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요동치는 정세 (86/104)

요동치는 정세

타닥타닥.

판판한 석판이 깔린 길을 탁탁 밟는 발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밑창에 가죽을 덧댄 신발을 신고 거의 뛰는 듯한 속도로 빠르게 걷던 내관은 이따금씩 주위를 살피는 듯한 눈초리를 하고선 익숙한 모양새로 자금성 내를 가로질러 황후전으로 향했다.

“황후 마마.”

때마침 비단 침상 위에 누워 궁녀의 안마를 받고 있던 황후는 불현듯 찾아든 내관을 향해 나른하게 눈길을 돌렸다.

“무슨 일인데 이 소란이냐?”

앞에 선 내관의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다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산해관에서 급보가 도착했사옵니다.”

“산해관에서?”

“예.”

살짝 표정을 굳힌 태후는 한쪽 손을 까딱여 궁녀를 뒤로 물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뭐라고 하더냐?”

“그게…….”

내관이 선뜻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태후는 고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다그쳤다.

“어서 말을 하지 못할까!”

“영원성이 함락됐다고 합니다.”

“뭣이! 그게 사실이냐?”

“그러하옵니다.”

“이런!”

지원군이라고 달랑 향용병만 보냈을 때부터 내심 영원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난공불락이라 불리는 성이 이렇게 빨리 함락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아직 석가장에 있는 예친왕 일파를 토벌하지 못한 상황에서 요서를 점령한 조선군이 기세를 몰아 산해관을 친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패하다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애초에 능력도 없는 자를 막중한 총병 자리에 앉히고 제대로 지원도 해 주지 않은 그녀의 잘못이 컸지만, 태후는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고 공손척에게 짜증을 냈다.

빨갛게 칠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태후는 눈치를 보며 앞에 서 있는 내관에게 소리를 쳤다.

“당장 대신들을 불러들여!”

“옛.”

지시를 받은 내관이 서둘러 방을 나가자 태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안절부절못했다.

한편 도현은 아직 패잔병 소탕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원성에 입성해 서문 문루에 올라서 넓은 시가지를 둘러봤다.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곳은 만큼 문루 지붕은 포격에 폭삭 무너졌고 성가퀴도 성한 걸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가지도 마찬가지였는데 성벽과 인접한 곳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고 여기저기서 화재가 발생해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찬찬히 성안을 살핀 도현은 오랜만에 웃는 얼굴로 뒤에 도열해 있는 장수들의 공을 치하했다.

“어려운 상황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모두 극복하고 이렇게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영원성을 함락시켰으니 다들 수고가 많았네.”

그러자 제일 앞에 나란히 서 있던 남두병 사령관과 통제사 손억기가 대표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공하옵니다.”

“좀 더 빨리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청군도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와 몇 달을 싸운 뒤에야 겨우 무너뜨릴 수 있었던 성을, 비록 피해가 크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함락한 건 다 경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워 준 덕분일세. 한양으로 개선을 하면 전공에 맞는 상급을 내릴 터이니 기대하게.”

도현의 말에 장수들은 기대 어린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망극하옵니다.”

“그건 그렇고 요서총병을 붙잡았다고?”

“그렇사옵니다. 항복을 한 뒤 총병 관저에 있는 걸 포로로 잡았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대답에 도현은 약간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관저라고 했나?”

“예.”

“전투를 지휘해야 될 자가 어떻게 성벽이 아니라 관저에 있었단 말인가?”

“알고 보니 실제로 저희와 맞서 싸운 자는 우군장 이화민이라는 장수이고 요서총병 공손척은 측근들과 함께 공성전이 벌어지는 동안 관저에만 틀어박혀 있었다고 하옵니다.”

몰랐던 사실에 도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혀를 찼다.

“쯧쯧. 명색이 요서총병이라는 자가 그런 비겁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한심하군.”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물었다.

“그 이화민이라는 자는 어떻게 됐나?”

“전투 중에 전적 장군과 싸워 숨을 거뒀습니다.”

“그랬군.”

장수들 사이에 서 있는 전적을 힐끔 쳐다본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비겁한 소인배이기는 하지만 청국의 고위 관리인 만큼 나중에 요긴하게 쓸 수도 있을 테니 잘 붙잡아 두도록 해.”

“예.”

“산해관 분위기는 어떤가?”

“기껏 보낸 지원군이 하루도 못 버티고 전멸당하고 바로 영원성까지 함락당한 것에 크게 당황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겠지. 요서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일 조짐은 없나?”

도현의 물음에 남두병 사령관은 신중한 태도로 대답을 했다.

“이곳이 만주를 노릴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 만큼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지만 당장은 산해관을 방어하는 데 치중하는 모습입니다.”

“흐음. 그래.”

영원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인적 물적 피해가 컸던 만큼 도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청군이 대군을 일으켜 몰려온다고 해도 패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령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어 태세를 완전히 갖추지 못해 늘어날 손실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전투를 벌이는 건 피해야 될 일이었다.

그리고 계속된 전투로 지쳐 있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청국 내부의 분란이 아직 다 정리되지 못한 상황이라 이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겁니다.”

주작단을 통해 내전 상황을 계속해서 보고받고 있었기에 도현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방심하지 말고 산해관에 있는 청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야 될 거야.”

“옛.”

“그리고 영원성을 포함해 요서 지역의 방어 시설을 최대한 빨리 복구하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성안 정리가 끝나는 대로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할 계획이옵니다.”

“일손이 부족하지는 않겠나?”

“공성전을 벌이며 잡아들인 청군 포로의 숫자가 이만 명가량 되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전이 끝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요서 지역을 요새화시켜야 되니까 필요하다면 이곳 주민들도 동원해 일을 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남두병 사령관은 절도 있는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이번에는 통제사 손억기를 보면서 지시를 내렸다.

“만약 청군이 움직일 조짐이 보이면 지체 없이 천진에 병력을 상륙시켜 적들의 신경을 분산시켜야 되니까 수군은 언제든 출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놔야 될 게야.”

“저희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 명령만 내려 주시옵소서.”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약간 풀어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석가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이 막상막하라면서?”

그러자 장수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던 김근행이 얼른 대답했다.

“예. 벌써 다섯 번의 큰 전투를 치렀지만 아직 어느 한쪽으로 승기가 기울지 않고 서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매만지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팔기군을 거느린 예친왕이 우세를 보일 줄 알았는데 오삼계도 제법 능력이 있군.”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이 끼어들며 말을 덧붙였다.

“명 내부의 문제로 처지가 이렇게 돼서 그렇지 요서총병으로 있으면서 청국의 공세를 수년간 홀로 견뎌 낸 명장이지 않사옵니까.”

“하긴.”

“그런 출신 덕분에 청군 병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한족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 질은 떨어지겠지만, 단순히 숫자만 봤을 때는 태후군이 훨씬 많은 실정이옵니다. 거기다 황제라는 대의명분까지 있으니 여러모로 유리한 상황이지요.”

실제로 오삼계는 황명을 앞세워 토벌군의 덩치를 계속 늘려 무려 삼십만 명에 육박하는 대군을 만들었다.

이 중에 십만 명가량이 급히 징집되어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향용병이었지만 그래도 숫자가 주는 압박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토벌군에 비해 예친왕을 따르는 군세는 십육만 정도였다.

도현은 동의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만 청국이 중원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친왕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지.”

“어찌 됐건 내전이 장기화된다면 우리들한테는 잘된 일이지 않겠습니까.”

손억기의 말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거기에 더해서 가능하면 껄끄러운 예친왕보다 상대하기 편한 태후가 승리하는 것이 좋겠지.”

도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려 멀리 북경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다음 날부터 조선군은 공성전으로 엉망이 된 영원성을 복구하고 요서 지역 특히 산해관과 인접한 곳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공사를 위해 포로가 된 청군 병사들이 모두 동원됐고 추가로 한족 주민 삼만 명을 차출해 투입했다.

한편 영원성 함락 소식이 전해진 청국 조정은 연일 대전에 신하들이 모여 회의를 거듭했지만, 달리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대전 회의를 지켜보던 석달개는 황후전으로 걸음을 옮겨 태후를 알현했다.

오늘 있었던 회의 내용을 태후한테 보고를 해야 됐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나?”

연이은 악재에 심기가 불편해진 태후가 약간 날 선 어투로 묻자 석달개는 허리를 굽히며 화를 내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이런저런 의견이 오갔지만 어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소식이 전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정말 한심하군.”

고운 이마를 찡그린 태후는 얼굴 가득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놔두면 대신들을 몽땅 다 불러들여 한바탕 난리를 피울 것이 뻔했기에 석달개는 얼른 태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산해관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사옵니다.”

“무슨 내용이지?”

“조선군이 인력을 대거 동원해서 산해관과 인접한 지역의 성을 보수하고 군사시설을 대거 새로 만들고 있다 합니다.”

그러자 태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산해관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징조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눈을 반짝인 석달개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영원성을 함락한 기세를 몰아 계속 진격해 오는 것이 아니라 산해관 인근 지역의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걸 보면 조선군이 만리장성을 넘어올 의향이 없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행여나 조선군이 북경까지 밀고 내려올까 봐 노심초사하던 태후는 석달개의 말에 솔깃한 얼굴을 했다.

“정말 그럴까?”

“그게 아니면 뭐 하려고 돈과 인력을 들여 이런 공역을 벌이겠사옵니까.”

“흐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태후는 기다란 은으로 된 손가락 장식으로 탁자에 툭툭 두드리며 머리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

“예상이 맞으면 굳이 토벌전에 나가 있는 총병대를 불러들이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요서 지역이 삽시간에 점령당하고 영원성까지 무너뜨린 조선군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태후는 급히 총병부대를 북경으로 불러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숫자는 오천 명 정도밖에 안 됐지만 전원 예친왕을 압박해서 받아 낸 수석총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화력이 상당했다.

실제로 토벌전에서도 큰 활약을 펼쳐 오삼계가 기병으로 구성된 팔기군을 막는 용도로 쓰며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아니, 그건 그대로 놔둬.”

“예?”

태후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산해관을 넘보지 않는다고 해도 언제 또다시 준동을 할지 모르니 방비를 단단히 해 둬야 될 게 아닌가.”

“아, 예.”

국가보다는 자신과 황제의 안위부터 먼저 챙기는 태후의 태도에도 석달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오 도독에게 전령을 보내 빨리 역도를 토벌하라 이르게. 예친왕 일파와 싸움을 벌인 지 벌써 몇 달째인데 아직 그러고 있으니……. 쯧쯧쯧.”

조선군의 압박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태후는 애궂은 오삼계에게 불평을 했다.

“바로 전령을 보내겠사옵니다, 태후 마마.”

“그럼 나가 보게.”

“예.”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느긋하게 누워 다시 궁녀의 손에 몸을 맡기는 태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석달개는 소리 없이 뒷걸음질로 태후전을 빠져나갔다.

영원성에서 제일 먼저 복구가 된 곳은 선착장이었다.

접안 시설이 완성되자마자 수송선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제물포와 바로 연결되는 항로가 이어졌고 덕분에 조선군은 보급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중에서 최우선으로 수송이 된 것은 공성전 중에 가장 소모가 컸던 화약과 포탄이었다.

지금도 커다란 수송선 두 척이 선착장 좌우에 접안해 보급품을 하역하고 있었다.

군관의 감독하에 웃통을 벗은 병사들이 묵직한 보급품 상자들을 어깨에 하나씩 걸치고 잔교를 내려와 바닥에 쌓았다.

“조심들 해!”

“으쌰!”

그렇게 내려진 보급품들은 품목과 수량을 꼼꼼히 확인한 뒤 한쪽에서 대기 중인 짐마차에 실려 창고로 옮겨졌다.

다들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지 실수 없이 체계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화약은 이게 마지막 물량이지?”

붉은색 갑옷을 입은 장수의 물음에 수행하던 군관이 바로 대답했다.

“예. 다음 수송은 사흘 뒤라고 했습니다.”

“그렇군. 날씨가 꾸물꾸물한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거 같으니까 화약부터 서둘러 창고로 옮기도록 해.”

“알겠습니다.”

물이 새지 않도록 상자에 방수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비를 맞지 않는 것이 좋았다.

작업을 하는 병사들도 그걸 아는지 평소보다 더 부지런히 상자를 옮기고 있었다.

“휴우. 보급품이 한꺼번에 도착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군그래.”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쪽배에 상자를 하나씩 내려서 해안까지 가져와야 됐는데 그나마 선착장이 빨리 복구돼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맞아.”

군관의 이야기에 장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그동안 바닷물에 몸을 반쯤 담그고 파도가 조금만 쳐도 좌우로 출렁거리는 쪽배에 소중한 보급품을 실고 옮기느라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던 걸 생각하면 어떻게 그걸 해냈는지 지금도 진저리가 처졌다.

“지금도 이렇게 바쁜데 군량미까지 옮겨야 했다면 정말 다 얼마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을 겁니다.”

군대는 거대한 소비 집단이라는 말처럼 전투를 치르지 않고 그냥 가만히 십만 대군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물자가 소모됐다.

군량만 봐도 매일 육백 가마씩 먹어 치울 정도였는데 처음 출정 때 천여 대가 넘는 짐마차에 보급품을 가득 실어 왔지만, 이미 다 떨어진 상태라 병사들을 굶기지 않으려면 수송대가 계속해서 곡식을 가져와야 했다.

이것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는데, 다행히 요서 지역에 속한 군현을 점령하며 상당량의 군량을 노획했고 결정적으로 영원성 곡식 창고에서 무려 십만 가마의 쌀을 찾아내는 대박을 터트렸다.

유사시 요서 지역 방어를 책임지는 곳이었던 만큼 영원성에는 충분한 양의 곡식을 항상 비축하고 있었는데, 귀중한 시설이라 창고들이 모두 내성에 모여 있어서 격렬했던 전투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항복을 하더라도 이런 물자들이 있으면 모두 불에 태워 상대가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기에 바빴던 공손척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덕분에 조선군만 큰 횡재를 하게 됐고 한동안 군량미를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내성에서 찾아낸 물자는 곡식뿐만이 아니었는데 상당한 양의 화약과 포목, 은괴 같은 재물도 한가득 보관되어 있었다.

마치 보물 창고를 발견한 것 같았다.

도현은 크게 기뻐하며 영원성에서 노획한 물자들을 전부 원정군을 운용하는 데 쓰도록 지시했다.

병사들이 작업하는 광경을 쳐다보고 있던 군관이 장수에게 말했다.

“하역이 다 끝났나 봅니다.”

“그럼 우리도 가 보지.”

짐마차를 향해 앞서가는 장수를 군관이 나란히 뒤따랐다.

영원성 내부의 상황은 심히 처참했다.

짧지만 아주 격렬한 공성전이 벌어졌던 탓에 바닥의 포석이며 담벼락을 비롯해 무엇 하나 제대로 성한 구석이 없었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대로변의 가게들도 온통 먼지를 뒤집어쓴 채 폐가처럼 변해 버렸다.

비록 조선군이 일반 주민들에겐 손을 대지 않는다고 공포를 하긴 했으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바로 몇 해 전 청국 군사들이 영원성을 점령했을 땐 집집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패물을 훔쳐 가고 젊은 처녀들을 희롱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조선군이라고 뭐 다를 것 있겠냐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반감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일을 해야 하는지라, 전투가 끝나고 며칠이 지나자 집에 틀어박혀 있던 영원성 주민들도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목수는 무너져 내린 지붕이나 부러진 의자 다리 등을 고치면서 망치질을 해 댔고, 심부름꾼 아이는 흙먼지가 뽀얗게 뒤덮인 가게를 청소하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으며, 장사꾼은 창고 안에 쌓아 뒀던 물건들이 도둑맞지도 않고 제대로 다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튼튼한 열쇠를 미리 준비해 놓은 자신의 선견지명에 기뻐했다.

치안 유지를 위해 총검이 부착된 수석총을 든 조선군이 골목 어귀마다 배치되어 있었기에 다소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긴 했지만, 시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금방 떠들썩한 말소리에 뒤섞여 기이한 조화를 이뤄 냈다.

물론 조선군이 아무리 점잖은 태도를 취해도 노골적으로 경계하며 욕설을 내뱉는 자들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과격한 사내들은 일부에 불과했고, 어쨌든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생각보다 빨리 이 미묘한 동거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이미 청군의 점령을 경험해 봤기 때문인지 걱정과 달리 요서 지역의 한족들은 별다른 반감 없이 조선군의 통제에 순순히 따랐다.

거친 만주족보다는 그래도 같은 유교 문화를 공유하고, 약탈이나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조선군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내성 관저에 임시 사령부를 차린 도현은 의자에 앉아 장수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점령지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청군도 산해관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실내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오늘까지 본국에서 화약 일천삼백오십 관(약 5톤)과 각종 포탄과 총알이 도착해 필요한 수량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화약 재고가 간단간당해서 불안했었는데 다행이군.”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또 본국의 화약 비축분이 크게 줄어들었겠군.”

조선군의 최대 장점이자 약점이 바로 화약이었다.

이번처럼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 소모량이 엄청나서 그걸 제때 보충하지 못하면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현은 물론이고 조선군 지휘부 모두 항상 화약과 탄약 재고를 민감하게 신경 썼다.

“전국의 병기창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산에 집중하고 있으니 당장 보급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도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부산포 제삼병기창의 규모를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합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도현은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탄약 사용이 앞으로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테니 좋은 생각이군. 상선.”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따로 재가를 받을 필요 없이 조정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규모 확장을 실시하라고 전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칠현의 대답을 들으면서 도현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 의자에 앉아 있는 장수들에게 물었다.

“점령지 주민들의 동향은 어떤가?”

“처음에는 불안감이 컸지만 아군이 치안을 확보하면서 며칠 전에는 시장이 다시 열릴 정도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아무래도 청나라가 요서 지역을 통치한 지 얼마 안 됐고 기본적으로 명을 몰아낸 점령자인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있기에, 주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들이 저희를 적대하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갑옷 대신 편안한 전복 차림은 한 장수 한 명이 보충 설명을 하자 도현은 수긍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과거 청군이 요서를 점령했을 때 사흘간 약탈을 허용해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걸 반면교사 삼아 행여 병사들이 점령지 주민을 함부로 대하거나 재산을 빼앗지 못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될 거야.”

“옛.”

그동안 거란족을 귀화시키고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인구를 늘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도현은 기껏 점령해 놓고 요서가 빈 땅이 되는 걸 막기 위해 요동 지역을 장악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주민들을 그대로 포용해 조선인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걸 위한 포석으로 도현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원정군 병사들에게 절대 함부로 주민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라고 엄포를 뒀고 그것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지금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만 언제 분위기가 바뀌어 반기를 들지 모르니 주민들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만주족을 비롯해 고분고분 말을 따르지 않을 것 같은 자들은 처음부터 솎아 내서 따로 관리하도록 해.”

도현의 말에 남두병 사령관이 약간 얼굴을 굳히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부터 점령지 전체에 대대적인 인구 조사를 실시해 아국에 적대적인 이들을 가려 낼 계획이옵니다.”

“심사를 철저히 하고 걸려든 불순분자들은 청군 포로와 함께 강제 노역을 시키며 정신 교육을 시키도록.”

“예.”

인구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서 지역 주민들을 받아들이지만, 행여 나중에라도 이것이 불안 요소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도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조선화를 시킬 작정이었다.

“산해관 쪽 방어 시설 공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그러자 왼쪽 편에 있는 장수 한 명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청군 포로와 인근 주민들을 동원해 계속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늦어도 봄이 오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 될 겁니다.”

“유사시 아군이 활용할 시설이니 조금 시일이 지체되더라도 튼튼하게 만들어야 될 것이야.”

“물론입니다.”

“참, 요하에 다리를 놓는 건 어찌 됐나?”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도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남두병 사령관이 말을 했다.

“본국에서 장인과 인력이 도착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만 강폭이 넓고 석재를 다루는 것이 쉽지 않아 완성을 하려면 최소 일 년은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군이 도하를 하는 데 사용한 배다리를 철거하지 않고 그때까지 임시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잘했어. 제물포까지 해로가 연결됐다고 하지만 요서를 확실히 장악하려면 배후지인 요동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안 되니까 그 부분도 신경을 쓰도록 해.”

“네.”

대답을 한 남두병 사령관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저, 전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용병대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이야기냐는 시선으로 그가 쳐다보자 남두병 사령관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투로 줄어든 인원을 보충해서 앞으로도 계속 활용을 하면 어떨까 합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도현은 미간을 살짝 모으며 되물었다.

“용병대를 정식 편제화시키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흐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짐이 수긍할 만한 이유를 말해 봐.”

“처음에는 왜국 용병들을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용도 정도라고 생각했사옵니다. 하지만 이번 영원성 공략에서 초반 상당한 곤혹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걸 보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청국을 상대하는 데 병력 부족이 심각한 상황에서 용병대만큼 손쉽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없지 않겠사옵니까.”

“그건 그렇지.”

“해서 지금처럼 임시로 운용할 것이 아니라 아예 정식 편제에 포함시켜 상시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통제사 손억기도 차분한 어투로 입을 열어 남두병 사령관의 의견에 힘을 실어 줬다.

“신도 나쁘지 않은 생각 같사옵니다.”

둘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분위기였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피 터지게 싸운 왜국에서 용병을 데려와 쓴다는 것에 장수들이 큰 거부감을 보였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장수들이 꽉 막힌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고를 한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만큼 조선군 내에 병력 부족이 심각하다는 방증이었기에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허리를 바로 한 도현은 정색을 하며 좌우에 앉아 있는 장수들을 쓸어 보고는 남두병 사령관한테서 시선을 멈췄다.

“용병대를 늘리는 건 문제가 아닌데…… 행여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통제할 수 있겠나?”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단순히 숫자를 채우기 위해 용병을 잔뜩 데려다 놨다가 전쟁 중에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남두병 사령관도 그걸 알기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십인장까지 아국 군관과 선임병을 배치한다면 부대를 확실히 장악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지.”

“…….”

“아무리 그런 체계를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딴생각을 품을 수 있고 자칫 조그마한 불씨에도 반목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게야.”

“그럼 어떻게…….”

도현은 살짝 코웃음을 흘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장수들을 바라봤다.

“감히 불순한 마음조차 먹지 못하도록 위압감을 주는 것과 함께 아국에 우호적이 되게 교육을 시키는 거지.”

그러자 말석에 앉은 장수 한 명이 조금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군기를 세우는 건 수긍이 됩니다만 그냥 용병을 데려다 쓰는 건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쯧쯧. 명색이 일군을 거느린 장수라는 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짧아서야.”

그가 혀를 끌끌 차며 쳐다보자 말을 꺼낸 장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금과 달리 용병대를 정식 편제화하면 항상 아군과 함께 움직여야 될 텐데 경은 언제 창을 거꾸로 잡을지 모르는 자들한테 등을 맡길 수 있겠나?”

“그건…….”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용병대 같은 건 데리고 다니지 않는 편이 나을 게야.”

따끔한 지적에 실수를 깨달은 장수는 고개를 숙였다.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다시 뒤로 몸을 기댄 도현은 깍지를 끼며 말했다.

“용병대가 활약을 했고 당장 요서 지역을 방어하는 데 전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일단 기존 규모로 병력을 보충해 운용을 해 보도록 하지. 전 장군.”

“예, 전하.”

아무래도 현재 용병대 지휘를 맡고 있다 보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던 전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가 도현이 부르자 얼른 대답을 했다.

“용병들을 확실히 통제할 자신이 있나?”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전적은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맡겨만 주신다면 전하의 충성스러운 검이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좋아. 믿어 보지.”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거기서 회의를 끝내고 일어났다.

그날 오후, 사전에 명령을 하달받은 군관과 병사들이 각 지역의 마을로 파견되어 호구 조사를 실시했다.

“줄 서시오, 줄!”

군관의 호위 격으로 따라붙은 병사들이 마을 주민들을 제어하며 크게 소리쳤다.

장사를 하건 농사일을 하건 상관없이 모조리 불러 모았기에 공터에는 투덜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게를 너무 오래 비워 두면 안 되는데…….”

“이보쇼, 난 옷에 묻은 흙도 털지 못하고 왔단 말이오.”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며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 때마다 병사들이 입을 모아 다독거렸다.

“금방 끝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자, 이쪽부터 먼저 온 순서대로 서시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눈치를 볼 뿐 누구 하나 쉽사리 발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단 오라고 해서 오긴 했으나 조선군이 무슨 행동을 할지 몰라 두려운 건지 다들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공터에 사람들이 한가득 있는데도 막상 줄이 만들어지지 않자 붓과 종이를 잔뜩 준비하고 앉아 있는 군관의 얼굴에 살짝 짜증이 스쳤다.

그렇게 자꾸 시간이 흐르자 군관이 의자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를 쳤다.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아 점령지 주민들의 호구 조사를 하는 것이니 다들 성실히 지시에 따르길 바란다. 만약 통제에 따르지 않거나 거짓을 고할 경우에는 왕명을 거부한 것으로 간주하고 엄벌에 처할 것이다!”

동행한 역관을 통해 군관의 말을 들은 주민들은 행여나 치도곤을 당할까 봐 겁을 먹은 얼굴로 서둘러 줄을 섰다.

“어여 서자고.”

“그, 그래.”

아무리 조선군이 행패를 부리지 않고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점령군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흐름이 바뀌고 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잠시 혼란이 빚어졌지만 병사들이 노력한 덕분에 어쨌든 몇 개의 기다란 줄이 만들어졌다.

군관이 붓을 들고 일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병사가 가장 맨 앞에 선 사람부터 차례대로 내보냈다.

제일 첫 번째로 묻는 것은 이름하고 나이 같은 기본 정보였다.

그리고 결혼은 했는지, 부모님은 살아 계시는지, 출신지는 어디인지 등의 물음에 대답하면 군관이 하얀 종이에 재빠른 솜씨로 기록해 나갔다.

간혹 가다 괜히 심보가 비뚤어진 사람이 있어, 기억이 안 난다며 일부러 시간을 끌거나 말을 이랬다저랬다 바꿔 귀찮게 구는 일도 발생하긴 했으나 그때마다 병사들이 나서서 처리해 준 덕분에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이름이 특이하군. 혹시 만주족인가?”

“그렇습니다.”

한족과 약간 다른 생김새의 사내는 역관을 통해 군관이 질문을 하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잘 살펴보니 옷이나 신발도 다른 마을 주민들과 비교하면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걸 볼 때 이 근방에선 힘깨나 쓰는 지역 유지쯤 되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 마을 주민들한테 받은 서류를 슬쩍 살펴본 역관이 군관에게 귓속말로 이야기를 했다.

“만주족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하면서 향리 역할을 하던 자입니다.”

“흐음. 그래?”

건네받은 서류와 앞에 선 사내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 군관은 약간 딱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 옆으로 가서 서시오.”

그러자 사내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황급히 말했다.

“왜 나만 다른 쪽으로 가는 겁니까?”

자신만 따로 빠진다는 것에 사내는 크게 불안해했다.

지시에 따르지 않고 미적거리자 미간을 찌푸린 군관은 차가운 어투로 언성을 높였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끌고 가.”

“옛.”

대기하고 있던 병사 두 명이 사내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고는 강제로 잡아끌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이놈 조용히 안 해!”

사내가 버둥거리며 버티자 병사 한 명이 창대로 그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퍽.

“아이고.”

그러고는 마치 포졸이 범인을 잡아가듯 아주 거칠게 사내를 데려갔다.

“쯧.”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찬 군관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음.”

한차례 험악한 상황을 봐서인지 주민들은 군관의 눈치를 보며 아까보다 더 빠릿빠릿하게 지시를 따랐다.

이런 식으로 조선군이 점령한 요서 지역의 모든 마을과 성에서 호구 조사가 이루어졌고 불온한 무리는 대부분 솎아졌다.

하지만 청국 조정에 협조한 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격하는 건 아니었다.

추려 낸 인원을 별도의 장소로 옮긴 뒤 거기서 다시 한 번 철저한 조사를 거친 뒤 유용한 기술을 가졌거나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자들은 따로 구분해 도현에게 충성할 기회를 줬다.

나머지는 삼엄한 감시 속에 멀리 북해도로 보내져서 길을 닦거나 광산에서 석탄과 철을 캐는 노역을 시켰다.

이처럼 조선군이 요서 지역을 빠르게 안정시키면서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갈 때 석가장에서는 예친왕 일파와 오삼계가 이끄는 토벌군 간에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회전이 벌어졌다.

“좌군에서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백기단이 우측으로 크게 우회하고 있다는 급보입니다!”

본진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오삼계는 사방에서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보고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는 어느새 정오는 넘기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등하게 접전을 벌였지만 두 시진쯤 지났을 때 상대편에서 그동안 아끼던 팔기군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자, 균형이 급격히 흔들렸다.

“상장군의 부대를 즉시 좌군으로 보내고 본진에 있는 기병대를 출전시켜 백기단을 상대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지금 좌군이 뚫리면 전열 전체가 붕괴되니까 어떻게든 버텨야 돼!”

토벌군도 무려 오만이나 되는 기병을 보유했지만 청나라 최고의 무력 집단인 팔기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벌써 세 차레나 충돌해서 모두 박살이 나며 아군의 사기만 떨어뜨리고 번번이 돌파를 허용해 전열을 흐트러뜨렸다.

“후우. 역시 총병대가 빠진 것이 치명적이군.”

한쪽 벽을 걷어 정면이 훤히 다 보이는 지휘 천막에 선 오삼계는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으로 시끄러운 전장을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정거리가 길고 장전이 빠른 수석총을 보유한 총병대는 기병인 팔기군을 막는 데 아주 유용한 수단이었다.

팔기군이 아무리 빠르게 돌격해 와도 총병들이 삼 열로 늘어서 집중 사격을 퍼부으면 한순간에 녹아나 버렸다.

이미 몇 차례 오삼계는 총병대를 활용해서 승리를 거두며 한 개 기旗를 전멸시킨 적도 있었다.

팔기군 한 개 기면 칠천오백 명가량인데 보유한 전력으로 따지면 열 배인 칠만 명을 박살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만큼 가치가 크고 유용한 병력이었기에 전력에서 빼 가는 걸 극렬히 반대했지만 태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총병대는 북경으로 돌아갔고 대신 산서성에서 차출해 온 향용병 오만이 보충됐지만, 오늘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있지 않아 팔기군의 일제 돌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다.

오삼계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병력의 우위를 살려 예친왕군을 포위하기 위해서 크게 우회시켰던 병력이 길을 잘못 찾아 우왕좌왕하다가 중간에 상대편 척후병에 들켜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 하나씩 겹쳐지면서 토벌군은 큰 곤란에 빠져 있었다.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내려다보는 오삼계의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는 가운데 또다시 급박한 보고가 들어왔다.

“청기단과 진충군이 중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야!”

청기단은 전 황제 시절부터 용맹을 떨친 용골대가 지휘하는 군대였기에 따로 말할 필요가 없는 강군이었고, 진충군은 예친왕의 직속 병력으로 총병대와 같은 수석총을 보유한 부대였다.

이 둘을 투입했다는 건 예친왕이 전투를 끝내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다는 뜻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여기저기 생긴 틈을 틀어막느라 본진에 있던 예비대를 거의 다 써 버린 오삼계는 낭패한 얼굴로 입술을 질근 씹었다.

그러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지휘 천막을 걸어 나가 한참 전투가 진행 중인 전장을 바라봤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이 보다 선명히 귀에 들렸고 비릿한 피 냄새가 바람에 실려 그의 코를 자극했다.

본진이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덕분에 전장 상황이 한눈에 다 들어왔는데 어딜 가릴 것 없이 전체적으로 토벌군이 밀리고 있었다.

특히나 새롭게 등장해 덮쳐 오는 청기단과 진충군은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중군을 단번에 휩쓸어 버릴 것 같았다.

“이제 어쩌지요?”

최측근인 왕추용이 당혹스러운 어조로 묻자 오삼계는 몸을 돌리며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당장 본진에 남아 있는 예비 병력을 중군으로 보내도록 해!”

“지금 있는 병력이라고 해 봤자 삼천 명이 채 안 됩니다.”

대충 봐도 일만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청기단과 진충군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숫자였다.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오삼계는 왕추용의 말에 버럭 역정을 냈다.

한시가 급한 판에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화가 난 것이다.

“그래서 이대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자는 건가! 지금 중군이 무너지면 끝장이야. 어서 시키는 대로 해!”

“아, 알겠습니다.”

왕추용은 그때에야 오삼계의 지시를 전하러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짧게 혀를 찬 오삼계는 굳은 얼굴로 시선을 돌려 천천히 전장을 살펴보고는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끄으응.”

급한 대로 지시를 내리기는 했지만 예친왕군의 최정예 부대를 상대로 지금 내보내는 지원 병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회의적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시간을 끌어 줄 예비 병력이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인 데다 사방이 탁 트인 벌판에서 보병이 주력인 토벌대가 말을 탄 팔기군에게 등을 보이고 후퇴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짙은 패배의 기운을 느낀 오삼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렇게 오삼계가 고심에 차 있는 사이에도 양쪽 병사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상대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휘두르는 창과 검이 번득이며 피를 갈망했다.

전장은 사지가 잘린 시신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시뻘건 피가 웅덩이를 이루며 진한 죽음의 기운을 풍겼다.

엉망으로 뒤엉킨 병사들은 피에 취해 서로의 몸에 병장기를 쑤셔 박고는 차가운 흙바닥에 쓰러졌다.

“죽어!”

“크아악.”

“컥.”

기합과 비명이 전장 곳곳에서 울려 퍼지며 아까운 목숨들이 수도 없이 사라져 갔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지옥 같은 전투는 뉘엿뉘엿 지는 석양과 함께 종장으로 치달았다.

“흐익.”

“사, 살려 줘.”

퍼걱.

결국 팔기군을 앞세운 예친왕 군의 파상 공세를 견디지 못한 병사들이 등을 돌려 달아나면서 토벌군의 전열이 급격히 붕괴됐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다.

비록 서로 칼을 들이대고 있지만 같은 청나라 병사임에도 불구하고 팔기군은 마치 상대를 모조리 다 죽여 버리겠다는 듯이 말을 타고 달려가 도망치는 이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슈각!

“끄억.”

사냥이라도 하듯 팔기군은 뒤를 쫓아가 병장기를 휘둘렀고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피를 뿌리며 널브러졌다.

급기야 적이 본진에까지 난입해 들어오자 오삼계는 분루를 삼키며 퇴각 명령을 내려야 했다.

이미 전열이 완전히 무너져 체계적인 후퇴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토벌군은 뿔뿔이 흩어져 팔기군의 추격을 피해 정신없이 달아났다.

허겁지겁 보정保定까지 퇴각한 토벌군은 사만으로 줄어 버렸다.

단 한 번의 패배로 무려 이십육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것이다.

전사자도 많았지만 상당수가 후퇴하는 과정에서 흩어졌는데 이렇게 낙오된 이들은 본대를 찾아오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이 그대로 군복을 버리고 탈영을 해 버렸다.

회전의 승리로 토벌군을 완전히 격파하는 것과 동시에 하북성 남부를 장악한 예친왕은 며칠 동안 전장 정리를 하며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곧장 기세를 몰아 북경으로 진격했다.

이로써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던 내전의 저울추가 예친왕 쪽으로 기울어지며 태후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점령지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자 한양으로 귀환하려고 했던 도현은 청국의 내전 상황이 급변하자 다시 영원성에 주저앉아 사태를 주시했다.

상석에 앉은 도현은 김근행의 보고를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해서 오삼계는 보정 방어를 포기하고 남은 병력을 모두 이끌고 북경으로 후퇴했다고 하옵니다.”

“성을 사수할 줄 알았는데 의외군.”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지만 예친왕이 팔기군을 이끌고 북경을 바로 공격할 움직임을 보여서 급히 이동했다고 합니다.”

“북경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었겠군.”

“맞사옵니다. 거기다가 태후가 급히 돌아와 북경을 지키라며 다그쳐서 오 도독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사사건건 간섭을 해서야 손발을 다 묶어 놓고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지. 쯧쯧.”

혀를 차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현은 다시 김근행을 보며 말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김근행은 이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회전에서 승리를 거둔 예친왕 쪽이 유리한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태후 쪽도 그리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슬쩍 도현을 쳐다본 김근행은 그가 팔짱을 낀 채 경청하고 있자 허리를 펴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높고 단단한 데다 이중으로 둘러진 북경 성벽을 넘기가 쉽지 않고 오 도독이 지휘하는 병력까지 합류하면 십삼만이 넘는 대군이 지키는 것이니 방어를 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거기다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태후가 양자강에 있는 병력을 급히 불러들이려고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게 정말이야?”

“자금성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입니다.”

“명나라는 어떡하고?”

“당장 북경이 함락되면 예친왕에 의해 현황제와 자신의 목이 떨어질 판이니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대책이 없는 여자군.”

도현이 살짝 머리를 내젓는 걸 보며 김근행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도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명군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설마 이빨 빠진 호랑이인 숭정제가 군대라도 일으킨다는 거야?”

“……맞습니다.”

요서 지역만 점령하고 청나라 내전이 장기전으로 이어져 이쪽에 한동안 신경을 쓰지 못하길 바라던 도현은 일이 점점 복잡하게 꼬이는 느낌에 눈가를 찡그렸다.

길게 보면 명나라가 청을 치는 것이 조선에 나쁘지는 않았지만 도현은 상황이 그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게 신경이 쓰였다.

“갑자기 그 노인네가 노망이라도 난 거야?”

짜증이 난 도현이 거칠게 말하자 김근행은 눈치를 살피며 이야기를 했다.

“숭정제가 아니고 당왕 주율건이 소장파 장수와 관리 들을 앞세워 청과의 전쟁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어쩐지.”

주율건이라면 도현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명 태조인 주원장의 스물세 번째 서자로 제후국 당唐 국왕에 봉작된 주경朱桱의 팔 대손으로 숭정제와는 먼 친척이었다.

예전에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북경이 함락되고 청군에 쫓겨 명국 조정이 남경으로 옮겨 오자 그때부터 부상한 인물이었다.

강남에 위치한 넓은 영지를 통해 막대한 부와 힘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상당한 재능과 관심을 보여 숭정제가 견제할 정도였다.

특히나 젊은 장수와 관리 들에게 인기가 많고 해적 출신인 정지룡과 손을 잡고 명국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진작부터 주작단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남경으로 옮겨 간 이후로 잔뜩 위축된 숭정제가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얼마 전부터 숭정제가 기력이 쇠해 자리를 보전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부쩍 주율건의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황태자를 밀어내고 주율건이 제위를 차지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김근행이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재하기 어렵습니다.”

“끄으응.”

도현은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나이는 주율건이 더 많았지만 화북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쫓겨난 것에 대한 화병과 시름을 이기지 못하고 남경에 온 이후 거의 매일 여자와 술로 날을 지새운 숭정제는 건강이 상당히 나빠져 있었다.

숭정제의 장남이자 황태자로 책봉된 주자랑朱慈烺이 있었지만 주율건에 비하면 그 힘이 미약했다.

요리하기 쉬운 숭정제와 달리 주율건은 가진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자였기에 아주 껄끄러운 상대였다.

아무리 기울어지고 있는 명나라라고 해도 재물과 인구가 풍부한 강남을 바탕으로 한 저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청나라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이제 명까지 신경을 써야 되다니.”

짧게 한숨을 내쉰 도현은 고개를 들어 김근행을 봤다.

“명군의 규모가 얼마나 될 것 같나?”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최소 십만 이상은 될 거 같고 지휘는 주율건 본인이 직접 맡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단순히 양자강 방어선을 북쪽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생기면 북경까지 밀고 올라가겠다는 뜻이군.”

“주율건이 출전을 주장하며 내세우는 것이 실지 회복과 황성 탈환이라고 합니다.”

이걸로 주율건의 의도가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예친왕에 이어서 또 한 명의 주의해야 될 인물이 나타난 것에 도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명군은 언제쯤 움직일 것 같나?”

“아직 숭정제의 재가가 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대군을 일으키려면 준비해야 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빨라도 올겨울일 겁니다.”

“그렇군.”

그의 예상도 그랬기에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멀리 떨어진 명나라는 일단 제쳐 두고 누가 이기든 청국 내전의 승리자가 다음으로 노릴 상대가 조선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도현은 서둘러 점령지에 대한 전력을 강화했다.

제일 먼저 새롭게 훈련시킨 거란 기병 일만이 요하를 건너왔고 지난번 회의에서 결정한 대로 왜국 용병을 추가로 고용해 칠천 명의 용병대를 정식 편제로 만들었다.

영원성 전투에 참가한 용병 일부가 귀국하면서 한몫을 단단히 잡았다는 소문이 나자 모집에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실력이 뛰어난 이들로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도 십만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영원성과 요서 지역을 모두 지키기에는 상당히 빠듯했다.

최소 오만 명 정도는 더 있어야지 효율적인 방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영토에 비해서 인구가 적은 조선의 사정상 더 이상 병력을 끌어 오는 건 무리였다.

요서 지역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곳에서 그만큼 병사를 빼 와야 된다는 뜻이었는데 본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영토가 편입시킨 지 몇 년 안 되는 상황이라 비워 두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추가로 징집을 했다가는 가뜩이나 인구에 비해 군대의 규모가 큰데 자칫 균형이 깨져 국가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 도현과 조선군 지휘부는 고심 끝에 요서 지역 전체를 지키는 건 포기하고 적이 쳐들어왔을 때 몇 군데 중요 거점에서 방어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면 전력을 집중 운용할 수 있어 병력 부족을 상당 부분 상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거기다가 조선군이 자랑하는 각종 구경의 화포를 대량으로 각 거점마다 배치한다면 아무리 많은 군대를 끌고 와도 쉽게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차근차근 방어계획을 하나씩 세워 가면서도 도현과 조선군의 기본 방침은 수비가 아닌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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