이 목책까지 세우며 주둔지를 만든 건 무슨 의도입니까?”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인삼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서지호가 이야기를 했다.
“토벌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물자를 보관할 장소가 있어야 되지 않겠소.”
뻔한 수작에 포름 총관은 인상을 찡그렸다.
“해적을 없애면 우리 조선뿐만 아니라 화란에도 좋은 일이니 부디 편의를 좀 봐줬으면 좋겠소이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자 포름 총관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튼 인정할 수 없으니 빨리 철수해 주십시오.”
상대가 재차 철수를 종용하자 서지호도 얼굴에서 미소를 살짝 지웠다.
“정말 이렇게 깐깐하게 나오셔야 되겠소?”
“보급기지가 필요하다면 이곳이 아니라 젤란디아 요새를 이용하면 될 겁니다.”
“거긴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포름 총관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한 서지호는 정색을 하며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께서 내게 하명하신 임무를 완수하게 위해서 이곳에 주둔지를 세우고 당분간 머물 예정이니 그렇게 아시오. 귀국과는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이번 일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 믿소이다.”
“허어.”
더 이상 협상은 없다는 듯이 서지호가 못을 박아 버리자 포름 총관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도 계속 포름 총관이 철수를 요구했지만 서지호는 고개를 내저었고 결국 첫 번째 만남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서로 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끝났다.
포름 총관 일행이 조선 측에서 제공한 숙소로 가자 대화를 지켜보던 김진석이 서지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순순히 양보를 할까요?”
그러자 서지호는 다 식어 버린 차 대신 새 찻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저들 입장에서는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불청객이나 다름이 없으니 분명 쉽게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럼 낭패지 않습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진석과 달리 서지호는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처음 임무를 맡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지 않나. 대화로 풀리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저들이 무력을 동원하려고 든다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 상대를 해 주면 될 것이야.”
“그렇지요.”
김진석은 약간 경직된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도 해가 뜨기 무섭게 포름 총관이 찾아와 귀찮게 했지만 서지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해적 토벌을 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네덜란드 측이 제대로 주변 해역을 관리하지 못해서 자신들이 여기까지 토벌을 온 것이 아니냐며 따지는 뻔뻔함(?)마저 보였다.
그렇게 나흘이 넘게 대화를 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자 포름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다시 젤란디아 요새로 돌아갔다.
한편 한양에서는 1652년 임진년 새해를 맞이해서 하례식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모인 첫 조회가 열렸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왕좌에 앉은 도현은 근엄한 얼굴로 좌우에 시립해 있는 신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올 한 해도 짐을 도와 아국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들 주시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회를 시작하려고 할 때 총리대신인 박황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전하, 현안 보고를 드리기 전에 건의드릴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나라가 커지고 국력 또한 높아진 만큼 그에 걸맞은 궁궐이 있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지금 거처하고 계신 창덕궁은 그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손색이 많으니 하루빨리 정궁인 경복궁을 재건해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조선왕조가 지은 궁궐 중에 제일 먼저 지어졌고 규모 또한 가장 컸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약탈을 당하고 화재가 나면서 모두 소실돼 지금은 터만 남아 있었다.
“총리대신께서 바른말을 하셨습니다.”
“그렇사옵니다. 경복궁을 저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저 역시 찬성입니다.”
정궁으로서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권위도 있거니와, 왜적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아픈 역사가 모두에게 쓰린 상처로 남아 있었기에 박황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도현은 그만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경들 생각은 잘 알겠네. 하나 아직은 시기가 이른 듯하니, 일은 차후에 다시 논하는 것이 좋을 거 같군.”
“어째서 때가 아니라 하시는 것입니까?”
경복궁을 재건하는 것은 언젠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지금처럼 민심이 평안하고 군왕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때도 찾아보기 힘들거늘, 어째서 본인만이 저리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왕가의 권위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아직 대외적으로 불안 요소들이 많고, 무엇보다 청과의 전쟁이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자금과 인력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역을 벌이는 건 형편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경복궁 문제는 정세가 안정되고 여유가 있을 때 다시 거론하는 게 맞을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정궁인 경복궁을 저리 폐허로 놔둔다면 선대왕들을 뵐 낯이 없을뿐더러, 백성들에게도 왕실의 위신이 제대로 안 서지 않겠사옵니까.”
완고한 박황의 태도에 다른 대신들도 덩달아 동조했다.
“총리대신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하, 재고해 주시옵소서.”
너도나도 한 목소리로 떼를 쓰자, 도현의 얼굴에 난감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끄응.”
잠시 뜻을 누그러뜨리는가 싶었으나 이내 그는 고집스럽게 입가를 한일자로 굳히고 말했다.
“경들의 충심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나, 아무튼 시기상조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더 이상 물고 늘어지면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는 경고를 담은 눈빛으로 그리 말하니, 박황을 비롯해 그의 편을 들었던 대신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경복궁 재건 문제를 뒤로 미루고 다른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회를 끝낸 도현이 희정당으로 돌아와 막 한숨 돌리려고 하고 있을 때 이번엔 숙안 공주가 그를 찾아왔다.
“공주가? 갑자기 무슨 일이라 하더냐?”
“전하께 드릴 물건이 있다 하시던데요.”
손아래 동생들과는 달리 숙안은 침착하고 조신한 편이라 도현이 먼저 불러들이지 않으면 좀처럼 희정당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아이가 제 발로 먼저 찾아왔다고 하니 도현은 기쁘면서도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라.”
“예.”
칠현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숙안 공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되는 숙안 공주는 제 어미를 많이 닮아 마른 체형에 하얀 피부, 선이 가는 것이 영락없이 젊은 시절의 중전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을 많이 듣곤 했다.
얼굴에 얼기설기 그려져 있는 마맛자국만 아니라면 꽤 미인이었을 텐데.
자식들은 다 사랑스럽고 어여쁘지만, 숙안 공주는 볼 때마다 부모로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에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바마마.”
하나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리기라도 하듯 도현을 바라보는 숙안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본인도 어렸을 때는 얼굴의 마맛자국이 부끄러워 매일 숨기곤 했는데, 도현과 중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니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숙안이 왔느냐. 어디,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도현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숙안에게 손짓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가끔씩 이리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항상 제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걱정하던 괴짜 공주는 어디로 가고, 딱 제 나이 때 처녀다운 풋풋함을 뽐내는 소녀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나?”
“후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숙안 공주는 도현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듯 작게 웃었다.
하긴 왕위에 올라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소년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와 청년의 푸르른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도현이다 보니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마치 오빠와 여동생 같을 뿐 도저히 부녀지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중전이 가끔 전하께서는 불로초라도 드시는 게 아니냐면서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서 말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네가 여기까지 다 오고?”
“사실은 아바마마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흐음? 어디 보자꾸나.”
선뜻 손을 내민 도현과 달리 숙안 공주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느냐?”
“그게, 좀 부끄러워서요. 제가 보잘것없는 솜씨로 만든 것이라…….”
그 말에 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예. 어마마마께서 여자는 수를 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요즘 배우고 있어요.”
왕실의 자손으로서 남부끄럽지 않게 학문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여성스러움을 갈고닦는 것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열심히 설득했을 중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럼 더 좋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물건 아니더냐.”
“아바마마.”
어쩜 저렇게 듣고 싶은 말만 쏙 골라서 해 주는 걸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다 도현과 같다면 지금 당장 혼인식을 치러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숙안 공주는 잘 익은 복사꽃처럼 볼을 발그레 붉혔다.
“보고 웃지 마셔요.”
그러면서 숙안이 내민 것은 봉황과 용이 수놓인 머리끈이었다.
폭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하고, 여성용보다는 다소 길이가 짧은 이것은 남자가 주로 이마에 두르는 용도로 쓰는 것이었다.
“하하, 뭘 그리 걱정하느냐?”
서툰 솜씨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선이 삐뚤빼뚤하고, 몇 번 실패해서 다시 수놓은 자국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도안이 화려하고 세세한 장식이 들어가 있어 그리 흠이 되진 않았다.
“처음치곤 꽤 괜찮게 잘 만들었구나.”
도현이 칭찬하자 숙안 공주는 매우 기쁜 듯한 얼굴로 환하게 안색을 밝혔다.
“정말이셔요?”
“아무렴.”
“다행이다. 아바마마께서 싫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리 딸이 처음으로 내게 준 선물인데 어찌 그러겠느냐?”
도현은 ‘넌 이 아비를 뭐로 보고.’라며 투덜거리곤 숙안 공주가 준 머리띠를 즉석에서 둘러매 보았다.
“멋지셔요, 아바마마.”
“하하, 내가 좀 그렇지? 어떠냐, 칠현아?”
“…….”
헤벌쭉한 도현의 얼굴을 보고 영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칠현은 갑자기 숙안 공주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려지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공주 마마의 실력이 무척 뛰어나십니다, 전하.”
“그렇단다, 숙안아.”
“아버님도 참, 과찬이셔요.”
들뜬 가슴으로 숙안이 자리를 물러난 후, 계속 웃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던 도현이 불쑥 말했다.
“그러니까 머리띠만 멋있단 얘기지?”
“예?”
“머리띠는 멋지고 예쁜데, 나는 안 괜찮다 이 얘기렷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런데 왜 머리띠만 칭찬하냐고.”
“어…….”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변명할 거리를 찾던 칠현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근데 숙안 공주 마마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었…… 쿠엑!”
대답 대신 딱딱한 베개가 날아와 칠현의 얼굴에 직격했다.
“아, 말하라고 해서 말했는데 왜 성질이세요!”
“그 입 다물라!”
버럭버럭 소리치고 드잡이질(?)을 해 대는 방 안의 소란에 바깥에 서 있던 궁녀들은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군신 간에 가벼운 애정(?) 확인의 시간을 가진 뒤 숙안이 만들어 준 머리띠를 잘 챙겨 넣고 도현이 올라온 서류를 살펴보고 있을 때 국방대신 임경업이 급히 희정당을 찾았다.
“아까 조회 때 봤는데 또 무슨 일이오?”
“급히 전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뭔지 말해 보시오.”
그러자 임경업은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하나 양손으로 받쳐 들며 말했다.
“남방으로 떠난 서 도호부사가 보낸 첫 번째 장계이옵니다.”
“오, 그래. 어서 가져와 보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기에 도현은 반색을 했다.
칠현이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가져오자 그는 얼른 매듭을 풀고는 옆으로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장계는 대만에 도착한 첫날 보낸 것으로 무사히 목적지에 상륙해 요새 건설에 착수한다는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도착했다니 다행이군.”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진짜 힘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않겠사옵니까.”
“맞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시선을 들며 말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운 것이 없도록 국방대신이 각별히 챙기도록 하시오.”
“염려 마시옵소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영길리와 화란의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전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영길리가 최근 들어 다시 해협 봉쇄에 나서면서 화란 동인도회사의 사업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하옵니다.”
“그럼 조만간 두 번째 충돌이 벌어지겠구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동방 무역을 통해 국가 경제를 유지하는 네덜란드였기에 교역로가 차단되는 건 그야말로 숨통이 막히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특히나 본국에서도 영국과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필요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동방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기에 말라카 해협을 틀어막아 상대의 숨통을 조이려는 영국과 교역로를 지키려는 네덜란드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거 괜히 두 나라의 싸움에 아국 상인들이 피해를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실제로 이미 그동안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던 조선 상단들은 유럽과 연결되는 교역로가 막히면서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마카오를 통해 일부 물품을 판매하고 왜국과의 교역이 다시 늘어나지 않았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대만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과 맞물려서 어느 나라가 유럽으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는지는 아국 입장에서도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니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도현은 남방 문제와 청국에 대해 임경업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한편 돌아온 포름 총관으로부터 조선 측의 주장을 전해 들은 루벨라 총독은 얼굴을 시뻘겋게 상기시키며 언성을 높였다.
“뭐, 해적 토벌? 이자들이 날 바보로 아나 정말 그딴 헛소리를 지껄였단 말인가!”
그러자 포름 총관 역시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해적 토벌은 핑계일 뿐이고 은근슬쩍 합자난 지역에 엉덩이를 붙이고 눌러앉으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그걸 그냥 보고만 왔단 말이오!”
흥분한 루벨라 총독이 질책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포름 총관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것이…… 수차례 항의를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에잉!”
누가 가든 작정을 하고 버티면 방법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루벨라 총독은 혀를 차며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지금 조선군은 어찌하고 있나?”
고개를 옆으로 돌린 총독의 물음에 포름 총관과 함께 합자난에 다녀왔던 빌헤름 중위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얼른 대답했다.
“우리가 떠나올 때쯤 이미 선착장과 주둔지 설치를 마치고 목책 외곽으로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옛.”
왼편에 앉아 있던 바벨 대령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대놓고 일을 진행하는 것 같군요. 빌헤름 중위, 조선군의 규모는 얼마나 되던가?”
이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빌헤름 중위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했다.
“머무는 동안 돌아다니는 데 제약이 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열 척이 넘는 선박에 병력은 족히 사오천은 될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 이천은 노역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포로였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빌헤름 중위는 그들도 모두 병력에 포함시켰다.
아무튼 상당히 많은 숫자에 루벨라 총독을 위시한 젤만디아 요새 간부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으으.”
“오천이라니…….”
“그리고 병력 대부분이 잘 훈련된 강병 같았습니다.”
숫자도 많은 데다 군기까지 제대로 잡힌 정예라니 간부들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갈수록 태산이군.”
“쪽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미개한 동양 군대지 않겠습니까. 명령만 내리시면 제가 수비대를 이끌고 가서 모조리 다 바다로 쫓아내 버리고 오겠습니다.”
바벨 대령이 호기롭게 내뱉는 말에 평소라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격려했겠지만 루벨라 총독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세. 조선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데다 동인도회사의 동방 교역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돼.”
“하면 이대로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작정입니까?”
바벨 대령이 살짝 언성을 높이면서 묻자 루벨라 총독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는 없지.”
섬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오랜 싸움 끝에 겨우 몰아내고 전체를 장악한 지 얼마 안 되는데 다른 세력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 처해 있는 네덜란드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당장 젤란디아 요새에 있던 군함 여섯 척 중에 절반이 넘는 네 척이 영국 함대와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바타비아로 간 상태였다.
여기다 지상 병력도 요새를 지킬 인원을 제외하면 조선군과의 전투에 나설 있는 숫자는 많아 봐야 오백 남짓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각종 향신료와 함께 조선에서 나오는 여러 물품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교역품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함부로 충돌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걸 보여 주듯 얼굴을 굳힌 채 한참 고심을 거듭하던 루벨라 총독은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이 문제는 우리 독단으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마침 바타비아에 계시는 도르네바르드 백작께 상황을 알려 행동을 결정하도록 하세.”
네덜란드군주인 오렌지 공의 측근이자 전권 대사인 도르네바르드 백작을 끌어들여 정치적인 책임을 덜겠다는 생각이었다.
“저들은 벌써 요새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군인인 바벨 대령이 불만을 표시했지만 루벨라 총독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조선군이 아무리 빨리 공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요새를 세우려면 최소한 몇 달은 걸리지 않겠나. 쾌속선을 이용하면 바타비아까지 금방 다녀올 수 있으니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걸세.”
“그렇긴 하지만…….”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포름 총관이 루벨라 총독의 의견에 찬성하며 힘을 실어 줬다.
“저도 그러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섣불리 대응을 했다가 자칫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요.”
루벨라 총독과 마찬가지로 포름 총관 역시 윗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더군다나 조선하고 교역을 해서 매년 큰 이익을 거두는 동인도회사였기에 관계가 악화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바벨 대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벨라 총독은 대응을 잠시 미룬 채 바타비아로 쾌속선을 띄웠다.
하지만 루벨라 총독의 기대와 달리 조선군이 가진 힘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거기다가 당장 눈앞에 닥친 영국 함대와의 일전에 집중하느라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네덜란드 측의 예상을 깨고 벽돌을 이용해 성벽을 쌓고 이천 명이나 되는 인력을 투입한 조선군은 하루가 다르게 요새를 세워 나갔다.
촤악!
“빨리들 움직여!”
채찍을 든 감독관의 다그침에 포로들은 눈치를 보며 가마에서 구워진 벽돌을 수레에 실어 나르거나 해자를 만들면서 파낸 흙을 가져와 성벽 사이에 넣고 다졌다.
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각 조마다 할당량을 주고, 성과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면서 은근히 경쟁까지 유도했다.
그래서인지 공사는 처음 계획한 것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서쪽 성벽은 거의 다 완성이 됐군.”
서지호의 이야기에 수행을 하던 부관이 얼른 말을 받았다.
“네. 내일 성문을 단다고 했습니다.”
“호오. 그래.”
요새가 완성이 되면 그만큼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서지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공사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때 하급 장수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장군, 지금 선착장에 본국에서 온 보급선이 도착했습니다.”
먼 외지에 나와 있을 때 본국의 소식을 알려 주고 무엇보다 필요한 물품을 가득 실고 오는 보급선만큼 반가운 손님이 없었기에 서지호는 반색을 했다.
“그럼 가 봐야지.”
서지호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선착장으로 향했다.
확장을 거듭해 이제 대여섯 척의 큰 선박이 한꺼번에 접안할 수 있을 정도인 선착장에는 이미 보급선 두 척이 닻을 내리고는 보급품을 하역하고 있었다.
쌀 같은 식량은 물론이고 나무통에 담긴 화약과 포탄 그리고 여러 종류의 가축까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말에서 내린 서지호는 선착장 한쪽에 서서 고함을 치며 하역 작업을 감독하고 있는 장수가 낯익은 걸 발견하고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박 만호가 아닌가!”
그러자 고개를 돌린 상대도 서지호를 보곤 반가운 얼굴을 했다.
“도호부사 어른.”
“정말 반갑구먼.”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예전 왜국 원정 때 함께 참전을 해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며칠은 더 있어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빨리 왔구먼.”
“다행히 오는 내내 순풍이 불어서 날짜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서지호는 한창 하역을 하고 있는 보급품들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물품이 상당히 많군.”
“예. 주상 전하께서 국방대신께 각별히 챙기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런 황공한 일이…….”
국왕인 도현이 잊지 않고 자신과 병사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서지호는 황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전하의 특별한 하사품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
궁금한 얼굴로 서지호가 쳐다보자 상대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입니다.”
“술?”
“대궐에도 진상되는 안동소주安東燒酎를 특별히 전하께서 지시해 오십 통이나 가져왔습니다. 먼 타지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내리신 어주御酒입니다.”
“이런 황공스러울 때가 있나.”
경상남도 안동 지역에서 주조되는 안동소주는 개성, 제주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삼 대 소주 중 하나였다.
고려 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역사 또한 오래됐는데 뒷맛이 깔끔하고 숙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처 소독과 소화불량, 식욕부진, 배앓이 등에 효력이 좋아 응급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애주가들이 한 번쯤 마셔 보기를 소원한다는 명주를, 그것도 임금이 하사를 해 줬다고 하자 서지호는 더욱 감격했다.
도현이 하사한 어주뿐만 아니라 이번에 들어온 보급선은 병사들 가족들이 보낸 편지도 함께 가져와서 큰 환영을 받았다.
술도 좋지만 아무래도 멀리 타지에 나와 있는 병사들한테 고향 소식만큼 반갑고 기쁜 것도 없었다.
서지호도 집에서 아내가 보낸 서찰을 박 만호에게 건네받고는 소중하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정말 고맙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같은 수군으로서 이 정도 일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정 그러시면 나중에 저도 어주 맛을 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하하. 알겠네.”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같이 미소를 짓던 박 만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화란 측과 한 차례 접촉이 있기는 했지만 보시다시피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 없이 거점을 만들고 있다네.”
“그렇군요.”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박 만호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영길리와 화란 간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왜, 그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아무래도 자신이 맡은 임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에 서지호는 귀를 세우며 관심을 보였다.
“오는 중에 마침 마카오에서 장사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상선을 만나, 들은 소식인데 두 나라가 다시 맞붙어서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양쪽을 합쳐 서른 척이 넘는 군선들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하더군요. 벌써 마카오 일대에서는 그에 관련된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에 서지호는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누가 이겼다고 하던가?”
“영길리가 화란 측 군선을 다섯 척이나 격침시키고 두 척을 나포하며 대승을 거뒀다고 하더군요.”
“지금 영길리라고 했나?”
뜻밖의 결과에 서지호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박 만호는 믿기 어렵다는 서지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번 패전으로 화란이 말라카 해협은 물론이고 빈탐 섬 부근 바다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합니다.”
“허어. 최근 영길리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남방 지역을 좌지우지해 온 화란이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다니 정말 놀랍군.”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 참.”
턱을 매만지며 서지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박 만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길게 보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우리한테 이롭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박 만호의 말대로 해전에서 화란이 대패를 당했다면 당분간은 이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였다.
다행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서지호는 머릿속으로 이 일이 향후 남방 정세를 어떻게 요동치게 만들지 계산이 복잡해졌다.
이틀 뒤 본국에서 쾌속선 한 척이 도착해 서지호에게 방카 섬 해전의 승패와 보다 자세한 소식을 알려 줬다.
한편 네덜란드 동방 식민지 경영의 중심지인 바타비아 요새는 방카 섬 해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군선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부두 곳곳은 비명과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로 가득 찼고 든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여기저기 피로 범벅이 되고 엉망으로 부서진 군선의 모습에 요새 거주민들은 패배를 뼈저리게 느끼며 절망했다.
이 순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은 바로 반데볼크 총독을 비롯한 요새 수뇌부들이었다.
지난번 영국 함대의 습격 때 받았던 피해를 몇 배로 쳐서 되갚아 주겠다며 전의를 불태웠었기에 더욱 좌절감이 컸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오!”
그러자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얼굴과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던 빌더스 제독이 머리를 숙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저의 실책입니다.”
빌더스 제독은 쉽사리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동양함대 제독이자 자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으로서, 타인의 선망과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사내가 저리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이런 상황은 본인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지만 회의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색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하고 일단 앉으시오.”
더 이상 그런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듯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빌더스 제독을 채근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부상을 당해 몸이 불편한 빌더스 제독은 부관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의자에 앉았다.
회의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해전에서의 패배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문제는 지금부터요. 승기를 잡은 영국 함대가 분명 이곳을 노릴 것이 분명한데 어서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소.”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방 지역에 있는 전력을 박박 긁어모아 벌인 해전에서 대패를 당하는 바람에 현재 바타비아의 방어력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승리를 거둬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영국 함대를 상대해야 되니 암담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지난번 습격 때 집중 포격을 받아 무너진 포대도 아직 다 복구를 못 한 상태였다.
“일단 급한 대로 포대 복구를 서두르라는 지시를 내려 뒀지만 영국 함대가 올 때까지 다 끝마칠 수 있을지…….”
반데볼크 총독이 말끝을 흐리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소. 반작크 장군.”
“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오?”
그러자 바타비아 주둔군 지휘관이자 준남작의 작위를 가진 반작크 장군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새 수비군 이천 명이 있고 무리를 하면 의용군을 오백 정도 더 모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포병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 주게.”
“지난번 적 함대가 습격을 해 왔을 때 항구 쪽에 있던 포대들이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건 아실 겁니다.”
시가지를 오갈 때마다 흉물스럽게 무너져 있는 해안 포대가 보였기에 참석자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포대들이 당하면서 배치되어 있던 대포도 함께 망실되거나 크게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당장 쓸 수 있는 대포가 열여섯 문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그런…….”
“허어.”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반데볼크 총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크게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더 심각한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대포들도 포탄과 화약 재고가 부족해 다 사용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작크 장군을 봤다.
“내성 무기고에 항상 충분한 수량을 보관해 두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었소?”
“그랬지요. 하지만 해로가 막혀 한동안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지난번 습격 때 많은 양을 소모한 데다 출정하는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을 대부분 꺼내 주는 바람에 무기고가 텅 빈 상황입니다.”
“끄으응.”
이야기를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절망적인 상황에 앓는 소리만 냈고 다른 참석자들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영국 함대가 들이닥치면 보나 마나 포격을 퍼부어서 방어선을 와해시키려고 들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맞대응할 수단이 없다면 그야말로 맨몸으로 적을 상대해야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포탄과 화약을 보충할 방도가 없겠소?”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묻자 반작크 장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영국 함대가 바닷길을 꽁꽁 틀어막고 있는 이상 보급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운이 좋아 본국에 지원 요청을 한다고 해도 물자를 준비해 여기까지 가져오려면 못해도 두세 달은 걸릴 텐데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소.”
“맞습니다.”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봐야지요.”
참석자들이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에 동조하며 그를 다그치자 반작크 장군은 약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화약을 구할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뭐요?”
방법이 있다는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몸을 당겨 앉으며 물었다.
“남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각 거점에서 보관 중인 화약과 포탄을 가져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미간을 찡그렸고 다른 참석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반작크 장군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필요성을 역설했다.
“영국 함대의 공격에서 바타비아를 지키려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만약 제때 화약과 포탄을 보충하지 못한다면 요새는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질 겁니다.”
“으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반작크 장군의 말대로 한다면 당장 필요한 화약과 포탄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는 있겠지만 대신 바타비아 이외에 다른 거점들을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키는 것이 됐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각 거점을 맡고 있는 수장들이 지시에 순순히 따를지 의문이었다.
“그러면 다른 곳들이 위험해지지 않겠나?”
“어차피 바타비아가 함락당한다면 나머지 거점들도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하나씩 각개격파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힘을 합쳐 대항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기는 한데 각 거점을 맡고 있는 수장들이 순순히 말을 들으려고 할지 모르겠군.”
“애써 일궈 놓은 것들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오렌지 공의 측근이시자 전권대사이신 백작님께서 나서서 설득하신다면 무조건 고집을 피우지는 못할 겁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고심하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이내 어찌할지 결정을 내렸는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가 편지를 쓰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날 밤 쾌속선 한 척이 급히 바타비아를 떠나 남방 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 거점을 돌아다녔다.
처음 이야기를 들은 각 거점 수장들은 펄쩍 뛰었지만 오렌지 공의 측근이자 백작 작위를 가진 도르네바르드가 편지를 써서 도움을 요청하는 데다 현실적으로 동방 무역의 중심지인 바타비아가 함락당하면 다른 지역도 버티기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보관 중인 물자를 내줬다.
대만에 있는 젤란디아 요새도 마찬가지였는데 지원은 고사하고 무기고에 있던 포탄과 화약을 절반이나 화물선에 실어 바타비아로 보내면서 합자난에 상륙한 조선군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