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권-신묘조약 (80/104)

<16권에서 계속>

16권

신묘조약

외무부 차관 이척이 가져온 협정서를 천천히 살펴본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척은 살짝 고개를 들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대로 협상을 체결해도 되겠사옵니까?”

“짐은 괜찮은 것 같은데, 통제사와 도총관의 의견은 어떤가?”

그러자 나이가 조금 더 많은 통제사 손억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아주 적당하다 생각되옵니다.”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원정군의 양대 축인 통제사 손억기와 도총관 엄황이 찬성하자 다른 신하들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도현은 앞에 있는 이척을 쳐다보며 지시를 내렸다.

“협상을 체결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하온데 막부를 이대로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모르겠사옵니다.”

“도총관은 막부를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나?”

“지금은 전쟁에 져서 고개를 숙이지만 언제든 다시 힘을 되찾으면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럼 어째서?”

엄황은 물론이고 방 안에 모여 있는 다른 신하들도 의문스러운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허리를 펴며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유를 말해 줬다.

“막부를 없애 버리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고 권력 공백이 생겨 혼란에 휩싸이겠지만 그건 오래 가지 않을 걸세. 곧 여러 대영주 중에 하나가 쟁패를 벌여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막부 가문으로 올라서겠지. 그럼 힘들게 원정을 해서 에도를 함락시킨 것이 금방 무용지물이 되지 않겠나. 그럴 바에야 힘이 빠진 도쿠가와 가문이 겨우겨우 막부를 유지할 수 있게만 해 주면서 지방 번주들과 패권 다툼을 벌이게 유도해, 오랜 시간 자신들끼리 치고받으며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 아국에는 백번 유리할 것이야. 그러면서 동시에 아국은 양쪽에서 이익을 취하며 저울추가 어느 한곳으로 기울지 못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지.”

설명을 들은 신하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단순히 왜국을 사분오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전 전국시대처럼 끊임없이 전란을 벌여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겠다는 거였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심계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도현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그런 깊은 뜻이 숨어 있었군요.”

사실 이완 단장이 이끄는 주작단은 이미 은밀히 지방 유력 번주들을 부추겨서 막부와 싸움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쯤이면 청국에서도 아국이 원정을 벌인 걸 알았을 테니 저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빨리 이번 전쟁을 마무리 짓도록 하세.”

“알겠사옵니다, 전하.”

도현이 청국을 거론하자 신하들은 표정을 굳히면서 머리를 숙였다.

왜국 원정은 만리장성을 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불과할 뿐 진짜 싸움은 청국과 벌이게 될 일전이었다.

다음 날 양쪽 대표들이 도현과 이에미쓰의 추인을 받아 앞으로 신묘辛卯조약이라 불릴 협상을 체결됐다.

조약 내용은…….

첫째, 매년 일천 관(4톤)의 은괴와 유황 오백마흔세 관(2톤)을 십 년간 조선 조정에 전쟁 보상금으로 상납한다.

둘째, 임진왜란 때 강제로 잡아간 조선 백성과 그 가족들을 모두 찾아 송환한다.

셋째,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각종 물품과 왕실 물건을 전부 반환한다.

넷째, 전란 중에 예술품을 약탈하고 조선 백성들을 강제로 데려가 수십 년간 노예처럼 부린 것에 대한 사죄로 금 오백 관을 보상금으로 조정에 낸다.

다섯째,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경복궁 재건을 위해 은 이백 관을 상납한다.

여섯째, 조선군이 점령한 일기도와 복강도(후쿠에 섬)를 비롯한 고토열도[五島列島] 그리고 북해도北海道를 조선에 할양한다.

일곱째, 조선군은 배상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에도에 일정 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기간 동안 모든 소요 비용은 막부에서 지급한다.

여덟째, 왜국은 조선이 종주국임을 인정하고 만천하에 알리는 뜻으로 왜왕과 막부 수장이 바뀔 때마다 조선 국왕에게 허락을 받고, 왜국 왕실의 상징인 삼신기三神器를 바쳐 진실 됨과 충성을 맹세한다.

이렇게 총 여덟 개의 조항으로 된 신묘조약은 임진왜란의 치욕을 시원하게 씻어 내릴 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야쓰에 의해 재통일을 이루고 빠르게 힘을 키워 나가고 있던 막부를 완전히 무릎 꿇리고 조선이 왜국의 종주국임을 확실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조약에 천황이 아닌 왜왕이라고 명시하고 수장이 바뀔 때마다 조선 국왕한테 책봉서를 받도록 해서 서열 관계를 분명히 했다.

막부군이 참패를 당하고 에도까지 함락당한 상태에서 체결된 조약이었기에 왜국과 막부에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임진왜란에 대한 치욕과 분노가 아직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 있었기에 조약 내용은 더욱 가혹했고 협상 과정에서 조금의 양보도 없었다.

조항 대부분이 막부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것들뿐이었다.

전쟁 배상금으로 지급하는 은과 유황은 그렇다고 쳐도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고 온 수많은 조선인 노예와 각종 물품 들의 반환은, 소유권을 가진 각 지방 번주들의 동의를 받아야 했기에 상당히 곤란한 점이 많았다.

이번 전쟁의 패배의 막부의 영향력이 예전만 하지 못한 데다 조선에서 끌고 온 노예 대부분이 도자기나 각종 물품을 만들어 내는 장인들이었기에 번주들 입장에서는 귀중한 인력인 이들을 내주지 않으려고 들 것이 뻔했다.

약탈해 온 물품들도 하나같이 왜국에서는 귀물 취급을 받으며 지배층들이 가보로 아끼는 것들이라 이것 역시 내놓으라고 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영토 할양은 일기도를 비롯한 고토열도는 작은 섬에 불과했고 북해도는 비록 땅은 넓어도 이때까지만 해도 척박한 미개척지라 조선에 넘겨주는 데 별다른 반발이 없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왜왕과 쇼군의 교체 때 조선 국왕한테 책봉서를 받는 것하고 왕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굴종의 의미로 바치는 거였다.

다른 것들은 백성들을 쥐어짜고 지방 번주들을 압박하면 반발과 충돌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감수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책봉서와 삼신기를 바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백번 양보해서 책봉서는 그렇다고 쳐도 삼신기는 왜왕의 신물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막부 내부에서도 반대가 엄청났다.

이에미쓰도 이 조항만은 어떻게든 빼려고 했지만 도현의 의지가 워낙 단호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막부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한 군사력을 다시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원정군 중 일부를 에도에 주둔시키기로 했다.

수십만 대군을 가진 청군과 대적해야 되는 조선 입장에서는 전력이 분산되는 거였지만 원정군 철수 후에 이에미쓰가 엉뚱한 마음을 먹지 않고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는지 감시하고 막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병력이 남아 있는 것이 나았기에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저기가 왕궁이군.”

막부나 왜국 왕실에서 꼼수를 부리기 전에 삼신기를 확보하라는 도현의 어명을 받고 곧장 바닷길로 에도를 떠나온 이관은 멀리 앞쪽에 보이는 건축물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라고 하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이 머무는 곳이었기에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부관.”

“예, 사직어른.”

왕궁 건물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관은 얼른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온 부관에게 목소리를 약간 낮춰 지시를 내렸다.

“이에미쓰의 친서를 가진 막부 관리가 함께 간다고 해도 왜왕과 그 측근들이 어떻게 반응을 해 올지 모르니 바짝 긴장들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부관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관 역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왜왕한테 옥쇄만큼이나 귀중한 신물을 상납받으러 간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며 당당히 가슴을 폈다.

왕궁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무리에 허둥지둥 창끝을 내밀며 방어 대형을 갖췄다.

그래 봤자 기껏해야 다섯 명 남짓뿐이라 막부 소속 인원을 제외하고도 기병 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조선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창대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이 오히려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용기가 가상했다.

일행이 멈춰 서자 일본식 갑옷인 오요로이를 입은 무사 하나가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서기는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는지 무사는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실권이 없는 왕이지만 그래도 왕궁을 지키는 이들이라고 하기에는 창피할 정도로 형편없는 모습에 이에미쓰의 명을 받고 온 미우라는 무사를 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들고 있는 깃발을 보면 모르나! 에도에 계시는 쇼군의 명을 받고 왔다. 어서 문을 열어라.”

하지만 미우라의 일갈에도 무사는 쉽사리 길을 열지 않았다.

“함께 오신 분들은 조선군이 아닙니까?”

“으음.”

무사의 물음에 낮게 침음성을 내뱉은 미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어인 일로 막부 관리께서 조선군과 같이 계신 겁니까?”

“…….”

차마 왕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조선에 넘기기 위해서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미우라는 무사의 물음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랫것들한테 떠들 이야기가 아니니 책임자를 불러오게.”

“안쪽에 연락을 했으니 곧 수비대장께서 나오실 겁니다.”

“흠.”

그렇게 얼마쯤 기다리자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무장한 병력 수십 명과 함께 중년 장수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무사는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얼른 중년 장수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다.

“막부에서 왔다는 관리가 조선군을 데리고 와서 쇼군의 명을 받았다며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합니다.”

“뭣이!”

깜짝 놀라 앞을 보던 중년 장수는 이관 일행과 함께 있는 미우라를 발견하고는 알은척을 했다.

“아니, 미우라 공이 아니시오?”

“아, 니시무라 장군, 반갑소이다.”

무슨 말을 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던 미우라도 친하지는 않지만 안면이 있는 자가 나오자 반색을 했다.

“에도에 있어야 될 공이 어찌…….”

“쇼군의 지시를 받고 천황, 아니 국왕 전하를 만나 뵈러 왔소이다.”

평소처럼 천황이라고 부르려던 미우라는 옆에 있는 이관을 의식하고는 호칭을 바꿨다.

에도만큼은 아니지만 온갖 권모술수가 판치는 왕궁에서 벼슬을 하다 보니 눈치가 빨랐던 니시무라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에도가 무너졌다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미우라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소. 아무튼 안으로 들어가게 문을 열어 주시오.”

“…….”

잠시 망설이던 니시무라는 이미 에도까지 함락된 상황에서 다 합쳐 봐야 오백 명도 안 되는 수비 병력으로 조선군에 대항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옆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성문을 열어라.”

“옛.”

초조한 얼굴로 대화를 듣고 있던 왜병들은 니시무라의 명령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갑시다.”

언제든지 검을 빼 들 준비를 하고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이관은 미우라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말 옆구리를 찼다.

따각따각.

그렇게 양옆으로 늘어선 왜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관과 부하들은 최초로 왜국 왕성을 밟는 조선군이 됐다.

일단 입성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한눈에 봐도 정예가 분명한 조선군이 성안으로 들어온 것에 니시무라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미우라한테 말을 했다.

“공을 보고 성문을 열기는 했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미우라는 말에 탄 채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후우. 어차피 전하를 뵙게 되면 다 이야기를 할 테니 그때 들으시오.”

어두운 표정에 니시무라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하긴 에도가 함락됐다는 소문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적국인 조선군과 함께 왔으니, 길보다 흉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장한 병력을 이끌고 왕의 거처로 갈 수는 없었기에 부하들을 한곳에 대기시킨 이관은 부관과 역관 한 명만 데리고 미우라와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신 허리에 찬 장검은 풀지 않고 그대로 소지했다.

드르르륵.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넓은 다다미방이 보였다.

넓은 방 안에는 관복을 차려입은 신하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고 정면에 있는 단 위에 화려한 복장을 한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바로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天皇이었다.

올해로 쉰다섯 살이 되는 고미즈노오는 백팔 대 천황으로 전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가즈코와 결혼해 이에미쓰와는 사적으로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부와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는데 제위 기간 중에 공가중제법도와 금중병공가제법도 등의 제정으로 조정의 행동 전반이 쿄토에 설치된 쇼시다이所司代를 통해서 막부의 관리를 받게 된 것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다.

급기야 계속해서 의도적으로 천황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막부의 행동을 참지 못한 고미즈노오는 천황위를 둘째 딸 오키고에게 넘기는 걸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현재는 딸에 이어서 사 남인 고쿄묘後光明 천황이 등극을 했지만 여전히 상황으로 남아 조정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이 자리에 고쿄묘가 아닌 고미즈노오가 나와 있는 거였다.

주작단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소상히 다 알고 있던 이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고미즈노오를 살펴보며 미우라와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 정도를 남겨 두고 멈춰 선 미우라는 허리를 숙였다.

“상왕 전하를 뵈옵니다.”

“…….”

임금 황皇 자가 아니라 왕王이라고 호칭을 부르자 고미즈노오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미우라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딱딱하게 굳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미우라 공.”

“예.”

“짐이 나이가 들으니 귀가 어두워진 것 같은데 지금 뭐라고 했나?”

“그게…….”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미우라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이관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상국인 조선 국왕께서도 왕 자를 쓰시는데 왜국이 호칭에 임금 황 자를 붙이는 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니 마땅히 고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옆에 있던 역관이 얼른 통역을 하자 고미즈노오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이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대가 미우라 공과 함께 왔다는 조선 장수인가?”

“그렇습니다.”

이관은 어깨를 펴며 고미즈노오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쳐다보면서 힘을 가득 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와 막부가 조선군에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호통을 치는 사람이 없었다.

황실이 모욕을 당하는 상황인데도 눈치만 보고 있는 신하들의 모습에 고미즈노오는 짧게 혀를 찼다.

“쯧.”

하지만 이런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고미즈노오는 이내 신경을 끄고 대화에 집중했다.

“에도에서 벌어진 일은 풍문으로 전해 들었네만 이 먼 교토까지 조선군 장수와 함께 짐을 찾아온 이유가 뭔가?”

고미즈노오가 용건을 묻자 미우라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했다.

“먼저 조선국과 막부는 전쟁을 끝내고 다시 예전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합의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말이 좋아 강화조약이지 에도 성이 함락되고 이에미쓰가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일방적인 항복을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천황을 우습게 알고 신하 주제에 상전 노릇을 하려던 막부가 된통 당한 것에 내심 고소해하면서도 향후 조선군의 행동과 강화조약 내용에 따라 왜국 왕실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기에 고미즈노오를 비롯한 신하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관심을 보였다.

“계속해 보게.”

“조약 중에 왕실과 관련된 것이 있어서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미우라가 준비해 온 조약 필사본을 내밀자 한쪽에 있던 시종이 얼른 받아 단 위에 앉아 있는 고미즈노오에게 가져다줬다.

“흐음.”

두루마리를 펼치고 내용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던 고미즈노오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급기야 마지막 조항에서 얼굴을 벌겋게 상기 시킨 채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황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조선에 넘겨준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당연히 반발이 클 거라 예상했던 미우라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방 안에 있던 신하들은 고미즈노오의 말에 크게 술렁거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난 절대 이 조약을 인정할 수 없어.”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왕좌 팔걸이를 내려치며 눈을 부라리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반응이 격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신기는 천황의 상징이자 왜국에서 황실의 권위와 정당성을 나타내는 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조선에 바치라고 하니 고미즈노오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고미즈노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막부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삼신기를 받아 내야 했던 미우라는 차분히 상대를 설득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럽고 화가 나시겠지만 대의를 생각해 주십시오.”

“막부의 대의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황실을 팔아넘기는 것인가!”

“황실을 팔아넘기다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천황의 상징인 삼신기를 내놓으라는 것이 그게 아니고 뭔가!”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쳐 대자 미우라는 어쩔 수 없이 황가를 달래기 위해 준비해 온 것을 꺼내 들었다.

“오해십니다. 쇼군께서도 이 일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셨습니다만 불가항력인 걸 어찌하겠습니까.”

“핑계를 대지 말게!”

“정말입니다. 대신 상심하실 전하를 위로하는 뜻으로 금중병공가중제법도禁中并公家中諸法度를 폐기하시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금중병공가중제법도는 1615년 9월 9일(게이초 20년 7월 17일)에 니죠 성에서 오고쇼大御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제이 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 전 간파쿠 니조 아키자네二条昭実, 삼인의 연서로 공포된 것으로 모두 열일곱 개 조로 이루어졌다.

내용은 천황가天皇家와 구게가 엄수해야 할 여러 규정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막부가 천황과 조정의 행동에 관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됐다.

한마디로 천황에게는 일종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쌍수를 들고 반겼겠지만 삼신기는 그동안 천황가를 조여 온 금중병공가중제법도보다 더 큰 가치를 지녔다.

“흥! 그딴 걸로 날 회유하려고 하다니 막부가 우리 천황가를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고미즈노오가 콧방귀를 끼자 미우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삼신기는 절대 내줄 수가 없으니 썩 물러가게!”

“전하…….”

“니시무라, 당장 저자를 밖으로 내치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냐!”

“옛.”

황궁 수비대장인 니시무라는 한쪽에서 눈치를 보고 있다가 고미즈노오의 호통에 황급히 대답을 하고는 가운데 서 있는 미우라한테 다가갔다.

“미우라 공, 갑시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관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행동은 아국과 막부가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걸로 봐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이관이 탐탁지 않았던 고미즈노오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보아하니 일개 장수인 듯한데, 그런 자가 감히 상황인 짐에게 그따위 건방진 태도를 취하다니 그러고도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할 수 있는가!”

추상같은 호통에 웬만한 이들은 몸이 움츠러들 정도였지만 이관은 주춤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했다.

“예의도 대우를 받을 만한 상대에게 차리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뭐, 뭣이!”

“조약을 따르지 않겠다면 원정군을 이끌고 에도에 와 계시는 아국 국왕 전하의 분노를 고스란히 다 감당해야 될 겁니다.”

“지금 날 겁박하는 것이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내뱉는 이관의 말에 불같이 화를 내던 고미즈노오는 물론이고 알현실 안에 있던 황실 신하들은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이…….”

치욕감에 몸을 부들부들 떠는 고미즈노오를 쳐다보며 이관은 최후통첩을 했다.

“하루 동안 생각할 시간을 드리지요. 내일까지 삼신기를 내놓지 않는다면 며칠 뒤에는 교토를 포위하고 있는 조선군의 모습을 보시게 될 겁니다, 그럼.”

가볍게 목례를 한 이관은 그대로 뒤로 돌아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저, 저…….”

그 모습에 고미즈노오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며 분노하자 남아 있던 미우라가 침통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조선 측의 경고를 그냥 흘려들으시면 안 됩니다.”

“뭐라!”

구박을 하는 시어머니보다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조선군의 편을 드는 듯한 미우라의 말에 고미즈노오는 언성을 높이며 그를 노려봤다.

“진심으로 상황 폐하와 천황가가 염려돼서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에도 성을 단 이틀 만에 쑥대밭으로 만든 조선군인데 교토라고 그냥 놔두겠습니까.”

이관이 없자 다시 고미즈노오를 상황이라 높여 부른 미우라의 이야기에 상대는 화를 내는 걸 멈칫했다.

파죽지세로 막부군을 연전연패시키고 철옹성이라 불리던 에도까지 단번에 함락시켜 버린 조선군의 힘은 이미 왜국 전체에 소문이 나 있었다.

여기다가 주작단이 약간의 과장과 거짓을 섞어서 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실제 전력보다 더 강하게 부풀려져 조선군에 대한 공포심이 널리 퍼졌다.

당연히 고미즈노오도 이런 소문들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강한 군사력을 지닌 막부도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황궁을 지키는 병력이라고 해 봤자 고작 수백 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막강한 화력과 수만의 정예 병사들을 보유한 조선군을 막아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벌써부터 주위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군이 쳐들어올까 봐 두려워하는 이까지 보였다.

고미즈노오도 겁이 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고 말했다.

“아무리 무도한 놈들이라 해도 감히 이곳을 침범하겠나?”

그러자 미우하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고미즈노오의 기대를 꺾어 버렸다.

“제가 본 조선 국왕은 거칠고 복종을 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인정사정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점잔을 빼며 대의명분을 따지는 예전 조선을 생각하면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그럼 자네는 삼신기를 내놓지 않으면 조선군이 정녕 이리로 군대를 몰아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나?”

아까와 달리 기가 많이 죽은 고미즈노오의 물음에 미우라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십중팔구, 아니 분명히 교토 황궁으로 칼끝을 돌릴 겁니다.”

“끄으응.”

딱 잘라 말하는 미우라의 대답에 고미즈노오는 얼굴을 구긴 채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주위에 있던 신하들도 조선군이 쳐들어올 거라는 이야기에 잔뜩 겁을 먹고 웅성거렸다.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황궁에는 조선군을 막아 낼 병력이 없는데…… 이 일을 어찌해야 될지.”

알현실 안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자 미우라가 굳은 얼굴로 고미즈노오를 바라보며 재차 설득을 했다.

“송구스러운 일입니다만, 막부뿐 아니라 천황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삼신기를 조선군에 넘겨주셔야 됩니다.”

“어찌 이런 일이…….”

미우라의 이야기에 고미즈노오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는 한탄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밤늦게까지 갑론을박 말이 많았지만 결국 고미즈노오는 삼신기를 조선에 바치기로 결단을 내렸다.

아무런 힘이 없는 천황가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데, 이걸로 왜왕은 조선 국왕한테 책봉을 받고 신물까지 바친 신하가 됐다.

당연히 앞으로 천황가의 모든 기록과 문서에서 천황이라는 호칭은 금지되고 왜왕이라 쓰고 불리게 됐다.

이걸로 천황가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더불어 막부도 조선의 압박에 굴복해 신물인 삼신기를 넘겼다며 번주들에게 비난을 받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전하, 교토로 갔던 이관 장군이 돌아왔사옵니다.”

주작단에서 올린 왜국 내부 동향 보고서를 읽고 있던 도현은 밖에서 들리는 내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들라 하라.”

“예.”

미닫이문이 좌우로 열리자 이관이 제법 커다란 나무 상자를 하나 양손에 들고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신 이관 전하의 명을 수행하고 돌아왔사옵니다.”

“교토까지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그게 삼신기인가?”

도현의 물음에 이관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어디, 이리 가져와 보게.”

그러자 시립해 있던 칠현이 얼른 이관에게서 나무 상자를 건네받아 도현 앞에 내려놓고는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는데 각각 쿠사나기의 검[草薙劍]과 야타의 거울[八咫鏡], 야사카니의 곡옥[八尺瓊勾曲玉]이라고 불렸고 이들을 합쳐 삼종신기라 했다.

왜국 신화에서는 아마테라스라는 신이 천황한테 이 삼종신기를 줘서 신물로 삼도록 했다고 전해 내려왔다.

천황조차도 함부로 보는 것이 제한될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귀물이었지만 도현은 잠깐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삼신기라고 해서 뭔가 거창한 것이 있을 줄 알았더니 별거 아니군.”

도현의 반응이 이해가 되는 것이 상자 안에 든 것은 변색이 된 청동 검과 거울 그리고 옥구슬이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물건인 건 알 수 있었지만 신물이라 불릴 만큼 신령한 기운이 흘러나온다거나 아름답지는 않았다.

“진품인 건 맞겠지?”

“왕궁 보고에서 꺼내는 걸 직접 확인했사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옆에 있는 칠현을 보며 말했다.

“이거 잘 포장해서 한양으로 가져가도록 해.”

“예, 전하.”

칠현이 다시 뚜껑을 닫고 상자를 한쪽으로 치우자 도현은 시선을 바로 하고는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이관을 쳐다봤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피곤할 테니 이만 가서 쉬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이관이 뒷걸음을 쳐서 밖으로 나가자 도현은 손을 뻗어 책상에 놓여 있던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칠현아.”

“더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전하?”

“왜국에 끌려와 있는 아국 백성들을 데려가는 일은 어디까지 진척됐다고 하더냐?”

“이척 공과 휘하 관리들이 어제부터 각 영지로 내려갔으니 조만간 백성들을 이리로 데려올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다가 이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에 힘이 없어 머나먼 이국땅까지 끌려와 수십 년간 고생한 이들이니 작은 불편함도 없도록 잘 보살펴 줘야 될 것이야.”

“그렇지 않아도 윤찬의 장군께서 사람들이 오면 임시로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등 이것저것 분주히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래야지.”

전쟁 보상금을 받고 쇼군인 이에미쓰의 항복을 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임진왜란 때 끌려와 노예처럼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해방시켜 본국에 데려가는 거야말로 당시의 치욕을 씻는 마지막 일이라 도현은 생각했다.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군마 지역.

우뚝 솟은 산자락을 등지고 육지의 고도처럼 홀로 뚝 떨어져 있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포로로 잡혀 온 조선 도공들이 모여 사는 산전山田 마을이란 곳이다.

산 하나만 건너면 다른 마을도 있었지만, 거기에 사는 왜국인들은 이 작은 산골에 모인 조선인들을 신기하게 여기는 한편 타국인이라며 봐도 못 본 척,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등 배척했기 때문에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 마을 바로 밑에는 깨끗한 실개천이 흐르고 산에는 땔감으로 쓸 나무도 많아서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조선 도공들은 그들에게 있어 안식처이자 유배지이기도 한 산전 마을을 터전으로 삼고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후우-.”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신선처럼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곰방대를 피우다가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무명천으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발에는 버선과 짚신을 꿰어 신었으며 상투를 틀고 평상에 앉아 있는 모양이 고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노인네였으나, 손가락 끝에 박인 굳은살과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에는 한 평생 외길만 고집하며 살아온 장인다운 우직함이 깃들어 있었다.

“곧 봄이 오겠군. 지금쯤이면 고향 땅에도 꽃이 한창 피었으려나?”

여름에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올라오고, 가을에는 스산한 낙엽 냄새가 나는 것처럼 봄을 알리는 춘풍에는 그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인생을 대략 육십 년쯤 살다 보면, 굳이 날짜를 맞춰 보지 않아도 코끝에 와 닿는 바람의 내음과 조금씩 변해 가는 새싹의 움직임으로 무슨 계절이 오고 가는지 절로 깨닫게 된다.

그렇게 노인이 세월의 빠름을 곱씹으며 반쯤 감은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도자기를 구울 가마에 땔감을 집어넣던 중년인이 앞으로 다가왔다.

“어르신, 이제 얼추 된 것 같은데 한번 살펴보시지요.”

“태구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라고.”

이야기는 그렇게 하면서도 노인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에 있는 가마는 성인 남성 열 명이 양손을 벌리고 서야 될 만큼 크기가 컸는데, 이곳 시노즈카 번의 영주와 상류층을 위한 각종 도자기들을 생산했다.

가마 앞에는 건장한 남자 대여섯 명이 바짝 말려 둔 땔감 뭉치들을 차곡차곡 안에다가 쌓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잘했군. 이 정도면 됐으니 이제 입구를 막고 불을 지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어르신.”

노인은 산전 마을에 거주하는 조선 출신 장인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데다 실력도 출중해 촌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태구라 불린 중년인은 고개를 숙여 대답을 하고는 작업 중인 이들한테 걸어갔다.

잠시 뒤 사내들은 노인이 지시한 대로 땔감을 넣는 걸 멈추고는 한쪽에 준비해 둔 벽돌로 가마 입구를 막고 진흙을 꼼꼼히 발라 열기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했다.

곰방대를 입에 물고 노인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뒤편에서 젊은 사내 한 명이 달려왔다.

“아버지!”

무심코 고개를 돌린 노인은 사내를 보고는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야, 이놈아, 오늘 가마에 불 지피는 날이라고 내가 누차 이야기를 했는데 아침부터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이제야 얼굴을 내미는 게야!”

다짜고짜 내지르는 노인의 호통에 사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헉헉.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예끼, 놈아! 도공한테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렇게 뺀질거려서 어디 기술을 배울 수 있겠냐?”

홀아비 생활을 하다가 왜국 여자와 결혼해 말년에 낳은 늦둥이라 그런지 더욱 애착이 갔기에 노인은 일부러 세게 야단을 쳤다.

그러자 사내는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내려는 노인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이야기를 했다.

“아이, 참! 정말 큰일이 생겼다니까요.”

“어른이 말을 하는데 끼어드는 건 어디서 배웠어!”

“그건 나중에 따지고요. 아버지 소원대로 조선에 돌아가게 됐어요.”

“버릇 없…… 지금 뭐라고 했냐?”

호되게 혼을 내려던 노인은 눈을 껌뻑이며 아들을 쳐다봤다.

“얼마 전에 조선 국왕이 끌고 온 군대에 막부가 항복을 했대요. 그래서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전국에 있는 조선인들을 모두 본국으로 데려간다더라고요.”

“그, 그게 정말이야?”

“그렇다니까요. 성에서 나온 관리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예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노인은 감정이 북받치는 표정을 지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다니…… 흑흑.”

평소 약한 모습 한번 보여 주지 않던 노인이 목 놓아 우는 모습에 그동안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 잘 알고 있는 아들의 가슴도 먹먹해졌다.

“이렇게 기쁜 날 왜 울고 그러세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사실인지 내가 직접 가 봐야겠다.”

벌떡 몸을 일으킨 노인은 허겁지겁 마을로 뛰어 내려갔다.

주위에 있던 사내들도 다 같은 조선 출신들이었기에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노인을 따라갔다.

마을 중앙에 있는 공터로 가자 정말 성에서 나온 관리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선과 막부가 맺은 조약에 따라 너희 모두를 귀향시키기로 했으니 각자 짐을 싸서 내일 정오까지 여기로 모이도록 해라.”

“나, 나리,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소리치자 관리는 귀찮은 티가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뭔가?”

“저희 가족들도 함께 가는 겁니까?”

그들에게 있어 가족에 대한 처우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미 임진왜란이 끝난 지 수십 년이 흘러 대부분의 조선인 포로들이 현지 여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기에 자신들만 본국으로 간다면 지금 가족과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살을 맞대고 산 지 수년이었기에 비록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도 주저되는 것이 당연했다.

“당연히 가족도 모두 해당이 된다.”

퉁명스러운 대답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고 가마터에서 달려 내려온 노인은 두 눈 가득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옆에 있던 아들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이구나. 진짜로 고향에 돌아가게 됐어.”

“아버지…….”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산전 마을 주민들은 바리바리 짐을 싸서 공터로 모여들었다.

그 속에는 당연히 노인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디서 났는지 왜국 옷이 아니라 한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어르신, 벌써 나오셨군요.”

태구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인의 말에 노인은 연신 웃음을 지우지 못하며 대답했다.

“허허허. 마음이 급해서 도통 잠을 이룰 수 있어야지. 그래서 새벽 첫닭이 울자마자 짐을 챙겨 나왔네.”

“그러시군요.”

“자네는 조선이 처음이겠구먼.”

“예.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까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중년인의 얼굴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내비쳤다.

그뿐만 아니라 벌써 임진왜란이 벌어진 지 사십여 년이 흐르다 보니 마을 사람 대분이 당시 끌려왔던 조선인의 이삼 세들이었다.

부모들 덕분에 조선말을 능숙하게 하고 생김새도 영락없이 조선 사람이었으나, 아무래도 태어난 곳이 왜국이다 보니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땅으로 간다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노인은 중년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 줬다.

“자네 몸속에는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거기에 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게야.”

“……예.”

그렇게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모인 사람들의 수가 공터를 꽉 메우고도 넘칠 지경이 되자, 어제 봤던 관리가 나와 명부를 들고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것과 다름없다 보니 확인 작업을 다 끝낼 즈음에는 벌써 점심때를 훌쩍 지나 늦은 오후가 다 되었다.

관리의 인도에 따라 일찍 끝난 사람들부터 무리를 이뤄 이동했는데, 마을 입구의 경계를 이루는 활짝 핀 벚꽃 아래를 지날 때 뭔가 주박에서 풀려난 듯 후련한 표정을 짓는 자가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어딘가 시원섭섭한 느낌인지 복잡 미묘한 얼굴이었다.

바람이 크게 한번 불자 벚꽃 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허허. 마치 우리를 배웅해 주는 것 같구먼.”

비록 끌려온 곳이긴 하지만 어쨌든 오랫동안 정붙이고 살던 곳이니 떠나는 것이 아쉽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고향의 정경을 떠올리니 멀어지는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낮은 담장과 장독대, 어릴 때 까치밥을 먹겠다며 타고 올라갔다가 떨어졌던 감나무 하며 마을 어귀에 잔뜩 피어 있던 복사꽃까지.

남 몰래 짝사랑했던 그 소녀는 지금쯤 평범한 아낙네가 되어 잘 살고 있을까.

이렇게 왜국에 끌려와서 몇십 년을 살게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용기 내어 고백이라도 한번 해 볼 것을, 하고 후회했던 나날도 많았다.

앞서 걸어가던 노인이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그와 같은 동네에 살다가 강제로 끌려왔던 사내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님, 고향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뭘 하고 싶소?”

“글쎄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좋을 텐데…….”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걸 알기에 노인이 말끝을 흐리자 사내가 얼른 이야기를 받았다.

“우리 친척들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구려. 아직도 그 고을에 살려나 몰라.”

등에는 짐을 지고, 수레를 끌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사람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온화하게 불어 날씨가 좋으니 먼 길을 가기에는 참으로 맞춤인 날이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걸어 영주 성에 도착한 마을 일행은 하루 동안의 휴식과 밥 그리고 잠잘 곳을 제공받고 또다시 에도를 향해 긴 여정을 이어 나갔다.

비단 산전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왜국 전역에 흩어진 다른 조선인 마을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그 수가 물경 십만에 육박했다.

하지만 막부에 반감을 가진 영주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잡아갔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먼 길을 이동해 온 조선인들은 에도 성 인근에 왜군 포로들을 동원해서 만든 임시 거주지에 모두 수용됐다.

“지금까지 얼마나 도착했나?”

군마를 타고 임시 거주지를 천천히 둘러보던 도현의 말에 수행을 하던 윤찬의 장군이 얼른 대답했다.

“삼만 명이 조금 넘사옵니다.”

“많군.”

“그래도 아직 예정된 인원의 반도 오지 않은 것이옵니다.”

“왜국에 있는 걸로 파악된 아국 백성들이 모두 얼마라고 했지?”

“이십만이 조금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막부나 각 지방 번주들이 조선 원정군을 속이는 걸 막기 위해서 도현은 미리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왜국에 있는 조선인들을 구해 갈 마음을 먹고 주작단에 숫자와 위치를 알아내 두도록 했다.

“그 많은 백성들을 지난 수십 년간 왜국 땅에 내버려 뒀다니 군왕으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럽구먼.”

그가 침통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도총관 엄황이 도현을 위로했다.

“연이은 전란으로 국력이 쇠해 어쩔 수 없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늦었지만 이렇게 전하께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왜국까지 오셨으니 저들도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클 것이옵니다.”

“그래도 나라가 저들을 지켜 주지 못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죄야.”

“전하…….”

잠시 말을 멈추고 이제 막 도착해 거주지로 들어오고 있는 조선인들을 쳐다보던 도현은 윤찬의 장군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윤 장군.”

“예, 전하.”

“고향으로 돌아간다지만 지난 세월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곳을 떠나 먼 길을 간다는 것에 불안해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오. 백성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장군이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시오.”

“염려 마시옵소서.”

“경만 믿겠네.”

그렇게 도현이 장수들과 함께 임시 거주지를 돌아보고 있을 때 멀리 시노즈카 번에서 이동해 온 산전 마을 주민들이 막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덜컹덜컹.

일주일 넘게 길을 걸어온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뽀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상당히 지쳐 있었다.

“여기가 배를 타기 전에 잠시 머물 곳인 모양이구먼.”

노인의 말에 커다란 등짐을 진 아들이 힘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무슨 길이 이렇게 먼지. 아주 다리가 부러질 것 같네.”

그러자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곰방대로 아들의 머리를 가볍게 내려쳤다.

탁!

“젊은 놈이 고작 이거 가지고 엄살은.”

“아야. 우, 씨, 마을에서 여기까지 이 무거운 걸 들고 왔는데 엄살이라니요?”

아들이 억울하다는 듯이 곰방대로 맞은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말하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봇짐을 내보였다.

“나처럼 늙은 사람도 짐을 가지고 걸어가는데 뭐가 어째!”

다시 때릴 것처럼 노인이 곰방대를 치켜들자 아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만 좀 해요. 그러다 머리에 구멍 나겠어요.”

“이리 안 와.”

곰방대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아들이 문득 뭔가를 봤는지 눈을 등잔불만큼 크게 뜨고 손가락으로 노인의 등 너머를 가리켰다.

“어? 저것 좀 보세요.”

“이놈아, 어디서 허튼수작이야?”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안 넘어갈 얕은 수에 속을 것 같냐며 노인이 버럭 역정을 내었다.

“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

억울해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들은 노인의 어깨를 억지로 잡아 돌리고 말했다.

“저기, 말 탄 사람들 보여요?”

아들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장수들과 말을 탄 일행들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햇볕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찡그리고 있던 노인은 바람에 펄럭 휘날리는 깃발을 보고선 사시나무처럼 손을 떨고 아들의 소매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저, 저게 무어냐?”

“깃발이잖아요. 어느 번에서 온 사람들일까요?”

적어도 도쿠가와 막부의 상징인 세 잎 접시꽃 문양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새인 것 같기도 하고…… 저런 문양은 처음 보는데 참 화려하네.”

태평스레 말하고 있던 아들은 어느새 곁에 있던 노인이 저 만치 앞서 가 있는 것을 보고 기겁해서 달려 나갔다.

“아버지, 그렇게 가까이 가시면 어떡해요! 괜히 높은 사람들 앞에 잘못 얼쩡거리다가 치도곤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요?”

“저건 봉황이야.”

“예?”

“틀림없다. 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저 모양을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암.”

혼자 뜻 모를 소리를 하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던 노인은 아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직접 가까이 가서 봐야겠다며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멈춰라!”

아들과 실랑이를 하면서 노인이 행차 가까이까지 다가오자 도현을 호위하고 있던 위사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지난번 몰래 침투한 이가 닌자들에게 도현이 시해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며 바로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사나운 기세였다.

“히익.”

정신을 차려 보니 바로 눈앞에 엄청 지위가 높은 사람처럼 보이는 젊은 사내가 황금색 도포를 걸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못하면 목이 달아나겠다 싶었는지 바닥에 넙죽 엎드린 아들과는 달리 노인은 도현의 도포에 수놓인 문양과 임금만이 걸칠 수 있는 황금색 곤룡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선 이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아, 아버지, 왜 그러세요?”

당황한 아들이 물었지만 노인은 할 말조차 잃은 듯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도현을 향해 절을 올렸다.

“미천한 백성이 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도현은 노인의 말에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인데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냐?”

“경상도가 고향인 최 아무개라고 합니다. 임진년 때 간악한 왜군들한테 붙잡혀 멀고 먼 이곳까지 끌려와 지난 수십 년을 고통 속에 살아왔는데, 이렇게 주상 전하께서 친히 여기까지 오셔서 저희를 구해 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에 직접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바닥에 엎드린 노인이 감정에 북받쳐 하는 이야기에 도현은 가슴 한쪽이 찌르르 떨려 왔다.

“짐이 너무 늦게 왔다고 원망하지는 않나?”

“원망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전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 여러 번 사신을 보내 저희들을 데려가려고 애를 쓰신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운이 닿지 않은 걸 어찌하겠습니까. 그래도 지금까지 저흴 잊지 않고 마지막 노년을 고향 땅에서 보낼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그저 감사하고 황송할 따름입니다.”

타고 있던 군마에서 내린 도현은 엎드려 있는 노인한테 다가가 직접 그를 일으켜 세우고는 고생을 해서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을 꼭 잡아 줬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기다려 준 그대가, 짐은 더 고맙네.”

“저, 전하.”

어찌 보면 임진왜란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도 나라를 원망하지 않고 뒤늦게 찾아온 그에게 고마워하는 노인의 모습에 도현은 오히려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갑작스러운 도현의 행동에 노인과 수행원들뿐만 아니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얼른 엎드린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조선인들도 하늘같은 임금이 직접 하찮은 늙은이를 직접 위로해 주는 것에 크게 감동했다.

누군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만세를 외쳤고 이내 드넓은 임시 거주지는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국왕 전하 만세!”

“만세!”

“조선국 만세!”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만세 소리를 들으며 도현은 앞으로 조선 백성들이 다시는 이런 고통과 시련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한편 포격으로 완전히 부서진 것을 다시 만든 임시 선착장에서는 조선 관리와 수군 병사 들이 왜국 각지에서 회수해 온 조선 물품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부서지지 않도록 잘 포장해 수송선에 선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회수된 물품에는 오래된 불상과 불화는 물론이고 여러 종류의 서책들과 예술 가치가 뛰어난 도자기 등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이건 뭔가?”

서출 출신으로 도현이 실시한 무자경장 덕분에 관직에 출사하게 된 박문식은 눈앞에 있는 커다란 범종을 보고는 두 눈을 껌뻑였다.

“사찰에서 쓰는 범종 아닙니까.”

업무를 돕고 있던 하급 병사의 말에 박문식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어떻게 이런 물건이 왜국까지 와 있냐는 거지.”

“그건 저도 모르지요. 아까 역관이 왜국 관리하고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경상도 어디에 있는 절에서 왜놈들이 떼 온 거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좋아 보이는 건 숟가락까지 가리지 않고 싹 다 긁어 갔다고 하더니만 정말인 모양이군. 이건 무게가 엄청나서 옮기기도 어려웠을 텐데…….”

박문식이 고개를 내저을 만도 했는데 범종은 웬만한 장정 서너 명이 팔을 뻗어야 둘러설 수 있을 만큼 크고 무거워서 약탈해 가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을 터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거 말고도 비슷하게 생긴 범종이 네댓 개 정도 더 있던데요.”

“허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은 박문식은 새삼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약탈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선 땅을 털어 갔으니 전란이 끝나고도 수십 년이 넘도록 아국 백성들이 그 후유증을 겪어야 했겠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닐세. 내일 배를 띄우려면 오늘 안에 물품 확인을 다 끝내야 되니 서두르세.”

“네, 나리.”

살짝 손을 내저은 박문식은 아직 확인을 하지 못한 물품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기에 잡담을 끝내고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이날 하루 동안 박문식과 다른 관리들이 확인한 회수 물품만 해도 무려 오백여 점이 넘었다.

그렇게 작업을 끝낸 물품들은 잘 포장을 해서 수송선에 차곡차곡 선적해서는 호위를 딸려 본국으로 보냈다.

왜국 각지에서 온 조선인들도 간단한 신분 조사를 거친 뒤 며칠간 에도까지 오느라 지친 몸을 추스른 다음 이천 명씩 나눠 배를 타고 그리운 고향땅으로 향했다.

원정군에 속한 장수와 병사 들은 이렇게 약탈당했던 물품과 노예로 끌려온 조선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는 푸념이 나왔지만, 누구 하나 맡은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귀찮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까지 일만 이천 점의 약탈 물품과 육천 명의 아국 백성들을 본국으로 보냈사옵니다.”

며칠 사이에 볼살이 쏙 빠지고 얼굴에 피곤이 잔뜩 묻어 있는 윤찬의 장군의 말에 도현은 방금 그가 올린 보고서를 천천히 훑어보고는 시선을 들었다.

“작업이 더딘 것 같군.”

“그게, 워낙 물량이 많은 데다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을 하다 보니 진행이 조금 지체되고 있사옵니다.”

행여나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윤찬의 장군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지만 도현은 의외로 별다른 질책을 하지 않았다.

“하긴 일손은 한정되어 있는데 처리해야 될 일은 많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렇다고 확인 작업을 대충해서는 안 될 것이야.”

“물론이옵니다.”

“그런데 이미 신분 조사가 끝낸 백성들을 아직도 본국으로 보내지 않고 임시 거주지에 놔두는 건 뭣 때문인가?”

“그게…… 수송할 선박이 부족해서 그렇사옵니다.”

“아니, 내가 알기로 원정군에 속한 보급선만 예순 척이 넘고 추가로 스무 척을 더 투입했는데 그래도 부족하단 말인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보급과 병참 책임을 맡은 윤찬의 장군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이 본국과 에도 사이의 거리가 멀어 아무리 빠른 바닷길을 이용한다고 해도 왕복하는 데 족히 보름 이상이 걸리는 데다 무엇보다 원정군에 필요한 물자도 실어 와야 하기에 수송선을 전부 약탈 물품과 백성의 송환에 쓸 수가 없사옵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도현은 수긍하는 얼굴로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음을 던졌다.

“하면 이 상태로 송환을 다 끝내려면 시일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은 소요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 달이라…….”

도현이 미간을 좁히자 윤찬의 장군이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더 빨리 일을 끝내고 싶어도 쓸 수 있는 선박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더 단축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이해는 가지만 시일이 너무 지체되는군. 뭔가 다른 방법이 없겠나?”

“그렇지 않아도 전하께 말씀을 드리려고 하던 것이 있사옵니다.”

“뭔지 말해 보게?”

“이번 원정에서 노획한 왜선들을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왜선을?”

눈을 반짝이며 그가 관심을 보이자 윤찬의 장군이 자세하게 설명을 이었다.

“아군이 쓰는 선박에 비해서 크기가 작기는 하지만 확보하고 있는 숫자가 꽤 되니 수송에 투입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통제사.”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의 부름에 수군통제사 손억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

“아군이 노획한 왜선 숫자가 얼마나 되나?”

“마흔 척이 조금 넘사옵니다. 거기서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있고 화물 적재량이 큰 세키부네 이상 선박은 스물세 척입니다.”

“그 정도면 확실히 도움이 되겠군. 통제사의 생각은 어떤가?”

“신 역시 같은 생각이옵니다. 바가지 하나로 물을 퍼 담는 것보다 두 개가 더 낮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 하지만 배를 움직이려면 사람이 있어야 될 텐데.”

“기존 군선에 태우고 있던 수군 병사들을 일부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겁니다.”

통제사 손억기의 말에 도현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 문제는 통제사한테 일임할 테니 윤 장군과 논의를 해서 추진하도록 하게.”

“예.”

“단순히 아국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정착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돌봐 주라는 건 어떻게 됐나?”

도현의 물음에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궁내부 관리가 바로 대답했다.

“하명하신 대로 귀환하는 백성들을 신경 써서 보살피라는 전하의 교지를 각 고을 수령들에게 보냈고 일인당 은화 스무 냥을 정착 지원금으로 내주고 있사옵니다.”

그 정도면 징집병 한 달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롭게 시작하는 귀환 조선인들한테는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재원은 부족하지 않나?”

“다행히 에도 성 비고에서 막부의 비자금을 찾아 확보했고 올해 전쟁 배상금으로 받아야 될 은괴 일천 관을 며칠 전에 넘겨받아, 필요한 자금을 모두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다행이군.”

원정 비용에다가 귀환하는 조선 백성들이 십여만 명에 달해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했다.

그동안 도현이 봉황상단을 이용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재정이 풍족해졌다고 하지만 혼자 감당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막부 비고에서 막대한 재물을 노획하게 되어 이런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배상금으로 받은 은괴 일천 관은 녹여서 은화로 만들기 위해 군선에 전부 실어 바로 한양에 있는 주조소로 보냈사옵니다.”

“잘했어. 이걸로 한시름 덜었군.”

전쟁이란 한마디로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는데, 전투를 하지 않고 그냥 원정군을 유지하는 데에도 매일 많은 자금이 소요됐다.

특히나 조선군처럼 화약 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한 군대는 그 정도가 더 컸다.

단적인 예로 원정군이 소모한 화약을 다시 보충하기 위해서 추가로 들어간 비용 내역을 받은 재무대신 김육이, 보고서에 적힌 동그라미 개수를 보고는 기겁했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추가로 십여만 명의 조선 백성들을 데려와 정착까지 시켜야 되니 지금 한양에 있는 재무부에서는 한숨 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럼 한 달 뒤에는 일을 다 마무리할 수 있는 거겠지?”

보료 등받이에 몸을 기댄 도현의 말에 왼편 자리에 앉아 있던 외무차관 이척이 입을 열었다.

“그게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니?”

살짝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묻자 이척이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몇몇 번주들이 막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전란 때 약탈해 간 물품과 강제로 끌고 온 아국 백성들을 되돌려 주는 걸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예상한 일 아닌가?”

“그렇기는 하옵니다만 이들의 행동에 막부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고분고분 말을 듣던 번주들까지 그쪽으로 쏠리며 반발하는 움직임이 점점 확산되고 있사옵니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감지한 도현은 짧게 혀를 차며 되물었다.

“그래서 최근에 에도로 오는 아국 백성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든 건가?”

“예. 어떤 번주들은 이쪽으로 향하던 이동 행렬을 멈춰 세우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일까지 있습니다.”

꽝!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게야!”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서탁을 세게 내려치며 도현이 소리를 내지르자 방 안에 있던 신하들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소식을 듣고 급히 기병대를 보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린 상태라 손을 쓸 수가 없었사옵니다.”

도총관 엄황의 말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이해는 됐지만 희망에 부풀었다가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아국 백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막부는 일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렇지 않아도 이척 경이 막부에 항의를 했습니다만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 모양입니다.”

도현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명색이 왜국의 통치권자라면서 그 정도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거야?”

“아무래도 우리와의 전쟁에서 막부가 가진 군사력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보니 지방 번주들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줄어든 것 아니겠습니까.”

“끄으응.”

도총관 엄황의 이야기에 도현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막부의 힘을 약화시키고 주작단을 시켜 은근히 지방 번주들한테 반감을 심어 준 건 바로 도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번주들 아래에 있는 조선 백성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막부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이에미쓰가 재차 친서를 보내 압박하겠지만 순순히 따를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팔짱을 낀 채 살짝 미간을 모은 도현은 잠시 고심을 하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번들 중에 제일 말을 안 듣는 곳이 어디지?”

도현의 말에 막부와 협상 창구 역할을 맡고 있는 외무차관 이척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사국에 있는 도사 번입니다.”

“도사 번이라…….”

말을 내뱉는 도현의 두 눈에는 서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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